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걸 우기는 세상
10년 전쯤 보스턴 미술관에서 무심코 화장실을 이용하려다 갑자기 어리둥절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필자가 급한 마음에 힐끗 사인을 보고 들어가려 한 화장실에는 반은 남자, 반은 여자의 이미지가 합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순간 ‘아, 급해도 여기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퍼뜩 들면서 잰걸음으로 반대편에 있는 남성 화장실로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후에도 필자의 시원치 않은 시력 때문에 성 소수자용 화장실 앞에서 발을 돌린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냥 자신이 생각하는 성 정체성에 따라 화장실을 이용하면 되는 게 아닌가?”라며 불평을 했던 것 같습니다.
(사진에는 젠더 중립 화장실이라고 쓰여 있는데 필자는 성 소수자용 화장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을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남성이 여자 화장실을 이용하면 같은 화장실을 이용하는 여성들이 불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리고 성 소수자의 입장에서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일 겁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낯설고 받아들이기 불편했던 성 소수자용 화장실이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이곳저곳 보이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익숙해져 갔습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사실 꽤 큰 변화를 의미합니다. 생각의 틀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변화는 ‘존재의 인정’입니다.
공공장소에 버젓이 등장한 성 소수자용 화장실은 이들이 법적으로 보호받는 합당한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모두 그렇게 인식해야 한다는 암묵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는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는 효과가 있습니다.
<결혼 피로연>이라는 동성 커플의 가짜 결혼 해프닝을 다룬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이 영화에 출연했던 윤여정 씨의 인터뷰가 얼마 전에 화제가 됐습니다. 그녀의 첫째 아들이 2000년에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했으며 뉴욕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었을 때, 그곳에서 아들의 결혼식을 열어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기사를 보며 또 한 번 ‘익숙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윤여정 씨처럼 널리 알려진 사람의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것과 당신의 아들이 우리나라에서는 아니지만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로서 살고 있다는 사실은 ‘아 동성애와 동성 결혼이 멀리 있는 얘기만은 아니구나’라는 인식을 갖게 합니다.
인터뷰에서 윤여정 씨는 “지금은 아들보다는 사위를 더 사랑한다.”고 말을 했는데 여기에는 많은 뜻이 내포돼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당신의 가족이 여느 집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돌려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필자에게는 이러한 행위가 비정상의 정상화로 느껴집니다. 결혼에 대한 가톨릭의 공식 입장은 이성 간의 결합만 인정하고 있습니다.
개신교도 이와 같은 입장으로 알고 있고 이 세상의 부모들 또한 자신의 자녀가 정상적인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기를 바랄 겁니다. 물론 어떤 불가역적인 이유로 동성 커플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홍글씨를 새겨 차별과 억압을 하는 것은 당연히 반대하는 입장이고 그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에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우리의 인권을 존중해줘.”가 아닌 “나를 정상으로 인정해줘.”라는 주장에는 아직 찬성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기사의 의도는 명확해 보였습니다. 윤여정 씨의 인터뷰를 보고 “경의를 표한다.”는 이야기를 한 나종호 예일대 의과대학 조교수의 발언이 소개되고 여기에 국내 팬들의 반응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었습니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국내 팬들은 윤여정을 향한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고 있다. 보수적인 대한민국에서 활동 중인 연예인으로서 아들의 동성애를 쉽게 인정하기 어려웠을 터. 그러나 윤여정은 배우가 아닌 엄마로서 아들을 오롯이 품었고 평생 숨길 수도 있었지만 쿨하게 인터뷰에서 가족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이렇게 기사가 작성되면 반대되는 주장은 침묵하게 됩니다. 자신의 생각이 대다수의 생각과 다르다고 인식하게 되면 사람들은 침묵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사의 댓글을 잠깐 봐도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는 팬들이 많아 보이지 않았는데 의아한 일입니다. 그리고 아들이 동성결혼을 했다고 밝힌 것이 ‘경의’를 표할 만할 일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경의라는 표현은 윤여정 씨가 “먹고살려고 연기했다.
(중략) 사랑하는 아들들아, 이게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란다.”라며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을 발표했을 때의 반응으로 어울리는 말이지 당신의 아들이 동성결혼을 했다는 인터뷰를 보고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고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래저래 마음고생 많으셨겠습니다. 이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정도가 합당한 반응일 겁니다.
점점 더 “아닌 건 아닌 거다.”라고 말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가는 방향이 올바른 건지 변화의 속도는 적당한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나 쏠림은 없는 건지 잘 따져보면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Chopin 즉흥 환상곡 C-sharp minor Op. 66: No. 4 (Arranged for string quartet by Dave Scher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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