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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백이라도 빠진것마냥 축 쳐져서 일어나 앉을 기운조차 없어 그대로 누워있다가 ‘ 달아나자 ’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참과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그 때 쓰러지듯 잠들고 난 뒤 몇시간, 몇일이나 지났는진 모르겠지만 그 날 렌에 의해 도망이 실패했을때가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이 방엔 나 외엔 아무도없다. 달아날수있다면 난 언제든지 달아나려고 할것이다. 이불을 걷고 욱씬거리는 몸을 일으켜세우자, 한번만 더 소란피우면 묶어놓는다는 렌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지만 마른침 한번 삼키고 애써 외면했다. 지금이 기회일지도모른다. 달아나는게 무리라면 구조라도 익혀두자라는 생각으로 걸음을 떼다가 침대 옆 한편에 있던 화장대에 내 모습이 비춰졌다.
심하진 않지만 뺨은 아직도 약간은 벌겋게 부어올라있었고 치료가 잘되었는지 아물어가는 터진입술과 부스스한 머리, 옷 사이로 보이는 몸 구석구석에는 보기 찡할 정도로 시퍼렇게 피멍이 들어있었다. 거울속에 비친 이 부스스한 거지같은 몰골을 한 사람이 내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얼마 없었던 삶에 대한 애착까지 바닥난 기분이다. 난 내옷이 아닌 처음보는, 처음입는 실크로 된 부드러운 옷을 입고있었다. 옷까지 갈아입혔다? 날 장난감 인형다루 듯 다루겠다는것같은데‥. 이 거지같은게, 렌의 픽하니 웃는 얼굴이 약올리기라도 하듯 눈앞에 아른거려와. 잊자, 이런걸 하나하나 일일히 생각하고 있다간 시간만 빼앗길것이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복층침실을 내려와 일단 창문으로 발을 떼어냈다. 내가 있는 이 곳이, 높지 않다면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서 도망치자. 가소롭게도 이런 바보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날 아무런 죄의식없이 여기로 납치하고 폭행까지 한 사람이다. 쉽게 도망칠수있게끔 해놨을 리가 없을걸 머리는 잘 알면서도,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지 않을거라는걸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 혹시몰라 ’ 라는 기대감으로 닥치는대로 해봐야 할 것 같았다.
혼자 아무도 없는 방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며 가까이 다가선 창문을 큰 소리가 안나게끔 천천히 열었다. 그리곤 거지같다는 욕을 낮게 읊조리고는 단념한 듯 다시 창문을 닫았다. 높다. 3층정도의 높이같다. 뛰어내려도 죽진 않을걸 알지만 뛰어내릴 용기도 없고 뛰어내렸다 한들 몸이 성하지도 않을것이고 성하지 않은 그 몸으로 달아나는 것도 무리라고 판단됐다. 그리고 높은것보다도 더 난감한건 문밖으로 내다본 정원이 지나치게 넓다. 여러 정황속에 당황하여 내 자신도 잠깐 잊고있었나 본데‥, 나 길치였지.
깊은 한숨을 내뱉고는 숙였던 고개를 틀어 문쪽을 쳐다보았다. 밖에서 잠구는건가? 지문인식? 비밀번호? 아니면 밖에서 감시? 그것도 아니면 방안에 CCTV? 이런저런 생각으로 방안 곳곳을 둘러보았지만 의심가는곳은 없어보였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문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문고리에 손을 대고 천천히 잡아 돌려보았다. 굳게 잠겨 절대 열리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던 문은 의외로 손 쉽게 내 손에 의해 열렸다. 쉽게 열려버린 문 탓에 어안이 벙벙하여 잠시동안 그자리에 굳은 채 가만히 서있었다.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열린 문밖으로는 영화속에서나 나올법한 궁전같은 넓고, 화려하고, 높고 웅장한 복도를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 역시 난 여기서 나가자마자 길을 잃어버릴것이다. 그래도 나가봐야 할 것같다. 왜, 사람이라면 살다보면 그런 순간이 한번쯤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이걸 하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 후회하게 될거라고 꼭 해야만 할것같다고‥. 그때의 내가 드넓은 복도를 멍하니 보며 그랬으리라.
“ 가볼까‥ ”
숨을 길게 내뱉은 후 다시 들이키고 천천히 밖으로 몸을 빼내었다. 어느길로 가야할지 막막하다. 오른쪽? 왼쪽? 양 쪽을 번갈라보다가 내가 결국 택한곳은 오른쪽이였다. 집이 아무리 커봤자 집은 집일것이다. 택한방향쪽 복도를 따라 무작정 걷기시작했을때쯤 하얀색 고급스러운 대리석으로 된 복도 바닥이 느끼기에 시렵게 느껴져서 발을 봤더니, 멍청하게도 맨발이였다. 누가 날 본다면 정말 불쌍하기 짝이없는 몰골일것이다. 딱 봐도 맞은게 확 티나는 멍자국들이며 입술의 상처…. 내가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앞으로 쭉 이런 거지꼴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님 뭐 죽던가‥. 거지같은 생각에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지금은 이런 생각보단 이 곳에 대해서나 신경쓰자.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 차가운 대리석에 닿는 작은 마찰음만이 넓은 복도에 사람의 인기척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집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것같다. 이렇게 큰집에 혼자 사는건가? 역시, 혼자 사는거겠지. 아! 아니다. 고용한 의사가 있다고 했다. 제로였던가? 날 치료해준사람이 아마 그 사람인것 같았다. 난 간부들이 모였다는 제로의 말을 기억해냈다. 왠지 그 간부들은 자주 모이는 사람들은 아닌것같고, 그렇다면‥, 제로랑 렌. 둘이 사는건가. 혹 다른 사람이 더 있다면 날 도와주지 않을까? 무리일려나‥. 렌의 집에 있다는 것은 렌의 사람이라는 말이니까, 날 도와줄리가 없겠지…? 거지같네. 걸으면서 이래저래 생각하며 천장 모서리같은 곳을 쳐다봤지만 역시 CCTV 같은건 없어보인다. 여전히 이 주변에서는 나 말고는 다른이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방에서 나올때 무의식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오랜시간동안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이내 경계를 풀었다.
집은 내가 상상했던 것 그 이상으로 컸다. 한참을 복도를 따라 걸은것 같은데, 걸을수록 달라지는건 그냥 웅장한 복도에 걸맞는 멋드러지게 놓여있는 온갖 꽃이 꽂혀있는 화병들이나 조각품, 상들. 아님 품격있어보이는 그림들 뿐이였다. 여러개의 큰 문들을 봤지만 열 자신이 없었기에 그냥 조용히 발소리를 죽여 지나쳐왔다. 그렇게 얼마나 더 걸었을까? 그때쯤이였다. 약간 가까운 듯한 앞쪽에 살짝 열린문이 내 눈에 보였던게….
내가 스스로 열어야하는 문이라면 왠지 겁이난다. 문 열때의 소리나 기척이 있어서 그런건지 어떤건지는 모르겠지만, 살짝 열려있는 문과 굳게 닫힌 문은 적어도 나에겐 다르다. 살짝 열려있는 문은 열어볼수 있을것같았다. 그리고 열어보고싶었다. 열수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니까 저 문 뒤는 어떤곳일지에 대한 궁금증도 생기기 시작했다. 언제나 궁금증이나 호기심은 어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존하는것 같다. 어느새 가까워진 문이 보였다. 두손으로 활짝 여는 형태로 된 문이였다. 한쪽 문은 닫혀있었지만 다른 한쪽문은 살짝 열려있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대리석의 마찰음을 최대한 줄여 천천히 열려있는 문 틈새를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복도와는 다른, 더 고급스러워 보이는‥ 거울마냥 사물이 비추어지는 대리석들이 빼곡하게 바닥에 깔려있었다. 높은 천장만큼, 높은 책꽂이가 높은곳에 있는 책을 꺼내기 손쉽게 만들어진 사다리와 함께 한쪽벽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것 같았다. 서재인가‥? 얼마나 넓을지 감이 잡히진 않지만 사물이 비춰지는 바닥을 통해 대충 안을 봤을땐 아무도 없는것같았다. 안에서는 책을 넘기는 등의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도 않으니‥, 안에 아무도 없을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할 때 쯤이였다‥.
또각또각. 내가 지나쳐 온 코너 맞은편 쪽에서 굉장히 균등하게 구두굽소리가 들렸다. 높은 하이힐의 굽은 보통 걸을때 또각또각 큰 소리가 나지 않는다. 낮은 굽일수록 굽소리가 더 크고 또렷하게 들린다. 그랬다고 남자 구두굽소리도 아닌것같았다. 여자것인데 분명‥, 이 집에 여자가 있다. 뭐지‥ 왠지 불안하고, 여자라서 더 더욱 내 존재를 들키면 안될것만 같았다. 만약 저 굽 소리의 주인이 렌과 관계가 짙은 사람이라면, 내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날 알게되서는 안될것같았다. 또각또각 정갈한 구두굽소리가 내가 있는 곳과 가까워지는게 느껴졌다. 더는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어, 무작정 열린 문틈으로 발소리를 죽여 뛰어들어갔다.
문을 닫는다면 문소리를 들을것같아서 문은 닫지도 못하고 안으로 들어가 문에 딱 달라붙었고 내가 들어오자마자 또각거리는 굽소리는 나와는 완전 가까워졌다. 그 구두굽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싶어서 문의 이음새 쪽에 살짝 벌어진 틈으로, 들키지 않게 자세를 최대한 낮추기 위해 쭈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쳐다보았다.
역시 예상대로 여자였고, 낮은 굽에 단정한 구두를 신고있었다. 양손에는 꽃병에 꽂았던 꽃을 갈은건지, 아님 갈으러 온건지 모르겠지만 싱싱해보이는 꽃이 들려있었다. 언뜻 본 얼굴과 웨이브가 진 단정한 갈색 단발머리 위에는‥ 이상한걸 쓰고 있다? 뭐지 저 차림은‥ 정말 TV에서나 많이보던 그런 차림이였다. 아주 아주 돈이 많은 부잣집 가정부들이 입는 그런 옷. 아‥
“ 저 옷을 보고 뭐라고 하더라‥ ”
난 때때로 갑자기 평소에 잘 알고있던 단어나, 잘 쓰던 말이 갑자기 기억이 안날때가 있다. 아니면 내가 당연하게 알고 쓰던 말을 글로 적을때 갑자기 내가 지금 쓴 이 단어가 맞는가 할때도 있었다. 그럴때면 옆에 있던 친구들이나 물어볼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었다. 머리를 싸매고 쭈그리고 앉아 있을 그때도 그랬다. 그 옷에 대한 단어가 기억이 날듯 말듯한 상황에 짜증나서 인상을 쓰고 머리에 손을 대고있었다. 괜한 고집이 생겨서 그 단어를 꼭 생각해 내고싶었다. 또각또각 거리는 구두굽소리가 이미 한참 멀어져갔는데도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고심하고 있을 때 였다.
“ 메이드복 ”
“ 아! 맞다! 메이드복!! ”
순간 나도 모르게 손벽을 쳤다. 목욕하다가 넘치는 물을 보고 유레카를 외치던 아르키메데스의 심정이 대강 이해가 됐었던 순간이였다. 꽉막히던 속이 시원스레 뚫리는 기분이였다. 그래 메이드복! 아, 바보같게 왜 그 쉬운단어를 생각못했지? 혼자 바보바보 중얼거리며 내 머리를 손으로 콩콩 쥐어박고 있다가, 한참 뒤 늦게 깨달았다.
방안에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팔뚝에 기분나쁜 소름이 돋아남을 느끼고 숨을 멈춘 채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가 있었다. 방의 크기를 고려하지 않은게 잘못이였다. 내가 있었던 방보다 조금 더 큰 듯한 이 곳은 마치 병원‥ 같았다. 곳곳에 병원에서나 볼 법한 의료기기들과 의료 장비들이 즐비해있었고 약간의 소독약 냄새도 공기와 함께 이 곳에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흰 가운 대신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고운 금색 머리카락의 따스한 분위기가 잔잔하게 깔려있는 남자가 서있었다‥.
아름답다. 내가 지금껏 살면서 그 어느것을 보고 이런말을 했던적이 있었을까.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예쁜 여자연예인들은 그저 ‘ 아 예쁘다 ’ 였다. 그것과는 다른 이 사람의 아름다움. 남자에게도 아름답다라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릴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 그리고 내 앞에서 싱긋 웃고 있는 이 사람에게는 렌과는 분명히 다른 무언가가 있다.
“ 저때문에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
“ 아… ”
내 앞에, 마치 태양같은 아름다운 금색이 아래로 가볍게 움직였다. 예의가 갖춰진 정중한 목인사에 당황해서 제대로 된 말도 못꺼낸 채 짧은 외마디만 입에서 맴돌았다. 웃는다. 날 부드럽게 내려다보는,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의 눈이 진실되게 웃는다. 이곳에서 눈을 뜨고 처음으로 정말 사람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다. 이 사람이라면 날 이 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함께 렌의 사람이라면 렌과 별반 차이가 없는 지독하게 차갑고 무서운 사람일거라는 생각이 겹쳐들었다. 렌에게 호되게 데어서 인지 나에게는 이 곳에 있는 모든것이, 심지어는 살아있는 생명, 생명이 없는 물건들까지 모두 거짓으로 둘러쌓인 것처럼 다가왔다. 이 사람도 믿을 수는 없다. 여기 있는 한 나에겐 더 이상 이 세상에 믿고 의지할 곳이 하나도 없다.
그가 날 부드럽게 쳐다보는 시선조차도 거짓일지 모른다. 그의 진실되게 웃는 눈 조차도 거짓으로 감싸고 있을지 모른다. 그 생각에 도달하자 마자 목뒤부터 시작해 온 몸과 신경들이 곧게 경직되어 감을 느꼈다. 손가락 마디마디까지도 굳어버린것같아‥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의 눈에 비친 나는 잔뜩 겁을 먹고는 눈치를 보며 어깨를 움츠린 채, 의도치 않게 렌에 대한 기억속 공포가 되살아나 몸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내 모습은 그가 나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라고 착각할만한 동정심과 연민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함과 동시에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착각으로 비롯되 그가 한없이 상처받고 아파하고 작아져가서‥, 그렇게 사라져갈줄은….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볼 수 없는 곳에 내버려져진 그때의 난, 얼마전까지의 난 바보같게도 전혀 알지 못했다.
잔뜩 흔들리는 불안한 시선으로 그의 눈, 그의 행동, 손끝 등 모든것을 신경을 곤두세워 예민하게 쳐다보며 공포를 마주한 사람의 본능으로 인해 뒷걸음질을 치려고 했지만 내 뒤엔 닫힌 문뿐이였고, 부들부들 떨며 문에 달라붙은 채 위태로운 시선으로 자기를 올려다 보고있는 나에게 그가 손을 뻗었다‥?
맞는다…!
공포앞에서의 사람의 본능이란 정말 무서운것같다. 아니, 몸의 반응이 무서운거라고 해야 될 것이다. 내쪽으로 뻗어오는 손을 보자마자 렌의 손이 겹쳐보이면서 맞는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들어와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양팔로 감싸고 목과 허리를 움츠렸다. 너무 무서워서 심장이 터질것같다. 온몸이 바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또 한번 견뎌내야 한다. 살기싫어. 차라리 그 때, 그 골목에서, 날이 한껏 선 차가운 칼이 내 옆구리를 파고드는 고통이 더 나았을것이다. 그 고통은 잠깐일테니까‥, 이 곳에서는 내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다. 질끈 감은 두 눈 사이로 무언가 새어나옴을 느꼈다. 이제 곧 몸 어느곳이든지 둔탁한 고통이 느껴질것이다.
그렇게 벽에 밀착되어 머리와 얼굴을 팔로 감싸고 느껴질 통증을 겁내고 있을때 쯤, 머릴 감싸고 있는 내 두 손에 둔탁한 통증 대신 섬세함이 베어있는 듯한 따뜻한 무언가가 조심스레 와 닿았다‥. 예상했던 통증이 아니였지만, 갑작스레 느껴지는 감각에 역시 움찔했지만 힘주어 감았던 눈에 힘이 점차 풀려갔고 이내 살짝 눈을 떴다. 내 손을 따뜻하게 감쌌던 그 무언가가 이어 내 손을 감싸쥐더니 천천히 머리를 감싸고 있던걸 풀어내렸다. 내 몸은 여전히 움찔거렸지만 그의 손길에 악의나 적의가 없는 듯 부드럽게 느껴져 뿌리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참으려고 했지만 눈물은 멈출 세 없이 계속 새어나왔다.
“ 미안해요.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였어요. 울지말아요 네? ”
렌과 이 사람이 지닌 다른 그 ‘ 무언가 ’ 가 뭔지 드디어 알게된거같다. 렌과 이 사람은 확실히 다르다. 우는 날 보고 적잖이 당황한 목소리로 어찌해야 될 바를 모르는게 눈물이 한가득 찬 뒤로 고스란히 보인다. 쉽게 믿으면 안될 상황이고 믿어선 안될 사람이지만 믿고싶어진다. 내 손을 잡고있는 이 사람 손에 의지하고 싶어진다. 그는 내 두 손을 따뜻하게 꼭 잡은 채 아래로 내린 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에게 눈을 맞추기 위해서 인지 나보다 두뼘여정도 큰 키로, 자신의 허리를 숙였다. 목소리 조차 따뜻하다. 목소리‥ 제로‥. 그 였다.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손길 그 날밤 날 조심스레 안아들었던, 렌이 ‘ 제로 ’ 라 칭했던 이 집의 고용의가 이 사람이다. 제로의 따뜻한 온화함 때문이였는지 어느새 눈물은 볼에 옅은 자국만을 남긴 채 말라갔다.
“ 그쳤다…. 휴 다행이다‥ 겁먹지 말아요. 아무짓도 안할테니까 ”
빨개진 눈으로 입만 삐죽거리며 땅만 쳐다보고 있는 나를 보곤, 그는 그의 한숨소리가 입소리로 들리도록 깊게 내 뱉더니 곧 다행이라며 작게 웃어보였다. 제로는 움츠러든 내 어깨를 의식해서 인지 더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뒷 말을 이어갔다. 그의 목소리에서 진심이라도 찾은건지 내 몸은 자연스럽게 어느정도의 긴장이 풀려갔다.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도 지금은 이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날 도와주건 여기서 벗어나게 해주건 아니면 렌과 똑같이 날 때리고 이 곳에 날 가두더라도 일단 지금은 이 사람밖에 없다. 딱히 이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믿고 의지할 사람이 이 사람밖에 없다는 거였을까. 나도 모르겠다. 그냥 이 사람밖에 없다. 몸에 긴장을 풀고 고개를 들어 허리를 숙이고 있는 그를 천천히 마주보았다. 여전히 그의 금발은 예쁘게 따뜻한 빛을 내고 있었다.
“ 이름‥ 알려주실래요? ”
“ …연, 가연 ”
이름을 묻는 그의 질문에 머뭇거리며 입을 떼지 못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꾹 잠겨있던 내 목소리가 나즈막히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평소의 목소리와는 달리 잔뜩 가라앉아서 듣기에 별로 좋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웃으며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 외자? 가연‥ 아주 예쁜 이름이네요. ”
그가 씽긋거리며 예쁘게 웃는다. 평소에 이름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내가, 그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 두자가 처음으로 좋게 들렸다. 마음이 편해져 간다. 여지껏 살얼음판을 걷는 것 마냥 잔뜩 얼어붙어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느슨해진것같다.
“ 내 이름은 제로에요. 제로 ”
나 역시 그의 목소리 하나하나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말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그의 이름이지만 그의 입에서 듣는 그의 이름은 나에게는 뭔가 다르게 다가왔다. 편해진 마음으로 예쁘게 웃는 그의 모습을 눈에 담자 나도 모르게 천천히 작게나마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제로의 미소는 보는이 마저 기분 좋게 만드는것같다.
“ 착하네요 정말‥ ”
내 미소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부드럽게 듣기 좋은 그의 목소리가 귓속에 잔잔히 머무름과 동시에 내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얼굴쪽으로 올라왔다. 여전히 폭력에 익숙해진 몸이 미소를 지운 채 움찔하며 고개를 틀고 눈을 감았지만 통증 대신 머리위에 무언가 포근히 올려지고 쓰다듬는게 느껴져왔다. 뿌리치기 싫다.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렇게 제로의 손길 아래에 있을 때‥.
“ …마스터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
마스터? 마스터는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제로가 말하는 마스터는 렌이다. 이 거지같은 상황에 날 몰아넣은 그가 나쁜사람이 아니라는거야? 있는 힘껏 그를 노려보면서 날 차분히 쓰다듬는 그의 손을 거칠게 쳐내버렸다. 가슴이 또 한번 먹먹해진다. 믿고싶었던 이 사람마저 렌의 편에 서서 렌을 두둔하고 있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니‥. 렌은 매우 몹시 엄청 굉장히 나쁜사람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있어서 이 세상에 있는 온갖 말을 이용해서 수식해도 족하지 않을만큼 그는 나쁜사람이다. 아니 그는 사람도 아니다. 사람이라면 이런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리가 없다.
“ ‥당신이 생각하는 ‘ 나쁜 사람 ’ 의 기준은 뭔데? ”
“ 가연… ”
“ 이 상처들 보여!? 당신이 치료했으니 더 잘 알겠지‥? 렌은 날 납치하고, 감금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렇게 폭력까지 일삼은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나쁘다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해야해!? 뭐라고 해야 되냐고!! ”
내 이름을 부르는 제로의 말꼬리를 듣고싶지 않다는 듯이 뚝 잘라내고는 온몸에 선하게 남아있는 피멍과 생채기들을 내보이며, 내 할말 다하며 발악을 했다. 그가 만약 내 입장이였다면 그 때도 렌이 결코 나쁜사람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을까? 서럽다. 그 누구도 날 이해할 수 없을것이다. 누군가 지치고 힘들어서 울고있을때 타인이 위로한답시고 건내는 ‘ 다 이해해 ’ 라는 말은 역시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상황에 그 입장에 그렇게 되어보지는 않고는 누구도 아무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지금의 내 심정은 이 세계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제로를 노려보고 있던 눈에 다시 눈물이 차들어와 시야가 흐릿해져 온다. 더 흐릿해지기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 난… 렌이 정말 싫어. 거지같게 싫어. 소름끼칠 만큼 싫어. 렌을 두둔하는 당신도… 싫어 ”
한글자 한글자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이 곳에 온 뒤로 남에게 상처주는 말을 곧 잘하게 되었다. 흐릿해진 시야가 눈깜빡임 한번에 다시 또렷해졌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도 이젠 별로 개의치 않는다. 내 분노의 표출이 눈물에 한정된다는 사실에 화가나고 울분이 터지지만 어떻게라든 감정을 표현해야 미치지 않을것 같다.
“ 렌 같은거… 정말 싫어! ”
절규 비슷한 악지름이 제로와 내가 있는 공간에 넓게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 때였다. 내 악지름과 동시에 내가 등지고 있던 닫힌 문 옆 살짝 열려있던 문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파고들며 천천히 열렸던 게‥.
“ 마스터‥ ?! ”
제로의 따스함을 한번에 사그러들게 만들만큼 지독하게 시린, 주변의 공기마저 차갑게 얼어붙게 만드는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렌‥. 다 들었어‥? 온 몸에 다시 한번 신경이 곤두서고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해온다. 렌이 전보다 더 차갑게 얼어붙은 것 같은 건 단지 내 기분탓 만은 아니였다. 제로 역시 렌의 주변공기가 싸늘해짐을 느낀 것 같았다. 목안이 칼칼해졌다. 하지만 침 조차 심킬여유가 없다.
렌은 싸늘해진 눈동자로 제로에겐 시선 한번 주지않고 내 눈만 쳐다보며 발걸음을 떼내려 한다‥. 무섭다. 렌은 지금 분명 화나있다. 렌이 화났다는게 내 두눈에 또렷하게 보인다. 싫어…,
“ 다가오지마… ”
울음섞인 목소리로 간절하게 말하며 렌을 피해서 뒷걸음질 쳤다. 렌이 한걸음씩 다가올때마다 난 두걸음씩 물러났다. 제로에게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 처럼 온몸의 신경을 렌의 행동하나하나에 예민하게 곤두세우곤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빠르게 도망쳤다간 렌의 행동에 반응하기 어려워질것이다. 렌의 손아귀에 잡히면 분명 또 차라리 죽는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고통스러워 질거야‥.
피가 마르는 기분이 바로 이런것이다. 미칠것같다. 내가 아주 큰 잘못을 저질른것같다. 도망쳐야 된다.
두걸음 정도의 폭을 두고 렌을 등지고 달아나려던 때에 ‥,
“ 아앗! ”
고통은 절대 익숙해질수 없는것같다. 인간이 어느 상황, 어느 감각등에 익숙해져가지만 통증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두피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등지고 있던 렌의 내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잡아챈 손에 의해 머리가 아래쪽을 향해짐과 동시에 뒤로 누워지듯 엎어졌다. 한손으로는 렌의 손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내 머리카락을 감싸 잡았지만 고통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고통으로 인해 몹시 일그러진 눈 사이로 한없이 높은 천장과 샹들리에 등 사치스러운 이 집의 모든것이 눈에 들어옴과 동시에 렌의 식은 얼굴도 보였다. 내 뺨을 거세게 내리쳤던 그 때와 똑같은 눈이다‥ 싫어, 싫다고!
“ 으…, 잘못했어요! 다신 안그럴게요.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잘못했어요 ”
여전히 머리카락을 붙들리고 꼴사납게 누운 채 고통에 신음하며 울며 불며 렌한테 두손 싹싹빌며 애원했지만 렌은 아주 미세한 미동조차 없었다. 그 때와 똑같이 너무 아파서 창피함과 수치스러움도 못 느낄정도였다. 제로가 쳐다보고 있는지 아니면 이 자리에 없는지 조차 생각할 겨늘조차 없었다. 무조건 렌의 억척같은 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발버둥과 절규에도 꿈쩍안하고 오히려 날 더 처절한 절벽으로 내몰아버리는 렌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 지금보다 더욱 더 날 싫어하게 만들어주지 ”
렌의 입가에 머문 미소가 살기를 띈 채 굳어있었다.
- 세경말 -
원래 이번편에선 렌의 출연이 없었던 편인데
렌이 빠지니까 역시 뭔가 이상해요.
달달한 분위기는 제로가, 거지같은 분위기는 렌이
둘이 대비되는 이미지를 만들기위해 노력중인데
역시 달달한 분위기를 지닌 남자는 써본적이 없어서 그런지 힘들어요T_T
늦은 만큼 분량은 길게길게!
9번의 추천이 누군지 알수만있다면 업어드릴텐데T_T 왜 추천목록은 없는건가여!
반성하세요 다음.
사랑해요 여러분♥
추천감사합니다
댓글감사합니다
저의 사랑과 정성이 가득담긴 업뎃쪽지를 받아보고 싶으시다면 거침없이 댓글에 ' 소다 ' 를 적어주세요.
(+) 여러분 댓글에 댓글을 달지 않는다고 안읽거나 소홀히 읽는 그런게 아니에요!
너무 감격스러워서 스크랩해서 스크랩북으로 만들어 갖고다니고싶어욯ㅎㅎㅎㅎㅎㅎ♥
원하신다면 댓글 하나하나에 마음을 다해 댓글을 달아드리겠습니당
첫댓글 소다/완전 기다렸어요~!>..<!!역시나 다음편도 기대되여~!
소다/ 역시 절 실망시키지 않는 작가님의 미친 렌이란 이런걸까요ㅋㅋ 추천고고
소다 역시 렌은 못됬네요 근데도 왜 렌이 좋은 걸까요???ㅠㅠ
소다/완존재미!!대박나세요><
소다/ ㅎㅎ 재밌어요~ 그치만 쪼금 짧은듯하네요...ㅎ 담편 기대할께요~
소다... 잘 읽었어요^^ 담편 너무 궁금해요...
ㅠㅠ제로 너무 멋있네요
소다.. 진짜 무서워요!!
렌이 여자애를 사랑하게되는 내용은 아닌거죠??
ㅠㅠ 다음편 기다릴게요
소다
완전기다렷어요!!!!!
다음편 기대*.*할께요!!!
다음다은 편 원츄!!!
재밌어요 ㅎㅎ 다음편~~
소다 렌과의 달달도 나왔으면!!!
소다 담편기대요
담편도빨리보고싶네요.......^^
#소다#
오늘 정주행하고왔서요헤헤 어떡해요...소설이너무제스타일입니당ㅠ..미친렌...하아..갖고싶네욯ㅎ
앞으로도 미친렌의 모습더 보여주세용....하하..제취향이....하....
여튼 다음편 벌써부터 보고싶네요ㅛ어떻게 기달리나.....렌빨리보고프네요..앞으로도 응원할테니
힘내세용!!!!^^
소다~~담편 기대함다.~~~
소다/ 재미있어요ㅠㅠㅠㅠ둘이 언젠가는 달달한날이...올수잇겟죠?ㅠㅠㅠㅠㅠ아무튼 다음편 기대되요!!!!!!분량을 조금ㄷ만더길게써ㅏ주셧으면좋겟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
소다 오마이갓 렌이... ㅜㅜ무서운사람이야ㅜㅜㅜㅜ다음편고고!
소다
소다..아 ㅠㅠ
소다 재밌어요~
소다 두사람 언젠가는 잘 되겠죠 흥흥흥
소다/너무재미있어요 다음편도 궁금하네요~ㅎ
렌 얼른 연이때리는거그만둬.....얼른둘이잘되야징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