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굽이5코스버들안길
산행일자 : 2023년10월10일
산악명 : 만산동호회
산은 왜 가느냐, 사람들은 대부분 건강을 위해서 간다고 한다.
그래서 기쁜 숨을 몰아쉬고 땀을 뻘뻘 흘리며
발길을 재촉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 좋은 자연경관은 안중에 없다.
그저 걷고 땀을 흘리는 데에만 몰두할 뿐이다.
사생결단하기로 작심한 사람 같다.
이들이 말하는 건강이란 무엇인가, 어떤 것인가?
힘이 철철 넘치는 것이 건강한가?
몸이 펄펄 날이 갈 듯한 것이 건강인기 하기는 최근의
우리들 인사법에도 건강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한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안녕하십니까 ’가 인사말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요즘에는 ‘건강하십까’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요즘에는 ‘건강하시지요’ 기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이들이 말하는 건강은 육신(肉身)의 건강일 것이다.
나는 그렇지가 않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완상하기 위해 간다.
숲, 개울, 꽃, 신록, 단풍, 바위, 암봉, 바람소리
그리고 역사(驛史).....이 모든 것을 포용한
대자연(大自然)을 느끼고 배우기 위해 간다
따라서 나에겐 산은 외경스럽고
숙연하기까지 한 위대한 존재다.
산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육신이 건강하다는 증거다.
나는 건강을 뜻을 다음과 같이 내리고 싶다.
멀쩡한 사지(四肢)로 힘차게 사에 오르고,
산에 올라서는 눈으로 자연의 빛깔과 모양을 느끼고,
귀로 자연의 오묘한 소리를 들으며,
입으로는 감동에 겨워 탄성을 지르는 총체적 몸짓이라고,
그 어느 것 하나라도 결여되면 진정한 건강이 아니다
건강한 육신으로 산행을 하고 마음껏 감흥을 발산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일인가!
산행의 참뜻을 이런 것에서 찾아야지 육신의 건강만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갓이다.
여기서부터 원주 굽이5코스버들안길 둘레길을시작했다.
둘레길은 긴 연작시처럼 서정적인 길이었으며
끝없이 펼쳐지는 화첩처럼 흥미롭고 경이로운 길이었다.
둘레길에서 아름다운 자연과 마주했고, 정겹고
소박한 사람들을 만났으며 그리고
그 길에서 만산동호회들과 함께 속닥거리며 둘레길을 걸었다.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절대 감출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일상의 속박을 떨쳐버린 데서 오는 가벼운 흥분
그리고 낯선 환경에 대한 막연한 불안
이 흥분과 불안이야 말로 여행의 본질이다.
여행이란 일상에 대한 어설픈 배반이자
동시에 피안으로의 짧은 망명이기 때문에.
하늘과 바다가 풍경을 마주하는 사람들
둘레길의 땅과 바람이 말없이 동행해주기 때문이다.
회원들이 걸어간다.
가을10월이 되니 가을 햇살이 빛난다.
삼성공원 방향으로 걷는다.
걷다가 보면
신선이 되는 길
이정표에서 반곡으로간다.
“나는 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마음은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
”고 루소가[고백록]에서 말했던 것처럼
다시 길을 나설 때까지 내 마음의 파장도 그 흐름을 멈추고 있을까?
우리는 나무가 우거진 길을 걸어간다.
바람과 나무가 걸어갔다.
환하게 뒤집히는 나뭇잎을 따라
나도 어디 환하게 뒤집혀서,
푸른 다리를 썼다. 바람과 나무가 걸어갔다.
나는 푸른 손을 썼다.
끝을 날리며 돌아오지 않기 위해 바람과 나무가 걸어갔다.
나는 푸른 등을 썼다. 등을 보였다. 영원히 푸른 눈을 썼다.
바람과 나무가 걸어갔다.
나는 푸른 귀를 썼다. 뒤집히고 뒤집히는
새소리를 따라 나도 어디 환하게 뒤집혀서.
돌탑들
많은 돌들로 돌탑을 쌓아 주변 경관까지도 깨끗하다
필자도 돌하나주어 돌탑위에 올려놓고
좁은 도로를 따라 오르면 앞쪽에 돌탑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일단 '대단하다.'라는 느낌이 들구요.
가정의 행복과 가족모두의 건강빌어보기도 한다.
솔솔 솔 향기 품고 걸으리
쓰임새에서뿐 아니라 생김새만으로도 소나무는
우리의 정신문화를 상징하는 나무다.
옛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소나무는 선비의 절개를 가리키기
위한 상징이었다.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
늘 푸른 절개를 갖춘 선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모님들은 집 안에서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높은 계단길을 올라간다.
다리를 건너는 중 하늘을 쳐다보니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구름 같은 건 아무래도 좋고
지나가는 구름에 대해
나는 아는 것이 없다
나는 연달아 웃고
구름 아래
내 두 발로 다리를 건넌다.
가로수가 단풍잎을 낳고 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발가락 끝이 빨갛다.
가을
쪽 꽃 필 무렵부터 푸르게 푸르게
하늘 물들이고
두꺼운 잿빛 구름 희디흰 마전 시켜
높이 매달고
티 없이 예쁜 단풍 곱게 물들여
팔랑이게 하고
산바람 안은 갈대꽃 갈색 빛으로
수런거리게 하고
계절도 모르는 철부지 우리들 속까지
곱디곱게 물들이는
가을
다른 산악회원들은 여기서 모이기 시작한다.
산길로 들어선다.
가을 햇살은 고슬고슬하다.
말랑말랑하다. 맨발로 이슬 젖은 황토 흙을 걷는 것 같다.
발바닥이 아득하다. 온몸이 작은 세포들이 우우이 눈을 뜬다.
바싹 마른 햇살은 산들바람과 잘 버무려졌다.
소슬한 바람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와삭와삭 사과 깨무는 소리가 난다.
반곡
←원주 신림→
시간을 이용한 원주 현신도시 주변 돌아본다.
언뜻 보아도 폐 건물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반곡역’ 이란 간판이 없다면
특별한 안내문도 보이지 않는다.
뒷면으로 가보면, 시멘트 된 자재들이 철거채로 쌓여 있다.
감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가을에 열매가 울긋불긋 열리는 모습이
보기 좋아 관상수로 심기도 하며 그렇기에 대부분의 보기 쉬운
곳에 심어 놓은 감나무 모양이다.
과일나무들 중 하나이다. 보통 이런 관상수로 심어 놓는
감나무의 감들은 별다른 관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벌레나 새가 쉽게 파먹거나 잘 익은 것 같아도
맛이 떫은 등 상품가치가 없다.
피어난 꽃들이요
너를 예쁘다 함은
보이지 않는 그 손길까지도
예쁘다 하는 것이니?
홀로 자만하지 말아라,
배꽃
햇살 고운 날, 하늘의 구름 밭이 통째로 내려앉은 듯 하얗게 배꽃이
만개한 배나무를 지날 때면 미당 서정주의 시
「상리과원」을 떠울립니다.
세상에 이렇게도 타고난 기쁨을 찬란히
터트리는 몸뚱어리들이 어디 있는가.’ 하던
시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서 한참 동안 넋을 놓고 배꽃을 바라보게 됩니다.
나무가 우거진 자연의 좋은 길을 우리는 걸어간다.
인간이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왔다면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개념이 옳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철저하게 반 자연적인 삶을 살아왔고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면서 철저하게
개인적인 삶을 살아감으로 인해 결국 자신까지도
파멸에 이르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됩니다.
자연은 ‘보이지 않는 손’의 법칙대로 사라 가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모습만 그대로 나타내 보이고 때로는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 생존투쟁을 하면서도
늘 그렇게 넉넉하게 어울러 살아갑니다.
원주 현신도시 둘레 길
반곡관설동 행정복지센터2.0km
코스모스는 신이 꽃을 만들 때 가장 먼저 만든 꽃이랍니다.
아를 때면 코스모스는 신의 처녀작인 셈인데,
어여쁘게 그지없는 코스모스를 보면
역시 신의 능력은 인간이 가늠할 수 없이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코스모스의 고향은 멕시코라지만
우리의 토양과 기후에 잘 맞고 가을이면
지천으로 피어 이젠 우리 꽃처럼 이젠 우리 꽃처럼 느껴집니다.
하늘은 하루에 한 치씩 높아져 하늘과
땅 사이가 가장 멀어 보일 때 가녀린 꽃대를 밀어
올려 꽃을 피우는 코스모스, 허공을 불어가는
소슬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한들거리는
코스모스의 춤사위는 얼마나 환상적이지요.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코스모스
꽃 길 위에 서면 정말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신의 은총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꽃은 다른 꽃들보다 작다고, 못생기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낭 그렇게 조물주가 자기에게 준 그 모습을 그대로 피어나고,
그대로 어우러져 들판을 아름답게 수놓아 갑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합니다.
남의 것을 넘보는 일도 없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그저 그렇게 보여줄 뿐입니다.
그런데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이루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연입니다.
화원들이 산악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
하차지점에 주차징에는 차가 꽉 차서 주차할 자리가 없어
산악버스는 다른 곳에 있어 버스가 올때까지 한참 동안 기다려
도착하여 식당으로 직행했다.
‘산에는 왜 가는가?’
생각해보면 과연 명쾌한 설명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너무 일상화되어 있는 일이라서
‘왜 사느냐?’는 질문과도 같은 막연함이 따르기 때문이다.
산을 태조부터 인간의 삶과 함께해 왔으며,
수많은 사람에 의해 시와 소설과 수필 등의
문학적 주제와 배경을 이루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을 좋아하고, 산을 자주 찾아가며,
일상생활 일부로 심고 있는 처지에 나지막하게 나마
‘왜 나는 산에 가는가?’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해보고 싶은
소박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