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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대성당 기념 미사, "축하받는 날 아닌 감사하는 날"
1974년 9월 26일. 명동 성당에서 열린 ‘순교자 찬미 기도회’는 사제들의 첫 시국선언 현장이 됐다. 지학순 주교 구속에 대한 항의와 불의한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이후 군부독재 종식과 민주주의 회복, 평화 통일, 경제 정의를 위한 목소리를 내고, 온갖 시국사건 사회적 참사로 희생된 이들과 그 가족들의 곁에 서 왔다.
그로부터 50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은 23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5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하며, 함께 걸어온 이들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한국 교회 첫 시국선언이 있기 직전, 사제들이 명동대성당 지하 경당에서 순교자 찬미 기도를 바쳤던 것을 전통 삼아, 이날 사제단은 지하 경당에서 기도를 바친 뒤 입당했다.
미사 전, 명동대성당 지하 경당에서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사제단. ⓒ정현진 기자
입당하는 사제단. ⓒ서경렬
“하느님의 은총으로 5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함께한 모든 이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우리의 50주년을 다시 주님께 바칩니다.”(문규현 신부)
이날 미사는 문규현 신부(전주교구)가 주례하고, 각 교구, 수도회 사제 90여 명이 함께 집전했다. 또 신자, 수도자, 이웃 종교인, 시민들, 특히 지난 역사 안에서 사제단과 함께 싸우고 고통받았던 이들, 이태원참사를 비롯한 사회적 참사 희생자 가족들이 성당을 가득 채웠다.
함세웅 신부는 강론 시작에서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살았던 모든 이를 위한 묵상을 요청하면서, “50주년 미사는 우리 모두가 정의의 옷으로 갈아입는 시간이며, 정의를 실천하고 정의를 보여 주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사목헌장 1항 “모든 이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라는 고백을 깨닫고, 이를 통해 세상과 동고동락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존재 이유, 신앙의 이유라는 그는, 민청학련을 비롯한 불의한 사건들의 관계자와 50년을 함께했던 선배, 동료, 후배 사제들, 시민들과 이웃 종교인들, 신자와 수도자들을 기억했다.
함 신부는 “사제는 정의의 옷을 입은 사람이다. 지난 50년 사제단은 부족했지만 나름대로 끊임없이 예수의 길을 따르도록 노력했다”며, “구원 신앙의 핵심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빚졌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빚은 오직 희생과 헌신과 사랑으로만 갚을 수 있다. 오직 예수께서만 갚아 주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구원사의 핵심은 뜻밖의 사건이었고, 하느님의 선이었다. 성경은 끝까지 성실하게 살아남은 자들의 희망의 토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 희망의 토대가 될 수 있도록 함께 다짐한다”며, “하느님 안에서 십자가를 지고 성령의 힘으로 순교자들과 순국선열들의 뒤를 따라 50년의 중턱에서 또 다른 50년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미사는 문규현 신부가 주례하고 90여 명 사제가 함께 집전했다. ⓒ서경렬
50년을 함께 걸어온 이들이 명동대성당을 가득 채웠다. ⓒ정현진 기자
“당장은 악이 승리하는 듯 보여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악인들은 풀과 같고 의인들은 나무와 같습니다. 풀과 달리 나무가 자라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므로 불의의 기세에 놀라지도 눌리지도 맙시다.”(50주년 성명서 일부)
사제단은 이날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 50주년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첫 머리에서 “50년 전 갓 서른을 넘긴 젊은 신부들이 안락한 성소를 박차고 서울로, 명동으로 집결했던 것은 주교 지학순의 수감 때문만도 아니요, 독재자 박정희의 폭압 때문만도 아니었으니 그것은 이곳 지하묘소에 잠들어 계시는 순교자들의 비상호출 때문이었다고 우리는 믿는다”고 밝혔다.
이들은 “우리가 '제1시국 선언문'에서 천명했던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헌정 회복/ 국민 생존권과 기본권 존중/ 서민 대중을 위한 경제정책 확립은 지금 짓다 만 밥처럼 이도저도 아니게 돼 버렸다”며,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다시 한번 민주의 이름으로 크게 일어설 때가 왔다”고 선언했다.
사제단은 “세상을 치명적으로 병들게 만드는 사회적 현상 하나는 종교가 공정을 외면하고 정의구현이라는 본연의 직무를 팽개치는 태만이다. 공정은 지상에 구현되어야 하는 하늘의 명령이고, 정의는 그것을 바르고 의롭게 펼치는 사람의 도리”라며, “이른바 ‘대붕괴의 시대’를 맞이한 오늘, 교회마저 세상의 슬픔과 번뇌를 외면한다면 사람들이 서러운 눈물을 어디서 닦을 것인가. 우리부터 사제단을 결성하던 때의 순수하고 절실했던 초심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지금이라도 우리가 갈 길이 어느 쪽인지 정해야 한다. 너도 나도 하나에서 나온 ‘한 생명’이니 살림도 ‘한 살림’이어야 한다”며, “더 늦기 전에 우리 사이의 불신과 미움을 포용과 이해로 바꾸자. 너와 나의 뜨거운 사랑을 상생의 에너지로 바꾸기만 하면 얼마든지 쳐낼 것을 쳐내고, 버릴 것은 태워서 거룩한 선열들이 꿈꾸던 나라를 향해 전진할 수 있다”고 요청했다.
(왼쪽부터)사제단에게서 감사패를 받은 안유 씨와 전병용 씨. ⓒ서경렬
미사 뒤에는 50주년 축하 메시지와 공연이 이어졌다. 축하식 중에 전병용(바르나바) 씨, 안유(루까노) 씨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전병용 씨, 안유 씨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세간에 알리는 데에 큰 몫을 했던 이들이다. 전병용 씨는 당시 남부구치소 교도관, 안유 씨는 보안계장이었다. 이들은 박종철 고문 치사에 관여한 경찰이 수감되면서 경찰의 조직적 은폐 정황을 포착하고, 남부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이부영 씨에게 이 사실을 전달했다. 이는 또 다른 교도관을 통해 서울대교구 김승훈 신부와 함세웅 신부에게 전해졌다. 김승훈 신부는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 미사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됐다는 사실을 발표했고, 이는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사제단은 이들에게 “오랜 세월 독재 권력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감옥과 바깥을 하나로 이어 준 의인”이라며 감사를 표했다.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도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서면으로 전한 메시지에서 그는 “신념과 구호에 그치는 신앙이 아닌 사회 속에서 그늘진 이들과 함께하며 야전병원으로서 교회의 사회복음화 사명을 충실히 수행한 사제단의 노고와 헌신에 깊이 감사한다”며, “앞으로도 하느님의 사제로서 성 교회의 복음 정신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정의와 평화를 위해 정진하기를 바라며, 무엇보다 인권사각 지대에 놓인 여러 계층의 소외된 이들을 돌보며, 구체적 사랑을 전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매우 긴급하고 절박한 과제인 하나뿐인 공동의 집, 지구를 살리는 생태환경 보존을 위해서도 힘을 모아 달라”고 당부했다.
한편 사제단은 11월 18일 5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열며, 이 자리에서 지난 역사를 정리하고, 다양한 시각의 평가를 통해 앞으로의 길과 방향을 함께 모색할 예정이다.
50주년 기넘 미사에 참가한 사제단. ⓒ서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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