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의 집에 갔더니 기우뚱한 식탁 다리 밑에 책을 받쳐놓았다
주인 내외는 시집의 임자가 나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린 게 변변찮아 어떡하느냐며
불편한 내 표정에 엉뚱한 눈치를 보느라 애면글면
……시집이 이토록 쓸모도 있구나
책꽂이에 얌전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기보단
한쪽 다리가 성치 않은 식탁 아래로 내려가서
국그릇 넘치지 않게 평형을 잡아주는,
오래전에 잊힌 시집
이제는 표지색도 다 닳아 지워져가는 그것이
안주인 된장국마냥 뜨끈하게 상한 속을 달래주는 것이었다
-『중앙SUNDAY/시(詩)와 사색』2024.03.23 -
책을 사면 보통 바로 읽지 않는다. 표지와 목차 그리고 책의 처음 몇 페이지를 가볍게 훑어보고는 책장이나 선반 위에 두고 짧으면 며칠, 길면 몇 달을 묵혀둔다. 그렇게 시간이 꽤 흐르면 그 책이 나를 흘겨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쌓인 먼지를 불어내고 그제야 책을 집는다.
이러한 유예의 시간을 ‘게으름’이라 하기보다는 ‘기다림’이라고 말하고 싶다. 책의 좋은 내용과 아름다운 문장을 만나면 기다린 만큼 더 기쁨이 커진다. 동시에 왜 이제야 이 책을 펼친 것일까 자책하기도 한다.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는 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새봄, 나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더 자세히 펼쳐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