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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각자 시작한 지점은 다르지만 한가지 목표를 향해간다.
소용돌이, 서로 각기 다른 곳에서 흘러들어와 같은 곳을 향해 휘오리쳐 간다.
그리고 지나가고 난 곳에 남는 것은 무엇이지.
파괴일 것인가, 구원일 것인가.
경국지색(傾國之色) ~ 서시(西施). 마흔두번째 이야기
소흥에서 회계까지는 정확히 나흘이 걸리는 길이었다.
이는 전령들을 기준으로 한 숫자이니 보통 여행하는 자들은 다서여섯 일이 걸리리라.
하지만 범려의 행군은 정확히 그 나흘만에 회계에 도착하였다.
"성문에 들어가기 앞서 잠시 쉬며 행렬을 다시 재정비한다!"
행렬을 지휘하는 범려의 끄나풀이 앞머리에서 뒤쪽을 향해 돼지같은 목소리로 내지르자
투구 사이로 자꾸만 흘러내리는 땀을 닦던 강연은 낮게 으르렁 거리듯 욕설을 내뱉고는 앞쪽,
나흘간 폭풍처럼 휘몰아친 고된 행군에 지쳐 비실대는 머리통들 사이로 삐쭉 솟은 범려의 마차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강연은 내리면서 황금빛 투구를 거칠게 벗고는 길 가장자리에 임시로 세운 천막 아래로
들어가 하인이 바치는 물 사발을 거칠게 뺏어들고는 한 모금 쭉 머금는다.
물을 입에 머금은 채 흙먼지로 씁쓰름한 입안을 헹군 강연은 그것을 주위에 서있는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안에 머금은 물을 그들의 발치에다 확 뱉어버렸다. 하인들과 시중을 드는 아랫 병사들이 움찔하였지만
아무도 물이 튀었다고 몸을 움직이거나 불평하는 자들이 없었다.
그렇게 자신의 현재 심기가 몹시 불편함을 대대적으로 광고하고 난 후 강연은
사람들과 떨어진 한구석으로 걸어가 옆구리에 손을 올리고 선 채 륜의 마차를 쳐다보았다.
굳은 선을 그리며 닫혀있던 입가에서 저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나흘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마음이 불안히 떨리어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문제의 나흘 전, 소흥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서 바람소리가 귓가에 윙윙 부딪혀오는 가운데 륜은
강연에게 이러한 말을 하였다.
[만일 제가 오나라에서 살아...돌아오지 못한다면, 아니. 제가 죽거든 부디 제 말을
샤오룬 오라버니에게 전해주세요,]
그녀는 자신이 죽을 것을 강하게 예감, 아니 예감이 아니라 이미 확신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때 그 열 여섯밖에 안된 앳된 소녀의 운명이 너무나도 가여워서 강연은 저도 모르게 울컥 감정이 치밀어 올라
그만 무책임한 실언을 하고 말았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샤오룬이 어떻게든 륜 소저를 구해낼 것입니다.]
그 말을 할 당시에는 전혀 감각이 없었는데 말을 하고 난 후에 아차 싶었다.
머릿속에는 감정이 싸늘히 식어버린 표정으로 륜을 버리고 가문을 택했다고 말하던 샤오룬의 얼굴이 떠오르며
목에 마치 가시가 박힌 듯 콱 말문이 막혀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륜은 마치 강연의 머릿속 샤오룬의 얼굴이 보이기라도 한 것처럼 엷게 웃고는 강연의 말을 못 들은듯
다시 한 번 자신의 말을 반복하였다.
[이 말은 제가 죽고나서 한 십 년 후, 그쯤 되어서 전해주세요]
[유언입니까]
방금 충동적으로 내뱉은 실언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인지 그것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
아니, 무엇보다 이 불쌍한 륜 소저에게 얼마나 상처를 줄 것인지 머릿속에서 벌떼를 풀어놓은 것마냥 왕왕거리는
설축전을 벌이고 있던 강연이 륜의 앳된 얼굴을 보다 엉겁결에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 말을 하고 난 후 강연은 아예 제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뒤늦게라도 사과를 하려하는데 륜이 무덤덤하게 그 말을 받았다.
[유언...그런 셈인가요, 조금은 이르지만 유언이네요]
씁쓸하게 웃는 륜. 죽음을 언급하는게 이 상황에서 괜시리 정말 불운을 몰고 올까 두려워진 강연은
급히 화제를 돌리었다.
[어째서... 십 년 후입니까]
[.....그 때쯤이라면...]
륜은 수줍은 듯 산들바람 같은 시선을 내리깔고는 말을 길게 끌며 적당한 단어를 고르는 듯 했다.
[그 때즘이라면 아무도 제 존재 때문에 아파하거나 다치지 않을듯 싶어서입니다.]
처음에 강연은 의아하여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륜이 죽고 나서 십 년쯤 지나면 자신에 대한 샤오룬의 감정도 서서히 무디어 질테니, 라는 것인가.
하지만 그녀는 아무도, 라며 복수의 사람을 지칭했다.
십수 년 후라면, 샤오룬을 비롯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구나,
샤오룬과 예인....
강연의 콧잔등이 시큰해져왔다.
시원스레 불어오는 바람에 검고 윤기나는 머릿결과 고운 치맛자락이 흩날리어 그녀는 마치
언덕위에 피어있는 이름모를 작은 흰 꽃과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자신의 가족들을 위하여 제 몸과 생명을 바치더니 이제는 자신이 죽은 후 남겨질 이들까지
걱정을 하고 있는것인가, 이 소녀는.
륜은 여전히 시선을 내리깔은채 살짝 위로 강연을 보고는 다시 눈을 깔았다.
[어리석고 이기적인 부탁입니다.
그 때쯤이라면... 오라버니도 자식을 두고 평화로이 살아갈 거에요.
저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겠지요. 어쩌면 강연 님께서 저의 부덕함을 욕하시고 제 청을
거절하실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난 날, 오라버니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로
괜히 심퉁을 부려 오라버니를 상심하게 하였는데 그에 대해 어째서 그리했었는지 해명조차 하지 않고
제... 마음이 어떠했는지 한번도 이야기하지 못한채 마치 세상에 없었던 듯 잊혀지는 것은...
조금 억울하고...슬픕니다. 이것은 여전히 저를 기억하고 또 다시 마음속에 품어달라 매달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 그것이나 이것이나 다 저의 허망한 욕심입니다만...
그렇지만 제 마음 한 번 말도 못해보고...사라지기는 참 억울하지 말입니다.]
그 말을 하는 그녀는 처음 강연이 그녀를 보았을 때와 같이 조금은 장난기 있고 밝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웃느라 찡그려진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그녀에게 남겨진 생이 길어보았자 4~5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오나라에 바쳐진 공녀들의 수명은 오나라로 보내진 뒤 길어봤자 1~2년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 평균이라는 것은
이제는 당연하게 월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죽은 후 10년이라면 샤오룬은 지금의 륜만한 자식을 둔 어엿한 아버지가 되어있을 터였다.
더 이상 혈기에 휘둘리지도 않을 것이고 아파하지도 않을 것이다.
강연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륜 소저, 지금이라도 내가 도와드릴게요. 이 길로 당장 멀리 도망가세요]
[....아니오,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강연 님, 강연님은 무인이고 진 대인 어르신의 손주이시니
아시겠지요, 어르신께서 예전에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그 얘기. 안다마다. 왜 모르겠는가, 무인이라면 모두가 자의든 타의든 꺠닫게 되는 것인데
[인생은 전쟁터에서 싸우는 것과 같아서 아무도 그를 대신해
그를 구해줄 수도, 나라를 구해줄 수도 없다.
지금 저를 도망치게 해주신다는 것은 저를 대신하여 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강연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륜이 빙그레 웃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제가 죽고 나서 십년 후에, 샤오룬 오라버니에게 전해주세요]
..........
"젠장, 그 말을 자기가 하지 왜 나한테 하라는 거야, 그것도 자기 죽고 십년 지날때까지 기다리면서!"
버럭 성질을 내며 강연은 발밑의 흙을 찼다.
건조한 날씨에 흙먼지가 부우- 일었지만 강연은 신경쓰지 않고 여전히 륜의 마차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속에서는 샤오룬과 륜, 그 둘에 대한 끓어오르는 애정에 마음이 다 헐을 지경이었다.
불쌍한 것들, 서로의 마음이 이런줄도 모르고 각자 어째서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가.
성미 급한 그의 원래 성격이라면 당장이라도 샤오룬에게 서신을 띄웠겠지만 망설여지는 것이
륜의 간절한 마음인것을 샤오룬이 자신의 새로운 삶의 목표에 해가 된답시고 싸그리 무시해버린다면
후에 어찌 낯을 들고 살아가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기도 그렇고 샤오룬 대신 자신이 나서자니 꼴이 이상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걸렸는데 지금 모양을 따지자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는 않았다.
강연은 샤오룬보다 더 일족을 중요시하기 때문이었다. 륜을 끔찍이 사랑했다던 샤오룬도
일족을 위하여 이 일에서 손을 떼었는데 하물며 강연은.
강연이 머릿속에서 아무리 생각하여도 답이 안 나오는 문제로 씨름을 벌이고 있는 사이
행군은 벌써 성 안으로 들어섰다.
중추절이 가까워 오는지라 거리는 인파와 물건들로 넘쳐나 풍요로우면서도 정신이 없었다.
큰 길에도 빽빽이 몰린 인파에 다소 길 정리를 하는데 시간이 걸리는지라 잠시 행군을 멈추고 서있는데
행군의 앞쪽에서부터 하인 하나가 헐레벌떡 강연 쪽을 향해 뛰어오는 것이었다.
"지, 진 부장 나으리!"
강연은 귀찮다는 듯 눈 아래로 범려의 끄나풀인 그 하인을 쳐다보았다.
"상국께서 황군들은 지금 여기서 황궁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명이십니다."
원래부터 황궁의 군사들이니 굳이 범려를 집까지 바래다드릴 필요는 없었고 그럴 생각도
발끝의 때만큼도 없었던 강연은 성가시다는 듯 고개만 까딱해보였다.
"알겠다,
전군 방향을 수정하여 황궁으로 회군한다."
강연이 명령을 내리자 그 명은 삽시간에 뒤의 보병들에게까지 전해졌고 공녀들을 실은 마차와
진상품들을 실은 수레를 가장자리에서 호위하고 있던 강연의 부대는 황궁쪽으로 기수를 틀었다.
그런데 강연의 밑에서 하인이 말을 더듬거리며 무어라 한다.
"뭐냐, 너 아직도 안갔냐?"
심퉁맞은 강연의 말투와 말에 올라앉아 있어 더욱 거대해 보이는 그의 덩치에 움찔하면서도
그는 꿋꿋이 말을 이어나갔다.
"저, 공녀들은 황궁으로 향하지 아니하지 말입니다."
순간 강연은 아차 싶었다.
당연히 공녀들은 황궁으로 같이 가지 않을 것이다. 범려가 마련해놓은 어느 장소로 가겠지.
재빨리 뒤에 따르는 자신의 부하들을 둘러보았지만 지금 모두 황군의 군복을 입은 상태에서 어느 누구도
몰래 륜을 미행하도록 붙힐 수도, 그럴 구실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강연의 속마음을 아는 것처럼 하인은 싱글싱글 웃었다.
그 낙타같은 면상을 군화 발로 한 번 걷어차줄까 하다가 강연은 이를 바드득 갈며,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진군
명령을 내릴수밖에 없었다.
황군이 황궁으로 회군하면서 드디어 길 정리가 끝나고 범려의 일행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 갈래로 갈라진 강연의 부대와 륜의 마차가 있는 범려의 행렬이 서로 빠르게 다른 방향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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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 범려 일행이 회계에 도착한 것과 비슷하게 소흥에서 날아온 한 통의 편지도 무사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예조총관 현필웅의 앞에 고이 놓이고 있었다.
쉰의 끝줄에 들어선 현필웅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간단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업무에 들어가기 앞서
그 사이에 날아온 수십 수백통의 상소들과 문서들을 뜯어보고 있었다.
상소문에 붙은 줄의 색으로 어느 부서에서 날아온 것인지를 구분하며 먼저 볼 것을 고르던 그의 손이
그 아래 깔려있던 납작한 흰 봉투에 멈춰섰다.
현 총관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 편지를 뜯었다.
편지를 뜯자 수줍은 꽃향이 솔솔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과 함께 전형적인 귀족 여성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필체가 드러났다.
현 총관에게는 익숙한 필체였다.
편지를 보낸 이는 그가 예전에 가르쳤던 황씨 일가 자제의 막내이자 현 총관의 큰 사위의 여동생인
예인이었다.
예인과 그의 큰 사위의 아버지인 황 대인과 둘도 없이 절친한 사이인데다 황 대인의 자식들이
어렸을 적부터 가르쳐온데다 식구가 된 이후로는 더욱 친밀하게 지내던터라 현 총관은 예인이
작은 아버지라 부르며 아버지 다음으로 가장 믿고 따르는 이였다.
현 총관 역시 예인을 몹시 귀여워 하여 자신의 딸처럼 생각하고 대하였다.
그렇지만서도 다음 예인이 보내온 편지의 내용은 현 총관으로 하여금 기가 막힌 한숨을 쉬게 만들었다.
"범려의 손에 있는 공녀를 구해달라니.."
그 시각 예인은 편지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자신이 직접 회계로 올라오고 있는 길이었다.
빠르게 달리는 마차 안에서 지나가는 풍경을 내다보며 예인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지금쯤 서신이 도착하였겠지,"
샤오룬에게 륜을 구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만, 아무리 주나라 황제의 사촌인 '그' 황 대인의
여식이라도 한낱 얌전한 규방 규수인 그녀가 무슨 힘이 있었으랴, 그녀의 힘이라고는 주변에
몇 있는 힘있는 인맥들 뿐이었다. 현 총관도 그 중 하나 가장 믿을수 있는 사람이었다.
뛰어난 학자이자 유능한 대신인데다 오양 진씨 일가 버금가는 청렴결백한 성격으로 구천 왕의 신임이
높고 범려에게서 존경과 인정을 받는 인물인 현 총관이 나선다면 범려도 어쩌지 못하고 륜을 고분고분히
내놓으리라는게 예인의 생각이었다.
다만, 그는 동기가 불충분하거나 불성실하다면 결코 도와주지 않을 것이었기에 급한 마음에 예인이
이리 달려가고 있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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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군과 따로 떨어진 범려의 행렬이 향한 곳은 범려 그 자신의 저택이었다.
소흥에서부터 지금까지 마차 안에 틀어박혀 창문 한 번 열어보지 않던 륜은 옆에서 들리던
사람들의 소리가 사라지자 무슨 일인가 싶어 마차의 창문을 조금 열고 내다보다 그녀의 눈이 바깥의
모습에 놀라 둥그렇게 커졌다.
이곳이 황궁인걸까, 하늘과 맞닿을 것마냥 높이 뻗어있는 담이 가장 먼저 보이고 그 담의 위에서
'상국께서 돌아오신다' 라며 누군가가 계속하여 외치고 있었다.
그러자 끼이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두터워 보이는 거대한 붉은 문이 커다랗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고 그 안에서 반듯한 예복을 한,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달려나와 문의 양 옆으로 마치
자로 잰듯 반듯하게 정렬하여 서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주인을 환영하는 시를 읊는 것이 아닌가.
기묘하면서도 웅장하여 위엄이 넘치는 광경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 륜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것이 월나라 권력의 정점에 서있는 상국의 위엄
거대한 저택의 담벼락 안에는 마치 궁이라 착각을 불러일으킬 법하게 고고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위엄찬 모습의 전각들이 서로 각기 다른 모습의, 하지만 조화를 이루며 서있었다.
오랜 세월 장인들이 혼을 불어넣어 완성시킨 그 전각들은 그 아름다움이 마치 영혼을 가진듯 생생하였다.
행렬은 그 사이에 난 돌을 깔은 길을 지나 저택의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화려한 듯, 하지만 천박하지 않고 우아한 미를 자랑하는 건물들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넋을 빼앗긴 륜은 문득 코 끝을 감도는 은은한 향을 감지했다.
향긋하면서도 경건한 백단향이 은은하게 공기를 감돌고 있었다.
어찌나 위세가 대단하면 이 귀한 백단향을 집안도 아닌 바깥 공간에도 맴도는 것일까.
게다가 이 집이라는 것이 어찌나 큰 것인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듯 하였다.
륜이 기가 질려버릴 무렵 륜의 마차는 앞의 범려의 행렬과 다른 방향으로 기수를 꺾었다.
륜이 당황하여 창문가로 얼굴을 내밀어 보았지만 건물 귀퉁이로 범려의 행렬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륜은 창문에서 떨어져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보가 아니냐, 지금 내 처지가 무엇인데. 망망대해에 홀로 버려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어디로 어찌 가든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다고 그리 놀라고 허둥대는 것이야"
놀라고 불안해하는 것은 구원의 희망이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잖아.
"어차피, 그런 희망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잡지 않을것이지만 말이야,"
자신에게 말하듯 홀로 중얼거리는 륜의 마음은 씁쓸하였지만 물결없이 잔잔하였다.
"두렵지 않다, 앞에 무엇이 다가오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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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라"
마차가 멈추어서자 바깥에서 하인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륜은 옷 몇가지만 들은 작은 보퉁이를 들고 마차에서 내려서고는 주위를 휘휘 돌아보다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아까 보았던 위풍당당한 높은 건물들은 보이지 않고 대신 사방이 울긋불긋한 단풍이 든
나무들로 들어서 있었다. 사방을 감싸듯 빼곡히 들어선 나무들은 무작위로 심어진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 나무마다의 단풍색에 맞춰 조화를 이루어 심은 것으로, 울긋불긋한 색이 더욱 화려하게
보여 마치 비단 같기도 하고 이름난 화가의 그림 같기도 한 장관이었다.
"따라오너라"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그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륜을 못마땅한듯 쳐다보던 하인이
퉁명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그제서야 륜은 퍼뜩 정신이 들어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 하인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속으로는 아직도 이 아름다운 단풍을 조금 더 보고 싶다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다지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하인의 뒤를 따라 가는 길 내내 양쪽으로 단풍나무들이 줄지어 서있어 눈을 어디로
돌리나 화려한 단풍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어딜 둘러보아도 단풍만이 가득하여 따뜻한 기운으로 가득찬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륜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잊고 열여섯 살 본연의 모습으로 잠시 돌아가 있었다.
하인의 뒤를 다라가며 즐겁게 주변을 구경하는데 하인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기다"
고개를 앞으로 들어보자 작고 아담한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너는 앞으로 여기서 지낼 것이며 특별한 말이 없는한은 결코 이 안을"
하인은 팔을 들어 방금 지나왔던 나무들을 삥 둘러 가리켰다.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제서야 륜은 현실로 돌아왔다.
그렇지, 자신이 여기에 놀러온 것이 아니지.
풍요로운 황금빛과 붉은빛에 따뜻하게 부풀어올랐던 마음에 일순간 빙검이 뚫고 간듯
뱃속이 서늘해졌다.
하인은 륜이 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뒤에 서 지켜보고 있다 돌아갔다.
그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륜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서늘한 마음으로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타닥- 하는 부산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우르륵- 장지문이 열리며 왠 여자아이가 튀어나왔다.
"벌써 오셨네요!"
혼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갑작스레 튀어나온 낯선 이의 등장에 륜은 깜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데 이 낯선 여자아이는 륜이 그러거나 말거나,
"생각보다 빨리 오셔서 미처 마중을 못나갔어요, 혹시라도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하지 않길
바래요. 상위는 지금까지 아가씨가 오시길 기다리면서 내내 이 집을 정리하고 아가씨를 위해서
집안을 꾸미고 있었거든요. 나이 어린 아가씨가 멀리서 온다길래 더욱 신경을 썼어요!"
정신없이 신나게 재잘거리는 이 여자아이의 속사포같은 말에 어안이 벙벙하던 륜은 당황하며
자신의 손을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는 소녀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아, 아가씨라뇨?"
그떄까지도 신나게 주절거리고 있던 여자 아이는 말을 뚝 멈추고 동그란 눈으로 륜을 쳐다보았다.
"주인 어르신께서 상위에게 그러셨어요.
귀한 아가씨가 오신다고, 그러니 상위가 아가씨를 잘 보살펴 드려야 한다고"
그 말에 륜은 뭐가 뭔지 혼란스러워졌다.
귀한 아가씨라고? 하지만 나 여기 공녀가 되기 위해 온것이 아니었나?
"저, 내가 여기에 오게 된 사람이 맞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난 귀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 아가씨라고 불릴만한 사람이 아니라구요"
상위라는 여자 아이는 다시 눈을 깜빡였다.
"여기에 오게 된 사람이 맞다면서요"
"네, 아까 어떤 나으리도 제가 여기에 있을 것이라 했으니 맞을거에요,
하지만.. 전 아가씨라고 불릴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소녀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주인 나으리께서 여기에 묵으실 사람이 아가씨라고 했어요. 그리고 아가씨께서는"
소녀는 잡혀있지 않은 다른 한손으로 륜을 콕 가리켰다.
"여기에 머무실 분이니 아가씨가 맞구요"
정말 단순명료하면서도 뭐라 반박하기 어려운 그 논리에 할말을 잃은 륜은 그저 입만 쩍
벌린채 상위라는 소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상위는 다시 방긋방긋 웃으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제가 아가씨 방을 꺠끗이 치워놓았어요. 원래는 잘 쓰지 않는 곳이라 무척이나 황량했는데
제가 혼자서 며칠을 두고 치워놓았어요, 창문도 열어서 환기도 시키고 거미줄도 다 걷고
침대도 이불도 다 빨았어요. 아가씨가 좋아하실까 정원에서 몰래 꽃도 꺾어 화병에 꽂아놓았다구요"
재잘재잘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소녀는 어느 방앞에 멈추어 서서는 륜을 돌아보고 씨익 웃었다.
마치 기대하라는 듯이.
그리고는 힘차게 방문을 연다.
예상치 못한 사람의 환대와 분에 넘치는 대접에 어리둥절하여 정신없이 끌려오던 륜은 소녀의 찡긋
고갯짓을 따라 방을 보고는, 아- 하고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방은 과히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크기였다.
남향의 창문으로 눈부신 정오의 황금빛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반들반들한 검은 오동나무 자개장이
창 아래 놓여져 있었다. 그 반대편, 방을 가로질러 높은 단에 얇은 천으로 휘장을 두른 침상에 따뜻한
단홍색에 노란색과 푸른색으로 수를 놓은 비단 침구가 덮여있었다.
방 안에는 이와 같이 소박하지만 우아한 가구들, 그리고 필시 이 상위라는 소녀의 솜씨가 분명할,
여러가지 비단 조각들을 이어 만든 보자기를 멋지게 주름지어 놓은 것, 색색의 꽃을 곱게 말리어 놓은 것,
화원에서 막 꺾어온 듯한 싱싱한 꽃을 꽂아놓은 예쁜 화병, 탁자 위 촛대 옆에 놓여진 긴 배 모양의
흰 그릇안에 담아놓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듯 연약한 모습이면서도 황홀한 향을 내뿜고 있는 여린
소녀와도 같은 꽃송이들, 종이로 나비를 흉내내어 접은 것 등 갖가지 아기자기한 장식들이 저마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방 안은 더없이 아름답고 풍요로와 보였다.
륜의 감격한 표정을 보자 상위라는 소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귀하고 예쁘신 아가씨라길래 제 머리속에서 아씨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예쁜 아가씨게 어울리도록
꾸며보았어요. 사실 너무 과하게 꾸미었나 싶었는데 실제로 아가씨를 뵈니 괜한 걱정이었네요.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실 줄은 몰랐어요!"
감탄하며 자신의 방을 보고 있던 륜은 소녀의 말에 움찔하며 얼굴을 붉혔다.
소녀는 륜이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며 히죽 웃었다.
나이는 륜보다 한두 살쯤 어릴까? 참으로 스스럼 없고 명랑한 성격인듯 보였다.
"참, 아직도 제 소개를 하지 않았네요, 전 상위라고 합니다.
앞으로 아가씨를 여기서 뫼시게 되었어요."
"나, 나는 륜... 아니, 본명은 서이광이라고 해요, 하지만 륜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리고... 그 아가씨라는 말은 좀."
"말씀 놓으세요, 전 단지 아가씨를 모시라는 명을 받은 하녀일 뿐 인걸요. 그리고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제가 융 어멈에게 경을 칩니다."
"하지만 난 아가씨라고 불릴 만큼 귀한 신분도 아니고 게다가 상위가 잘 알지 못하여 그러는 것이겠지만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륜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처음으로 남에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려니 속이 울렁하여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어찌되었건 난 아가씨라 불릴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부디 륜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러자 그때까지도 구김 없던 상위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혼란스러워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한 것인지 아니면 명쾌한 것인지, 어쨌든 금새 답을 내었다.
"아가씨라 불리우는 것이 정 불편하시다면, 좋습니다. 륜 언니라고 부르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아가씨라 부르겠습니다."
결국 륜이 먼저 포기하고 두 손을 들었다. 귀족도 아니고 한 번도 남에게 시중을 받지도 들어주지도
못했던 륜으로서는 자세히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더 이상 상위에게 존대를 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녀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생각했던 데로 륜보다 두 살 어린 열네 살인 상위는 쉴새 없이 말을 하며 온 몸에서 행복한 기운을 내뿜는
참으로 신기한 아이였다.
둥글 넙적한 얼굴에 낮은 코, 얼굴에 주근깨가 박힌 평범한 얼굴의 상위는 네살 때 기근으로 팔려왔다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우울해하기는 커녕 그것으로 자신의 부모도 -아마도- 굶주림을 면하고 생명을 구했을
것이고 자신도 그때 팔려오지 않았으면 그대로 굶어죽었을 것이라며, 차라리 여느 집의 종이 된 것이
그 부모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은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부잣집도 보통 부잣집인가요, 이 나라의 재상님의 집인걸요"
륜의 작은 보퉁이를 뺏아들듯 가져가 풀고서 정리를 하며 상위는 쾌활하게 말했다.
"저 같이 종 중에서도 아랫것은 쌀밥이 아닌 보리밥이나 조밥을 먹더라도 삼시 세끼
굶는 일은 없습니다, 게다가 명절 때나 큰 잔치가 있을 때마다 고기도 먹을 수 있으니 말이에요."
조용히 상위의 말을 듣고 있던 륜은 상위가 종이라는 자신의 처지를 전혀 불행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행복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의아했다.
"하지만 종으로 사는 것은 고달프지 않나요? 늘 일을 해야하잖아요, 상위도 이렇게 어린데"
말을 하며 륜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방을 둘러보았다. 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다던 이 집을
상위 혼자 정리하고 장식했다니. 열네 살의 어린 소녀가 하기에 무척이나 힘이 들었을 것 같다.
하지만 상위는 오히려 륜의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제가 일을 하기 때문에 밥을 먹을 수 있는걸요,
만일 일을 하지 않는다면 조밥이나마 삼시 세끼 먹을 수도 없었을 거에요. 융 어멈은 땀을 흘리는
자만이 밥먹을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걸요,
아, 그리고 요즘 같은 세상에 일이나마 하고 밥을 먹을수 있다는게 얼마나 다행인가요?"
륜은 자신보다 어리고 자신은 이제 수일 겪고있는 비참함과 어려움을 철들기 무렵부터 계속하여
겪고 있으면서도 전혀 어렵다 힘들다 생각치 않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 어린 소녀를
바라보며 알수 없는 기분에 휩싸이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전 아가씨, 아니. 륜 언니를 모시게 되어 기뻐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히히 아직 언니를 보지못하여 언니가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이 방을 제가 좋아하는 데로 꾸몄는데
그 일이 제게는 참으로 재밌었어요. 사실 그렇게 제가 좋아하는 데로 마음놓고 꾸밀수 있는 기회가
제게는 없었거든요, 게다가 앞으로는 언니 한분에게만 시중을 들며 이 집만 꾸미는 것이 제 일이니
어찌나 즐거운지요"
열심히 말하는 상위의 볼에 발그레한 홍조가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륜은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공녀가 되기 위해 회계까지 왔으니 다음에 자신이 갈곳은 아마도 짐승우리처럼 끔찍한 곳이 아닐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뜻밖에도 너무나도 안락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아까 하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앞으로 특별한 일 외에는 이 집을 포함하여 나무로 둘러쌓인
이 안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하였지만 도무지 갇혀있는 곳이라 하기에 이곳은 너무나도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게다가 시중을 드는 하녀까지 붙여주다니. 마음이 노곤노곤 녹아버릴듯 행복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해져 상위에게 왜 자신이 이곳에 있게 되었는지 자세히 물어보려던 륜은
상위의 행복한 얼굴을 보고 그만 두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무슨 상관인가, 이곳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혹은 앞으로 갈 길이 그렇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그냥 가면 될 것을.
상위가 뒤에 연못이 있다고 보여주겠노라며 스스럼없이 륜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머뭇거리며 상위에게 끌려가는 륜의 얼굴에 오랜만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고 곧 그 미소는 잔잔하게
번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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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어, 은휘"
소흥에서 돌아왔다 상관에게 고하고 집무실로 들어온 강연은 그곳에서 생각치 못했던
반가운 얼굴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강연과 동갑으로 구천왕의 고모인 현의왕녀의 양자로 강연과는 죽마고우인 은휘였다.
"오나라에 갔다더니 돌아온 게로구나, 언제 돌아온거야?"
오랜만에 본 친구가 반가워 강연은 은휘의 맞은편의 의자를 빼고 앉아 평소답게 말을 거는데 이에 응하는
은휘의 반응은 영 생기가 없고 그의 얼굴은 어둡고 침울하기만 하였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는거야?"
숨소리만 들어도 상대방의 기분을 안다는 죽마고우의 심상찮은 반응에 강연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은휘는 대답 대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강연은 친구의 반응에 혹시 큰 일이라도 있나싶어 마음이 덜컹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은휘,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거냐"
"강연,"
"그래"
은휘는 깊이 심호흡을 하더니 강연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넌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적이 있냐?"
"무...뭐?"
"넌 이 나라가... 이 상태로 얼마나 존속될 수 있을것이라 생각해?"
"이 자식, 입조심 해! 아무리 우리 둘만 있다지만 궁 안에서!"
은휘의 말에 강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정색을 한다.
하지만 은휘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했다.
"오나라에서 돌아온 지는 꽤 되었다는 걸 너도 알고 있었을 거야,
오자마자 곧바로 너에게 알리지 않은 점, 무척이나 서운했을 거라는 것 안다. 하지만..
난 도저히.. 집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어. 그동안 몹시 아파 누워 있었거든"
아닌게 아니라 은휘의 얼굴은 헬쓱했다.
"하지만 내가 아팠던 것은 육신의 병 때문이 아니었어. 내가 아팠던 이유는.."
은휘는 무언가 보기 싫은 기억이라도 떠오른 듯 눈을 질끈 감고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스스로 세상과 단절해버린 모습이었다.
심상치 않은 친구의 모습에 조금은 두려워진 강연은 그저 입을 쩍 벌린채 이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가까스로 은휘는 이성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입을 여는 그의 입술은 바들바들 떨렸지만 그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침착하여 엄숙하기까지 하였다.
"난 오나라에서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하도록 은폐 당했던, 진실을 보았다.
아, 그 무간지옥보다 더 참혹하고 두려운 진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반드시 눈을 치켜뜨고 알아야만 하는!"
은휘의 주먹이 탁자 위를 쾅- 하고 내리쳤다.
"강연, 너는 오나라로 보내진 공녀들이 어떻게 되는지. 정확히 알고 있냐"
"공녀들이라면... 뭐 열에 여덟은 한 번도 오왕의 눈에 띄지도 못하고 새 공녀들이 올때마다 밖으로
내쳐지어 대다수는 몸파는 색주가 되거나 걸식하여 살아가지만 운좋은 몇몇들은 고향으로
돌아오기도 한다고 들었네만"
"그것은 잘못된 진실이네!"
은휘의 주먹이 다시 한 번 탁자 위를 거세게 내리치고 그의 총명한 두 눈에서 검은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오나라로 간 공녀들 중 어느 누구도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함은 물론, 다시는 성한 몸으로 오나라 궁밖의
땅조차 밟지 못하네! 그나마 성하지 못한 몸으로라도 밖으로 나올수 있는 자들은 행운이지. 대다수 아닌 거의 전부가
개처럼.. 죽어버리니까."
분노로 이글거리던 그의 총명한 두 눈이 음울한 슬픔과 비참함으로 가득 채워진다.
강연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친구가 하는 말을 모조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분명 공녀들이 오나라로 가서 욕을 보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가 개처럼 죽는다니, 그런 일은 금시초문일세. 그렇다면 나라에서, 아니 상국(범려)이 우리 모두에게
거짓을 말하였다는 것인가"
"희롱? 희롱도 우롱도 아닐세, 이건. 이것은... 이것은 한 마디로 말도 되지 않는 자작극이나 다름없네!"
흥분하여 소리치는 은휘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은휘는 자신이 오나라로 가서 본 모든 것을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내가 오나라로 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이네. 난 그때 장터의 책방에 들러 주나라에서 들여왔다는
진귀한 서적을 보고 있었지.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일세. 그런데 우연히 들어간 골목에서.."
생각만 하여도 끔찍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하는 중간중간 속이 턱 막힌듯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은휘는 천천히 자신이 본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고 강연은 그가 본 검은 진실 속으로 함께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오나라로 가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강제로 징집된 공녀들의 평균 나이는 15세와 16세 사이였다.
그들은 범려의 밑에서 1~2년 교육을 받은 후 다시 1~2년 정도 오나라에서 생활하다
마침내 궁에서 내쳐진다. 그것도 성한 몸으로 출궁하는 여인들의 수는 반의 반도 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였다.
조금 걸리는 것이 있다면, 궁에서 출궁하는 공녀들이 대부분 불구가 되어서 나온다는 것을 빼고는.
오왕 부차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바치던 공녀들은 어느새 말 그대로 오나라 궁 안의 모든이들을 위한
놀잇감으로 전락해 있었다. 부차는 공녀로 바치는 여인들의 백명 중 단 몇 명만을 한 두 번 취할 뿐이었고
나머지는 모조리 궁에 드나드는 사내들이 돌려가며 취하는, 그야말로 도성 밖 창녀보다 더 천한 갈보였다.
그런데 그녀들을 괴롭히는 것은 멀쩡한 사내들 뿐만이 아니었다.
궁안의 여인들, 후궁들을 비롯하여 일개 궁녀들까지도 공녀들은 늘 만만한 상대였다.
성질 난폭한 후궁에게 손찌검을 당하고 온 궁녀들은 도성 밖 개보다도 천하다 여겨지는 공녀들을
마루타 삼아 분풀이를 하였고 심지어 추악한 호기심으로 공녀들을 고문하여 죽여버리는 일도 허다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일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았다.
궁에서 키우는 개보다도 못한 취급이었다.
간신히 포악한 궁녀들의 손아귀에서 목숨을 부지하였다 싶으면 이번에는 환관들의 차례였다.
궁녀들은 투기와 질시로 공녀들을 괴롭혔고 환관들은, 가난이나 불우한 운명에 대부분 타의로 정신하여
환관이 된 그들은 사내도 계집도 아닌 탓인가, 늘 음울하고 속을 알수 없는 꺼림칙한 자들이었다.
그들의 분노는 궁녀들의 그것보다 한층 더 싸늘했고 잔인했다. 세상을 향한 분노를 푸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마치 자신에게 하는 채찍질을 대신하여 공녀들에게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몇몇 자들은 신체로 이행하지 못하여 쌓이는 사내로서의 분노와 욕정을 푸는 것이었다.
한겨울의 매서운 눈보라보다 역병보다 기근보다도 더 잔인하고 처절한 일들을 거치고 나면 어느 누구 하나
온전한 정신을 지닌 자들이 없었다. 짓이겨진 고깃덩이처럼 그녀들의 정신과 영혼은 뭉개지고 그녀들의 몸은
입에 담기조차 역겨운 성병이나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장애로 흉하게 뒤틀려 버린다.
전혀 죄의식 없이 즐겁게 장난질을 치던 궁안의 사람들은 그 지경이 되면 마치 갖고 놀던
인형이 망가졌네, 하듯 그녀들을 궁의 밖에 내어다 버린다.
인간으로서의 마음도, 영혼도, 몸도 모두 잃어버리고 망가진 그녀들에게 남는 것이 있다면
여전히 배가 고프고 춥다는 걸 느끼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으로서의 본능 뿐.
처참한 몰골로 그녀들은 낯선 타국의 거리에서 그 나라의 가장 더럽고 비루한 걸인보다
더 비참한 모습으로 걸식을 하다 객사한다.
그것이 대부분의 공녀들의 운명이었고 그녀들의 평균 나이는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한다.
꽃처럼 한창 피어날 나이에 그녀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평생을 살며 겪을 고통과 두려움을 모으고 모아도
달하지 못할 엄청난 욕을 당하다 인간으로서 태어난 의미조차 알지 못한채 생을 마감한다.
우연히 들어선 더러운 골목에 웅크리고 있던 왠 노파가 은휘의 다리를 붙잡고 구걸을 하였다.
놀란 은휘가 저도 모르게 노파를 걷어찼다. 노파가 쓰러지자 기이하게 뒤틀린 그의 신체가 드러났다.
은휘는 헛구역질을 하며 월나라의 속담을 중얼거렸고 그 소리를 들은 노파가 반응했다.
노파는 이제 갓 스무살이 되었다는, 사년 전 오나라로 끌려온 공녀라고 하였다.
처음에 은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의 몸은 뼈와 가죽만이 앙상했고 머리칼은
모두 희게 세어 몇 줌 남아있지도 않았다. 목소리는 바람이 드나들듯 가랑가랑거리었고,
무엇보다 그녀는... 그녀의 눈이 있어야 할 곳은 구멍만 뻥 뚫렸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곧 목숨이 끊어지려 하였던 그녀는 죽기 전에나마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났노라고
제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며 애걸하였고 그것을 거절하지 못하였던 은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이야기다.
친구의 말을 듣던 강연의 표정이 점차 창백하게 변해갔다.
"그것이 사실이냐,"
"그래, 정말 그렇다니까. 정말 참혹하더군. 지금껏 공녀로 간다면 오왕의 관심 한 번 받지 못하고
금새 쫓겨나 거리의 창녀로 전락한다는 말에 끔찍하다 생각하였는데, 하! 차라리 거리의 창녀로
사는 것이 양반 행세더군! 궁 안의 귀족놈들도 모자라 환관들에게까지 능욕을 당하다 인간이 아닌 모습이
되어서야 내쳐지니"
최대한 덤덤히 말하려는 은 무관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거칠게 떨리고 있었고 눈빛은 금새라도
오나라 놈들의 목을 찢어발기겠다는 듯 살기가 번뜩였다. 하지만 곧 그의 표정이 억울함과 비참함에
젖어들어갔다.
"우리가 너무나도 무지했네.
이건 참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강연. 난... 사실 지금껏 상국의 하는 짓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애국심은 존경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네. 그래서 나는 단 한 번도 그가
하는 일들에 대해 이의를 달지도 않았거 의문을 갖지도 않았었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꺠달은 것은.."
은 무관은 괴로운 듯 반듯한 자신의 이마를 몇번이나 쓸어내렸다.
"이건... 미친짓이네, 미친짓이야... 차라리 오나라에 통합되는 것이 더 낫네."
강연은 눈을 크게 떴으나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감히 동료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끌려간 공녀들의 말로, 범려가 이 땅의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 아닌, 그동안 아무도 알지 못하였던 사실이었다.
아니, 적어도 범려는 알았을 것이다.
왕도 이 사실을 아는지 강연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범려는 알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일이 만일 백성들에게 알려진다면, 아무리 힘없고 무지한 백성들이라도 더이상 가만히
뺏기고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미 엉망진창이 된 나라, 민심마저 돌아선다면 그때는 오나라에
당하지 않아도 우리들 스스로가 붕괴해버리고 말 것이었다.
그러지 않기 위해, 적당히 오나라의 비위를 맞추어 얻는 이 굴욕적인 평화를 위하여 범려는
지금껏 아무렇지도 않게 백성들을 속이며 그들을 우롱하고 있었다.
강연은 자신도 모르게 턱이 아프도록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었다.
"그 자식..."
강연이 이를 으득갈며 주먹을 불끈 쥐는데 은휘는 여전히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하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이 나라는 날이 갈수록 이 꼴이라니. 그렇다면 지금까지 자신의 목숨인 마지막 식량을 나라를
위한다는 말을 한치의 의심없이 믿고 기꺼이 내어놓고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눈 여식들을 보낸 백성들은
무엇인가. 지금껏 개 같은 오나라 놈들이 고깝다 입에 대지도 않고 고작 개가 이빨의 가려움을 가시려 씹는 소가죽을
바치기 위해 목숨과 직결되는 곡식과 자식을 내놓았던 것인가!
그러나 더 분한 것은 따로 있네. 그것은 바로 썩어빠진 관료들의 생각이야.
내 그 공녀를 장사지내어 주고난 뒤 오나라에 주거하고 있는 나라의 귀족을 만났다네.
내가 길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말해주었더니 그 작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자랑스레 떠벌리더군.
내가 그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손을 쓰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그치가 뭐라고 하는지 아는가?
정말 부끄럼도 없이, 어차피 곧 죽을 것들을 무엇하러 자신이 손을 쓰느냐는 것이야!
"그 말을 듣고 나는 기가 막혔지. 하지만 그제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가더구만.
강연, 그동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알기에 공녀들이 오왕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궁에서 내쳐지어 거리의 몸파는 계집이 된다면 어찌하여 다시 그녀들을 거두어 데려오지 않았느냔
말일세. 그런 의문이 제기되었을때 나온 변명이라는 것이 그녀들은 이미 한 번 혼인한 몸이나 다름 없으니
궁에서 내쳐졌더라도 다시 거둘수 없다는 것이거나 혹은 더럽혀진 자들이라며 경멸로 단칼에 거절하였지.
지금에야 알겠어. 예법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고 높은 도덕적 긍지에 흠이 가서도 아니야.
그녀들이 그런 몸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민중의 분노를 살까 두려워 그동안 쉬쉬 해왔던 거야!"
강연의 주먹이 탁자 위를 거세게 내리치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주먹은 허옇게 될만큼 꽉 쥐어져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이런 금수만도 못한 것들...!"
"난 마음을 정했네. 나는..."
은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
"나는 앞으로 범려를 따르지 않을 것이네."
"!!"
"자네도 알고 있었겠지만 이 나라는 언제부터인가 범려의 손아귀에 들어가 그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었네. 그는 교활한 악마와도 같은 자네. 그럴싸한 말로 모두를 속이고 현혹하고 있어.
그의 말에 따라 움직인 지난 세월 남은 것이 무엇인가, 약해 빠진 왕족들에 굶어죽어가는 백성들
사리사욕만 채우는 귀족들. 난 더이상 범려를 믿을수가 없네. 비록 내가 왕상 전하를 모시는 신하이지만
이 나라를 위해서라도 난 더 이상 이 일을 두고볼 수만은 없네!"
"뭘 어찌 하려고 그러는 거야"
"이번 중추절 때, 전하께서 궁중 잔치를 여신다지,
그때에 우리와 같은 귀족들의 자제가 모두 궁으로 모일걸세. 난 이 일을 그들에게 알려야 겠어"
"무리한 일이네, 은휘! 그러다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리하게 일을 진행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네,
난 그들 모두를 내 편으로 만들 작정이 아니야. 알고 있었는가. 요즘 나이 어린 귀족들 중에서도
현 정책에 의심을 품은 자들이 많아. 내가 그동안 교류를 나누던 자들이 그런 자들이지.
난 그들에게 이번 일을 조금씩 알려줄 참이네. 그렇게 그들의 반응을 보고 한편으로 갈 것인지를 정할 것이야."
"그 후에는 어찌 하려고.."
은휘는 서늘한 눈으로 강연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선대의 시간은 끝나가네. 이제 그들의 뒤를 이을 것은 우리들이야.
우리들만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직시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 말을 듣고 난 후 강연은 문득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귓가에서는 넓은 대양의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였다.
"공녀들의 일은 단순히 일각에 불과할 걸세. 그 속으로 파고들어가면 어떤 추악한 진실이
있을지 알 수 없어. 더럽고 추악한 덩어리가 더 커지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세력을 불리고 선위를
차지해야만 해."
__
멍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와 강연은 조부인 충현공에게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온 손자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던 충현공은 나가려는 강연을 불러세웠다.
"이번에 열릴 중추절 연회에 말이다."
왕궁에서 열리는 연회를 말하는 것이었다.
일년 중 설 외에 가장 큰 명절인 중추절에 궁안에서는 늘 귀족들을 초대하는 연회를 열었으나
그 연회에 참가할 수 있는 귀족은 회계에 상주하는 소수의 고급 귀족들 뿐인데다 오랫동안 권력에서
손을 놓고 한걸음 뒤로 물러서 방관하고 있던 진씨 일가는 진 대인 대신 가문을 이끌고 있는 충현공의
아들이자 강연의 아버지인 상현만이 참석할 뿐이었다.
"올해에는 너와 네 애비, 그리고 너. 우리 삼대와 샤오룬이 모두 참석할 것이다."
강연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샤오룬이 형님 대신 연회에 참석하는 것이다."
"어찌 삼대가 모두 함께..."
서릿발 같은 인상의 진 대인과 달리 아우 충현공은 서글서글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여 그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었다.
"그저 우리가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뿐이다."
궁으로, 권력으로, 다시 한 번 힘의 중심으로 돌아간다.
세상을 지배하는 힘의 중심에서 태어난 우리이니 우리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
묘한 표정의 강연을 쳐다보던 충현공이 슬슬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샤오룬, 슬슬 그 아이의 즉위를 준비해줘야 할 것이다."
강연은 순간 움찔하였다.
즉위, 순간적으로 왕권을 찬탈하자는 이야기로 들렸지만 충현공은 그저 사람좋은 웃음을 허허
흘릴 뿐이었다.
강연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순간적으로 놀랐던 자신을 꾸짖었다.
답지 않게 뭘 그리 놀라느냐,
우리는 오양 진씨이다.
그까짓 왕위 따위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과거 우리는 나라와 왕을 움직였던 그림자 왕가.
오양 진씨의 당주는 그 왕가의 왕이 아니던가.
왕이니 즉위라는 말만이 어울릴 뿐이지.
"할아버님, 그렇다면 샤오룬이 곧.."
"그래, 머지않아 곧 그 아이가 당주에 오를 것이다.
종친회에서 모두 결정이 났다...
"먼지에 가린 우리의 빛과 광영을 다시 꺼내자꾸나,"
충현공은 사람좋은 푸근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오양 진씨의 정통 혈족, 학같은 고고한 인상과 다정한 모습 뒤에 숨겨진
날카로운 힘을 향한 본능.
조부의 웃는 얼굴을 보는 강연의 귓가에 분노한 목소리의 은휘의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륜. 이대로라면 은휘가 전해진 진실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이 되어버릴 그녀.
그리고 샤오룬, 과거 끝이 보이지 않는 영광을 누렸던 위대한 그림자 왕가의 귀환을 이끌
왕, 샤오룬이 그것을 알게 된다면 어찌될까.
모두가 각자 시작한 지점은 다르지만 한가지 목표를 향해간다.
소용돌이, 서로 각기 다른 곳에서 흘러들어와 같은 곳을 향해 휘오리쳐 간다.
그리고 지나가고 난 곳에 남는 것은 무엇이지.
파괴일 것인가, 구원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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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쪽은 ☆ 붙여주세요. 제가 자꾸 까먹어요^^;
첫댓글 진실을 알고보니 륜이가 더 안타깝네요ㅜ 강연이는 어떻게 할지..
쓰다보니까 살이 조금씩 붙어가고 있어요, 그래서 쓰면서 내용이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쓰고 있답니다^^;
너무 잘읽었습니다. 공녀들의 진실을 알게되니 일제시대의 정신대에 끌려간 사람들이 생각나네요
그 이야기랑 비슷하네요. 전 생각도 못했는데 말이죠. 사실 모티브를 얻은건 당나라나 서태후 시대가 배경인 소설들이었어요^^ 그런 소설들속 궁궐의 이야기를 보고 저 스스로 이땐 이랬을수도 있었겠구나, 상상해서 나온 디테일이랍니다^^ 단순한 재미만이 아니라 좀더 상징적인 의미를 담아내려 노력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재밌게 봐주세요^^
두개가 나와있네요^^좋습니다. 이야기가.
감사합니다~ 요즘 한창 필받아서 열심히 쓰구 있어요, 제발 늘 요즘만 같아라ㅎㅎㅎ
한가지 의문점이 있는데....대체 어떻게 해야 한문장 한문장이 읽는사람의 가슴에 확 와닿을수있는거죠? 꼭 제가 그 이야기속의 주인공이 된것처럼 모든게 이해가 가요...작가지망생인데 작가님이 너무 부러워요ㅠㅠ
앗 이런 칭찬 부끄러와요-_-* 다른 잘쓰는 작가님들에 비하면 구성이나 진행능력도 훨씬 떨어지는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