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우당 이회영 선생을 생각하며(작가 한지훈)
2011년 6월 10일은 신흥무관학교가 생긴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우리 독립운동사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된 독립군장교만 2100명이 넘는다. 이 학교가 없었다면 사실상 우리 독립운동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위대한 학교를 설립한 사람이 바로 우당 이회영이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조선의 내노라하는 대가 집안 자손이었지만 한일합방이 되자 그는 그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만주로 거처를 옮긴다. 그는 6형제들과 함께 가족 60여명을 이끌고 만주로 거처를 옮긴다. 가족들의 모든 재산 현재가치로 약 600억(추정)을 정리하고 그는 동토의 땅으로 발길을 옮긴다.
조선 대가집 아들 이회영은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어떤 순간에도 자유가 주는 의지적 희열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노비문서를 태우고 노비들과도 격이 없이 지냈다. 심지어 나이 많은 노비에게는 존댓말을 쓰기도 했다. 그는 본인의 의지대로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뜻대로 살다간 선구자였다. 그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지켜낸 사람이다. 우당 이회영 선생이 위대한 점은 거부할 수 없는 편안함의 유혹을 이겨내고 신념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는 1932년 뤼순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5일 만에 목숨을 잃었다.
지금은 시대가 많이 변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회영과 같은 사람들이 살다간 시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제 스마트폰을 자유롭게 쓰는 젊은이들에게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는 고리타분한 이야기처럼 되어 버렸다.
이회영은 분명 다시 새겨볼 인물이다. 나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이회영으로 부터 우리는 살아있는 투혼의 정신을 배울 수 있다.
우당으로 부터 본받아야 할 가장 큰 가치는 신념을 끝까지 지켜 냈다는 점이다.
그도 인간이기에 일본으로부터 쫒기는 신세가 두렵고 힘들었을 것이다. 인간적으로 모멸감도 여러 번 당했을 것이다. 그는 일본과 조금만 타협했어도 그냥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신념을 지켜낸 인물이다. 너무 이상적인 사람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의 의지가 너무도 강하다.
조금만 힘들고 어려워도 금새 꼬리를 내려버리는 무기력한 현대인에게 우당 이회영은 거대한 신념의 기둥이다. 카드사에서 연체통보 문자만 와도 벌벌 떨고, 시장에서 1,000원을 안 깎아 준다고 화를 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부끄러워지기 시작한다.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때때로 고통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신념을 지켜 낸 모든 위인들은 일신의 안위보다는 정신을 지켜낸 사람들이다.
어떻게 이렇게 살수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어리석은 질문이다. 이회영은 인간의 진짜 행복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만주벌판 차디찬 골방 안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고 온갖 압력과 회유에도 지조를 잃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행복감은 질서 잡힌 정신에서 온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사상과 정확한 신념이 없다면 그저 살기위해서 살아갈 뿐이다.
내 정신을 쉽게 팔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내 정신을 바로 세우고 그것이 바른 일이라면 끝까지 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무질서한 현대사회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이회영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그 업적이 많이 가려졌던 인물 중에 한사람이다. 그가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최근에 와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회영을 사상적으로 평가 할 생각은 없다. 단지 이회영선생이 끝까지 포기 하지 않으려 했던 자유,평등의 거대한 의지를 꼭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