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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7일 연중 제19주일
제1독서 : 지혜 18,6-9
제2독서 : 히브 11,1-2.8-19
복 음 : 루카 12,32-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2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
33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34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41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42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43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5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46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48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재물과 지위는 이웃을 위한 것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은 지극히 높고 엄하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감히 부를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율법을 주고, 그것을 철저히 지킬 것을 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율법 준수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하느님이 엄하게 벌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인권을 소중히 생각하는 민주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과거 로마제국과 중세 봉건사회에서 통용되던 신앙언어를
절대적 언어로 생각하고 하느님을 높고, 두려운 분으로 상상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분이 주신 계명을 잘 지키고, 그분에게 제물을 잘 바쳐서,
그분으로부터 은총을 얻어 우리가 잘 살 수 있다고 상상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직도 그렇게만 믿고 있다면, 오늘 복음의 말씀,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는 말씀은
하나의 허사, 곧 의미 없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대조되는,
엄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베푸셨고, 자녀가 부모로부터 인간다운 삶을 배워서 사람이 되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을 배우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호세아 예언서는 하느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11,1)
자상하게 우리를 위해 배려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초기 신앙공동체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는,
우리의 생명을 베푸신 분, 우리를 자상하게 돌보시는 분이라는 고백과 더불어,
우리가 그분의 베푸심과 돌보심을 배워서 실천하며 살겠다는 결의를 담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이미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이 끝난 뒤에 우리가 갈 내세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현세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내세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함께 계심을 받아들여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있습니다.
하느님을 높고, 두려운 분이라 믿으면,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또 불안하게 하는 하느님일 것입니다.
군복무를 하는 사람에게 군 지휘관은 높고 두렵습니다.
판결을 받기 위해 법정에 선 사람에게 재판장은 높고 두렵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예수님은 그분을 두려운 분이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당신의 나라를 기꺼이 주는 분이라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에 대한 그 시대 유대인들의 편견을 넘어 그들이 하느님을 올바로 체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으면,
우리는 그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불러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분이지만,
우리가 그분이 하시는 일을 배워 실현하며 살 때, 우리 삶의 원천으로 확인되는 분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하면서 된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자기가 가진 것으로 서열이 정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가 가진 것을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신 것이라 생각하며,
그것을 자기 주변에 베풀어서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체험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모습입니다. 종은 주인을 주목하고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에게 주목하고 그분이 가르친 하느님의 일, 곧 섬김을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이 일을 맡긴 관리인에다 신앙인을 비유하면서, 하느님은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재물이나 지위를 얻으면, 그것을 자기에게 주어진 특권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웃 앞에 우월감을 가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질서에서는 다릅니다.
재물과 지위는 그것을 가진 사람이 마음껏 누리고 행세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인은 하느님이 자기에게 베푸셨기에
다른 형제자매들을 위해 자기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물은 이웃을 위해 베풀어야 하고, 지위는 이웃을 위해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이 아버지이신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도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하느님과 교섭하여 자기 한 사람 잘될 길을 찾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녀 된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많이 바치는 자에게 축복해 주는 이 세상의 탐관오리가 아닙니다.
공양미 삼백 석을 받고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해준 심청전의 용왕도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베풀 듯이, 대가 없이 당신의 나라를 기꺼이 주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인과응보의 원리를 따라 베풀지 않습니다.
성공한 자녀를 사랑하고 실패한 자녀를 소홀히 하지도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 모두를 사랑하고 돌보아 주며, 자녀 모두가 훌륭히 살 것을 원합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모두 당신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아서, 은혜로우신 당신의 생명을 살 것을 원하십니다.
자녀는 부모의 생명을 연장하여 삽니다. 부모의 모습을 역사 안에 지속시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역사 안에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실현합니다.
가진 것을 이웃에게 베풀면서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신앙인은 ‘기꺼이 베푸시는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기에,
그분의 베푸심을 당당하게 실천하면서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과 그분의 질서가 자기 주변에 실현되는 사실을 기뻐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은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방금 흥겹게 노래한 ‘복되다, 주께서 당신 기업으로 뽑으신 백성이여!’ 화답송 후렴이
바로 주님 뜻에 따라 충실하고 슬기롭게 산 이들을 지칭합니다.
어제 오전 잠시 침을 맞으러 춘천에 갔다가 뜻밖에 한 가족을 만났습니다.
거의 25년 동안 알고 지내는 가족인데 거의 만나지 못했다가 어제 모처럼 만났습니다.
서울 생활을 잡고 부부와 큰 딸, 그리고 장애 아이 작은 딸의 4식구가
시골 산골에 묻혀 13년째 생활하고 있는 가족입니다. 놀라운 것은 가족의 분위기입니다.
전혀 어둡고 무겁고 우울한 침체된 분위기가 아녔습니다.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 결 같이 밝고 명랑하고 활기 있어 보이는 모습이 정말 좋았습니다.
“아, 은총으로 살아가는 가족이구나!”
찬탄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저희 수도원 역시 수도자들이 잘나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순전히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제 주변에도 은총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바로 이 은총으로 살아가는 강원도 산골의 4식구의 삶의 비결을 발견했습니다.
장애아에 기울인 가족의 전폭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장애 딸아이의 이름은 은혜恩惠 마르셀리나입니다.
나이 30이 거의 가까워지기 까지 가족이 쏟은 사랑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대로 은혜는 가족 일치의 중심이었고 은혜 이름 그대로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가족임을 그 밝고 선善한 분위기에 즉시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은혜의 빛’입니다.
말 그대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 칭찬받은 충실하고 슬기롭게 살아가는 종들 같은 가족입니다.
과연 이 어둡고 혼란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늘의 별처럼 은혜의 빛을 발하며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그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믿음으로써 살아가십시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사실 옛 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아니 어찌 옛 사람들뿐이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 역시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자산 중의 자산이 믿음이요 신뢰입니다.
불신불립이라 믿음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요 설 수도 없습니다.
이 회색 빛 절망의 시대에 믿음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힘 중의 힘이 믿음의 힘입니다. 믿음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끊임없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공급되는 믿음의 힘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결국 하루하루 은총으로,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겸손의 자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 홀로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희망하기에 항구한 믿음입니다.
사랑과 희망이 하나로 녹아있는 믿음입니다.
오늘 1독서 지혜서의 저자는 이집트 탈출의 하느님 위업을 상기시키며 믿음을 자극합니다.
그대로 믿음의 고백입니다.
‘과연 당신께서는 저희의 적들을 처벌하신 그 방법으로,
저희를 당신께 부르시고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믿음의 고백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저자의 믿음의 고백은 얼마나 웅장한지요. 장강의 흐름 같은 믿음의 고백입니다.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는 원래 11장 40개 구절들의 일부입니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
믿음으로써, 아벨은 카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믿음 덕분에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써 에녹은 하늘로 들어 올려져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가르침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믿음으로써 살아갔던 이들이 면면입니다.
성서의 인물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고 우리 또한 똑같습니다.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이렇게 믿음의 선배들을 보고 배우는 우리들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믿음을 튼튼히 하는 우리들입니다.
둘째, 보물을 하늘에 쌓으십시오.
‘믿음의 삶’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희망의 삶’ 또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사랑의 삶’ 역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장애아를 둔 4식구의 가정이 은혜의 빛으로 가득했던 것은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헛된 보물을 진짜 보물인 줄 알고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여러분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보물은 바로 그 사람 마음의 수준과 정도를 가리킵니다.
세상의 보물들은 모두가 헛됩니다.
죽어 아버지의 집에 귀가歸家할 때 가지고 갈 보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살아생전에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고 귀가할 때는 맨손으로 홀가분하게 가는 것입니다.
죽음의 귀가 시간에 하늘에 쌓아 놓은 보물이 없으면 얼마나 허전하고 당황스러울까요.
과연 얼마나 하늘에 보물을 쌓아 놨습니까?
그러니 저에게 최고의 보물은 하느님이십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진정 믿는 이들의 보물은 하느님이십니다.
보물인 하느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우리 마음은 하느님께 향하게 되고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하느님의 원하시는 바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진선미眞善美의 삶을 살게 되고,
바로 이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특히 사랑의 자선도, 모든 이웃에 대한 선행도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저에게 무료로 정성껏 침을 놔주는 침술사 형제님도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정성껏 이렇게 미사를 봉헌함도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지상에 보물을 쌓은 사람들은 부자 같지만 가난뱅이들이며,
하늘에 보물을 쌓은 사람들은 외관상 가난뱅이 같지만 실상 부자들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에 전념한다면 세상은 참 아름답고 밝아질 것입니다.
죽어 아버지의 집에 귀가할 때 찬미와 감사노래 부르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날 것입니다.
그러니 매일매일 여러분의 하늘 금고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깨어 사십시오.
종파를 초월하여 영성생활의 공통적 목표가 오늘 지금 여기 깨어 사는 것입니다.
깨어 있을 때 마음의 순수요 나쁜 생각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환히 영혼의 등불을 켜들고 깨어 기도하며 기다리며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막연한 침묵은 불가능하고 무가치 하듯이 막연한 깨어있음도 불가능하며 무가치합니다.
활짝 열린, 빛나는 깨어있음입니다.
주님을 기다릴 때 바로 활짝 열린 빛나는 깨어있음입니다. 기쁨과 설렘의 깨어있음입니다.
누구를, 무엇을 기다립니까? 기다리며 준비함이 없이는 깨어있음도 없습니다.
깨어있음 역시 주님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깨어있을 때 깨달음이요 깨끗한 마음입니다.
모두 ‘깨’자 돌림의 은총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님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그러니 미사나 성무일도의 공동전례 때에는 반드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종들인 우리는 행복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님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주인을 주님으로 바꾸니 더욱 실감이 납니다.
그러니 준비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 충실하고 슬기롭게 살아야 합니다.
겸손과 온유,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주님은 오실 것입니다.
아니 죽음도 이렇게 오실 것입니다.
요즘 불볕더위가 한창입니다. 이열치열以熱治熱입니다.
‘불과 열아 주님을 찬미하라. 추위야 더위야 주님을 찬미하라.’
다니엘 찬가에서처럼 불볕 찬미로 불볕더위를 통과해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연중 제19주일, 우리 모두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의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 믿음으로써 살아가십시오.
2. 보물을 하늘에 쌓으십시오.
3. 깨어 사십시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깨어, 믿음으로써, 하늘에 보물을 쌓는 시간입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언젠가 인터넷에서 ‘10년 후의 편지’라는 제목의 글이 돈 적이 있습니다.
우선 그 ‘10년 후의 편지’ 전문을 올려 봅니다.
2023년 4월 13일에 열어봐! 발신인 테일러 스미스 수신인 테일러 스미스.
'오늘 기도는 했어? 비행기는 타 봤니? 다른 나라엔 가 봤어? 닥터 후는 아직도 TV에서 방영해?‘
- 중략 -
내가 지금 이 편지를 쓰고 나서 10년이 지났다는 거 알지? 살다 보면 좋고 나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야.
그게 삶의 이치이고, 넌 그저 거기에 맞춰 살아야 해. 넌 잘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럼 안녕, 테일러 스미스가.'
미국 테네시 주 존슨시티에 살던 12세 테일러의 자신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이 소녀는 자신의 편지를 직접 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편지를 쓰고 1년이 지나서 급성 폐렴으로 주님 곁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편지를 그의 부모가 발견했고, 늘 긍정적이었던 딸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인터넷에 공개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편지를 읽고는 스스로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 역시 10년 뒤의 편지를 한 번 써보았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의 시간이지만, 그래도 잘 될 것 같은 꿈과 희망을 갖게 됩니다.
설마 10년 뒤의 편지를 쓰면서 ‘난 틀려먹었어. 난 안 돼.’라면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생각을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 역시 엄청나게 긍정적인 마음, 그리고 대범한 생각을 갖고 미래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바로 그때 이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를 위한 확실한 준비가 아닐까요?
그런데 더 중요한 준비를 할 시간이 있습니다.
이 역시 미래이지만,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달려 있는 마지막 순간,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대한 준비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 준비에 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 우리를 심판하는 그날과 그때를 모르기 때문에,
언제 올지 모르는 그날을 위해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 있는 종들이 행복하다고 하시지요.
성지에서 종종 아이를 데리고 오시는 부모들을 봅니다. 그런데 그 부모의 시선은 거의 비슷합니다.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자기 자녀에게 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를 하면서도 계속 아이를 살펴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이가 울면 부모는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아이를 향해 달려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근처에서 아이를 계속 살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아이를 계속 살피고 있었던 모습처럼, 주님을 계속 살피고 있다면,
즉 주님과의 관계의 끈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야 말로 주님을 맞이하는 가장 훌륭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지금 나는 주님과의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그래서 얼마나 마지막 날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을까요?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믿음과 반대되는 말은 무엇일까요?
배반, 배신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배반과 배신은 대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땅에서 구원해 주신 하느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우상을 섬겼고,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해서 팔아 넘겼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배반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을 사기꾼이라고 부릅니다.
배반을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박해와 고문은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교회는 순교를 믿음의 가장 큰 척도로 생각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은 신앙의 별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믿음에 대한 아름다운 글을 남겨 주셨습니다.
대학로에는 함석헌 선생님의 시비(詩碑)가 있습니다.
대학로에 갈 기회가 있으면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말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원하십니다. 믿음은 또한 행동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친 것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성모님께서도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믿음을 드러냈고,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셨고, 그 믿음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전의 아픈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1986년 저는 군종병으로 근무하였습니다.
군종 신부님께서는 2박3일 군종신부님 회의가 있으셔서 출장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청소를 깨끗이 하고, 신부님이 없는 동안에는 부대에서 지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라고 대답은 하였지만 제게는 다른 마음이 생겼습니다.
‘신부님이 출장을 가시면 마음껏 놀아야지. 친구들을 불러다 술도 마셔야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막 파티를 시작하려는 순간입니다.
신부님께서는 모임이 취소되어서 다시 성당으로 오셨습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그대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흐르는 물이 썩지 않듯이 함께 나누는 사람은 결코 신앙이 시들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는 늘 깨어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름철에 홍수로 인한 피해가 예상되지만 우리는 늘 피해를 입고 나서야 대책을 세우곤 합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라는 말이 있듯이 신앙도 건강할 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받은 만큼 베풀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 중에 하나가 암입니다.
이 암은 자기는 영양분을 받으면서 다른 세포에게 영양분을 주지 않는 세포 때문에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혼자 비대해지고, 다른 세포들의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몸의 균형을 깨뜨린다고 합니다.
자기가 받은 만큼 베풀 줄 아는 신앙인은 결코 그 신앙이 시들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의 꽃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면서 그리스도의 삶을 전하면서 활짝 피어있는지,
아니면 어느덧 나의 게으름과 나의 욕심과 나의 이기심으로 시들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연중 제19 주일 입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에 대한 교육장면인데, 크게 두 장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곧 자선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는 장면(루카 32-34)과,
게으름과 자만에 빠지지 말고 주님의 오심을 ‘깨어 기다려야 한다’는 장면(35-48)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주님의 재림과 관련한 세 가지 비유
곧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35-38), “도적의 비유”(39-40), “청지기의 비유”(42-48)가 소개됩니다.
먼저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 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
이 말씀은 “깨어있음”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그것은 단지 잠들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라, “기다리는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잠들지 않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돌아오면 문을 “곧바로 열어 주려고” 뜨거운 열망으로 기다리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의 열망으로, 임을 그리워하는 것이 깨어있음이요, 임을 희망하는 것이 깨어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기다림, 이 희망은 이미 축복입니다. 그 안에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을 지향하여 있는 까닭입니다. 바로 그 지향 안에서 깨어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깨어있음”은 지향 곧 임의 뜻 안에 깨어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깨어있음“의 표시를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허리에 띠를 띠고”라는 말은 과월절 음식을 어떻게 먹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주신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곧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는 말씀을 떠올려 줍니다.
곧 깨어있음은 마치 출애굽의 긴장을 갖추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한편,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합니다.
‘등불’은 정신과 마음이 깨어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님을 향한 기다림 곧 지향을 켜놓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깨어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이미 등불을 지니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것은 임께서 우리 안에서 빛을 밝히고 계신 까닭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깨어있을 수 있음”은 깨어 계시는 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까닭입니다.
아니, 그렇게 임께서 우리에게 시중들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토록, 임께선 이 순간에도 우리를 휩싸고 돕니다.
우리 안에 현존하시며 나와 더불어 활동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은 “깨어나라” 하지 않으시고, “깨어 있어라” 하십니다.
이어서, 들려주는 “도적의 비유”(39-40)도 “깨어있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어있음 곧 하느님 나라에 대한 고대와 기다림은 ‘행복’과 동시에 선언됩니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라는 말씀은
어떤 위협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밀려올 그 빛에 기쁘게 마음을 활짝 열어 놓으라는 촉구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청지기”에 비유하십니다.
이 역시 “깨어있음”이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청지기”에게 충실함과 슬기로움을 동시에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대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냐?”(루카 12,42)
이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종들이 아니라, 주인의 종들이 맡겨졌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들을 돌보는 일이 주인을 섬기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의 뜻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그 맡겨진 이들을 돌보는 일은 그들을 다루는 기술이나 요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따라 정해진 양식을 내어줄 수 있는 데”(루카 12,42) 있기 때문입니다.
곧 주인의 뜻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뜻을 아는 지혜는 솔로몬에게서 보듯이, “듣는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지혜는 먼저 귀 기울여 듣는 이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아는 슬기로움”을 “주인의 뜻에 따라 사는 충실함”과 함께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루카 12,47)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으로부터 맡겨진 사명을 받은 청지기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충실함과 슬기로움으로 맡겨진 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사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다름 아닌 주님께서 맡겨준 형제들에게 주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는 일,
그것이 곧 주님께 대한 충실함과 슬기로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새겨들어봅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
내가 보물이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34절)
이 구절에 마음이 뺏겼다.
글을 쓰지 않을 때도 곱씹었고, 글을 쓰면서도 곱씹고 있다.
예수 시대의 보물은 단순히 금, 은 보석만도 아니고 귀한 먹거리도 보물이었단다.
어떻게 보면 입으로 들어가 뒤로 나오는 숱한 먹거리도 보물로 볼 수 있었던 시절이 순수하기까지 하다.
마음을 두는 건 수시로 변한다. 적어도 내 경험칙은 그러하다.
사람이 그랬고, 물건이 그랬다. 귀한 것일수록 마음의 변덕이 죽을 쑤듯 들끓는다.
돌이켜 이유를 캐물으면, 답은 그리 복잡지 않았다.
비교하니까, 자꾸만 뭐가 더 귀하고, 뭐가 더 내게 이익이 되는지 이기적 셈법을 해 대니까....
속은 늘 계산하느라 바쁘기만 했다.
오늘 복음을 두고 주인을 향한 ‘일편단심’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행복한 종은 주인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이고, 기다림에 충실한 이라고 단정하면서 말이다.
이런 해석은 대개 갑을관계, 권위주의를 바탕으로 주입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종은 종이어야 하고, 주인은 위대해야 한다는 계급 논리를 바탕으로 종의 겸손함이 강조된다.
이 겸손함은 비교 우위를 이미 인정해 버린 자기 비하의 또 다른 면을 숨기고 있는 건 물론이다.
오늘 복음의 주인은 이러한 계급 논리를 철저하게 무시한다. 오히려 종처럼 행동한다.
허리에 띠를 매고 식탁에 앉히고 시중드는 주인은 심지어 자신의 재산을 충실한 종에게 죄다 맡겨 버린다.
주인이 종이 되고 종이 주인이 되는, 그래서 주인이냐 종이냐의 문제는 애시 당초 복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주인이 종이 될 수 있는 건, 오로지 종의 충실성에 기반 한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길 수 있었던 건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일, 곧 세상에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명의 충실성에서 가능했다.(요한 13,4)
주인으로서 아니면 종으로서 또 아니면 다른 어떤 이로서 우린 세상에서 살아간다.
주인과 종, 사장과 노동자, 정치인과 백성이라는 ‘관계적 프레임’ 안에서
우리 삶을 조망하는 태도는 어쩌면 우리 삶의 충실성에 걸림돌이 된다.
오히려 어떠한 삶이든 그것이 가지는 본디 가치와 역할을 고민하고
제 삶의 기본과 권리에 충실한 이들이 하느님나라에 어울리는 이들이다.
관계 속에 따지고 계산하다 보면 제 삶의 가치엔 불충한 결과를 초래한다.(루카 12,45)
불충한 종은 방종한 삶을 산 게 아니라, 계산된 삶을 살았다.
주인이 언제 올지 나름 계산했고, 계산한 만큼 자신의 삶을 잃었다.
늘 깨어 기다리고 준비한다는 건, 사람의 아들을 맞이하기 위함이다.(12,40)
준비한다는 건 시간적 결승점을 향해 나가는 일시적 혹은 한계적 집중 코스를 체험하는 게 아니다.
준비는 일상이고, 그 끝을 모를 만큼 평범한 게 준비한다는 거다.(1테살 5,2; 2베드 3,10; 묵시3,3)
불충실한 종은 ‘처단된다’. 처단하다라는 그리스어 동사, 디코토메오(διχοτομέω)는
‘두 조각으로 자르다’란 뜻을 지녔다.
이 표현은 불신을 지닌 이들에 대한 전통적 심판의 표현이었다.(2사무 12,31; 1역대 20,3; 탈출 29,17; 에제 24,4)
관계 속에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유폐시키거나 무시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둘로 쪼개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심판은 자기를 살지 못하는 이가 자기를 찾고자 하는 역설적 반영일 수 있다.
진정한 자기를 찾는 게 구원이고 비교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충실할 수 있는 게 제 삶의 보물이다.
사랑만큼 깨어있는 법이니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오늘 주님께서는 주인을 위해 깨어있는 종들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밸이 꼬여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이 말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만 주인을 위해서 깨어있어야 하는 것인가?
주인은 종에게 깨어있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세상의 주인과 종의 사이에는 종이 주인에게 깨어있고,
주인은 종에 대해서 무신경해도 되고 그런 것이 당연하지요.
그러나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누가 더 깨어있을까요?
우리가 주님께 더 깨어있을까요, 주님이 우리에게 더 깨어있으실까요?
주님이 세상의 주인들과 같다면 당연히 우리가 주님께 더 깨어 있어야 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전혀 깨어있지 않으실 터이지만
주님은 그런 분이 결코 아니시고, 아니시어야만 하지요.
만일 주님이 우리에게 깨어있지 않으시다면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으실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기도할 수도 없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사실 주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깨어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하면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훨씬 더 사랑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와 어머니와의 사이 그 이상의 것이지만
우리와 어머니 사이와 비교하면 그래도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자식이 어머니에게 깨어있는 것보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더 깨어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쩌다 어머니에 대해 신경 쓰는데
어머니는 자식에게 늘 깨어있으시고,
우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다른 것에 더 신경 쓰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에게 깨어있으시지요.
언젠가 제가 아는 새터민 아이가 아이를 낳고 난 뒤 한 말이 생각납니다.
열아홉 살에 아이를 낳았으니 아이가 아이를 낳은 셈인데
아이를 낳기 전에는 한 번 잠들면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이 드는데
아이를 낳고 나니 아이가 깨서 바스락 거리기만해도 깨더랍니다.
그것이 그렇게 신기해서 저에게 얘기하는데
더 신기한 것은 그렇게 깨어도 짜증이 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엄마의 위대함이고 사랑의 힘이며
엄마의 깨어있음이고 사랑의 깨어있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엄마보다 하느님은 우리를 더 사랑하시고
그러기에 더 사랑으로 우리에게 깨어있으시다고 말하는 것은 군소립니다.
아무튼 주님은 우리보다 더 우리에게 깨어있으시는데 그 이유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듣기에 이상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종의 식사에 주인이 시중드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그럼에도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본래 하느님과 우리의 사이는
주인과 종의 사이이고, 그래서 우리가 더 깨어 있어야 마땅하지만
사랑이 우리보다 훨씬 더 많고 크시기에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늘 더 깨어 있으시면서 온갖 시중을 우리를 위해 드신다는,
달리 말하면 우리의 온갖 기도를 다 들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어 우리의 기도에 늘 깨어있으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에 깨어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