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누가 다스리건 무슨 상관이랴
산장을 열면 낙엽 지는 소리가 들린다. 가을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것은 짧게 머물다 떠나기 때문이다.
사랑도 유한성 때문에 애절한 것이고, 젊음도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빛나는 것이다.
인생 또한 단 한 번의 생애이기 때문에 소중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영원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므로 삶을 아름답게 사는 방법은
그 어떤 일이든 집착하지 않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떠나야 할 때 망설이지 않는 법문을 가을에게 다시 배운다.
가을 아침에 옛글을 읽다가 다음의 내용에 눈과 귀가 열린다.
해가 뜨면 밖에 나가 일을 하고 해가 지면 방에 들어가 쉬고 우물 파서 물마시고 밭을 갈아 먹고 사니
누가 나라를 다스리건 그게 무슨 상관이랴.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 제대로 된다면 서민들의 입에서 이런 노래가 흘러나와야 한다.
각자의 생업에 충실하면서 현재의 생활수준에 만족할 수 있다면 어느 백성이 정치하는 이를 원망하고 지탄하겠는가.
태평성시가 무엇인가. 서민들이 생활고 걱정을 하지 않는 세상을 말한다.
인평불어 수평불류.
사람 사는 세상이 평등하면 원망의 말이 적고, 수면이 잔잔하면 한쪽으로 물길이 쏠리지 않는 법이다.
이러쿵저러쿵 백성들의 불만이 많으면 난세다. 올바른 정치가 행해지면 서민들의 일상생활에 정치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온전한 정치라면 무엇보다 서민들을 괴롭히거나 불편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산골 촌로의 입에서 나라를 향한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고 장터의 아주머니들 표정이 밝지 않으면 잘못된 정치를 하는 것이다.
올바른 정치는 서민들의 입에 정치 이야기가 더 이상 오르내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
서민들이 나라 걱정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라는 뜻이다.
당 태종의 치적을 기록한 『정관정요』에 이런 대목이 실려 있다.
태종은 어느 날 가까운 신하 위증을 불러 물었다.
“어떤 임금을 가리켜 밝은 군주라 하고, 또 어떤 임금을 어리석은 군주라 하는가?”
위증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밝은 군주란 각계각층의 여론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임금이고, 어리석은 군주란 한쪽 말만 듣는 임금입니다.”
충직한 신하인 위증은 어느 날 무슨 생각에서인지 태종에게 이런 고자질을 한다. “백성들 중에 폐하를 비방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러자 태종은 태연하게 말한다.
“나에게 덕이 있어 비방을 듣는다면 조금도 언짢을 게 없다. 그러나 덕이 없으면서 칭찬을 듣는다면 도리어 그게 탈이 아니겠느냐?”
국가의 지도자나 정치인들이 칭찬에 중심을 잃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덕이 없으면서 달콤한 소리만 듣기를 원한다면
민심을 알 수도 없고 민심을 얻을 수도 없다. 민심을 역행하면 결국은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기 그릇이 있다. 그 그릇이 차면 넘치게 마련이다.
자기 그릇을 모르고 과욕을 부리다가 낭패를 자초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치는 개인도 그렇지만 집단도 예외는 아니다.
위정자들은 전체의 흠을 살피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때그때의 위기만 넘기면 된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그런 미봉책은 커다란 흐름 앞에 넘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흐름은 역사의 순리면서 인과의 원리다.
역사는 항상 정의와 진실 쪽에 서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스스로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역사의 평가는 준엄하고 무섭다는 것을 살아오면서 거듭거듭 목격했기 때문이다.
출처 ; 현진 스님 / 산 아래 작은 암자에는 작은 스님이 산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