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네가 나왔다 (외 2편)
이수명
꿈에 네가 나왔다. 네가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왜 누더기를 입고 있니 누더기가 되어버렸어 날씨가 나쁜 날에는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없는 날에는 누더기 옷을 꺼내 입는다고 했다.
꿈에 네가 나왔다. 꿈속을 네가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걸어가서 너무 쓸쓸해서 땅에서 돌멩이를 주웠는데 빛을 다 잃은 것이었다.
돌벽 앞에 네가 한동안 서 있었다. 나는 돌벽이 무너질 것 같다고 피하라고 했는데 너는 집을 나와서 천천히 산책 중이라고 했다.
꿈에 네가 나왔다. 아주 짧은 꿈이었다.
도시가스
썩은 광장을 따라 걸었지
썩은 낙엽 썩은 사과가 굴러다니고 게임을 난 할 줄 모르지 손가락으로 화면을 두드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너는 말한다. 나는 배워야 한다. 두드리고 계속 두드리는 것을 새로운 공격을 하는 것을 그래, 각오를 다진다.
장갑을 벗고 흰 장갑을 벗고 장갑을 치우고 손을 치우고 배워야 한다. 바닥에 한 사람이 신문지를 깔고 누워 있다. 신문지를 덮고 누워 있다. 몇 장은 둥근 맨홀 뚜껑으로 굴러가서 뒹군다. 맨홀 뚜껑에는 도시가스라 씌어져 있다. 뚜껑을 열지는 않는다. 가스가 있다. 우리에게는 가스가 있다. 가스는 색깔이 없고 냄새가 없고 무게가 없고 소리가 없고 보이지도 않고 그러나 가스는 부드럽고 가스는 온화하고 가스는 은은하게 순조롭게 우리에게 흘러들어오고 가스는 우리를 어루만지고 우리의 생각은 온통 가스로 가득 차 있다. 도시가스 보급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그래서 산책 같은 건 필요 없다. 산책길에 해가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소용없다. 해는 우리가 인사도 하기 전에 빨리 떨어지고 저기 광장의 끝이 벌써 보인다. 끝을 향해 제대로 나 있는 길 반듯한 길을 따라 걷는다. 썩은 광장에 당신은 서 있어요 입에서는 태만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너는 반듯한 이마를 들고 이번에는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다. 화면을 두드리지 말라고 썩은 손가락을 사용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사용하지 않는다. 새로 나온 게임을 배우지 않는다.
무단결석 아침에 일어나면 물부터 마신다 흐린 눈앞에 무분별한 책들이 꽂혀있는 책장이 흔들리는 아침은 우울해 아침 담배는 우울해 아침빛이 너무 쓸쓸해서 빛에 무엇을 비춰 볼 엄두가 안 난다. 오늘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 보다가 비행기 시간을 검색해 보다가 출발하는 것이 싫어 아무 곳도 가고 싶지 않다. 정오가 지나 타이레놀을 두 알 먹고 빌려 온 책을 뒤적거린다. 일주일 연체된 책을 다 읽지는 못할 것 같다. 이 일을 미루고 저 일을 미루고 멀쩡한 약속을 깨고 일주일치 필요한 식료품 목록을 짜다가 집어던진다. 물을 한 잔 더 마시고 지하실로 내려갈까 지렁이와 이야기를 나눌까 최근에 발견한 지렁이에게 같이 죽자고 말하는 대신 그래도 잘 지낸다고 말하는 게 좋겠지 창을 뚫고 들어오는 나뭇가지가 있어 그것이 머릿속을 뚫고 들어올지 잠시 생각한다. 손이나 몸이 나뭇가지가 될지도 모른다. 나무가 되기 전에 나뭇가지가 되기 전에 일어나 주방에 타일을 붙일까 하나를 붙이면 다른 하나가 떨어지고 그것을 붙이면 처음 것이 떨어지는 이상한 타일 붙이기를 하고 있을 때 계속 여기 머물러 있는 것이 좋은지 알지 못한다. 어디로 옮겨가는 것이 좋은지 알지 못한다. 그래도 신음소리는 내지 않는다. 떨어진 타일들이 움직이는 것만 바라보고 있다. —시집 『도시가스』 2022. 4 (2022 청마문학상) ----------------------- 이수명 / 1965년 서울 출생. 1994년 《작가세계》에 시로 등단. 2001년 《시와반시》에 평론 등단.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붉은 담장의 커브』『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마치』 『물류창고』 등. 시론집 『횡단』. 비평집 『공습의 시대』『표면의 시학』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