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푸른 잣나무, 동선 스님 1
아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봄을 알리는 것이리라. 이렇게 비라도 오는 날은 공연히 마음이 울적해지고 어린 소년 같은 여린 심정이 되어 사람이 마냥 그리워진다. 그 어딘가에 있을 그리운 벗을 찾아 하염없이 길을 떠나고 싶다. 이런 날 찾아갈 수 있는 벗이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다행한 일이며 즐거운 일인가? 나는 그리운 그 마음 자락을 어쩌지 못하고 아침 길을 나섰다. 저 멀기도 한 태백산 깊은 골짝에 농사지으며 사신다는 동선 스님은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동선 스님은 나보다 세속 나이로 보나 출가 승랍으로 보나 십여 년은 더 연장자이다. 그래서 나는 스님을 알게 되어 아주 친숙해지면서부터는 세속의 작은 형님 같이 여겨 (실제로 속세 나의 작은 형님 나이와 비슷하다) 존경했으며, 그 분의 굳건하고 초지일관하는
수행정신에 일말의 부러움까지 보내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어느 한 때는 귀찮아 할 정도까지 이 곳 저곳을 따라도 다녔다.
그러던 것이 근자 몇 년 동안 서울이란 곳에서 이런저런 볼 일을 많이 보게 되고 내 나름으로는 불교계의 병폐라든지 인간이 살아가는 문제를 고민도 하고 뜻 맞는 스님들과 모임도 가지느라 딴에는 무척 바빠하며 살았다. 그래서 스님의 안부를 진작부터 들어 알고 있었지만 찾아뵙지는 못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 순전히 봄비 탓으로 아무 생각없이 길을 나섰다.
사람이 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 수행자의 삶이라 하는 것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런 것은 우리가 평소 늘 생각해 오던 것이 아니던가? 한데 이번에 눈밭에서도 늘 푸른 잣나무 같은 동선 스님의 사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자꾸만 오늘의 우리 승단의 행태와 종단의 분교가 겹쳐서 떠오른다. 그리고 나와 우리들의 삶을 새삼스럽게 돌아보게 된다. 스님의 청결한 삶이 우리들의 삶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거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옛 사람의 말에는 겨울의 북풍한설이 몰아친 이후에야 소나무의 푸른 기상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오늘날 풍진 세상, 혼탁한 세상이 되고 보니 스님의 삶은 더욱 푸르고 굳센 잣나무 같이만 여겨진다.
스님이 사시는 곳은 강원도 정선 땅 구절리라는 곳이다. 이름이 말해 주듯이 첩첩산중이며 남한 땅 제일의 오지라고 한다. 청량리역에서 10시 통일호 열차편으로 중산까지. 증산에서 간선 열차를 갈아타고 구절리까지 가니 더 이상 앞으로 나아 갈래야 갈 수도 없는 종착지다. 마을 초등학교 앞에 있는 가게에서 스님이 게시는 고비덕(고비는 고사리의 강원도 말) 가는 길을 물었다. 그랬더니 가게 주인 남자 한 쪽 구석자리 난로가에서 술을 마시던 마을 청년들 대여섯이 함께 아주 반가워한다. 흡사 내가 자신들을 찾아온 손님이나 되는 듯이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가? 이것으로 이 마을에서 동선 스님이 얼마나 존경을 받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가게에서 무엇인가 스님께 사다줄 물건을 골랐더니, 주인과 청년들이 스님께 무엇이 필요하며 식성이 어떠한 것까지를 소상히 알고서는 가르쳐 준다. 어느덧 동선 스님은 나보다 또 우리들 스님보다 이곳 농사꾼들과 더 친숙해 있었다.
사실 동선 스님 스스로도 말하길 이곳 마을 노인당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친구이며 이웃이라고 했다. 가끔씩 저녁이면 노인당에 놀러도 가고 잠을 자고 오기도 한단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수더분한 인간미라든지 심성이 착함과 넓은 아량에서 늘 배우고 있다고 했다. 승과 속, 출가와 재가의 틀을 벗어나고 순수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으로 여겨진다.
동선 스님의 토굴이 있는 고비덕까지는 구절리에서도 산길 솔 숲 사이를 한 시간 남짓 걸어야만 했다. 그 곳은 원래 화전민이나 살았음직한 그야말로 강원도 전통의 산골벽지 마을이다. 마을이라야 3-4백 미터 간격으로 대여섯 채의 집들이 있는 정도다. 그것도 이젠 모두들 떠나고 빈 집들이다. 그 빈 집 가운데 하나를 스님의 임의대로 빌려서 쓰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까지 아름답고 좋은 곳을 버려두고 저들은 또 어느 곳을 찾아 떠났을까? 아마 도회지의 어느 모퉁이에서 고달픈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농사꾼이 농촌에서 살 수 없도록 하는 오늘의 우리 현실이 못내 원망스럽기만 하다. 이렇게 모두가 살 수 없어 떠나고 없는 빈 산골 마을을 동선 스님은 또 혼자서 지키고 있는 것이다. 아랫마을에서 만났던 청년들이 “스님이 이 곳에 와서 농군이 된 지 벌써 4-5년이지요. 이젠 일하시는 것을 보면 우리도 겁날 정도입니다”라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스님이 살고 있는 집은 산골 농가로서는 썩 잘 지어진 것이다. 목재도 탄탄하고 가옥구조도 쓰임새가 매우 좋게 되어 있다. 마루 기둥에 주렴 대신 붙여 놓았을 글씨가 풍화에 닳아 없어지고 희미한 흔적만이 남았는데 그 흔적의 글씨가 예사롭지 않다. 내 느낌을 말했더니 동선 스님은 이 곳이 옛 유배문화지여서 학식 높은 농사꾼들이 많았다고 한다. 앞 산의 이름도 공자의 노나라와 맹자의 추나라 이름을 합해서 노추산이라고 한단다. 차를 타고 지나면서 일곱 명의 현인이 살았다는 뜻의 거칠현동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도 보았다. 하여튼 빈 집들이 썩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나라에서 농사꾼을 집으로 보존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일어났다. 그렇게라도 보존하지 않으면 수년 내에 저 빈 집들은 다 없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재가 어찌 고대광실 화려하게 지어진 큰 집만이겠는가? 오히려 저 벽지 외진 곳 농민의 집이 더 문화적 가치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잘 살수록 옛 우리의 가난한 삶의 흔적을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스님의 토굴집은 뒤뜰에 대추나무와 오얏나무가 있고 콸콸 솟아나오는 우물이 있다. 산골 주거환경이 얼마나 운치 있고 인간적인가‘하는 것까지 보여주고 있다.
도를 닦는 수행이란 무엇인가? 바로 자기 삶을 진실하게 가꾸는 일이 아니던가? 밖으로 화려한 것만을 찾아 헤매다보면 속은 텅 빈 강정 같이 되어서 허풍쟁이가 되고 진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 곳에서는 모든 것이 진실하게만 보인다. 어느 것 하나도 스님이 직접 손으로 하지 않은 것이 없다. 부엌과 나무광에 가득 채워진 참나무 장작이나 김치광의 겨울 밑반찬까지. 그리고 식사 후에 마시는 당귀차까지 모두가 봄부터 가을까지 노력의 땀으로 수확한 것들이었다. 심지어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저녁연기의 평화로움까지 온전한 스님의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일까? 냉수 한 사발 당귀차 한 잔까지도 시중의 그 맛이 아니다. 모두가 입에 달고 꿀맛 같다. 스님의 말로는 토질이 좋아서 어떤 농사를 지어도 다 맛이 있다고 한다. 김치는 겨우 고춧가루 정도를 양념했을 뿐인데도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저녁 공양 후 많은 이야기를 했다. 옛날 흘러간 추억들이며 도반들의 안부며 점차 못해져만 가는 승단의 수행풍토며, 세상 인심의 변화 등을 이야기했다. 스님은 “모두 너무 잘나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에 그렇다. 좀 못나게 살면 될텐데,,,“ 하셨다. 그리고 ”가끔 여기도 도반들이며 아는 스님들이 더러 찾아오지. 내가 혼자 농사짓고 문화 혜택도 없이 산다고 하니까. 어떻게 고생하고 사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한번씩 와서 보는 것이지. 와서 보고는 모두가 참 멋있게 산다고 부러워들 해. 그러면 나는 그 속을 뻔하게 알지만 그래도 여기서 같이 살자고 권해보지. 저쪽에 빈 집들이 많이 있으니까. 땅도 노는 땅이 많고,,, 하지만 부러워는 하면서도 와서 살지는 못하는 거야. 왜냐하면 돈맛을 못 버리고 잘나고 싶은 생각들을 못 버리니까. 이런 곳은 마음의 고향으로만 남겨 두는 것이야“라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그 잘나고 싶어하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모두가 돈을 벌고 출세를 하고 싶어하는 마음의 병 때문에 수행자는 올바른 수행을 못하고 있고 재가인들은 재가인 대로 온전한 인간의 삶을 못 살고 있다. 인간이 잘 산다고 하는 것이 돈을 벌고 명예를 얻는 일이 아닐 터인데 우리들은 삶의 귀중함을 그 하찮은 일들에만 온통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감히 스님의 삶 앞에 멋있다는 말이나 아름답다는 말을 함부로 못하겠다. 그 말들이 스님을 얼마나 욕되게 하는 것인가? 스님은 멋이나 운치를 위해 이런 벽지에서 뼛골이 빠지는 고생을 즐거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치열한 삼과 삶의 진실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보다 겸허한 자세로 스님의 삶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땅의 농촌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땅을 자본화하고 삶을 돈벌이의 도구로 전락시켰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불행해지고 있지는 않는 것일까?
아직도 고비덕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 산에는 온통 눈뿐이었다. 하지만 그 곳에도 땅은 풀리고 봄은 올 것이다. 그러면 스님은 또 농삿일에 바빠지고 땀을 흘려 일해야 할 것이다. 고비덕을 다녀온 뒤 나는 며칠 동안 몸살을 앓아야 했다. 실로 오랜만에 인간이 사는 모습을 보고 온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아직도 눈만 감으면 그 곳 아름다운 풍관이 눈에 보이고 김치 맛이며 물맛이 입에 남아 있다. 그 뿐인가. 귀를 맑게 하는 스님의 이야기들이 생생하다. 이 뒷맛의 여운이 얼마나 갈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가끔씩이라도 스님을 찾아뵙기로 마음에 다짐해 둔다.
출처 ; 그 산에 스님이 있었네 / 효림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