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사성암에 소 떼가 올라오다.
살다 살다가 별일을 다 본다. 구례 사성암으로 소떼 들이 불공을 드리러 오고, 내가 좋아하는 남원, 곡성, 구례의 섬진강이 범람하여 많은 사람들이 시름에 잠겨 있으며 전국 어디고 성한 곳이 없다. 이번 장마로 피해를 입으신 모든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드릴 뿐이다.
구례읍에서 바라보면 섬진강 너머로 보이는 오산, 사성암에서 바라보면 섬진강이 휘돌아가고 지리산 연봉이 한눈에 들어차는 사성암을 답사했던 때가 엊그제였다.
소나무 숲이 끝나서 길 아래로 갈참나무 숲이 나타나고 길 위에는 대나무가 숲을 이루었다. 그 숲이 끝나는 지점에 사성암이 있다.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에 위치한 사성암은 연기조사, 원효대사, 도선국사, 진각국사 등 네 성인이 수도하였다. 하여 사성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육당 최남선은 <심춘 순례>에서 이 오산과 사성암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거무하게 잔수진(潺水津)을 당도하니 남원(南原)의 순자강(鶉子江)이 순천(順天)의 낙수(洛水)를 합하여 압록진(鴨錄津)이 되어 동으로 흐르다가 구례(求禮)에서 병방산(丙方山) 끼고 V자 곡강(曲江)을 이룬 곳이다. 전에는 역(驛)도 있고 원(院)도 있었으며, 또 순천 및 남원으로 통하는 대로에 임한 요해지(要害地)로 유사한 때에는 매우 중히 여기던 곳이다. 저 임진왜란에 군의 연락 관계로 하여 두 번이나 다툰 것도 이 까닭이다. 오른쪽 기슭으로 좆아 내려가다가 오산(鰲山)을 바라고 산길이 들어섰다. 이름만 길이요 게다가 가파르매 가는 것보다 쉬는 동안이 더 길었다. 개울은 고사하고 샘 하나 그늘 하나 제법 한 것 없는 빡빡한 길을 5리나 너머 올라가서 커다란 바위의 틈틈으로 돌아 들어가매 바위 아래 조그만 암자를 붙인 것이 정상이었다. 사성암(四聖庵)이라 하여 작기는 하여도 오래 전부터 이름 있는 곳이니 원효, 의상, 도선 이하로 진각(眞覺), 원감(圓鑑) 등이 다 여기 안선(安禪)이였다.
대개 오산은 백운산(白雲山)의 서북쪽 갈래가 섬진강(蟾津江)을 만나 깎아지른 절벽을 이룬 우뚝 솟은 봉우리니 암자의 앞 뒤 좌우가 다 석벽이요 돌아가면서 대도 있고 굴도 있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틈서리도 있어 그 자체만도 이미 한 기관이라 하겠는데 더군다나 구례의 평야는 쾌활한 뜻으로 섬진강의 긴 물은 먼 맛으로 두류(頭流)의 연 이은 봉우리는 웅혼한 기운으로 이 세 가지가 합하여 일대 장려한 안계(眼界)를 만들어서 발아래에 벌려 놓았다. 서북으로 고개를 돌리면 저 광주의 무등산으로부터 곡성, 남원을 거쳐서 산은 겹겹이 둘러서고 물은 꿈틀꿈틀 흐르는데 물과 같이 넓어지는 평야는 눈이 미치는 데까지가 도무지 새파란 밭이다.
(...)
널따란 고전장(古戰場)을 높이 서서 굽어보니.
시원히 갑갑함에 웃을지 울지 몰라.
뒷짐을 느짓이 짓고 침을 한번 삼켜라.
언제부터 무너져 내려온 것인지 오산을 절반이나 부스러뜨렸을 듯 한 긴 너덜 위로 구르듯이 내려오는 동안이 여간 지루하지 않다. 수없이 꼬불꼬불 돌아가나 그런 채 어푸러질 듯한 내리막길이다. 복숭아나무 많은 문척리 앞에서 구례(求禮) 읍내 가는 나루를 건넜다.”
오산의 오(鰲)자는 한자어로 자라나는 뜻이다.
곡성, 압록을 거쳐 구례 구를 돌아 흘러온 섬진강 물이 구례 앞에서 이 오산을 싸고 화개, 하동으로 흐른다. 그래서 자라처럼 생긴 이 오산이 섬진강의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 하여 자라산이라는 뜻으로 오산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신경준이 저술한「산수고」에는 섬진강을 잔수(潺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섬진강 물이 잔잔하게 물결치며 휘도는 이 구간을 두고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성암의 기록에 의하면 오산이 금자라 형국이어서「금오산」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이 오산에 전해오는 여러 가지 말들 속에 “오산을 오르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고 두 번 다시 가지 않아도 후회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건너편에 보이는 지리산의 노고단이나 형제봉에 비한다면 작디작은 산에 지나지 않지만 사성암 부근의 기암괴석은 나라 안의 어느 산에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뿐인가. 구례읍과 지리산 자락을 싸고도는 섬진강의 물줄기를 바라보는 맛은 오르지 않은 사람들은 맛볼 수 없는 일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 속에 이 절 역시 나라 안의 여느 절들과 다름없이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마애여래입상이 있는 암벽으로 오르는 길이 시멘트나 철근이 아닌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라서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나무 계단을 오르자 거대한 깎아지른 암벽에 간략한 선으로 음각된 마애여래입상이 나타난다. 오른손을 들어 중지를 잡고 왼손은 손가락을 벌여 가슴 앞에 대고 있다. 마애여래입상을 원효대사가 손가락으로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
옛 사람들은 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목숨을 걸고 올라왔을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지극 정성을 모아 이 불상들을 새겼을 것이다. 얼마나 절박했던 믿음들이 이 난간에 기대어 정을 쪼아대게 만들까?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절벽에 한 그루 새 푸른 나무가 서 있고 나는 마애여래입상을 바라보며 가부좌하고 앉는다
신정일의 <암자기행>에서
어서 지긋지긋하게 내리는 비가 그쳐서 시름에 겨운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주기를
간절이 빌고 또 빌뿐이다.
2020년 8월 10일 월요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