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臨濟) 선사는 당나라 말기에 살았던 위대한 선승으로 임제종(臨濟宗)의 개조로서 영원한 자유인이고, 무애(無碍)의 달인이자 파격의 멋스러움을 지녔던 분이다. 그의 문하에 유수한 승려가 많이 배출됐다. 그리하여 한국의 조계종에도 그의 법맥이 닿아있다. 고려 말기의 국사였던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년~1382년) 대사가 중국 원나라에 유학해 임제종 양기파(楊岐派)에 속하는 석옥 청공(石屋淸珙, 1273~1352) 선사의 선맥을 수입해 왔다. 그것이 조선시대 선불교에 큰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 대한불교 조계종 법맥의 원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선사들이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할 때 ‘할(喝)’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스스로 임제 법손임을 드러내는 말이 된다. 임제 스님의 어록집인 <임제록(臨濟錄)>은 제자 혜연(慧然)이 엮었으며, 임제종의 근본 경전이고, 견성(見性)을 향한 수행방편에 대한 해설서로서 예로부터 선(禪)을 사랑하는 지식인들이 애독했다. 내용은 상당(上堂:법당에 올라가서 하는 설법), 시중(示衆:대중에 대한 설법), 감변(勘辨:스승과 제자간의 문답), 행록(行錄:행장), 탑기(塔記:석탑에다 새긴 글)로 돼 있다. 일본의 철학자인 이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박사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의 귀중한 서적이 모두 불타 없어져도 임제 선사의 어록인 <임제록>만 타지 않고 남으면 만족하겠다고 했다. 그만큼 일본에서도 존중 받은 어록이었다. 6조 혜능(慧能)의 제자가 남악 회양(南岳懷讓)이고, 남악 아래 마조(馬祖), 그 아래 백장(百丈), 그 백장 선사 밑에 황벽(黃檗) 선사인데, 바로 황벽 선사의 제자가 임제(臨濟) 선사이다. 모두 도인 가운데 으뜸가는 도인이요, 밝은 도안(道眼)을 갖추신 분들이다. 어느 젊은 수좌가 임제 선사에게 물었다. “스님 진정한 불법이란 무엇입니까?” 이 말을 들은 임제는 그 수좌의 뺨을 갈겼다. ‘철썩’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를 밀어 땅바닥으로 처박았다. 이것을 본 다른 수좌들이 맞은 수좌에게 말했다. “자네는 높은 법문을 듣고도 왜 절을 하지 않았느냐?” 높은 법문이란 바로 ‘철썩’하는 소리였다. 진정한 법문이란 ‘있는 그대로’란 뜻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공자를 만나면 공자를 죽여라.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말고 얽매이지 말며 있는 그대로 자신을 살아라.’ 그런 말이다. 임제 선사는 강력히 주장했다, 선(禪)이란 이념이나 사상, 진리 등에 얽매이고 집착하는 것을 배제하라고. 사람들은 무엇인가 얻고자 애를 쓰지만 곧 그 마음이 변하기 때문에 그런 집착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선(禪)은 생각의 중지, 마음의 비움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온갖 망상과 부질없는 생각들을 내려놓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선이다. 임제 의현 선사는 마조선(馬祖禪)을 계승했으나 그는 마음의 작용성(作用性)을 극대화하고 그 모든 성격을 하나로 모아서 ‘현용(現用)’ 또는 ‘사람[人]’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선(禪)을 개척했다. 임제(臨濟) 선사가 황벽(黃檗) 선사 아래에서 열심히 수행할 때의 이야기이다. 당시 입승(立繩―세간의 기율부장 역할)을 보던 목주(睦州) 스님이 임제 스님을 쭉 지켜보고는 큰 그릇으로 여기고, 하루는 조실(祖室)이신 황벽 선사를 찾아가서 말씀을 드렸다. “우리 회중(會中)에 장차 산마루에 큰 정자나무가 될 만한 인물이 있으니 조실 스님께서 자비로 제접(提接)해 주십시오.” “내가 벌써 알고 있네.” 황벽 선사께서는 이미 큰 법기(法器)가 하나 와서 진실하게 공부 해나가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 계셨던 것이다. “오늘 저녁 예불을 마치고 나서, 스님께 그 수좌(首座)를 보낼 터이니 잘 지도해주십시오.” 목주 스님은 황벽 선사께 이렇게 청을 드려놓고, 임제 스님을 찾아가서, “그대가 지금까지 열심히 참구해 왔으니 이제는 조실 스님께 가서 한번 여쭈어 보게.” 하니, 임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을 여쭈어야 합니까?” “불법(佛法)의 가장 긴요한 뜻이 무엇인가를 여쭈어 보게.” 임제 스님은 목주 스님이 시키는 대로 조실방에 찾아가 예삼배(禮三拜)를 올리고서 여쭈었다. “스님, 어떠한 것이 불법의 가장 긴요한 뜻입니까?” 말이 떨어지자마자 황벽 선사께서는 주장자(柱杖子)로 이십 방(棒)을 후려 갈기셨다. 임제 스님이 겨우 몸을 이끌고 나와 간병실에서 쉬고 있으니, 목주 스님이 찾아왔다. “갔던가?” “예, 가서 스님의 지시대로 여쭈었다가 방망이만 흠씬 맞아 전신이 다 부서진 것 같습니다.” “이 대도(大道)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신명(身命)을 내던져야 하네. 설사 몸이 가루가 되고 뼈가 만 쪽이 나더라도 거기에 조금이라도 애착을 두어서는 안 되네. 그러니 그대가 다시 한 번 큰 신심(信心)을 내어, 내일 아침에 조실 스님께 가서 종전과 같이 여쭙게.” 이 경책에 힘입어 다음날, 임제 스님은 다시 용기를 내어 조실방에 들어갔다. “어떠한 것이 불법의 가장 긴요한 뜻입니까?” 이렇게 여쭈니,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이십 방(棒)이 날아왔다. 이번에도 목주 스님은 간병실에 누워 있는 임제 스님을 찾아와 사정 얘기를 듣고 나서 거듭 힘주어 말했다. “이 법은 천추만대(千秋萬代)에 아는 선지식을 만나기도 어렵고 바른 지도를 받기도 어려운 것이니, 밤새 조리를 잘 하고 다시 용기와 신심을 가다듬어 내일 조실 스님을 찾아가게.” 그 다음날도 임제 스님은 조실방에 들어갔다가 역시 종전과 같이 혹독한 방망이만 이십 방(棒) 맞고 물러나왔다. 임제 스님은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는 목주 스님에게 말했다. “저는 아마도 이곳에 인연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다른 곳으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는 것은 좋으나 조실 스님께 하직인사나 올리고 가게. 갈 곳을 일러주실 것이네.” 임제 스님이 떠날 채비를 다 해놓고서 황벽 선사께 가서, “스님, 스님께서는 큰 자비로 저에게 법(法)의 방망이를 내려 주셨는데, 제가 업(業)이 지중해 미혹(迷惑)한 까닭에 진리의 눈을 뜨지 못하니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하고는 하직인사를 올렸다. “어디로 가려는가?”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바로 고안(高安) 강변으로 가서 대우(大愚) 선사를 찾게. 틀림없이 자네를 잘 지도해 주실 것이네.” 그리하여 임제 스님이 바랑을 짊어지고 고안 대우 선사 처소를 향해 수백 리 길을 걸어가는데, 걸음걸음이 의심이었다. 무슨 의심이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나는지, “불법의 가장 긴요한 뜻이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어째서 황벽 선사께서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세 번 다 이십 방(棒)씩 육십 방을 내리셨을까?” 그대로 일념삼매(一念三昧)에 빠져서 걷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수백 리 길을 걸어갔다. 팔만 사천 모공에 온통 그 의심뿐이었다.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참선법은 바로 이와 같은 일념(一念)을 지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참구하는 한 생각이 간절하게 지속되게 되면, 그 가운데서 억겁다생(億劫多生)에 지은 업(業)이 빙소와해(氷消瓦解)돼 몰록(문득) 진리의 문에 들어가게 되는 법이다. 참학인(參學人)들이 10년, 20년 동안을 참구해도 진리의 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까닭은, 보고 듣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간절한 한 생각이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육근 육식(六根六識)의 경계를 다 잊어버리고 몰록 일념삼매(一念三昧)에 들어 부동일념(不動一念)이 되면, 일기일경(一機一境)상에 홀연히 견성대오(見性大悟)하게 된다. 임제 스님이 여러 달을 걷고 또 걸어서 마침내 고안에 당도해 대우(大愚) 선사를 참예했다. “그대가 어디서 오는고?” “황벽 선사 회상에서 지내다가 옵니다.” “황벽 선사께서 무엇을 가르치시던가?” “제가 불법의 가장 긴요한 뜻이 무엇인가를 세 번이나 여쭈었다가, 세 번 다 몽둥이만 흠씬 맞았습니다. 대체 저에게 무슨 허물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대우 선사께서 무릎을 치시면서, “황벽 선사께서 그대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가르치셨는데, 그대는 여기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가?” 하시며 "허허." 웃으셨다. 순간, 웃는 그 소리에 임제 스님은 홀연히 진리의 눈을 떴다. 대우 스님의 웃음소리가 임제 스님에겐 일기일경(一機一境)이었던 것이다. 그토록 의심하던 「황벽 육십 방(棒)」의 낙처(落處)를 깨쳤던 것이다. 그리고 한 말이, “황벽의 불법(佛法)이 별 것 아니구나!”였다. 임제 스님이 불쑥 이렇게 말하자, 대우 선사께서 임제 스님의 멱살을 잡고는 다그치셨다. “이 철없는 오줌싸개야! 네가 무슨 도리를 알았기에, 조금 전에는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더니 이제 와서는 황벽의 불법이 별 것 아니라고 하느냐.” 그러자 임제 스님이 대우 선사의 옆구리를 세 번 쥐어박으니, 대우 선사께서 잡았던 멱살을 놓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대의 스승은 황벽이니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네.” 황벽 선사에게도 돌아가라 했다. 황벽 선사가 마당을 거닐다가 임제 스님이 돌아온 것을 보고,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언제 공부하느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스승은 제자에게 반지성적이고, 언어와 문자를 거부한 ‘방(棒)’으로 반응을 보인 것일까? 이에 대해 무비 스님은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으로 설명했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몽둥이질이나 손가락 들어올리기, 꽃을 들어 보이기와 같은 표현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왜 몽둥이질을 했을까”라든가 “왜 손가락을 들어 올렸을까” 또는 “왜 꽃을 들어 올렸을까” 라고 온갖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해서 사량 분별로 밝히려 하다가 보면 8만4천리로 빠져 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임제 선사가 황벽(黃檗) 선사 문하에서 피나는 정진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황벽은 자기 스승이었던 백장(百丈)이 물려준 법의 징표인 선판(禪板-좌선을 하다가 피곤할 때 몸을 의지하는 작은 판) 등 좌선 도구를 물려주었지만, 인가의 징표라 할 수 있는 그것들을 모두 불태워 버릴 정도로 기성의 가치와 권위를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그 후 임제 선사는 하북(河北) 진주(鎭州)의 임제원(臨濟院)에서 종풍을 드날렸다. 그래서 후세에 이를 임제종이라 불렀다. 이와 같이 임제 선사는 매우 준엄한 선풍으로 알려져 있으며,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임제종의 시조가 됐으며, 특히 ‘임제 할(喝)’로 유명하다. ‘할(喝)’은 선종(禪宗)에서 진리를 문답하는데 쓰는 독특한 수단, 즉 스승이 참선하는 사람을 인도할 때 질타하는 일종의 고함소리를 말한다. 선승(禪僧)들 사이에서 수행자를 책려하기 위해서, 혹은 법문을 마칠 때, 큰 소리로 ‘엑’ 혹은 ‘악’ 하고 고함을 치는 소리 또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마치 황벽 선사의 ‘방(棒)’과 비슷하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마음작용을 표현할 때, 수행자를 호되게 꾸짖을 때, 법회에서 설법을 끝낼 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 ‘할’을 발한다. 이러한 의미의 ‘할’이 선종에서 사용된 것은 중국 당(唐)나라 시대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로부터 비롯됐다. 마조(馬祖) 선사가 한 번 할을 했는데, 그 제자 백장(百丈懷海)이 사흘이나 귀가 먹고 눈이 캄캄했다는 것이 첫 기록이다. 그리고 임제(臨濟) 선사에 이르러 널리 사용됐다고 한다. 임제 선사는 ‘할’ 하나로 수백 명의 수행자들을 지도, 점검했다고 하는데, 임제 선사의 할에 의한 지도를 임제 사할(臨濟四喝)이라고 했다. 이는 할을 사용하는 경우를 4종으로 구분한 것이다. 즉, 임제 선사는 자신의 ‘할(喝)’은 하나지만 그 기능과 역할은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임제 선사는 누구든 네 번만 ‘할’을 던져 보면 상대방의 경지, 납자들의 병통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네 번의 할로 상대방을 파악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직관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제1할은 학인(學人)이 지해(知解-알음알이)에 묶여 명상언구(名相言句)에 집착할 때 할을 해 깨우치게 하는 것으로 보검(寶劍)이 물건을 절단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제2할은 수행자가 근기가 얕음을 드러낼 때 위의(威儀) 있게 할을 하는 것, 사자가 포효할 때 뭇 짐승이 놀라는 것과 같은 대기대용(大機大用)의 할이다. 제3할은 스승이 수행자를 시험하거나, 또는 반대로 수행자가 그 스승의 역량을 시험하기 위해 할을 하는 것으로 이를 감험(勘驗-조사 점검하는 것)의 할이라고 했다. 제4할은 제1할의 용(用)을 짓지 않는 것으로 향상의 나일 할(那一喝)이라고 하며, 위의 3할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수렴 포섭하는 것이다. 임제 선사 이후 중국ㆍ한국ㆍ일본 선종 등에서 할 사용이 일반화됐다. 임제 선사는 어떤 형식화되고 고정적인 실체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부처가 부처의 행을 하지 않고 화두라는 글자(일구)에 갇혀버린 채 홀딱 늙어버렸다면, 그것만큼 허망한 인생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임제(臨濟) 스님은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수행자들을 향해, “자기 머리를 두고 또 머리를 찾는 짓”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렇듯 임제의 불교는 ‘참 인간의 구현’이었기에 임제 이전에는 이 문제를 다분히 관념적으로 다루었지만 임제에 이르러 비로소 인간의 본성(本性)은 ‘자성(自性)’으로 표현됐고, 이는 다시 ‘견성(見性)’이라는 두 글자로 압축했다. 마조 선사가 자성(自性)의 추상성을 극복하고 일심(一心)이라는 평상심(平常心)의 선을 만들어 선(禪)을 보다 현실적인 종교로 만들었다면, 임제 선사는 마음이라는 말조차도 극복하고 ‘지금 눈앞에서 작용하는 것’ 또는 ‘지금 여기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하는 지극히 평범한 언어를 구사해 선(禪)을 더욱 구체화, 일상화했다고 할 수 있다. 임제 선사 역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심지법(心地法)을 계승하고 심즉시불(心卽是佛)의 일심법(一心法)을 말했으며, 허공처럼 무상(無相)⋅무주(無住)인 마음의 무한한 작용성과 만법을 인식하는 작용을 말했지만, 임제 선사는 그러한 근원자(根源者)인 마음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설법을 듣고 있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표현 이상으로 구체적이고 피부에 와 닿는 평범하지만 진실한 말이 어디에 있겠는가? 임제선(臨濟禪)은 여기에서 최고의 종교성을 얻게 되는데, 이로써 중국선(中國禪)은 완성됐다고 할 수 있다. 임제 선사는 867년 입적했는데, 선방에서 정진하던 그 모습 그대로 의연히 앉은 채 열반에 들어 옷매무새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한다. -----------------------------------------------------------------------------------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 선사 이야기> 아미산 [출처]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 선사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