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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ropa Universa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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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게시판 동아시아 1715년 어느 일본인의 세계 인식.txt
loco43 추천 0 조회 2,077 15.03.25 20:39 댓글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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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3.29 01:13

    @수아로그 척양은 일본도 마찬가지로 초기에 내세웠고 개항기 서양 문물 수용과정의 차이는 개항과정 차이 등 난학같은것보다 더 크게 영향 끼칠 요인이 많습니다. 수십년 허송세월을 단축시켜줬다고 이야기하시지만 실제론 1,2년이고 이정도 차이는 정치적 요인 몇가지면 쉽게 차이나니까.

    지대한 영향이라면서 난학 찬양에만 시야를 좁혀 열을 올린다고 그게 역사되지는 않네요.

  • 15.03.29 01:14

    @bookmark 실제로 강무소가 흑선 내항 3년 만에 나오고 곧 일본 각지에서 독자적인 교련이 진행되는 사례를 들었는데도 역관 타령을 하는 것은 오히려 더 이상합니다. 서양 학문을 한다고 네덜란드 어를 배워야 하는 시대는 한참이나 전이었어요.
    정확히는, 이미 일본어로 번역된 교범이지만 난학을 통해서 정의된 용어로 점철되어 난학을 모르면 해석이 안되는 외계어 수준의 교범을 가지고서 각지에서 교련을 진행할 수준. 교양 수준의 난학은 딱 이 정도였죠. 거기에 더해 게베르 소총과 같은 전장식 총기를 각지에서 금방 복제할 정도의 기술이 확산된 정도고요.

  • 15.03.29 01:20

    @수아로그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사승내역 일부분입니다만, 오늘날의 학자들도 그렇듯 당시 학자들이라고 어느 한 학문만 익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학문을 배우고 익히죠. 난학은 초창기 막부의 금령에 학문이란 이름도 붙여지지 못한 채 암암리에 읽히는 금서, 게다가 외래학문이라 초보적일 따름이었습니다만, 흑선 내항 즈음엔 또한 교양의 하나로써 후쿠자와 유키치가 그랬듯 많은 이들이 익히는 여러 학문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에 대한 대답으로 달아드렸더니 시간대가 헷갈리시는 모양이군요. 17 18세기 국학성립기 난학이 초보적이라도 있었다는 님의 주장에 대한 답변인데 말이죠. 국학이 흑선내항때 성립됐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지금?

  • 15.03.29 01:20

    @bookmark 서구 학문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용어를 정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날 일본이 정의한 서구 번역용어들이 무수하게 쓰이고 있는 건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더 빨리 서구 학문을 수용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벌써 여기서 몇 발자국 앞서 나가는 것이죠.

  • 15.03.29 01:30

    @수아로그 서양 학문 수용에 있어서 앞서나가게 된 건 결국은 유신 이후이고 이때 이후에야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번역이 일어난다니까요. 메이지유신의 중요성 위에서 몇번씩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그 유신의 사상적 기반은 아무리 들이파도 국학이지 난학은 아니었고, 난학의 영향은 찾을수 있긴 한거냐 레벨이라 문제지. 난학이 일본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라고 할려면 난학이 이 메이지 유신에 얼마나 기여했냐를 따져야 합니다만, 도대체 그런 기여를 찾을수가 없어요.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측면은 국학이거든요. 국학에 난학이 미친 영향은 성립시기부터 유신시기까지 뒤져봐도 있긴한가 수준이고.

  • 15.03.29 01:34

    @bookmark '흑선 내항 즈음엔' 이란 대목은 그냥 무시하고 넘기시는군요. 제 설명능력이 부족한 거겠죠;;
    17-18세기 초엔 공식적으로 난학이라는 이름조차 붙지 못한 금서였죠. 그렇지만 데지마란 창구가 있기에 외래 학문이 퍼지는 것을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몇 번이고 국학을 외래문화와 학문의 번성에 대한 반동이라고 말했잖습니까. 메인이야 유학이죠. 하지만 난학(이라 이름붙기도 전, 남만문화의 유입)도 국학의 성립과 발전의 동인이라고요.
    국학에 대해 에도시대 [중기]에 성립되었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죠. 주자학을 근본이념으로 삼고 데지마로부터는 외래문화가 유입되어 오는데 대한 [반동]이라구요.

  • 15.03.29 01:44

    @수아로그 국학 성립시기엔 난학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주요 사상가들 연도로 말씀드렸습니다. 난학 성립시기를 1세기정도 앞당기는 폭거를 님이 저지른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죠. 금서로 취금됀다고 해도, 은밀하게 퍼진다 해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추정근거는 있어야 하는데 그런것도 없는걸 있다고 하면 안되죠. 국학성립의 동인에 남만문화가 있다고 볼 수조차 없는것 역시, 이시기 주요사상가들이 남만 문화를 언급도 안하는 걸로 설명 가능하고요. 이들이 언급하는 외래 문화는 유학입니다. 결국 이들이 국학을 성립시킨 요인도 유학, 즉 성리학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요. 금서여서 비밀리에 읽혀졌다 한다면 통역관도 알파벳이나 겨우 아는

  • 15.03.29 01:51

    @bookmark 18세기 중엽의 상황을 설명하긴 어렵습니다. 막부 특유의 잔혹성을 보이며 피로 찍어누른 일본 기독교도 밀교틱하게나마 살아남는데.

    그냥 금서라서, 몰래몰래 숨었기에 기록이 안남았다 한다면 우선은 실존여부부터 의심해야겠죠. 그리고 그 난학이 국학성립에 영향을 끼첬다는걸 그들의 글로 입증해야겠고. 나름 이것저것 찾아서 교차로 읽어봤는데도 그런건 찾질 못했는데 뭘 가지고 입증하실지 기대되네요.

  • 15.03.29 01:53

    @bookmark 메이지 유신 이전 화혼양재의 급격한 진행속도와 서양학문 수용에서 난학의 의의를 말하는 거고 국학을 기조로 한 메이지 유신에의 사상적 기여라면 그건 이미 수백년 전에 국학 성립과 발전에 동인을 준 것이 있죠.
    거기에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흥아론에서 벗어나 [탈아론을 주장하는 데에 오랬동안 익혔던 [난학을 통해서 ‘중화적 사물의 질서’와 결별]했듯이 아예 아시아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을 펼치게 되는데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고요. 이건 탈아론이나 후쿠자와가 나오는 여러 교양서에서 언급하는 대목이기도 하죠. 사고인식 개변이요.

  • 15.03.29 02:15

    @수아로그 ... '수백년 전에 국학 성립과 발전에 동인을 준 것이 있죠.'는 실체 불명, 일단 그때 난학의 시초라 불릴만한게 존재했다고 님이 입증부터 해야 할 것이고, 서양학문 수용에서 난학의 영향을 님이 주장하는 건 1~2년 앞당기기. 거기다 화혼양제는 '난학 그런거 없이 동아시아 3국이 다 하던 동도서기론'의 영역에 불과하다니까요.

    개항 이후 사상적 변화의 최대요소는 어떤 책을 봐도 국학이라고 지적하며, 대외인식 변화에서도 난학보다 개항기에 서구쪽 상황 알아보러 보내진 사람들의 공로가 큽니다. (님이 5년걸렸다고 어쩌고 할 시기의 조선도 사람들을 보냅니다. 행동 차이가?) 뭐든지 난학 덕택이라고 하는게 잘못된 것.

  • 15.03.29 02:19

    @수아로그 뭐든지 난학을 갖다붙이는건 결국 '일본은 이렇게 빨리 개화했다! 조선 뭐하니?'하는 갓본론에서나 보는건데 솔직히 좀 그렇습니다.

  • 15.03.29 02:21

    @bookmark 1804-1829년 사이 막부가 일본 전역에 개설한 학교와 사설 교육기관 데라코야 등은 일부 난학도 가르칩니다.
    1790년대부터는 네덜란드 외의 서양 선박의 근접이 심해져 대외위기 인식이 생겨나는데 1825년에 영국 선박이 히라도를 습격해와 이국선 타파령, 격퇴명령을 내리게 되죠.
    하지만 이를 일본 지식인 모임 쇼시카이의 난학자 와타나베 가잔 등이 쓴 비판서들이 막부 관리들에게 퍼지고, 또한 1842년 아편전쟁의 경과가 전해지자 바로 폐지, 대신에 신수급여령, 식수와 땔감을 공급하라는 명이 내려집니다.
    이들이 바로 국학과 쇄국론자의 반대편에 선 초기 개항론자들이죠. 일본의 개항론은 생각보다 뿌리가 훨씬 깊습니다.

  • 15.03.29 02:50

    @bookmark 갓본론이라뇨? 어처구니 없네요. 일본은 이미 수백년간 서양 학문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더 빨리 서양 문화를 수용하는데 성공했다는 것 뿐입니다.

    에도 막부 성립과 쇄국 이전 나가사키를 통해 들어온 남만학문을 남만학, 만학이라고 불렀죠. 난학과 구분 짓지만요.
    철저한 기리시탄 탄압과는 달리 막부의 데지마 운영은 그렇게 엄격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원칙적으로야 공무상 허가된 관리와 네덜란드인만이 데지마를 오갈 수 있었지만 네덜란드인들은 일본 여성과 마음대로 결혼할 수 있었다고 하죠. 창녀라는 명목이지만 실상은 양민이라 왕래가 막혀있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 15.03.29 02:48

    @수아로그 먼저 들어온 만학이 있고, 데지마는 사실 별로 완벽한 창살도 아니고, 그래서 쇼군 요시무네가 양서 수입 금지를 완화한 것을 정확히는 서양학문 연구 [활성화]라고 설명합니다.
    이때부터를 난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모토오리 노리나가 등으로 국학이 한창 성숙되어가는 시점이기도 하죠. 이미 만학은 오래 전에 들어와 있고, 난학(이라 불리기 전이지만)은 데지마에서 솔솔 새고. 국학 성립 이전에 외래문화는 한창 들어와 있어요.
    제가 난학이라고 쓴 것은 용어적으로 틀렸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갓본론 소릴 들을 이유는 안 된다고 보네요.

  • 15.03.29 09:04

    @수아로그 난학은 공, 사 교육으로 이미 전국에 확산되어 있고 이를 통해 배출된 초기 개항론자들의 숫자는 흑선 내항 이전에도 이미 그냥 무시하기엔 너무 많습니다. 물론 탄압을 받습니다만.
    유리 제조라거나 종두법 시도, 대포 주조, 게베르 소총 복제 등등 이렇게 확산되어 있던 난학자들의 개항 전후의 업적들입니다.
    죠슈벌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시다 쇼인의 스승 사쿠마 쇼잔은 유학을 배운 전통 지식인이지만 또한 난학자였습니다. 난학이 아무것도 안 했다고요? 난학은 이미 일본에 수용되어 사회 전체에 체화되어 있었습니다.

  • 15.03.29 03:07

    @수아로그 일본의 국수적인 시각에서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국학을 드높이고 자생적 개혁을 강조하려 난학에 대한 의도적인 폄훼가 심한데, 사실 개항 이전에 난학을 배운 수많은 이들이 퍼져 있었고 그들은 바로 유신지사들의 스승이자 친우이며 경쟁자이거나 아예 본인이 난학자죠.

  • 15.03.29 09:22

    @수아로그 참고로 사쿠마 쇼잔은,

    「동양도덕, 서양예술」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주인공이기도 한 쇼잔의 사상은 「궁극적인 양이를 위한 개국」에 모아져 있었다. 주자학자이기도 한 쇼잔이 양이의 방편으로서 정신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합리주의를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서양학문(난학)을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며 이 해방론, [양이를 위한 개국] 사상이 요시다 쇼인을 거쳐 타카스기 신사쿠, 기도 다카요시,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등의 죠슈벌 양이지사들에게로 이어지죠. 난학은 그를 위한 양이지사들의 수단으로, 당시 선진 병학을 바탕으로 포대 축조나 총대 교련 따위를 한 사람들, 다들 난학을 배운 이죠.

  • 15.03.29 09:41

    @수아로그 http://dvdprime.donga.com/g5/bbs/board.php?bo_table=comm&wr_id=9276995

    위 글에서 보듯 난학이 공통분모가 되어 [양이를 위한 개국]에 공감해 삿쵸동맹으로 이어집니다.

  • 15.03.29 09:46

    @수아로그 ;;;; 유학이 도쿠가와 막부 성립 이전에도 존재했다구요?? 대체 어디에요? 하극상이 만연하던 전국시대에 유학이 일본에 존재하고 번성했단 말입니까? 일본 유학은 임진왜란을 겪어야 비로소 사상적 체계가 성립되는데요.

  • 15.03.29 09:51

    @인생의별빛 번성이 아니라 유학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는 건데,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요. 직접 말씀하신 대로 임진란을 거쳐서 이미 들어와 있는 상태에 이에야스가 국가이념으로 삼았지 애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는 건 임진란이 도쿠가와 막부 성립 이후에 있었다는 소리가 되는데요;;

  • 15.03.29 10:33

    @수아로그 앞에서 본인이 하신 말씀을 망각하지 말아주시죠. 분명 '근세 일본의 양대 학문'을 국학과 난학으로 정리하고 유학은 '그 이전에 들어와 있었으니 양대 학문이라 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죠. 근데 어쩝니까? 주자학은 가마쿠라 시대에 들어온 것이 사실이지만 주요 연구가들은 승려들이었거든요. 율령제가 붕괴하고 무가 통치가 시작되면서 지식인이라곤 승려밖에 남지 못한 일본에서, 불교 공부를 기본으로 하면서 취미삼아 주자학 읽는 걸 '그래도 일단은 들어와 있었지 않느냐'는 이유로 근세 일본의 사상사와 학문 체계 정리를 하는 도중에 언급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는 게 가능이나 합니까?

  • 15.03.29 10:42

    @수아로그 일본 유학, 특히 주자학의 출발점은 하야시 라잔이라고 봐야 하며, 좀 더 당겨 올려도 하야시 라잔의 스승인 후지와라 세이카까지밖에 못 올립니다. 그리고 후지와라 세이카는 다름아닌 강항과 깊은 교류를 맺었죠.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유학을 중흥시킨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일본 유학의 시작은 16세기 말기가 맞습니다. 그리고 에도 시대 막부의 가장 기초적인 통치체계로 자리잡고요. 따라서 근세 일본의 양대 학문이라고 하면 유학과 국학인 겁니다. 난학이요? 글쎄 나가사키 바깥에서 깊이 연구된 흔적이 있느냐고 몇 번이나 묻습니까 대체? 학문적 근거를 좀 주세요 제발.

  • 15.03.29 10:44

    @수아로그 아, 참고로 하야시 라잔은 후지와라 세이카의 천거로 도쿠가와 가문의 지남역을 맡은 게 1605년, 그의 나이 23세였습니다.
    또한 후지와라 세이카 본인부터가 교토에서 승려였던 시절에 주자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니, 이것 역시 주자학만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집단은 없었다는 증거가 되죠. 당시에는 승려들이나 간신히 접할 수 있는 게 주자학이었습니다. 승려들 사이에서 명맥이나 남아 내려왔을 뿐이지 본격적인 사상적 체계가 성립되기 시작한 건 좋게 봐줘야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이고, 일반적으로는 에도 시대 극초반으로 봅니다.

  • 15.03.29 10:48

    @수아로그 50대의 한창 왕성히 활동할 나이의 유학자인 후지와라 세이카가, 도쿠가와의 관직 출사 요청을 거부하면서 20대의 새파란 젊은이를 "그래도 얘가 유학을 제일 잘합니다"라면서 쇼군에게 직접 천거할 정도라니, 하야시 라잔이 율곡 이이 수준의 세기급 천재였거나 아니면 일본 유학의 기틀이 그 정도로 미약했거나 둘 중 하나겠죠.
    이 정도로까지 증명해놨는데도 유학을 배제하고 난학을 국학과 대등하게 놓으시렵니까? 국학은 유학 상대하느라 벅차서 난학 따위에게 눈길이라도 제대로 갔을까 모르겠네요. 애초에 난학이 최초로 체계화된 것이 19세기 초라는 건 위에서 북마크 님이 열심히 설명해주시기도 했고요.

  • 15.03.29 10:53

    @수아로그 그리고 주자학자 쇼잔이 정신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합리주의를 내세울 수 있었던 건 그게 난학 덕분이 아니라 애초에 일본 유학의 특성 자체가 그랬습니다. 제가 언급한 '일본식 화이론' 자체가 국학이 아니라 유학 영역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한 이론입니다. 근세에 접어들어 동아시아 각국이 중세적인 세계관을 벗어던지고 내셔널리즘을 성숙시키는 과정에서 일본 유학은, 일본만의 '혼'을 강조한 국학과는 달리 정치체제, 경제력, 군사력 등 현실적인 관점에서 일본 문명의 특수성을 강조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 과정에서 세계지리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인식이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 15.03.29 10:57

    @인생의별빛 언제 난학을 국학과 대등하게 놓았다는 건가요;; 양대 학문이라 함은 에도 시대에 [탄생]했기에 나오는 용어라고 앞서 설명드렸는데 말입니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941

    유학은 관학으로 둘 보다 당연히 위에 위치해 있죠. 게다가 그 국학, 실상 도막 과정에선 어그로나 끌었고 쇼잔 문하들로 대표되는 주자학+난학 콤비들의 양이를 위한 개국론이 메이지 신정부를 탄생시켰는데요. 국학에 대해서 위 기사는 아예 각색역사라고 비판할 정도죠.

  • 15.03.29 10:57

    @수아로그 일본 유학이 조선 유학과 달리 중국문명과 일본문명을 각각 상대화할 수 있었던 과정에서 네덜란드발 정보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던 것은 분명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난학'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고, 애초에 일본 유학은 일본문명이 다른 문명들과 '대등하다'면서 각 문명마다 장단점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을 뿐이니 결국 유학의 문명론적 틀을 벗어나지는 않았던 겁니다. 난학이 '담론을 형성하는 데에 기여'했느냐고 묻는다면 더더욱 아닙니다.
    따라서 조금 무리하자면 일본 유학의 발전 과정과 세계지리 사이의 관계를 언급해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국학과 난학은 정말 아닙니다.

  • 15.03.29 11:00

    @수아로그 주자학+난학 콤비라니 코미디네요. 아이즈를 중심으로 하는 좌막파에서 주자학의 세력이 강했고, 정작 유신을 이끈 도막파 웅번들 사이에선 양명학의 세력이 강했습니다. 뭐, '세력이 강했다'라고 말하기에는 학문 간 구별이 뚜렷하지 않으니 어렵지만, 오늘날 연구 결과로는 대체로 양명학적 '관점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 15.03.29 10:59

    @수아로그 그리고 이제 신문사 링크는 그만 좀 올려주시면 안될까요. 어떻게 모든 근거가 다 신문사 링크에서 나옵니까?

  • 15.03.29 11:05

    @수아로그 애초에 막부가 중흥시킨 것이 주자학입니다. 쇼군을 왕과 같은 위치에 대입시키고 상하 간의 강력한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데에는 주자학이 가장 좋았고, 따라서 막말 시점에 있어서도 막부 중심의 정치를 유지시키려는 보수파는 주자학에 기울어있죠. 반면에 인간들 사이의 기질 자체에는 선천적인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 양명학이야말로 막부와 대립하는 도자마 다이묘들의 입맛에 더 들어맞는 겁니다.
    양이론 자체는 주자학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을지 몰라도(애초에 쇄국을 처음 시작한 게 주자학을 채택한 막부였으니까), 좌막이냐 도막이냐의 갈래에 있어서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갈래가 뻔하죠.

  • 15.03.29 11:28

    @인생의별빛 [존왕]양이부터가 천황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건데, 좌막과 도막 구분에 단순하게 주자학과 양명학을 내세우시다뇨;;

    서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얼마든지 다양하게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난학이 [공기]포지션으로 취급될 이유가 없다는 시각을 견지하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엉뚱한 트집을 잡으려 든다는 느낌은 과한 걸까요?
    그리고, 신문사 링크를 걸지 말라고요? 이건 [해당 시각]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있음을 [증명]한 겁니다.
    물론 이건 주류적인 시각이 아닌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측면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 15.03.27 10:54

    난학자들 없었으면 메이지유신도 실패했을듯

  • 작성자 15.03.27 11:03

    존왕양이의 선봉에 섰던 쵸슈는 서구연합함대에게 공격 받기 전에 이미 5명의 젊은이들을 막부 몰래 영국으로 파견합니다. 양이를 하려면 서구를 알아야 한다면서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 5명을 영국 런던에 유학보냅니다. 이게 1863년. 이런 유연한 사고는 난가쿠의 전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죠

  • 15.03.27 14:56

    일본이 근대화를 성공한이유는 자체 재정도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막말에 이르면 조선재정의 13배의 달했던게 에도막부입니다. 동시기 일본에서 터지는 잇키와 조선에서 일어나던 민란과 도적떼 창궐만하더라도 두국가는 농민층에게 누가 더 낫다고 할수없을정도로 막장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정부의 경우 재정수입이 열악했는데. (실제로 세율도 낮음) 삼정의 문란으로 표현되는 지방관들과 아전 그리고 양반들에 탐학으로 그 약소한 조세수입마저도 줄줄이 새어나가기 바빳습니다. 조선의 세율이 동북아 삼국중 낮았으나 온갖잡세와 부정부패로 사실상 동급수준입니다

  • 15.03.28 17:54

    기본 인구 차이랑 세율 차이 때문에 둘 다 잡세와 부정부패가 없다고 가정할때 이미 1:8 정도로 세수부터 차이가 나긴 합니다. -_-;;

  • 15.03.29 00:44

    @aaaa aaa 아니 그것보다도 막부의 제민지배력이 더강했습니다. 경제사적으로 보면일본이 동시기 청과 조선보다도 더 강력했습니다

  • 15.03.29 09:44

    @대륙 그것도 사실이죠. 도요토미 시절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의 강력한 전제 통치. 중세 유럽의 농노제와 비견해야 할 수준이죠. 조선의 오가작통법 따위는 갖다대지도 못할 수준;;

  • 15.03.30 02:50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유신 초기부터 근대화 과정에서 그렇게 많은 빚을 졌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조선측에서도 이걸 보고 저렇게 운영해서야 되겠냐는 반응을 보인 걸로 알고 있구요. 정말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았으면 파산했을 거라던데 말입니다.

  • 15.03.30 13:56

    @그레친 근대화에는 돈이 많이 드는일입니다. 영국에게서 차관도 빌렸죠. 문젠 돈을 꾸는것도 갚을 능력이 있는지 판단하고 꿔주지 아무한테나 대출안해줍니다 .그리고 청일전쟁에서 전비로 드는돈이지 청나라도 일본에게 져서 결국 파산위기까지 봉착했죠 그리고 초창기의 산업육성이 초기자본이 상당히 소요되나 그것이 뒤에 흑자로 전환할수 있는겁니다.조선만 하더라도 농업생산량이 일본벼의 도입과 일본지주들의 도래. 그리고 주 수입품인 면직물가격이 낮아지면서 자체적인 부농들이 탄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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