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팔번이든 십칠번이든 노래한번 불러봐라 하면
언제든지 나는 석별을 불렀었다.
원래가 돌대가리라 가사를 아는게 석별밖에 없었고
리듬또한 따라하기 쉬우니 나의 십팔번으론 안성맞춤이었다.
석별을 택한건 고교를 졸업한 이듬해였다.
따라부르기도 쉬웠고
홍민의 목소리가 너무도 매력적으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우리집안은 노래와는 거리가 멀다.
누구든 우리 아버지와 형의 노래를 들어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기껏해야 어머니가 흥얼거리던 콧노래가 전부였다.
형까지도 대중앞에서 노래할 기회는 별로 없었으며
안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그만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태어난 나로서는 시대적으로 비극을 맞는다.
유행가와 팝송의 시대에서 자라난 나는,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위해 노래책도 샀다.
음악장르는 모르겠지만 흘러간 뽕짝와 과도기의 키타쏭.
밴드부라 음악만큼은 수였지만 악기라고는 스켈이 고작이다.
그러나 열심히 독학을 했다. 결과는 역시나였다.
안개, 편지, 파도여등등을 연습했지만 끊어먹지않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석별뿐이었다.
석별 하나로 사회에 나가 모임의 휘날레를 장식하리라고
굳게 다짐을 한다.
첫직장은 마산에서 출발이 되었다.
노래방은 아니지만 비슷한 가라오께였다.
가사를 볼 수가 없으니 한자리에서 석별만 세번을 불렀다.
나이트크럽의 오부리도 아까웠다.
아는 노래라고는 석별 뿐이었고, 내차례만 되면 재탕이 되어버렸다.
일년 반만에 마산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원주로 발령이 난 것이었다.
석별을 좋아하더니 석별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강원도의 영서를 주름잡으며 밴드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물좋은 시절이다.
잡기라는 잡기는 모두다 섭렵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제약사의 세일즈맨이다.
강원도엔 가라오께가 없었다.
스탠드바와 룸싸롱.
지금은 노래방기기가 놓여있지만 당시엔 밴드를 불렀다.
나는 여전히 석별 한가지로 먹고 살았다.
어느덧 카수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석별을 익히고 5년이 흘렀으니 제2의 홍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년이 조금지나 회사를 옮겼다. 역시 석별을 부르면서...
여섯개의 회사를 전전하면서도 석별외에는 아는게 없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나 송창식의 거 뭐시냐..아하.. 왜불러
왜불러를 배우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허사였다.
노래를 하다보면 가사를 까먹기 일수였다.
죽을 때까지 석별만 불러야하는 운명인 것 같았다.
에라 고향을 떠나버리자.
인천으로 향했다.
석별로 석별을 하고 말았다.
노래방이라는 것이 생겼다.
기회였다.
가나다 순으로 연습에 들어갔다.
강원도 아리랑, 강촌에 살고 싶네, ........
그러나 화면을 안보고 불러야 그럴듯하다.
석별은 언제나 십팔번지의 히든곡으로 남아있고, 마지막을 장식했다.
노래방 덕분인지 인천의 생활은 오래 지속이 되었다.
그러나 석별을 바꾸지 않는한 더이상 머물 수는 없었다.
조잡스럽게 직업을 전전하다 결국엔 원주로 다시 오게되었다.
노래가 곧 운명이라는 말이 돌아다녔다.
내가 역마를 탄 이유가 석별이라는 노래때문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원주에 오자마자 앗싸! 노래방기기와 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이가 먹어가며 인생이 서글퍼진다.
하염없이 고향생각이 나고 어머님이 생각난다.
모정의 세월도 불러보고 향수도 불러본다.
석별만큼이나 나의 애창곡이 되어버린 향수!!
언젠가는 샘밭서 살 날이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으로
오늘도 향수를 불러본다.
역마살을 끝내고파.....
첫댓글 중년방 정모하면 꼭 노래방 가야겠네요. 감자님의 석별을 들어 봐야죠? ^^
중년방을, 그리고 원사를 떠나란 말씀은 아니겠죠? ㅎㅎㅎ 좋은시간 보내시길요.
안녕하신가요? 노래에 살고 노래와 떠나고...인생 여정이 보이네요. 님이 좋아하는 노래는 부르는 감동 보다 듣는 감동이 더욱 생생할것 같네요. 이렇게 주룩 주룩 비가오는날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