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경經 : 법으로 다스릴 때 잊어서는 안 될 여섯 가지
1. 칭찬의 말을 살피라
현명한 군주의 도道는 마치 유약有若이 복자宓子에게 응답한 것과 같다. 군주가 [신하의] 말을 들을 경우에는 변설의 교묘함을 칭찬하고, 그 행동을 볼 경우에는 그 심원함을 훌륭하게 여긴다. 그래서 여러 신하들이나 사민士民들이 말하는 언어는 빙빙 돌리는 듯하고 과장되지만, 그들의 행동은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있다.
그래서 묵자가 나무로 된 연을 만들었을 때의 이야기, 노래를 불러 무궁(武宮, 무예을 강의하는 장소)을 쌓았을 때의 말을 예로 들 수 있다.
약이 되는 술과 충고의 말은 명군이나 현명한 군주와 성스러운 주군만이 홀로 알고 있는 것이다.
2. 실제 효용을 목표로 삼아라
군주가 [신하의] 말을 들을 경우 [실제] 효용을 목표로 삼지 않으면 말하는 자는 대부분 가시나무로 조각을 한다거나 백마가 말이 아니라는 설을 펼 것이며, 정해진 과녁을 맞추게 하지 않으면 활을 쏘는 자가 모두 예羿와 같이 될 것이다.
군주의 유세에 대한 태도는 모두 연나라 왕이 도를 배우는 것과 같고, 장황하게 유세하는 자는 모두 정나라 사람이 나이를 가지고 다투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말을 섬세하고 세세하며 미묘하게 하고 어렵게 하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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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진실된 것을 구한다면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3. 선왕을 모방하지 말고 나랏일을 살펴라
서로 남을 위해주는 것이라 여기면 책망하게 되지만, 자신을 위하는 것이라고 여기면 일이 잘 실행된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원망하고 책망하는 경우가 있고, 사람을 고용해서 경작을 하게 하려면 맛있는 고깃국을 내놓는다.
이에 대한 예로는 문공이 [송나라를 토벌하면서] 먼저 [그 나라] 왕의 죄를 퍼뜨린 일과 구천이 [오나라를 토벌할 때] [군주가] 여황대如皇臺(=고소대姑蘇臺)를 건축한 이야기가 있다. 그러므로 환공은 채나라에 대한 노여움을 [마음속에] 감추고 초나라를 공격했고, 오기吳起는 전쟁에서 실적을 생각하면서 [부하의] 상처를 [입으로] 빨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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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에게 선왕의 이름을 빌려 막막한 방법을 실행하게 한다면 아마도 오늘날에는 맞지 않을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해서는 고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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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실질에 맞게 예우하라
이익이 있는 곳에는 백성이 돌아오고, 명성이 드러나는 곳에서는 선비들이 목숨을 바친다. 이 때문에 공적이 법에 어긋나는데도 상을 더해주면 군주는 아랫사람에게 이득을 얻을 수 없고, 명성이 법에 어긋나는데도 명예를 더해주면 선비는 명성을 빛내는 때 힘쓰고 군주를 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장中章과 서기胥己가 벼슬하자 중모中牟의 백성들은 밭을 버리고 학문을 따라 배우려는 자가 고을의 절반이나 되었고, 평공平公이 [숙향叔向을 모실 때] 장딴지에 통증이 오고 발이 저려도 감히 자리를 흩트리지 않자 진晉나라에서는 벼슬자리를 버리고 몸을 기탁하는 자가 나라의 절반이나 되었다.
이 세 명의 선비라는 자는 말한 것이 법에 부합하면 관부의 서적에 실려 있을 것이고, 행동이 일에 맞는다면 법령에 따르는 백성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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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솔선수범도 적절해야 한다
시경詩經에서 말하였다.
“[군주가] 몸소 행하지 않고 직접 행하지 않으면 서민들은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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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군주와 신하와] 각자의 직분을 명백히 하지 않고 일의 성과를 추궁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이 몸소 아랫자리(신하가 할 일을 비유함)에 임한다면 반드시 [수레를] 내려 달려가고, [위나라 소왕이] [법전을 읽다가] 앉아서 잠이 들고, 자신의 신용을 가리기 위해 평민 복장을 한 꼴이 된다. 공자孔子는 [이 일을] 알지 못했으므로 [군주는] 사발과 같고 백성은 사발에 채운 물과 같다고 하였다.
추군鄒君도 [이 일을] 알지 못했으므로 먼저 자신을 다스렸다. 현명한 군주의 도는 숙향叔向이 사냥해온 짐승을 나눈 방식(공이 많고 적음에 따라 나누는 방식)과 [한나라] 소후昭侯가 청탁을 들어주지 않는 것과 같다.
6. 작은 믿음을 지켜라
작은 믿음이 이루어져야 큰 믿음이 세워지므로 현명한 군주는 믿음을 쌓는다. 상벌에 믿음이 없으면 금령은 시행되지 못한다. 이에 대한 예로는 [진나라] 문공이 원原을 공격한 일과 기정(箕鄭, 진나라의 대부)이 기근을 구한 방법이 있다. 이 때문에 오기吳起는 [식사하기로 한] 옛 친구를 기다렸다가 식사를 했고, [위나라] 문후는 약속한 사냥터 관리인을 만나 사냥을 하였다. 그러므로 현명한 군주가 믿을 나타내는 일은 증자曾子가 돼지를 잡은 일과 같다. 그 근심이 되는 예로 초나라 여왕이 경계하는 북을 울린 일과 이회李悝가 [좌우의] 군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적이 온다고 속인 일이 있다.
*한비자(韓非子, 기원전 280~?, 성은 한韓, 이름은 비非인데, 한비라는 이름을 높여 한비자라 부른다)는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법가사상가로 그가 지은 책이 ‘한비자’인데, ‘한비자’는 군주론과 제왕학의 고전으로 유명하며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죽으면서 어리석기로 알려진 후주의 유선에게 읽도록 한 책이 ‘한비자’였다고 합니다.
*한비자는 유학자인 순자의 문하에서 이사와 함께 학문을 배웠으나, 이사는 자신의 능력이 한비자만 못하다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한비자’가 세상에 나온 뒤 진나라 시황제가 우연히 이 책을 읽고 감동하여 한비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말하여 한비자가 진시황을 만나게 되었는데, 객경 벼슬에 오른 이사는 동문수학한 친구 한비자가 진시황의 총애를 받는 것을 꺼려 그를 모함하여 진시황은 이사의 말을 듣고 한비자를 죽인 후 많이 후회하였다고 전해지고, 한비자는 본래 신하가 군주에게 유세하기 어렵다는 점을 터득하고 난언難言, 세난說難 등 여러 편에서 진언의 방법을 자세하게 말했지만 정작 자신은 죽임을 당하는 화를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위 내용은 문학박사이신 김원중 교수님이 옮기신 ‘한비자’ 권11 제32편 외저설 좌상(外儲說左上 : 법으로 다스릴 때 잊어서는 안 될 여섯 가지) 중 ‘경經 : 법으로 다스릴 때 잊어서는 안 될 여섯 가지’을 옮겨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