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부르고뉴(버건디)는 부르군트족의 '부르군트 왕국'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부르군트 왕국은 프랑크 왕국에 복속되어 프랑크 왕국 소속이다가 샤를마뉴 사후 왕국 분할때 요렇게 갈라집니다
그리고 중간에 여러가지 일을 거쳐서
서프랑크 왕국 지역은 프랑스의 부르고뉴
중,동프랑크 왕국 지역은 상하부르고뉴 -> 아를 왕국 -> 신성로마제국 직할(황제가 부르고뉴/아를 왕위를 겸함)이 됩니다
여기서 프랑스쪽의 부르고뉴 공국 Duchy of Burgundy과 신성로마제국쪽의 부르고뉴 자유국 Free County of Burgundy - Franche Comté de Bourgogne 혹은 Freigrafschaft Burgund 이 갈리게 됩니다.
여기서 프랑스쪽의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왕실 직할령이 되었다가 프랑스 왕의 막내아들인 로베르 (크킹2 1066 시나리오에서 부르고뉴 공작)에게 주어지고 이 가문은 (카페-)부르고뉴 가문이 됩니다. (후에 후손중 하나가 레콩키스타에 참여했다가 포르투갈의 왕이 되고 사생아 가문인 아비스 가문, 그의 사생아 가문인 브라간자 가문으로 이어집니다)
신성로마제국쪽의 부르고뉴 자유국은 이탈리아 왕이었던 이브레아 가에 의해 통치되다가 (이브레아 가문은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왕이 되기도 하고 그의 사생아 가문인 트라스타마라 가문은 합스부르크에 넘어가기 전까지 카스티야-레온-아라곤-나폴리의 왕을 지냅니다.)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가 차지했다가, 다시 이브레아 가에 통치되다가, 이브레아 가의 잔느가 프랑스 왕 필리프 5세와 결혼(1307)해서 낳은 딸 잔느가 (카페-)부르고뉴의 오드 4세와 결혼하게 되었고 그의 손자인 (아들은 일찍 죽음) 필리프 드 로브레가 부르고뉴 공국과 부르고뉴 자유국을 합치게 됩니다.
하지만 필리프 드 로브레는 자식을 남기지 않고 일찍 죽었고, (15세, 1361년)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왕(장 2세, 1328년부터 프랑스 왕은 발루아 가문)에게 다시 귀속되었으며, 부르고뉴 자유국은 필리프 드 로브레의 할머니인 잔느의 여동생인 마르그리트 1세(1310년 출생, 1382년 사망)에게 넘어갑니다. (프랑스 왕 필리프 5세의 딸)
마르그리트 1세는 플랑드르 백작인 루이 당피에르와 결혼한 상태였고 이에 따라 부르고뉴 자유국은 플랑드르 백작의 영토가 됩니다. 이때 마르그리트 1세는 그의 손녀였던 마르그리트 (후에 플랑드르의 마르그리트 3세/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 2세)를 필리프 드 로브레와 결혼시켰으나 (당시 어린 마르그리트는 7세) 필리프 드 로브레는 위에서 말한대로 일찍 죽었습니다.
한편 장 2세는 부르고뉴 공국을 막내 아들인 필리프에게 주는데 그가 호담공 필리프 2세고 여기서부터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이 시작됩니다. (1364) '호담공'은 Bold 혹은 le hardi를 번역한 것인데, 여기는 필리프 2세가 14세때 장 2세를 따라 전쟁에 나가서 용맹을 보여줬다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여기까지 썼는데 그 후는 간결하게 잘 정리된 글이 있어서 링크로
http://blog.cyworld.com/aja007/6531989
첫댓글 링크글 좋내요 덕분에 분할 상속을 왜했는지 궁금했었는대 궁금증 잘 풀고갑니다.
이 글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정말 발루아-부르고뉴 입장에서는 루이 11세가 부왕 샤를 7세와 대립해서 자기네 영지로 망명했을 때 싹을 잘라버렸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외교/정치적으로 미숙한 샤를이 공위에 오르지 않거나...
선량공이 영국한테 붙고 아라스 화약을 맺지 않았으면... 이란 생각도 해봅니다
http://forum.paradoxplaza.com/forum/showthread.php?743333-Divergences-of-Darkness
@Acela 근데 그때쯤이면 이미 잉글랜드가 막장 상태가 된 것과 달리 프랑스는 잔 다르크를 필두로 완전 상승 기세를 타고 있어서 누가 봐도 잉글랜드가 망할 거라고 생각했지 않을까요? 물론 부르고뉴가 아예 전력으로 싸우겠다고 하면 그러지 못할 것은 없었을 듯 하지만...
@DarknessEyes 아라스 화약이 부르고뉴가 잔다르크 잡아서 영국에 넘긴 이후니까 혹시 모르죠
용담공이 전쟁중에 죽지 않았더라도 라인 일대 통일국가 형성은 요원했겠군요..
대단히 어려운 문제였을 겁니다. 그런 어려운 문제를 하필 외교쪽에는 영 젬병인 샤를이 맡게 되면서 더 꼬인 감이 크죠. 아라스 조약으로 인정된 프랑스 왕의 종주권을 거부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이를 지원해줄 쓸만한 외교적 동지를 구하지 못한 채 사방팔방으로 어그로를 끌고 다녔으니...유일한 동맹인 잉글랜드는 그를 도와 프랑스와 적극적으로 전면전을 할 의향이 없었고, 황제 프리드리히에게 왕위를 받고자 했던 계획도 결국 실패했고요. 이런 와중에 루이 11세가 뛰어난 외교 수완으로 샤를의 적들을 하나로 묶고 자기가 뒤에서 지원했던 것과 달리, 샤를은 공익 동맹의 수장을 맡긴 했으나 이들을 제대로 결집하지 못했죠.
말머리 달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