딸아 딸아 예쁜 딸아
부녀 결연이 있은 지 백 일의 다음 날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조각 케이크를 사왔던 딸이 밤늦은 시간에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왔다.
(맛 있으셨어요? 제가 좋아하는 고구마로 샀는데.)
답장을 보내려는데 물음표나 마침표를 찍는 법을 몰라 내 방식대로 보내고 말았다.
(우리 어머니 드렸어요 맛 있다고 잡수셨어요)
딸이 또 문자를 보내온다.
(돈이 없어서 조각 케이크 샀어요. 나중에 좋은 거 드릴게요.)
내가 보내는 답장은 간단하다.
(고마워요)
딸의 답신도 간략해진다.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 갈게요.)
다시 내 차례. 역시 간단하다.
(고마워요)
그렇게 한 차례의 통신을 끝내고 그 동안 딸과 나누었던 백 일간의 인연을 생각해 보았다. 정확하게는 약 8개월이니 이백 일을 훌쩍 넘지만 정식 결연은 역시 백 하루이다. 지난 6월 20일부터 9월 말인 오늘까지의 백 하루 동안 우리는 아빠와 딸로서 인정을 나누어왔다.
“어제가 아빠 딸 한 지 백 일이었는데 몰랐지?”
만 원짜리 석 장을 살짝 쥐어주며 물었을 때 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떻게 아셨어요?’의 표정을 지었다.
“난 선물 사는 방법을 몰라. 그냥 이렇게 할 테니 애기가 알아서 뭐든지 사.”
삼 만원의 용도로 말을 돌려 답변을 대신하는데 아무래도 딸의 표정은 ‘모르고 있었다’는 쪽이어서 속으로 조금 서운했다.
“미안해. 내가 서툰 아빠라서.”
딸은 약간 울상을 지어 보이는데 불만인지 감동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서운하니?”
고개를 살짝 흔든다. 딸만의 특기. 의사표시의 방법이 간략한 건 처음 볼 때부터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거……”
그 날이 아마 그런 선물을 주는 특별한 날인가 했을 게다. 아직 아빠와 딸을 맺기 한참 전이었다. 대략 단골손님과 헌책방 주인의 사이가 시작되었을 무렵, 딸이 예고 없이 내민 선물은 초코파이 한 개였다.
“왜, 이걸?”
고개만 꾸벅 숙여 보이고 얼른 달아난다. 생각해 보니 남녀 간에 선물을 주고받는다는 무슨 ‘…데이’가 요즈음인가 싶어 기분이 야릇했다. 내 나이 꽉 찬 환갑인데 이런 걸 받아도 되나 싶기도 하고, 장난이라면 조금 심한 장난이다 싶기도 하여, 이런저런 생각이 마구 난장(亂場)이었다.
“그 애기가 중학교 2학년이라고 한 거 같던데 아무래도 내가 놀림감이 된 거 같아.”
동업자 후배와 전화를 하다가 그쪽으로 화제가 돌아갔을 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불쌍해 보인 거 아닐까? 형이 좀 노숙자 티가 나잖아.”
동업자 후배가 한술 더 떠서 초를 친다. 안 그래도 심란한 판에 불출 소리를 들은 격이라 화가 나서 답변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렇기는 해. 내 차림새며, 나이보다 늙은 얼굴 하며, 중학교 2학년 애기에게 호감을 살 만한 조건이 손톱만큼도 없어.)
그렇게 스스로 판단을 내린 후 우울한 몇 날을 보냈다. 잊을 만하다 싶을 때 딸이 다시 들려 또 선물을 주었다.
“이거……”
코코넛 비스킷 두 개들이 작은 포장 하나였다. 얼결에 받아들자 얼른 도망치는 건 지난번과 마찬가지였다.
“허허, 참.”
보내고 난 후 손에 든 비스킷을 한참 쳐다보다 책상 서랍을 열어 전번에 받은 초코파이와 나란히 놓았다. ‘이렇게 소중한 걸 어떻게 먹어’하는 생각이 떠올라 곱게 모시기로 했다.
“이거 읽어보렴. 오늘 들어온 책인데 내용이 좋다.”
다음 날 다시 딸이 왔기에 책을 한 권 쥐어 주었다. 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받더니 “고맙습니다.”하는 인사말과 함께 허리를 90도로 꺾어 예절바르게 인사를 한다. 당황한 내가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판인데 딸은 금세 달려 나갔다.
“형, 나이가 몇이우? 부끄러운 게 당연하지.”
동업자 후배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더니 또 면박을 준다. 나이 값을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럼 어떡해. 애기한테 받고 말아?”
어렵게 변명을 하는데 또 충고다.
“조심해야 허우. 그 나이 때는 송아지 사랑이라 아무에게서나 그렇게 대상을 찾는 거요.”
듣고 보니 그렇겠다 싶었다. 조심하는 게 좋겠다 싶어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이거 집에서 만든 거예요.”
다시 며칠 후 들린 딸이 내민 건 찹쌀떡 한 뭉치였다. 한 개가 아닌 한 뭉치였는데 떡메로 친 찹쌀떡의 미완성품을 비닐에 싸서 뭉치 째로 가져온 것이었다.
“나 아무래도 그 애기한테 푹 빠졌나 봐.”
딸의 엉뚱한 선물에 감동한 내가 전화로 자랑을 하자 동업자 후배는 이번에야말로 진지하게 충고를 해주었다.
“형, 나이 생각하고 세상 눈 생각하시우. 요즘은 여자애들 어깨만 짚어도 성추행으로 들어가는 시대라는 걸 알기는 하우?”
‘아차!’ 싶었다. 애정 문제로 인생에 실패하여 팔순의 노부모를 모시고 어렵게 살고 있는 처지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형은 아마 그 아이의 부모보다도 나이가 많을 거요. 할아버지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걸.”
동업자 후배의 충고는 비아냥거림에 가까웠다. 가장 가까운 사이라서 내 처지를 정확히 알아 맥을 짚어 주는 것이었는데 그날은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그의 충고에서 암시를 받아 무의식중에 스스로 처방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얼마 후인 6월 20일 저녁이었다. 치매 증상이 심하셔서 자주 실종이 되시곤 하시던 아버님이 그날은 오전부터 보이지 않으셔서 밤 8시경까지 찾다가 여의치 않아 여기저기 전화를 하며 심란해 하고 있을 때였다.
“신고는 했어! 치매명찰을 달아드렸으니까 어디서든 연락이 올 거야!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들을 해 놔!”
휴대전화에 대고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는 동생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서 빠끔히 쳐다보고 있었다. 제 소리에 취해 손님이 오신 것도 모르고 있었다 싶어 돌아보니 딸이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었다. 진작부터 보고 있었던 모양으로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애기, 언제 왔니?”
얼결에 묻는데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비닐봉지에 참외를 예닐곱 개 담아 선물로 가지고 왔는데, 상황이 그 모양이라 걱정만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애기야!”
감동의 순간이었다. 세상에 내 걱정을 같이 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다음 순간 나는 딸에게 구애를 하고 있었다.
“애기야. 너 내 딸 하자.”
그리고 백 일 하고도 하루, 행복한 석 달 열흘이었다. 딸은 나이에 비해 말수가 적고 착하여, 주로 이야기하는 건 말이 헤픈 푼수 아빠 쪽이었다. 대화래야 헌책장사 아빠와 여중생 딸의 공통 화제로 책에 관한 이야기뿐이었지만, 우리 부녀는 심심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딸의 선물공세는 여전하여 학교 실습시간에 만든 무공해 비누나 길거리 행상에게서 산 모자 손수건 등을 차례로 가져왔고, 나 역시 아빠 노릇을 하느라고 법정스님의 수필집 ‘무소유’ 초기 판본 등을 답례로 주거나 여학생들이 즐겨 읽는 순정만화들을 따로 모아 놓았다가 빌려 주곤 하였으므로 당연히 짝짜꿍이 잘 맞았던 것이다.
“사돈어른, 배 아프지 않고 딸을 쑥 낳아 놨으면 한턱내야지, 입 딱 씻을 거야?”
동업자 후배의 놀림이었다. 대학생 아들이 있다고 사돈을 삼자고 보채는 통에 얼결에 그러자고 대답을 하였는데, 그 후로 호칭이 바뀌었던 것이다.
(좋은 인연인데 잘 지켜나가야 해요. 세상의 시각에서 자유스러우려면 아빠와 딸의 위치 고수에 정직해야 하는 거요.)
아마 그렇게 충고하고 싶은 걸 에돌러 말하고 있는 거라고 받아들이며, 나도 속으로 답변하곤 한다.
(그렇고말고. 우리 딸 예쁘고 또 예쁜데 행여 못난 아빠가 누를 끼칠라. 나이가 많아 아빠로 불러주기 어렵다면 내가 팍 양보해서 할아버지로 하지 뭐.)
조만간 딸의 친부모와 상면하여 할 말도 미리 연습중이다.
“허락도 안 받고 아빠로 취임해서 미안하우. 서양에서는 누구에게나 대부나 대모가 있다던데, 그런 정도의 아빠로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는데…… 내 나이가 너무 많아 꼴불견이다 싶으면 애기의 할아버지라도 괜찮으니 용서해 주시우. 소중한 인연으로 알고 두 분을 도와 잘 키울 테니.”
설명의 순서가 늦었는데, 딸은 백일 운운 하는 이야기를 들은 즉시 뛰쳐나가 예의 조각 케이크를 사와서, 가뜩이나 감격에 겨워하던 아빠를 또 한 번 감동시켰던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인연으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