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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학내 커뮤니티에도 게시한 글이지만 여기에도 같이 올려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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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는
에도 중기의 무사, 유학자, 정치인 그리고 외교관이었습니다.
그가 조선에서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조선통신사와의 외교에서인데요, 그는 당시 일본인들을 야만인 취급했던 통신사 인원들을 유교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문장력으로 놀라게 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조선과의 외교를 다른 차원으로 바꾸어 놓는데, 그때까지 애매했던 교린관계를 형식상 '대등하게' 또는 '우열'하게 바꾸어놓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때까지 <일본국大君>이라 지칭되던 도쿠가와 쇼군을 <일본國王>으로 '공식화' 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이게 왜 문제가 됐냐면 쇼군 위에 덴노(천황)이 있었기 때문이죠. 따라서 조선 국왕은 쇼군과 대등해진 결과 덴노의 '신하'가 된 것입니다. 사실 조선 통신사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았으나 굳이 분쟁을 일으키기 싫어 '좋은 게 좋은거다' 하면서 대충 넘어갑니다. 물론 나중에 성호 이익과 같은 실학자들은 이와 같은 무능 외교를 신랄히 비판하죠.
왜황(倭皇)이 실권(失權)한 것이 또한 6~7백 년에 불과한데 국민의 원하는 바가 아니다. 차차 충의의 인사가 그 사이에 생겨서 천황을 복권시킨다는 명의가 정당하고 말이 옳으니, 뒤에는 반드시 한번 성공이 있을 것이다. 만일 하이(蝦夷)를 연결한 다음 그 천황을 끼고 제후에게 호령한다면 반드시 대의를 펴지 못하지 않을 것이다. 66주의 태수(太守)들이 어찌 서로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만일 이렇게 되면 저편은 천황이요 우리는 왕이니, 장차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죽은 아들 맹휴(孟休)가 일찍이 말하기를, “통신사(通信使)의 경우, 그 서ㆍ폐(書幣)와 문자에 있어 우리의 대신으로 하여금 항례(抗禮 동등한 예절)로 함이 가한데 나라일을 계획하는 자가 먼 생각이 없고 목전의 미봉책만 하였으며, 또 관백이 왕이 아닌 줄 알지 못하고 이에 이르렀으니, 몹시 애석하다.”-성호사설 中 -
인트로가 길었는데 아무튼 아라이 하쿠세키는 통신사의 대표 조태억과 필담을 나누면서 세계에 대한 이들의 무지를 은근히 비웃습니다. <강관필담>을 보면 아라이는 통신사 인원들이 유럽,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의 나라를 아는지 은근 슬쩍 떠봅니다. 이에 대해 통신사 인원들은 '본디 대서양이란 나라가 있다고 들었는데 네덜란드, 이탈리아는 어디에 있는 나라냐'고 되묻습니다. 이에 대해 아라이는 '귀국에는 만국전도도 없는가?' 라며 비웃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신단에게 '지금 서방 여러 나라들도 모두 대청(大淸)의 관복 제도를 쓰고 있는데 왜 귀국만이 명나라의 옛 의례를 고수하는가'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사신단은 '천하가 모두 오랑캐를 따르지만 우리나라만은 대명의 제도를 고치지 않으니, 청국도 우리를 예의의 나라라 하여 감히 예의에 벗어난 것으로 우리에게 가하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아무튼 이런 아라이 하루세키는 1715년 일본에 온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 시돗찌를 심문하여 <서양기문>이라는 저서를 집필합니다. 이는 서양 각국의 지리와 특징들을 서술한 동양 최초의 책인데, 지금 기준으로 봐도 그 상세함은 상당히 놀랍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렇게 중요한 저서가 국내에는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습니다.
현대 일본어 번역본은 무료로 온라인에 공개되어 있는데, 제가 일본어를 잘 하지 못해서 구글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핵심적인 부분만 대충 소개 해드립니다.
원문은 http://book.geocities.jp/kunio_suwa/Seiyoukibun.pdf
서양기문 제2권 - 세계정세 中
1. 지구에 대해
"대지는 해수와 일치하고 원형 내지 구형이다. 그냥 계란의 황 맛이 흰자 속에있는 것 같은 것일까. 지구의 둘레는 9 만리에서 여기 저기도 모두 사람이 살고있다. 지구 전체를 분류하여 5 대주로한다.
하나는 요로파 (한어로 구라파欧羅巴로 번역. 처음에는 漢音처럼 발음하고 있었지만, 그 발음은 지나(중국)식으로 부적절하다고 시돗찌가 지적했다. 후에 온 네덜란드인에게 물어 보아도 시돗찌 말하는 곳이 맞는 것 같다. 옛날 일본인은 요우로우하이라고했는데 이것은 漢音이 변하고와는 한 것이다. 흔히 안쪽 남만이라는 지역이 유럽이다.)
두 번째는 아프리카 (한어로 리미아利未亜라고 번역하고있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세 번째 아시아 (한어로 아시아亜細亜로 쓴다. 네덜란드 鏤板의 그림에 따르면, 이상 세 대주는 함께 한 구역 내에있어, 이것을 지상계로 한다.)
넷째 노오루토 · 아메리카 (서양어로 노오루토는 남쪽이다.하쿠세키한테 번역해준 놈이 노쓰와 사우쓰를헷갈린듯중국어로 남아묵리가南亜墨利加이다.)
다섯째는 소이데 아메리카 (소이데는 북쪽이다. 중국어로 북아묵리가北亜墨利加라고 한다. 네덜란드 인에 따르면 남과 북 아메리카는 모두 하나의 대륙이다.)"
그리고 각 대륙의 지리, 가량 희망봉, 지중해, 마다가스카르, 필리핀 제도, 인도, 북극, 흑해, 홍해, 카스피 해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평하길 "생각해 보면 대서양 · 지구등의 지도는 그 유래가 아직 막연하다. 명나라의 오중명은 만국곤여도에 대해 말하길 "유럽 국가에 관해서는 이런 종류의 낡은 지도가있다. 아무래도 이탈리아 인과 프랑스 인은 모두 원양 항해를 좋아하는 것 같다. 때로는 절해의 땅을 방문 조사하고 그 지식으로 이런지도 등을 만들고 있다. 그러한 것을 수년 동안 쌓아 이러한 대략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고 한다.
2. 요로빠(유럽) 諸國:
먼저 이탈리아
(이곳의 국가를 전부를 쓰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기에 여기에는 그냥 시돗찌의 설명에 있던 것만을 단축한다.) 이탈리아 (한어로는 大里亜). 유럽의 남쪽 그리고 지중해 위에 있다. 그 나라 수도를 로마노라고 한다. (네덜란드어에서는 로마라고 한다. 한어로는 羅馬国이라 한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교의 교주(교황, 법왕)이 지배하는 곳으로, 주위는 불과 십 팔리 주민은 70 만명이다. 사람들은 정밀 기기를 제작한다. 그리스도 교황은 주로 데우스(DEUS)의 교회 (천주교)를 관장한다. 군사 등은 각지에 도우쿠스(DOUX)가 담당한다. (도우쿠스는 이른바 추장이다. 추후 다시 설명)
시시리아 섬은 화산이다. 시시리아는 한어로 西斉利亜라고 한다. 에우로파 최남단에서 지중해의 섬이다. 섬에 산이 두개 있고 하나는 항상 불을 내뿜는다. 한쪽은 항상 연기를 내고 모두 밤 낮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본조 寛永年(1624 ~ 1643)에 일본에 온 꼰빠니야, 지요세후가 이 쪽 사람이라고 한다. 이 중 지요세후는 기독교를 버리고 일본에 귀화했는데 岡本三右衛門라고 부르게 되었다.
포르투갈은 동쪽 동양에
포르투갈 (한어로 波亦杜瓦亦라고 쓴다. 옛날 일본에서는 호루토기스, 부루토가루라고도 했으며 더 "남방"라고 부른 것도이 나라의 일이다). (수도명은 리사본 또는 리스본). 유럽 서남의 바다에 접한 땅에있다. 이 나라는 여러가지 물건을 해외에 수출하고, 마침내 아시아 지역 고아, 마카오, 마로카 등지에 본국 사람을 주둔시키고, 번화가 등을 지배 시켰다고한다. (고아는 일본에서는 고리라 불리며 마카오는 일본에서는 마무카우라고 불린다. 마로카은 마테야라고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설명) 서양의 배들이 우리나라에 도래 한 것은이 나라가 시작이다. 또한 기독교가 동양에 들어간 것도이 나라로부터다.
포르투갈인의 일본 등장
사견이지만, 포르투갈 인들이 처음 분고 국에 온 것은 천문 10 년 (1541) 7 월이다. 그 후, 사쓰마 국에 온 것이 천문 12 년 (1543) 8 월이다.
포르투갈 왕위를 둘러싼 문제와 에스파니아 왕의 이중지배
(지요세후(일본명: 岡本三右衛門)의 책에 따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포르투갈 왕비는 에스파니아 왕의 딸이었습니다. 포르투갈 왕이 상속자 없이 사망하자 왕후는 부모의 나라 에스파니아에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왕비가 임신했다고 판명한 포르투갈 사람들은 왕비를 쫓아오고 포르투갈은 왕비를 되돌려받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남아가 태어났는데 그는 21세에 죽었습니다. 또 상속자가 없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선왕의 동생은 예수의 종이 되기 위해 로마에 있었는데 그는 당연히 아내도 없고 아들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민이 상담하여 선왕의 조카를 상속인으로 해서 에스파니아의 왕에게 포르투갈 국사를 맡게 하였습니다.
(후략)
에스파니아는 서쪽 동양에
에스피니아(네덜란드어로는 이스빤야라고 한다). 포르투갈과 프랑스와 땅을 접하고 그 속국이 18있다. 또한 남아메리카의 땅을 얻고 새롭게 나라를 열고 노와 · 에스파니아라고 불른다. (멕시코라고도 한다 : 노와는 일본어로는 새로운 의미.. 노오바 이스뻰야라고 부르는 것도 같다) 이후 아시아 지역에서는 로쿠손(루손 또는 필리핀 인근 섬)도 합병했다. (중략......) 외국 선박의 내항을 금지한 이후 오지 않게 되었다. 1624년의 봄 다시 와서 관계 복구를 요구했지만 일본 측에서 거부했다.
카스테이리야(카스테이라라고도 한다. 옛날 우리나랑서 카스타안이라고도 불렀다).
에스파니아의 동남쪽에 있으며 서로 동맹 관계에 있다고한다. 사견으로는이 나라 자체는 일본과 교류 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 한 프란시스 쿠스 · 자베이리우스이 나라 사람이라고한다.
프랑스와 노와 프랑시야
가아리야(갈리아) (또한 라틴어로, 프랑카 레키스 모두 프랑카 레기욤이라고도 한다. 그 레키스, 렌기욤이라는 것은 국가라는 의미라고 한다. 또한 이태리어로 프랑시아라고 하며 네덜란드어로는 프랑스라고 한다. 옛날 일본에서 가리얀이라고 한 것은 가아리아의 사투리인 것으로 보인다.) 유럽 서해상에, 이탈리아, 에스파냐, 네덜란드 등지에 인접 해있다. 또한 소이데 아메리카의 땅을 합쳐 새로운 나라를 열고 노와 프랑스 야라고 칭한다.
사견이지만, 프랑스의 상선이 옛날 일본에 온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나라에 대해서는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것도 사견이지만, 「서양인이 명나라에 통과 된 것은 武宗 쇼 토쿠 12 년에, 프랑스 화랑 기 국가 입공이 처음 "이라고 써있다. 이 쇼 토쿠 12 년 일본에서는 영정 14 년 (1517)에 해당하기 때문에, 서양 배가 시작해 일본에 온 천문 10 년 (1541)부터 24 년 전이다.
도이치(신성로마제국)와 주변 지역
제르마니야(네덜란드어에서는 호고 도이치, 모두 도이치라고 한다)
에우로파 지역의 대국이다. 수도는 비엔나라고 한다. 이 나라의 군주는 모두 諸國이 함께 추대하여 임페라토르라고 칭한다. 이에 소속된 호루토스는 모두 7명이라고 한다. (시돗찌의 설명에 따르면 7명의 호루토스라는 것은 예를 들어 7 제후와 비슷한 것이라고 한다. 네덜란드인의 설명의 따르면 군주는 카이자르라고 칭하고 호루토스는 9명이라고 한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도이치는 산물이 풍부하고 국가도 부유하고, 병마도 매우 강하다. 그러나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다. 호루토스가 1 명이라도 반대하면 군사를 결코 이동할 수 없기 떄문이다. 또한 국가는 북쪽에 있고 춥고 암염을 생산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금의 공급을 네덜란드에 의존하고 있다고한다.
부란데부루고 (侯国) (후란데보루코이라고도 한다.이 나라에 대해 상세 불명) : 제르마니야의 동북, 호타라니야의 서북쪽에있다.
호타라니야: 제르마니야의 동쪽 뽀로니야의 북쪽에 있다.
포로니야: 제르마니야의 동쪽에 있다.
삭소니야: 제르마니야의 근방이다. 상세불명
모스코비야: 에우로파 동북쪽에 있는 땅이다. 땅은 매우 춥다. 겨울에는 얼음이 두껍게 쌓이고 3m에 이른다고 한다. 사람과 말이 모두 얼음 위를 걸어다닌다.
수웨이치야: 요로빠 북쪽에 있다. 노르웨이기야와 땅이 인접해있다.
노르웨이기야: 요로빠 최북단에 있다. 빙해에 접해있다.
강국 네덜란드의 역사와 해전
오란다(명나라에서는 화란和蘭이라고 불렀다. 또는 홍이紅夷라고도 불렀다).
오란다(이하 네덜란드)는 제르마니야 서북쪽에 있다. 처음에는 제르마니야의 작은 섬에서 어업활동을 하다가 땅을 얻어 7개 주에서 나라를 건국했다. 건국 초기에는 에스파니야에 속해있었다. 그 후 에스파니아의 폭정을 못버티고 본국 에스파니아와 단절했다. 에스파니아는 군사를 일으켜 치려고 했지만 각지에서 지원하여 80년 동안 싸워서 반대로 네덜란드가 에스파니아로부터 10개주를 탈취했다. 지원국의 중재로 양국은 화의하고 네덜란드는 침략한 땅을 반환했다.
네덜란드는 해전에 자신이 있고 이점에서는 무적이다. 육상에서는 해전만큼은 아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몇 주의 땅을 침략하여 나라는 부유하고 병사도 강하다. 지금은 요로빠에서 하나의 강국이다. 7개 주의 이름은 오오부루이쯔스루, 후리이스란토, 오루란토, 세란토, 그루닝, 게루토루란토, 우이토라키토이다.
침략 탈취한 해외의 토지는 카푸토포네수베이(현재의 케이프타운), 고도로루, 마로카(말라카), 바타아비야, 노와 오란데야(현재의 호주), 제이란(대만) 등이 해당한다.
해적 이기리스(영국)와 로마교회와의 단절
앙게루아(이하 영국)(앙게리아라고도 한다. 이탈리아어로는 앵게루테라라고 하며 네덜란드어로는 잉글랜드라고 한다).
요로파 서북쪽 바다에 큰 섬이 두 개 있다. 하나의 섬은 북쪽으로 스코츠테야이며 남쪽으로 앙게루아이다. 다른 섬은 이베르니야라고 한다.
영국은 바다의 나라로 배 건조와 해전에 뛰어나다. 네덜란드인이 해외에 통하는 기술을 습득할 때도 처음에는 영국 사람의 가르침을 받고 지금처럼 해로의 사용에 숙달했다고 한다.
요로파의 상업용 선박은 영국을 두려워하고 영국인을 해적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렇게 불리는 것을 영국 왕은 치욕으로 생각하여 영국사람이 마음대로 외양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나라도 원래는 천주를 믿고 기독교에 봉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변화가 일어났다. 영국 왕이 왕비를 폐위하고 새 왕비를 맞았다. 기독교 교리에는 원래 간통을 대죄로 취급한다. 그래서 교황은 영국 국왕이 파계했다는 이유로 나라를 저주했다. 이 교회를 받드는 다른 나라들도 또한 이와 관계를 단절했다. 네덜란드인과 단교한 것도 이때의 일이라고 한다.
사견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게이죠 5년(1600)에 이 나라는 처음으로 네덜란드와 함께 우리나라와 교류를 요구했다. 1613년 가을 처음 공헌했다. 다음 해에 다시 왔다. 그 후 온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외: 스코츠테야, 이베르니야, 그루웬란토
군주의 규정 방식
원래 요로빠의 국가들은 군주를 옹립할 때 적자가 있으면 논의가 생기지 않는다. 만약 적자가 정해져있지 않으면 신민이 이름을 적어 투표한다. 투표 수가 많은 자를 군주로 한다. 군주가 신하를 임명하는 방식도 이와 같다. 신민의 추천이 많은 자를 등용한다. 군주가 제 멋대로 관리를 임명할 수 없다.
(네덜란드인의 말에 의하면 네덜란드 본국에서는 군주가 없다고 한다. 예를 들어 각 주에는 담당하는 관장을 세우고 통치하게 한다. 국민이 그 관장을 선출한다. 또한 지요세후의 말에 따르면 요로빠 지방에는 레네사(???어딘지 모르겠음)와 제누아(제노바 공국)처럼 나라 전체에 1명을 선출해서 1년 동안 국사를 돌보게 하며 매년마다 그 사람을 교체 시킨다고 한다. 레네사, 제누아 등의 국가의 위치는 불명)
이 지역의 국가들의 군주 위계는 다음과 같다.
혼테헤키스 마키스이무스(PONTIFEX MAXIMUS). 이것은 로마교회의 교황으로서 오직 1명만 칭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임페라토르이다. (이것은 한나라의 帝와 유사하다. 제르마니야의 군주가 이에 해당한다.)
그 다음은 레키스(REX). (한나라의 王에 해당한다. 프랑시야, 앙게리아 등의 군주가 이에 해당한다.)
그 다음은 후랜스(PRINS). (레키스 다음 등급이다. 한나라의 대장군과 비슷한 것인가? 네덜란드와 에스파니아가 서로 싸울 떄 앙게리아의 레키스가 자국의 군사를 인솔하여 네덜란드 후랜스가 싸운 경우가 있다.)
그 다음은 호루스토(이것은 후랜스 다음의 등급이라고 한다. 제르마니야에 속하는 7개 국가 대부분이 이 칭호가 있다고 한다. 이것 또한 한나라의 장군에 해당하는 것일까.)
그 다음은 도우쿠스(DOUX). (이것은 호루스토 다음 등급이다. 이탈리아의 경우 소재 마다 병사를 담당하는 자가 도우쿠스라고 한다. 부락의 추장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칭호가 존재한다고 하는데 전체를 세는 것은 어렵다.
루테이루스의 사도: 시돗찌가 말하는 '이단'이다.
하악.. 힘들다... 왠만해서 다 번역하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그 외에 개신교에 대한 설명,
유럽 각국의 언어(하쿠세키는 히브리어, 라틴어, 그리스어를 설명함)를 소개하고
그리고 오스만 제국, 마다가스카르, 시암, 캄보디아, 보르네오, 말라카, 무굴제국, 벵골, 호주 발견, 자카르타 등의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일명 7년 전쟁)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고요.
놀라운 점은 이 책이 저술된 게 1715년이라는 사실....
이런 점을 보면 역시 정보와 지식이 꾸준히 축적되어야 하는 거 같습니다.
조선은 19세기 중후반까지 이들 나라의 역사는 커녕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수아로그 척양은 일본도 마찬가지로 초기에 내세웠고 개항기 서양 문물 수용과정의 차이는 개항과정 차이 등 난학같은것보다 더 크게 영향 끼칠 요인이 많습니다. 수십년 허송세월을 단축시켜줬다고 이야기하시지만 실제론 1,2년이고 이정도 차이는 정치적 요인 몇가지면 쉽게 차이나니까.
지대한 영향이라면서 난학 찬양에만 시야를 좁혀 열을 올린다고 그게 역사되지는 않네요.
@bookmark 실제로 강무소가 흑선 내항 3년 만에 나오고 곧 일본 각지에서 독자적인 교련이 진행되는 사례를 들었는데도 역관 타령을 하는 것은 오히려 더 이상합니다. 서양 학문을 한다고 네덜란드 어를 배워야 하는 시대는 한참이나 전이었어요.
정확히는, 이미 일본어로 번역된 교범이지만 난학을 통해서 정의된 용어로 점철되어 난학을 모르면 해석이 안되는 외계어 수준의 교범을 가지고서 각지에서 교련을 진행할 수준. 교양 수준의 난학은 딱 이 정도였죠. 거기에 더해 게베르 소총과 같은 전장식 총기를 각지에서 금방 복제할 정도의 기술이 확산된 정도고요.
@수아로그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사승내역 일부분입니다만, 오늘날의 학자들도 그렇듯 당시 학자들이라고 어느 한 학문만 익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학문을 배우고 익히죠. 난학은 초창기 막부의 금령에 학문이란 이름도 붙여지지 못한 채 암암리에 읽히는 금서, 게다가 외래학문이라 초보적일 따름이었습니다만, 흑선 내항 즈음엔 또한 교양의 하나로써 후쿠자와 유키치가 그랬듯 많은 이들이 익히는 여러 학문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에 대한 대답으로 달아드렸더니 시간대가 헷갈리시는 모양이군요. 17 18세기 국학성립기 난학이 초보적이라도 있었다는 님의 주장에 대한 답변인데 말이죠. 국학이 흑선내항때 성립됐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지금?
@bookmark 서구 학문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용어를 정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날 일본이 정의한 서구 번역용어들이 무수하게 쓰이고 있는 건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더 빨리 서구 학문을 수용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벌써 여기서 몇 발자국 앞서 나가는 것이죠.
@수아로그 서양 학문 수용에 있어서 앞서나가게 된 건 결국은 유신 이후이고 이때 이후에야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번역이 일어난다니까요. 메이지유신의 중요성 위에서 몇번씩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그 유신의 사상적 기반은 아무리 들이파도 국학이지 난학은 아니었고, 난학의 영향은 찾을수 있긴 한거냐 레벨이라 문제지. 난학이 일본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라고 할려면 난학이 이 메이지 유신에 얼마나 기여했냐를 따져야 합니다만, 도대체 그런 기여를 찾을수가 없어요.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측면은 국학이거든요. 국학에 난학이 미친 영향은 성립시기부터 유신시기까지 뒤져봐도 있긴한가 수준이고.
@bookmark '흑선 내항 즈음엔' 이란 대목은 그냥 무시하고 넘기시는군요. 제 설명능력이 부족한 거겠죠;;
17-18세기 초엔 공식적으로 난학이라는 이름조차 붙지 못한 금서였죠. 그렇지만 데지마란 창구가 있기에 외래 학문이 퍼지는 것을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몇 번이고 국학을 외래문화와 학문의 번성에 대한 반동이라고 말했잖습니까. 메인이야 유학이죠. 하지만 난학(이라 이름붙기도 전, 남만문화의 유입)도 국학의 성립과 발전의 동인이라고요.
국학에 대해 에도시대 [중기]에 성립되었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죠. 주자학을 근본이념으로 삼고 데지마로부터는 외래문화가 유입되어 오는데 대한 [반동]이라구요.
@수아로그 국학 성립시기엔 난학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주요 사상가들 연도로 말씀드렸습니다. 난학 성립시기를 1세기정도 앞당기는 폭거를 님이 저지른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죠. 금서로 취금됀다고 해도, 은밀하게 퍼진다 해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추정근거는 있어야 하는데 그런것도 없는걸 있다고 하면 안되죠. 국학성립의 동인에 남만문화가 있다고 볼 수조차 없는것 역시, 이시기 주요사상가들이 남만 문화를 언급도 안하는 걸로 설명 가능하고요. 이들이 언급하는 외래 문화는 유학입니다. 결국 이들이 국학을 성립시킨 요인도 유학, 즉 성리학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요. 금서여서 비밀리에 읽혀졌다 한다면 통역관도 알파벳이나 겨우 아는
@bookmark 18세기 중엽의 상황을 설명하긴 어렵습니다. 막부 특유의 잔혹성을 보이며 피로 찍어누른 일본 기독교도 밀교틱하게나마 살아남는데.
그냥 금서라서, 몰래몰래 숨었기에 기록이 안남았다 한다면 우선은 실존여부부터 의심해야겠죠. 그리고 그 난학이 국학성립에 영향을 끼첬다는걸 그들의 글로 입증해야겠고. 나름 이것저것 찾아서 교차로 읽어봤는데도 그런건 찾질 못했는데 뭘 가지고 입증하실지 기대되네요.
@bookmark 메이지 유신 이전 화혼양재의 급격한 진행속도와 서양학문 수용에서 난학의 의의를 말하는 거고 국학을 기조로 한 메이지 유신에의 사상적 기여라면 그건 이미 수백년 전에 국학 성립과 발전에 동인을 준 것이 있죠.
거기에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흥아론에서 벗어나 [탈아론을 주장하는 데에 오랬동안 익혔던 [난학을 통해서 ‘중화적 사물의 질서’와 결별]했듯이 아예 아시아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을 펼치게 되는데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고요. 이건 탈아론이나 후쿠자와가 나오는 여러 교양서에서 언급하는 대목이기도 하죠. 사고인식 개변이요.
@수아로그 ... '수백년 전에 국학 성립과 발전에 동인을 준 것이 있죠.'는 실체 불명, 일단 그때 난학의 시초라 불릴만한게 존재했다고 님이 입증부터 해야 할 것이고, 서양학문 수용에서 난학의 영향을 님이 주장하는 건 1~2년 앞당기기. 거기다 화혼양제는 '난학 그런거 없이 동아시아 3국이 다 하던 동도서기론'의 영역에 불과하다니까요.
개항 이후 사상적 변화의 최대요소는 어떤 책을 봐도 국학이라고 지적하며, 대외인식 변화에서도 난학보다 개항기에 서구쪽 상황 알아보러 보내진 사람들의 공로가 큽니다. (님이 5년걸렸다고 어쩌고 할 시기의 조선도 사람들을 보냅니다. 행동 차이가?) 뭐든지 난학 덕택이라고 하는게 잘못된 것.
@수아로그 뭐든지 난학을 갖다붙이는건 결국 '일본은 이렇게 빨리 개화했다! 조선 뭐하니?'하는 갓본론에서나 보는건데 솔직히 좀 그렇습니다.
@bookmark 1804-1829년 사이 막부가 일본 전역에 개설한 학교와 사설 교육기관 데라코야 등은 일부 난학도 가르칩니다.
1790년대부터는 네덜란드 외의 서양 선박의 근접이 심해져 대외위기 인식이 생겨나는데 1825년에 영국 선박이 히라도를 습격해와 이국선 타파령, 격퇴명령을 내리게 되죠.
하지만 이를 일본 지식인 모임 쇼시카이의 난학자 와타나베 가잔 등이 쓴 비판서들이 막부 관리들에게 퍼지고, 또한 1842년 아편전쟁의 경과가 전해지자 바로 폐지, 대신에 신수급여령, 식수와 땔감을 공급하라는 명이 내려집니다.
이들이 바로 국학과 쇄국론자의 반대편에 선 초기 개항론자들이죠. 일본의 개항론은 생각보다 뿌리가 훨씬 깊습니다.
@bookmark 갓본론이라뇨? 어처구니 없네요. 일본은 이미 수백년간 서양 학문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더 빨리 서양 문화를 수용하는데 성공했다는 것 뿐입니다.
에도 막부 성립과 쇄국 이전 나가사키를 통해 들어온 남만학문을 남만학, 만학이라고 불렀죠. 난학과 구분 짓지만요.
철저한 기리시탄 탄압과는 달리 막부의 데지마 운영은 그렇게 엄격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원칙적으로야 공무상 허가된 관리와 네덜란드인만이 데지마를 오갈 수 있었지만 네덜란드인들은 일본 여성과 마음대로 결혼할 수 있었다고 하죠. 창녀라는 명목이지만 실상은 양민이라 왕래가 막혀있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수아로그 먼저 들어온 만학이 있고, 데지마는 사실 별로 완벽한 창살도 아니고, 그래서 쇼군 요시무네가 양서 수입 금지를 완화한 것을 정확히는 서양학문 연구 [활성화]라고 설명합니다.
이때부터를 난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모토오리 노리나가 등으로 국학이 한창 성숙되어가는 시점이기도 하죠. 이미 만학은 오래 전에 들어와 있고, 난학(이라 불리기 전이지만)은 데지마에서 솔솔 새고. 국학 성립 이전에 외래문화는 한창 들어와 있어요.
제가 난학이라고 쓴 것은 용어적으로 틀렸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갓본론 소릴 들을 이유는 안 된다고 보네요.
@수아로그 난학은 공, 사 교육으로 이미 전국에 확산되어 있고 이를 통해 배출된 초기 개항론자들의 숫자는 흑선 내항 이전에도 이미 그냥 무시하기엔 너무 많습니다. 물론 탄압을 받습니다만.
유리 제조라거나 종두법 시도, 대포 주조, 게베르 소총 복제 등등 이렇게 확산되어 있던 난학자들의 개항 전후의 업적들입니다.
죠슈벌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시다 쇼인의 스승 사쿠마 쇼잔은 유학을 배운 전통 지식인이지만 또한 난학자였습니다. 난학이 아무것도 안 했다고요? 난학은 이미 일본에 수용되어 사회 전체에 체화되어 있었습니다.
@수아로그 일본의 국수적인 시각에서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국학을 드높이고 자생적 개혁을 강조하려 난학에 대한 의도적인 폄훼가 심한데, 사실 개항 이전에 난학을 배운 수많은 이들이 퍼져 있었고 그들은 바로 유신지사들의 스승이자 친우이며 경쟁자이거나 아예 본인이 난학자죠.
@수아로그 참고로 사쿠마 쇼잔은,
「동양도덕, 서양예술」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주인공이기도 한 쇼잔의 사상은 「궁극적인 양이를 위한 개국」에 모아져 있었다. 주자학자이기도 한 쇼잔이 양이의 방편으로서 정신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합리주의를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서양학문(난학)을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며 이 해방론, [양이를 위한 개국] 사상이 요시다 쇼인을 거쳐 타카스기 신사쿠, 기도 다카요시,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등의 죠슈벌 양이지사들에게로 이어지죠. 난학은 그를 위한 양이지사들의 수단으로, 당시 선진 병학을 바탕으로 포대 축조나 총대 교련 따위를 한 사람들, 다들 난학을 배운 이죠.
@수아로그 http://dvdprime.donga.com/g5/bbs/board.php?bo_table=comm&wr_id=9276995
위 글에서 보듯 난학이 공통분모가 되어 [양이를 위한 개국]에 공감해 삿쵸동맹으로 이어집니다.
@수아로그 ;;;; 유학이 도쿠가와 막부 성립 이전에도 존재했다구요?? 대체 어디에요? 하극상이 만연하던 전국시대에 유학이 일본에 존재하고 번성했단 말입니까? 일본 유학은 임진왜란을 겪어야 비로소 사상적 체계가 성립되는데요.
@인생의별빛 번성이 아니라 유학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는 건데,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요. 직접 말씀하신 대로 임진란을 거쳐서 이미 들어와 있는 상태에 이에야스가 국가이념으로 삼았지 애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는 건 임진란이 도쿠가와 막부 성립 이후에 있었다는 소리가 되는데요;;
@수아로그 앞에서 본인이 하신 말씀을 망각하지 말아주시죠. 분명 '근세 일본의 양대 학문'을 국학과 난학으로 정리하고 유학은 '그 이전에 들어와 있었으니 양대 학문이라 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죠. 근데 어쩝니까? 주자학은 가마쿠라 시대에 들어온 것이 사실이지만 주요 연구가들은 승려들이었거든요. 율령제가 붕괴하고 무가 통치가 시작되면서 지식인이라곤 승려밖에 남지 못한 일본에서, 불교 공부를 기본으로 하면서 취미삼아 주자학 읽는 걸 '그래도 일단은 들어와 있었지 않느냐'는 이유로 근세 일본의 사상사와 학문 체계 정리를 하는 도중에 언급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는 게 가능이나 합니까?
@수아로그 일본 유학, 특히 주자학의 출발점은 하야시 라잔이라고 봐야 하며, 좀 더 당겨 올려도 하야시 라잔의 스승인 후지와라 세이카까지밖에 못 올립니다. 그리고 후지와라 세이카는 다름아닌 강항과 깊은 교류를 맺었죠.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유학을 중흥시킨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일본 유학의 시작은 16세기 말기가 맞습니다. 그리고 에도 시대 막부의 가장 기초적인 통치체계로 자리잡고요. 따라서 근세 일본의 양대 학문이라고 하면 유학과 국학인 겁니다. 난학이요? 글쎄 나가사키 바깥에서 깊이 연구된 흔적이 있느냐고 몇 번이나 묻습니까 대체? 학문적 근거를 좀 주세요 제발.
@수아로그 아, 참고로 하야시 라잔은 후지와라 세이카의 천거로 도쿠가와 가문의 지남역을 맡은 게 1605년, 그의 나이 23세였습니다.
또한 후지와라 세이카 본인부터가 교토에서 승려였던 시절에 주자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니, 이것 역시 주자학만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집단은 없었다는 증거가 되죠. 당시에는 승려들이나 간신히 접할 수 있는 게 주자학이었습니다. 승려들 사이에서 명맥이나 남아 내려왔을 뿐이지 본격적인 사상적 체계가 성립되기 시작한 건 좋게 봐줘야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이고, 일반적으로는 에도 시대 극초반으로 봅니다.
@수아로그 50대의 한창 왕성히 활동할 나이의 유학자인 후지와라 세이카가, 도쿠가와의 관직 출사 요청을 거부하면서 20대의 새파란 젊은이를 "그래도 얘가 유학을 제일 잘합니다"라면서 쇼군에게 직접 천거할 정도라니, 하야시 라잔이 율곡 이이 수준의 세기급 천재였거나 아니면 일본 유학의 기틀이 그 정도로 미약했거나 둘 중 하나겠죠.
이 정도로까지 증명해놨는데도 유학을 배제하고 난학을 국학과 대등하게 놓으시렵니까? 국학은 유학 상대하느라 벅차서 난학 따위에게 눈길이라도 제대로 갔을까 모르겠네요. 애초에 난학이 최초로 체계화된 것이 19세기 초라는 건 위에서 북마크 님이 열심히 설명해주시기도 했고요.
@수아로그 그리고 주자학자 쇼잔이 정신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합리주의를 내세울 수 있었던 건 그게 난학 덕분이 아니라 애초에 일본 유학의 특성 자체가 그랬습니다. 제가 언급한 '일본식 화이론' 자체가 국학이 아니라 유학 영역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한 이론입니다. 근세에 접어들어 동아시아 각국이 중세적인 세계관을 벗어던지고 내셔널리즘을 성숙시키는 과정에서 일본 유학은, 일본만의 '혼'을 강조한 국학과는 달리 정치체제, 경제력, 군사력 등 현실적인 관점에서 일본 문명의 특수성을 강조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 과정에서 세계지리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인식이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인생의별빛 언제 난학을 국학과 대등하게 놓았다는 건가요;; 양대 학문이라 함은 에도 시대에 [탄생]했기에 나오는 용어라고 앞서 설명드렸는데 말입니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941
유학은 관학으로 둘 보다 당연히 위에 위치해 있죠. 게다가 그 국학, 실상 도막 과정에선 어그로나 끌었고 쇼잔 문하들로 대표되는 주자학+난학 콤비들의 양이를 위한 개국론이 메이지 신정부를 탄생시켰는데요. 국학에 대해서 위 기사는 아예 각색역사라고 비판할 정도죠.
@수아로그 일본 유학이 조선 유학과 달리 중국문명과 일본문명을 각각 상대화할 수 있었던 과정에서 네덜란드발 정보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던 것은 분명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난학'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고, 애초에 일본 유학은 일본문명이 다른 문명들과 '대등하다'면서 각 문명마다 장단점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을 뿐이니 결국 유학의 문명론적 틀을 벗어나지는 않았던 겁니다. 난학이 '담론을 형성하는 데에 기여'했느냐고 묻는다면 더더욱 아닙니다.
따라서 조금 무리하자면 일본 유학의 발전 과정과 세계지리 사이의 관계를 언급해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국학과 난학은 정말 아닙니다.
@수아로그 주자학+난학 콤비라니 코미디네요. 아이즈를 중심으로 하는 좌막파에서 주자학의 세력이 강했고, 정작 유신을 이끈 도막파 웅번들 사이에선 양명학의 세력이 강했습니다. 뭐, '세력이 강했다'라고 말하기에는 학문 간 구별이 뚜렷하지 않으니 어렵지만, 오늘날 연구 결과로는 대체로 양명학적 '관점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수아로그 그리고 이제 신문사 링크는 그만 좀 올려주시면 안될까요. 어떻게 모든 근거가 다 신문사 링크에서 나옵니까?
@수아로그 애초에 막부가 중흥시킨 것이 주자학입니다. 쇼군을 왕과 같은 위치에 대입시키고 상하 간의 강력한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데에는 주자학이 가장 좋았고, 따라서 막말 시점에 있어서도 막부 중심의 정치를 유지시키려는 보수파는 주자학에 기울어있죠. 반면에 인간들 사이의 기질 자체에는 선천적인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 양명학이야말로 막부와 대립하는 도자마 다이묘들의 입맛에 더 들어맞는 겁니다.
양이론 자체는 주자학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을지 몰라도(애초에 쇄국을 처음 시작한 게 주자학을 채택한 막부였으니까), 좌막이냐 도막이냐의 갈래에 있어서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갈래가 뻔하죠.
@인생의별빛 [존왕]양이부터가 천황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건데, 좌막과 도막 구분에 단순하게 주자학과 양명학을 내세우시다뇨;;
서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얼마든지 다양하게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난학이 [공기]포지션으로 취급될 이유가 없다는 시각을 견지하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엉뚱한 트집을 잡으려 든다는 느낌은 과한 걸까요?
그리고, 신문사 링크를 걸지 말라고요? 이건 [해당 시각]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있음을 [증명]한 겁니다.
물론 이건 주류적인 시각이 아닌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측면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난학자들 없었으면 메이지유신도 실패했을듯
존왕양이의 선봉에 섰던 쵸슈는 서구연합함대에게 공격 받기 전에 이미 5명의 젊은이들을 막부 몰래 영국으로 파견합니다. 양이를 하려면 서구를 알아야 한다면서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 5명을 영국 런던에 유학보냅니다. 이게 1863년. 이런 유연한 사고는 난가쿠의 전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죠
일본이 근대화를 성공한이유는 자체 재정도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막말에 이르면 조선재정의 13배의 달했던게 에도막부입니다. 동시기 일본에서 터지는 잇키와 조선에서 일어나던 민란과 도적떼 창궐만하더라도 두국가는 농민층에게 누가 더 낫다고 할수없을정도로 막장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정부의 경우 재정수입이 열악했는데. (실제로 세율도 낮음) 삼정의 문란으로 표현되는 지방관들과 아전 그리고 양반들에 탐학으로 그 약소한 조세수입마저도 줄줄이 새어나가기 바빳습니다. 조선의 세율이 동북아 삼국중 낮았으나 온갖잡세와 부정부패로 사실상 동급수준입니다
기본 인구 차이랑 세율 차이 때문에 둘 다 잡세와 부정부패가 없다고 가정할때 이미 1:8 정도로 세수부터 차이가 나긴 합니다. -_-;;
@aaaa aaa 아니 그것보다도 막부의 제민지배력이 더강했습니다. 경제사적으로 보면일본이 동시기 청과 조선보다도 더 강력했습니다
@대륙 그것도 사실이죠. 도요토미 시절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의 강력한 전제 통치. 중세 유럽의 농노제와 비견해야 할 수준이죠. 조선의 오가작통법 따위는 갖다대지도 못할 수준;;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유신 초기부터 근대화 과정에서 그렇게 많은 빚을 졌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조선측에서도 이걸 보고 저렇게 운영해서야 되겠냐는 반응을 보인 걸로 알고 있구요. 정말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았으면 파산했을 거라던데 말입니다.
@그레친 근대화에는 돈이 많이 드는일입니다. 영국에게서 차관도 빌렸죠. 문젠 돈을 꾸는것도 갚을 능력이 있는지 판단하고 꿔주지 아무한테나 대출안해줍니다 .그리고 청일전쟁에서 전비로 드는돈이지 청나라도 일본에게 져서 결국 파산위기까지 봉착했죠 그리고 초창기의 산업육성이 초기자본이 상당히 소요되나 그것이 뒤에 흑자로 전환할수 있는겁니다.조선만 하더라도 농업생산량이 일본벼의 도입과 일본지주들의 도래. 그리고 주 수입품인 면직물가격이 낮아지면서 자체적인 부농들이 탄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