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기열전(名妓列傳) 장성기생 노화(蘆花)
전라도 장성 땅에 노화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빼어난 미모에다, 머리가 명석하고 아리따운
소녀였지만, 조실부모하고 고아가 되어 어느
퇴기의 양녀가 되었다가 기생이 되었다.
예전에는 대개 늙은 기생들이 불쌍한 고아를
양녀로 들여 돌보는 척하고 기생을 만들지만
실제로는 남편도 자식도 없는 자신을 위해서
일종의 노후대책이기도 하였다.
‘蘆嶺山의 꽃’ 이라고 불리는 노화는 가무와
시문만이 아니라 만사에 민첩하고 능통하여
기생이 된 지 몇 해도 지나지 않아 일약 명기
(名妓)가 되어 있었다.
지방의 토호 한량은 물론이고, 수령방백까지
노화를 탐하여 재물을 앞세우서, 물량공세를
폈으며 사내다운 사내는 하나 없고 하나같이
꽃만 탐하는 탐화봉접들이었다.
그 속에서 고뇌하던 노화는 어차피 일부종사
할수 없는 기생일 바에는 차라리 허랑방탕한
저들의 재물이나 취해서, 불쌍한 중생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노화의 대담한 행동에는
아무런 거리낌 조차 없었으며 재물만 있으면
누구라도 노화를 취할수 있었고 재물의 양에
따라 노화의 접대는 품격이 달랐다.
그리하여 사내들은 더욱 많은 재물을 다투어
가져왔고 노화는 재물을 모두 거두어 고을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노화의 인기는 날로 높아가고 사내들 재물은
날로 바닥이 났으며 한량들이야 자기 재물을
탕진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랴마는 수령들은
고을의 국고를 축냈으니 그게 문제였다.
장성 군수가 연거푸 세 명씩이나 봉고파직을
당했으며 그것도 한 계집에게 빠져서 국고를
탕진한 죄였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고 마침내
조정에서 논의가 벌어졌다.
수령들이야 합당한 벌을 받았지만, 노화라는
계집을 그냥 가만두면 장차 장성고을이 망할
판이니 노화를 한양으로 잡아 올려서 당장에
능지처참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임금 성종이 묵묵히 듣고 있다가 노화의
행실은 밉지만, 처형할 죄목이 없다며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벌할 수가 없을 터 살려주면
한양까지 오염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조정 대신들 의견은 법과 절차를 따라
처형하기 보다는, 장성 땅으로 어사를 보내어
장형(곤장)으로 다스리다가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쪽으로 뜻이 모였다
그리하여 그동안 장성의 국고 탕진의 실상을
조사해 온 사헌부 지평 노계명이 암행어사로
발탁이 되어서 성종의 어명을 받들고 전라도
장성으로 내려가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몇달 전 장성에 내려갔다가 노화에게
매혹된 바가 있는 이조좌랑 홍만춘이 아무도
모르게 이 소식을 노화에게 전했다.
노화의 양모는 이제 노화가 죽게 되었다면서
울고불고 난리를 떨었지만, 노화는 태연하게
내가 수청든 죄밖에 더 있느냐면서 침착하게
대비책을 강구하고 있는듯 하였다.
한편 평민으로 변장한 어사 노계명은 장성에
내려가는 도중에 충청도 일대의 민정을 살핀
후에, 마지막으로 장성으로 출두하기 위하여
각양각색으로 변장한 부하들에게
출두일시와 장소를 알려주고 각기 흩어져서
출발하기로 하였으며 장성을 가려면 갈재를
넘어야 하고, 외길 갈재를 넘다가 벌써 날이
저물어 마침 주막이 있어서 들어갔다.
열려 있는 대문을 들어서니 소복으로 단장한
얼굴이 아리따운 여인이 대청에 홀로 앉아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첫눈에 보아도 모습이
너무나 매혹적인 절세가인이었다.
노계명이 하룻밤 재워주기를 청하려 하는데
여인은 방안으로 들어가고 총각이 나오더니
주막이기는 하지만 오늘은 절대로 안된다고
하면서 오늘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주인 내외가 청상과부 딸만 홀로두고
초상집으로 갔다고 했으며 주막에 혼자 있는
아름다운 청상 과부를 보고 호방한 풍류남아
노계명의 마음에 갈등이 생겼다.
노계명은 어명을 받고 불의를 척결하러 가는
몸으로 여색을 탐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어찌 놓칠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갈등했다.
"내일 일만 추상같이 처리하면 되지."
자기합리화 쪽으로 마음을 기울인 암행어사
노계명은 총각을 달래주고 여인을 설득하여
술자리를 같이하는데 성공했으나 그 다음의
일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여인은 처음 본 분을 어떻게 믿을수 있느냐
했고 노계명은 굳은 맹세를 글로 써 주겠다
했으며, 한참을 망설인 여인은 글을 모르니
팔뚝에 이름을 새겨달라고 하였다.
글을 모른다는 말에, 미소를 지은 노계명은
여인의 팔뚝에 먹물로 설부녀(흰눈과 같은
피부의 여인)라고 쓰고 마르기 전에 바늘을
찔러 글자를 새기라고 하였다.
여인은 설부녀라는 이름도 세상에 있느냐고
화를 버럭내면서 일어서려고 했으며 당황한
노계명이 어르고 달래서 노계명이란 석자를
써주고 나서야 목적을 이루었다.
그렇게도 애를 태우던 노화의 태도가 요염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마련해준
것이라면서, 십장생 병풍을 가져다 둘러치고
그 안에 원앙금침을 펼치는 것이었다.
갈재 주막에서 아리따운 여인과 함께 생각지
못한 호강을 누린 노계명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장성고을 관아에
나타나 암행어사 출두를 명하였다.
불문곡직하고, 장성의 요화란 기생 노화부터
잡아들여 형틀에 묵었으며 자기 죄는 자기가
알 것이고 백번죽어 마땅하니 단번에 물고를
내라고 하면서 불호령을 내렸다.
집장사령 (執杖使令)이 곤장을 높이 쳐들고
막 내리치려는데 노화가 큰소리로 야무지게
외치면서 소첩은 기생으로서 수청든 죄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설사 그것이 중죄라고 해도 문초없이 백성을
죽이는 법이 경제육전 어느 조목에 있느냐고
하면서, 어사는 마땅히 치죄(治罪)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당당하게 아뢰었다.
경제육전을 들어 대면서 허를 찌르는 노화의
항변에 어사는 소스라치게 놀랐으며 어쩔 수
없이 지필묵을 내려서 자복서를 쓰라고 하자
노화는 능숙한 필치로 시를 한수를 거침없이
적었다.
蘆兒臂上刻誰名 墨入雪膚字字明
寧使川原江水盡 此心終不負初盟
노화의 팔에 뉘 이름 새겼는가?
고운 살에 먹이 배어 글자도 선명하다.
차라리 천원강이 말라버릴지언정
굳게 맺은 그 맹세 변할 줄이 있으랴
노계명 어사는 또 한번 소스라치게 놀랐으며
갈재주막에서, 함께 정을 나누었던 아리따운
여인이 기생 노화일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모든 것이 기생 노화의 치밀한 계략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지만, 언제나 당당하였던
호걸남아 노계명도 이번 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 같아서 무척 당황하였다.
노화를 죽이자니 대장부 위신이 말이 아니고
살리자니 어명을 어긴 죄를 어찌한단 말인가
망설이던 노계명 어사가 드디어 영을 내린다.
"저 여인을 즉시 방면하여라. 사유는 오늘로
상경하여 대왕께 직접 품고(稟告)하겠노라."
천하의 쾌남아 노계명다운 결단이었고, 바로
상경한 노계명 어사는 임금에게 어명을 어긴
죄로 석고대죄를 하고 궐하에 부복을 했으며
임금이 노계명 어사에게 말했다.
"충직한 노지평이 명을 어겼으면 필시 사유가
있을 것이니 자세히 아뢰도록 하여라."
노계명이 성종 임금에게 자초지종을 솔직하게
모두 아뢰자 호탕한 임금 성종이 파안대소하며
자신의 무릎을 치면서 노계명에게 말했다.
"과연 노지평이로다. 어명을 어긴 죄 벌을 주어
마땅하나 불미한 일을 숨김없이 모두 아뢰었고
장부의 결단이 명쾌했으니 어찌 벌하겠는가.
사람을 논할때는 주색은 따지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고 하면서 그만한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가 있는 것이므로 전라감사에게 명하여 사후
처리를 잘 하도록 하리라."
그 신하에 그 임금이었고, 며칠 후에 노지평을
또다시 부른 성종은 어사의 이름을 팔에 새긴
기생을 어찌 장성에 그대로 두겠는가 하고는
기적에서 빼라고 하면서 한마디 하였다.
"이제부터 경이 알아서 하여라."
성종의 성은에 감복한 노계명이 노화를 즉시
한양으로 불러 부실을 삼고 평생을 함께했다.
'鄭飛石 명기열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