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를 정리하면서
낡은 아파트를 리모델링하고 보니 새 아파트로 입주한 기분이 들었다. 첫날은 어수선했는데 침대를 들여놓으니 분위기가 달라졌다. 병약한 아내는 이사보다 더 힘든 봇짐들을 풀어 주방 기구와 옷가지들을 정리하느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나대로 힘들었지만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속에 올봄 일구고 있는 텃밭에도 나가 봐야 하는데 그럴 겨를이 나질 않아 유감이다.
보름 전 고향을 찾아 큰형님으로부터 아우가 수행해야 할 과제를 받아 놓았다만, 그 일에도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 큰형님이 평생에 걸쳐 남기는 문장과 칠언 율시들을 문집으로 간행하는 작업을 돕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1차 교정지가 나왔는데 내가 할 일이 만만하지 않다. 그새 큰형님이 새로 남긴 한시와 30년 전 집안 파보를 간행할 때 쓴 한문 문장도 추가로 입력해야 한다.
아파트 비상계단에 둔 봇짐 가운데 이불과 옷가지는 먼저 정리를 마쳤다. 주방 기구 일부와 책은 그대로 남겨둔 상태로 분위기가 달라진 집에서 사흘째를 맞았다. 가뭄 속에 텃밭이 어찌 되었는지도 궁금했지만 큰형님 문집 교정과 추가 자료 입력은 밤을 새워 할 일이 기다렸다. 그런데 보존용으로 분류된 책을 싼 박스들이 아직 실내로 들여놓지 못해 일을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
리모델링을 시작하던 첫날에 베란다 창틀을 비롯해 낡은 서가와 가구들을 폐기 처분했다. 이후 원목 가구점을 찾아가 서가와 식탁 제작을 의뢰하면서 그새 없이도 잘 지낸 소파도 같이 주문해 놓았다. 오전에는 스무날 전 제작을 의뢰한 가구 납품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사보다 더 힘이 든 일들은 순차적으로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서가가 들어오면 책을 정리할 일이 기다렸다.
아침나절 가구점 사장은 직원과 함께 제작을 의뢰한 가구들을 들여놓았다. 작은 방에 들어갈 서가를 먼저 올리고 이어 식탁과 소파가 들어왔다. 기성품이 아닌 원목을 주문 제작으로 의뢰했는지라 만족할 만했다. 이참에 내가 노트북을 올려놓고 쓸 작은 책상도 마련했다. 전에 사용했던 책상을 낡고 서랍이 부서져 삐걱거려 내구연한이 한참 지나도 바꾸지 못하고 계속 써 왔더랬다.
가구점 사장이 간 뒤 아내는 식탁 의자에 앉아보더니만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와 함께 새로 마련해 거실을 차지한 전기 매트가 장착된 소파는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사실 나는 텔레비전 앞에 앉을 시간이 없는지라 소파에는 관심이 가질 않았다. 나는 주로 바깥으로 나돌기도 하지만 집에 머물더라도 노트북이나 책을 펼치면 되기에 소파에 앉아 볼 여유 시간이 없기도 했다.
점심 식후 현관 바깥에 둔 짐을 안으로 들여놓았다. 어제 못다 정리한 주방 기구들에 이어 끈으로 묶어둔 책을 풀었다. 공사 기간 중 먼지에 노출될까 봐 끈으로 묶은 책은 비닐로 한 겹 더 감싸 놓았더랬다. 그래도 책을 풀면서 먼지를 닦아가며 서가에 올려 끼웠다. 내가 읽고 남긴 책들도 있었지만 집을 떠나간 두 아들 녀석의 책이나 상장도 더러 보였는데 시간이 꽤 걸려 마쳤다.
서가에 책을 정리하면서 보름 전 고향의 큰형님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 족보에서 발췌해 문집에 추가로 수록할 자료도 확보해 놓았다. 연 사흘째 이삿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울산에 사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직 현직인 친구는 먼저 퇴직한 내가 무료하게 지낼까 봐 수시로 연락이 왔는데, 나는 퇴직 이후 몇 개월이 흐른다만 현역 시절보다 더 바쁘게 보내는 날들이라 했다.
리모델링에 들면서 손때 묻은 세간들을 모두 묶어 현관 밖으로 꺼내놓고 피난민처럼 임시 거처 원룸에서 스무날을 머물다가 집으로 복귀해 사흘째 짐을 정리하고 있다. 아직 앞 베란다 창고에 빼곡하게 쌓아둔 물건들이 제 자리를 찾도록 정리하는 일이 남았다. 앞날을 예측하긴 이르긴 하다만, 문득 앞으로 이사 가는 없이 현재 주거 공간에서 생을 마칠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22.05.27
첫댓글 서재랑 쇼파 식탁까지 새살림으로 더할나의 없이 편리하고 정된된 터에서 행복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생에서 단 한 번으로 끝내야 할 일이 낡은 아파트에서 이사 가지 않고 리모델링하는 일인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