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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순국선열
내외귀빈 기념촬영
기 념 사
공사다망하심에도 불구하고 오늘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하 반민법) 제65주년 기념식에 참석해주신 내외귀빈 및 애국지사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원래 반민법 제정일은 1948년 9월 22일이었으나 추석연휴로 인하여 금일 기념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바쁘신 일정 중에도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내외귀빈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또한 이런 뜻 깊은 자리에서 불초소생이 기념사를 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며, 먼저 민족정기 구현과 대한민국의 국가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헌신하신 우국지사 선열들께 감사와 추모의 마음을 전하는 바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무척 혼탁한 세상이 되어 있습니다. 사회정의는 실종되고 오로지 황금만능주의만 팽배해졌고, 의롭지 못한 권력에 빌붙어 오로지 일신의 부귀영달만을 누리려는 자들이 지배계층이 되어 선량한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된 근본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요?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일본인들은 물러갔습니다만, 일제의 견마(犬馬)가 되어 동포들을 착취하며 군림했던 친일파들은 그대로 남게 되었습니다. 친일파들의 몸은 한국인이지만 정신은 일제의 개가 된 그 자체였습니다. 광복이 되자 그들은 일단 몸을 움츠리고 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광복은 되었으나 우리는 다시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그 기간 중 친일파 청산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려 했으나 오히려 친일관료 출신들을 중용하며 친일청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던 미군정의 거부로 친일파 청산 문제는 정부수립 후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정부수립이 되자마자 국가정의를 갈망하던 의원들에 의해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특위’가 구성되어 반민족행위자 7천여 명을 파악하고 검거활동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민족정기와 국가정의에 바로서는 것을 본 많은 국민들은 찬사를 보내며 성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 아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과 미군정을 거치면서 이미 기득권층이 된 친일파들은 이런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반민특위가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을 체포하자 본격적으로 움직여 반민특위위원들을 암살하려 했고, 국회프락치사건을 일으키고, 반공대회를 열어 이들을 빨갱이로 규정했습니다.
급기야 1949년 6월 6일 이승만 대통령은 경찰병력을 투입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고 특경대원들을 체포 구금하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이어 특위위원들의 가택을 수색하고 특위사무국과 재품부의 관련서류를 압수하여 이후 반민특위 활동은 급속도로 위축되었습니다. 그토록 대다수 국민들이 열망하고 갈망하던 민족정기와 국가정의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친일비호세력을 주축으로 새로운 특위가 구성되어 반민특위의 숭고했던 활동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민족정기와 국가정의의 상징인 반민특위를 무력으로 무너뜨린 친일세력들은 일제를 주인으로 떠받들다 주인으로 우뚝서는 광복을 맞아 급기야 친미세력으로 변모하며 자신들의 입지를 확실히 굳히고 승승장구하여 지금까지 장기간 대한민국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팔고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동포를 짓밟은 친일파들을 한 명도 제대로 척결하지 못한 것은 해방된 우리 민족의 수치이자 세계사적인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친일파들이 지배세력이 됨으로써 반민족, 반민주, 반역사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어 국가의 미래에 먹구름까지 끼게 되었습니다.
반민특위가 와해됨으로써 우리나라의 경우 반민족행위자에 대해 단 1건의 사형집행도 없었습니다.
이에 반해 2차 대전 후 프랑스는 4년간의 짧은 기간 중 나치에게 부역한 6,700여 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렸고 그 중 767명을 처형하였습니다. 또한 4만여 명에게 징역형을 선고하고 이들의 시민권을 박탈하였고, 당시 근무했던 공무원 중 25만여 명이 숙청대상이 되어 해임파면 등을 당했습니다. 프랑스 드골 대통령은 “훗날 프랑스에 다시 국가적 위기가 닥쳐온다 해도, 민족반역자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수만 명에 이르는 부역자들을 처단하여 다시는 그런 악질 국가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였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희 한국독립유공자협회는 젊은 시절 가족을 내팽개치고 목숨 걸고 일제와 싸웠던 독립유공자들이 모인 단체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친일파의 후손들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이 이대로 흘러가는 것을 결코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있으나 이제는 몸이 늙어 그것도 여의치 못한 실정입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우리에게 반민특위라는 숭고한 활동이 있었고, 그러한 국가정의를 무너뜨린 세력이 아직까지 이 나라의 기득권층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시기를 간곡히 바라오며, 이 나라의 민족정기와 국가정의가 하루 속히 바로 세워지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행사를 준비한 모든 분들이 사명감을 갖고, 역사적 과제인 민족반역자 처벌이라는 중대 과제를 묵과할 수 없음을 확고히 인식하여 오늘 행사를 훌륭히 준비한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3년 9월 23일
한국독립유공자협회 회장 임 우 철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임우철회장
좌로부터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임우철 회장, 이대산 애국지사, 오희옥 애국지사, 강석현 상근부회장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축사를 대독하는 기동민 정무부시장
김명수 서울특별시의회 의장 축사를 대독하는 이정찬 서울시의원
축사하는 서울특별시의회 김인호 재정경제위원회 위원장
축사하는 김원웅 단재신채호선생기념서업회 회장
결의문을 낭독하는 학생대표 어윤하, 청년대표 이동재
사회를보는 심종환 안나운서, 조안나 실장
오늘에 돌아보는 반민특위의 의미
김삼웅(전독립기념관장)
독일 지금도 나치 잔당 찾기운동
지난 7월 중순 독일의 베를린ㆍ함부르크ㆍ퀼른 등 주요 도시에 은신한 나치 전범자에 대한 신고를 촉구하는 포스터 2,000여 장이 내걸렸다. 포스터에는 “너무 늦었지만 너무 늦지 않았다. 수백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나치전범에 의해 희생당했다. 가해자 일부는 자유로운 상태이며, 생존해 있다. 그들을 체포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에서는 지금도 나치전범과 친나치 민족반역자들을 체포하고 법정에 세운다. 반민족행위자들에게는 공소시효를 두지 않고 있다. 이것은 역사정의를 통해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양식의 발로이고, 정의와 진리를 수호하는 국민교육의 지침이 되고 있다. 우리와 비교하여 부끄럽고 본받고 싶은 정신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불의와 부정, 비리의 큰 줄기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그들과 그들의 후손이 우리 사회의 주역이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해방된 100여 개의 국가 중에 민족반역자를 처리하지 못한 채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국가의 주요 포스트를 장악하고 세습한 나라는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다.
해방 70주년을 2년 앞둔 시점, 일제강점 35년에 배가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친일청산이 시대적 화두로 이어지는 것은, 항일전선에서 희생된 선열들과 생존지사들에게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도 정부수립 후 국민의 여망에 따라 그리고 역사적 소명에 따라 반민법을 제정하고 반민특위를 구성하여 민족반역자들을 심판대에 올렸다. 그러나 친일세력의 등에 엎힌 이승만 대통령은 막중은 역사적 소임을 다하기는커녕 반민특위를 짓밟고 친일파들을 중용하면서 우리 현대사는 오염되기에 이르렀다.
반민법 제정과 반민특위 와해공작
오늘은 1948년 제헌국회가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법률 제3호로서 제정한 지 제65주년이 되는 날이다. 반민법은 제헌헌법 제101조에 의해 국회에 반민법 기초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민의를 수렴하고, 많은 논의 끝에 제정되었다.
반민법은 1946년 미군정 법령 제 118호로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설치되어 ‘민족반역자ㆍ부일협력자ㆍ간상배에 특별법’을 제정하였으나 미군정이 선포를 금지함으로써 중단되었다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국회에서 제정한 것이다.
외적에게 나라를 팔고,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을 탄압하고, 일제에 협력한 악질 친일파ㆍ민족반역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반민법이 해방되고 3년이 지난 뒤에야 제정되었다. 하지만 반민특위의 활동은 쉽지 않았다.
반민특위 활동은 출범하면서부터 친일세력의 심한 반발을 받았다. 특히 검거선풍이 심해가면서 이들의 방해공작이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일제경찰출신으로 경찰에 자리잡고 있던 자들이 반발세력의 중심이었다.
그들은 풍부한 자금과 빠른 정보, 폭넓은 조직으로 반민특위의 활동을 화해시키려 들었다.
이들이 노린 1차적인 표적은 김상덕과 김상돈이었다. 반민특위 중에서도 가장 열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나 정부의 정책에 앞장서서 반발한 관계로 친일세력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로 보였다.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는 3월 초 김태선 시경국장을 찾아가서 반민특위를 와해시킬 계획을 보고하고 먼저 김상덕, 김상돈, 김명동 등 특조위원들에 대한 내사를 극비리에 진행시켰다. 김상덕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 너무도 뚜렷하여 허물을 찾을 수 없게 되자 김상돈의 연고지인 서울 마포일대를 샅샅이 뒤져 그의 행적을 추적하여 찾아낸 것이 일제 때 총대(總代)를 지낸 경력이었다. 총대는 지금 마을의 통장격이었다.
이 사실은 즉각 이승만에게 보고되고 이 대통령은 신익희 국회의장과 김상덕 특위위원장을 경무대로 불러 “반민특위 안에 친일파가 있다”면서 김상돈을 예로 들었다.
이 일은 국회로 비화되어 3월 19일 김 부위원장에 대한 파면 긴급동의안이 제출되었지만 국회는 부결시켰다.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에 의해 부결되고 만 것이다.
친일세력의 반민특위 요원 암살음모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반민특위 구성이 마무리 될 무렵인 1948년 10월 하순경이다. 신변의 불안을 느끼게 된 악질 일경출신들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경찰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반민특위의 활동을 예의 주시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반민법 제정과정에서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반민특위 활동을 월권행위라고 비난해온 이승만은 1949년 2월 초 심복이라 할 노덕술과 최연의 체포사실을 내무차관 김효석으로부터 보고받고 내무장관 신성모와 법무장관 이인을 경무대로 불러, “반민특위 사람들이 사람을 마구 잡아들이고 고문까지 한다니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호통을 쳤다. 이에 이인이 “반민법은 제정과정부터 졸속이었고 법이론상 많은 문제점이 있다”면서 법개정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국무총리 이범석이 주재한 국무회의는 ‘반민족행위자처벌법 일부 개정의 건’을 통과시켰다. 유명무실한 내용으로 개정하려는 조처인 것이다. 더불어서 이승만은 2월 15일 반민법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한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담화문에서 “근자 조사위원회에서는 조사위원들이 경찰관 2,3명을 데리고 다니며 사람을 잡아다가 구금, 고문한다는 보도가 있는데, 이는 국회가 조사위원회를 조직한 본의도 아니요, 정부로서도 포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법개정을 하게 된 이유를 밝혔다.
이승만의 이 담화는 국회에서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노일환 의원 등이 “대통령의 담화는 친일파를 옹호하겠다는 저의를 드러낸 것”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반민특위도 보고만 있지않았다. 제1조사부장 이병홍은 “반민법은 민족의 성전으로 생각하고 이 법률을 발동할 때는 언제나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마음과 엄숙한 태도를 갖추는데, 특위가 행패를 부리는 것처럼 헐뜯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흥분하고 나섰다.
김상덕은 이승만의 담화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 반민법 운영이 삼권분립에 위배된다고 하였는데, 반민법은 헌법 제101조의 규정에 의해 만들어진 특별법으로 이를 무시하는 대통령의 행위는 헌법을 무시하고 삼권을 독점하려는 의도이며 반민법 운영을 방해하려는 행위다.
2. 반민특위 활동이 치안에 중요한 영향을 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치안은 반민자가 담당하여야만 하는가? 제주도사건, 여순사건, 3.8선 충돌사건 등등이 반민자를 처단함으로써 발생한 것인가?
3. 특위위원 “2~3인이 자의로 사람을 잡아다가 난타, 고문”한 데 대해, 특위의 체포는 반민법 제16조, 특별조사기관조직법 제6조에 의하여 권한이 부여되어 있다.
백보를 양보해서 “과거 수 십년 동안 독립군을 살해하고 애국자를 악형으로 고문하여 허위의 문서로 투옥시키던 악질 반역자를 약간 고문이 있었다 한들 이것이 또한 무슨 큰 실수이며 대통령은 무엇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뼈가 저리는가.
김상덕의 이와 같은 강력한 논박으로 이승만의 담화문은 빛을 잃고, 반민특위 요원들은 더욱 용기와 사명의식을 갖고 업무에 매진할 수 있었다.
사법부라고 방관할 리 없었다. 대법원장 김병로는 “대통령이 법을 개정하려는 것은 법률 자체가 헌법에 위배되니까 이를 수정하려는 것이라고 생각되나 이는 헌법위원회에서 심의할 성질의 것이며 반민특위의 체포, 구속하는 조사활동은 불법이 아니라고 본다.”라고 이승만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궁지에 몰리게 된 이승만은 경무대로 신익희 국회의장과 김병로 대법원장을 불러 이들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2월 23일 국회는 정부의 반민법개정안을 심의, 독회만 끝내고 부결시키고 말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회는 행정부를 견제하면서 반민특위의 활동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반민특위에 대한 태도는 날이 갈수록 적대적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김상덕이 지도하는 반민특위는 이에 흔들리지 않았다. 반민특위는 이승만에게 정부 각 기관 내의 반민법 해당자에 대한 조사요청을 공식공문으로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처음에는 일단 조사나 해보도록 하라고 내각에 지시했으나, 해당 공무원 숫자가 너무 많고, 이 때문에 공무원 사회가 뒤숭숭해지자 돌연 조사중지를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이승만은 국회의장 신익희와 김상덕 위원장을 경무대로 불러 노덕술을 석방하도록 촉구하다가 거절당하자, 공산파괴분자의 활동을 들어가며 반민특위 활동에 신중을 기하라는 위협적인 담화를 발표하고 뒤이어 반민법 해당공무원 조사중지의 명령을 내렸다.
반민자에 대한 역사적인 첫 공판이 3월 28일로 잡혀졌다.
이에 앞서 3월 4일 특별재판부 부장 김병로는 특재 재판관 전체회의를 열었다. 15명의 재판관 전원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 김병로는 반민자재판이 민족적인 성업임을 강조하고 민족의 총의에 따라 공정하고도 신속하게 재판을 진행할 것을 당부하였다.
김병로는 또 3월 12일 재판일정과 재판부가 결정되자, “반민법 재판은 개인감정이나 편파적인 관념을 배제하고 민족총의에 따라 신속히 진행될 것”이라는 소신을 밝히고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모든 민족의 울분을 일소함으로써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기틀을 바로잡겠다”는 결의를 다짐했다.
특별검찰관 신현상도 “온 국민이 원고의 입장과 재판관의 입장에 서서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마침내 3월 28일 반민자에 대한 역사적인 첫 공판이 정동의 특별재판소 대법정에서 열렸다. 반민특위는 그동안 중앙청 청사의 더부살이를 마치고 정동에 특별재판소 사무실을 마련하였다. 이날 아침부터 방청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국민의 관심과 열기를 보여주었다. 이날 첫 재판은 상오에 이기용, 하오에 박흥식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역사적인 반민족행위자 재판의 첫번째 피의자의 ‘영광’을 차지하게 된 이기용은 검은 두루마기 차림으로 재판정에 들어서 피고석에 앉았다. 고종의 5촌 조카인 조선황족 출신으로 일제로부터 자작을 받고 이왕직 고문, 귀족원 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일왕으로부터 3만원의 ‘은사금’을 받기도 하였다.
친일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1949년 4월 눈엣가시와 같았던 국회 소장파 의원들이 이른파 ‘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남아 있는 소장파 의원들은 언제 저승사자의 손길이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불안에 떨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반민특위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부의 비협조와 “특위는 빨갱이가 움직인다”라는 따위의 각종 음해에 시달려온 특위요원들은 신변위협에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김상덕은 사면초가의 위기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국회의장 신익희 등과 대책을 숙의했지만, 이승만의 광기에 대처할 뾰족한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반민자 공판이 진행되고 있을 때 친일세력은 3.1운동의 성지 탑골공원과 반민특위 본부에까지 몰려와서 특위의 해체를 주장하고 반민특위를 빨갱이 집단이라고 고래고래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심지어 6월 2일에는 친일세력의 사주를 받은 유령단체들이 국회 앞에 몰려와 특위요원들을 온갖 욕설로 헐뜯고 체포된 반민자들의 석방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반민특위는 6월 3일 시위자들이 특위본부를 습격한다는 정보를 듣고 경찰에 경비를 의뢰했지만 경찰은 이를 외면하였다. 경찰의 방치 속에서 동원된 시위대는 특위본부를 포위하고 사무실까지 습격할 기세를 보였다. 특위 특경대들이 공포를 쏘면서 간신히 데모대를 해산시키려 하자 그제서야 경찰이 나타났다. 특위 특경대는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가 6·3반민특위활동 저지 데모의 주동자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그를 구속한 데 이어 선동자 20여 명을 연행하였다.
최운하가 구속되자 각 경찰서의 사찰경찰 150여 명이 집단 사표를 내는 소동을 벌였다.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반민특위가 크게 위축된 상태에서 사찰경찰의 집단사퇴가 이루어진 것이다. 특위활동을 제약시키고 이에 대항하려는 친일경찰의 조직적인 계략이었다.
서울시경 산하 전사법경찰이 반민특위 특경대해산 등을 요구하며 집단사직서를 내놓고 있을 때인 6월 5일, 중부서장 윤기병, 종로서장 윤명운, 치안국 보안과장 이계무 등은 “실력으로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하자”는 데 뜻을 같이하고 음모를 꾸몄다. 이들은 밤늦게 시경국장 김태선에게 자신들의 계획을 전하고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지를 얻어냈다. 장경근은 “앞으로 발생할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질 터니 특경대를 무장해제시켜라, 웃어른께서도 말씀이 계셨다”라고 이승만의 사전양해가 있었음을 암시하였다.
6월 6일 심야에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지와 ‘윗어른’의 양해를 받은 이들은 반민특위 습격의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짰다. 행동책임자는 반민특위의 관할서장인 중부서장 윤기병이 맡기로 하였다. 윤기병은 새벽 일찍 중부경찰서 뒷마당에 전서원을 비상소집하여 차출한 서원 40명을 2대의 드리쿼터에 태워 중구 남대문로의 특위본부로 출동시켰다.
윤기병이 직접 지휘한 습격대는 특위본부 뒷골목(현 한전빌딩)에 도착하여 20명은 주변경계에, 나머지 반은 정문과 비상구, 각층 사무실에 배치되었다. 윤기병은 장탄한 권총을 꺼내들고 오전 8시경에 출근하는 특위직원들을 모조리 붙잡아 드리쿼터에 싣도록 명령하였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검찰관 차장 노일환 의원과 검찰관 서용길 의원도 이들에 의해 무장해제 되었다. 뒤늦게 출근하다 사태를 목견한 김상덕 위원장과 김상돈 부위원장이 “국립경찰이 불법으로 헌법기관인 특위를 강점하고 직원을 불법체포하니 이게 무슨 행패냐”고 분노를 터뜨렸으나 경찰은 들은 체도 아니했다. 특위사무실의 점거사실을 전해들은 검찰총장 겸 특별검찰관인 권승렬이 현장에 달려왔지만 오히려 경찰에 의해 몸수색을 당하고 출입조차 저지되었다.
그것은 제대로의 정신을 가지고는 바라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피가 역류하고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자신을 의식했다.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임정 문화부장)은 넋빠진 사람처럼 초점없는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부위원장 김상돈(서울시 초대 민선시장, 60년대 미국이민, 반정부운동으로 일관하다 86년 작고) 씨는 책상을 치며 통곡을 하고 있었다.
기마경찰관들이 일정 때 제일은행이었던 반민특위 청사를 삼엄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청사 안으로 들어간 정.사복 경관들은 자리에 앉아 있는 반민특위 조사관들을 때로는 밀쳐내고, 때로는 발길질을 하면서 서랍 속의 서류에서 책상 위의 서류까지를 찢어 버리거나 보자기에 싸는 등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1949년 6월 6일의 일이다. 경찰은 반민특위 직원의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법에 따라 휴대했던 호신용 권총 등 무기와 서류, 통신기, 기타의 장비를 압수하고 직원 35명을 강제로 연행, 수감(검거)했다. 이날 오전 9시쯤에 이르기까지 약 1시간 동안 백주에 벌어진 무법·불법의 난동이었고 만행이었다.
당일 국립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현장에서 직접 당하면서 사태를 지켜봤던 이원용의 생생한 증언이다. 친일파가 중심이 된 경찰은 백주에 헌법에 근거하여 특별법으로 구성된 국가기관인 반민특위를 폭력으로 짓밟고 직원들을 구타하면서 서류를 찢거나 탈취해갔다.
다음은 경찰이 반민특위를 짓밟은 현장을 지켜본 취재기자의 증언이다.
1949년 6월 6일 내가 목격한 반민특위에 대한 경찰의 행동은 바로 쿠데타 그것이었다.
이들은 반민특위 특별검찰과장을 겸하고 있던 검찰총장 권승렬 씨로부터도 권총을 압수했다.
“이놈들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예, 검찰총장이십니다.”
“그러한데 나에게 그런 불손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느냐?”
“상부의 지시라서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너희들의 최고 상부가 내가 아니냐? 내가 언제 하늘이 두려운 줄 모르는 이런 불법 행동을 하라고 지시했더냐?”
그래도 경찰들은 막무가내로 권 총장의 권총을 압수해 갔다.
현직 검찰총장의 휴대용 권총까지 빼앗는 경찰의 무지막지한 행동은 법질서나 위계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만행이었다. 그들은 ‘상부의 지시’를 불법의 이유로 댔다. 검찰총장의 상부는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의 배경은 이승만이 직접 김상덕이 거처하는 관사를 두 차례나 찾아와 회유를 하였지만 여의치 않자 물리력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던 것 같다.
반민특위 습격은 이승만 지시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국회로 비화되어 이날 오후 열린 제13차 본회의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국회내무치안위원장 라용균 의원은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만난 사실을 보고하면서 “특경대 무장해제는 국무회의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친히 명령한 것”이라는 대통령의 전언을 공개하였다.
특위습격사건이 이승만의 직접 명령이라는 발표에 의원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여기에다 사건 경위보고에 나선 장경근이 “특경대는 내무부가 인정한 국가경찰관이 아닌데도 특위가 임의로 임명하여 경찰관 호칭을 사용, 신분증명서까지 소지하고 경찰관 임무를 불법적으로 행사했다”고 전제, “내무부가 누차 그 경찰관 임무를 불법적으로 행사했다.”고 말하고, “내무부가 누차 그 불법성을 지적, 해산을 종용했으나 특경대의 경찰권 행사가 더욱 늘어나 부득이 강제해산시켰다”고 변명하였다. 이 발언이 의원들의 격앙된 분위기에 불을 질렀다.
격앙된 김상덕은 “특경대는 작년 10월 윤치영 전내무장관과 협의하여 설립된 것인데 불법 운운하니 말도 안 된다. 권총은 없어도 법관은 법관이 아닌가. 반민자는 권총에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민족정기에 잡히는 것이다”라고 일갈하였다. 그러나 장경근은 소신을 조금도 굽힘없이 “경찰관은 협약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정식발령이 있어야 한다. 또 무기의 회수는 발사를 방지하기 위해 취해진 예방조치였다”고 맞섰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과 이에 대한 대통령 이승만의 태도 그리고 내무장관과 차관의 오만무례한 언동을 지켜보면서 김상덕은 이튿날인 6월 7일 특위 활동이 더 이상 어렵다고 판단하고, 국회의장에게 특위위원장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뒤이어 오기열·조규갑·김경배·이종순 등 특위위원들도 사퇴서를 제출하고 특별검찰관들도 사퇴하여, 반민특위의 활동이 사실상 마비되었다. 특경대의 활동도 마비되어 친일파의 체포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반민특위 간부들의 일괄사퇴서를 받은 국회는 새로운 후임 위원을 선출하여 김상덕은 조국남·조규갑 의원과 함께 특위위원으로 재선출 되었으나 재차 사임하였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에 놀란 국회는 다음날 내각총사퇴와 압수한 반민특위의 무기와 문서의 원상회복, 내무차관과 치안국장의 파면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상정, 찬성 89, 반대 59로 통과시켜서 분노의 일단을 표시하고, 정치적인 수습 방안을 모색하였다. 협상결과 특위가 구속한 최운하·조응선 등 친일경찰과 연행된 특경대원들을 교환 석방키로 하였다. 석방된 특경대원 중 부상자 22명은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다. 참으로 어이없는 ‘협상’으로 상징적인 친일경찰이 석방되고 반민특위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제2차 국회프락치사건까지 발생하여 국회부의장 김약수와 반민법 제정에 앞장섰던 노일환 의원 등이 체포됨으로써 특위활동이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곽상훈 의원에 의해 반민법 공소시효를 단축하자는 개정안이 국회에 제안되었다.
반민특위 검찰관인 곽상훈은 반민특위의 활동이 여러가지 요인으로 지지부진하니 반민법 제29조 중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31일까지로 단축토록 하자는 개정안을 내놓았다. 곽상훈은 “반민특위의 모든 공소시효를 중단해도 좋을 만큼 업무수행을 거의 끝냈다”고 엉뚱한 이유를 댔다. 1950년 6월 20일로 규정된 시효기간을 크게 단축시킨 내용이었다. 이 개정안은 표결에 부쳐져 74대 9로 쉽게 가결되었다.
후임 반민특위 위원장에는 법무장관 시절부터 반민법의 모순을 지적하며 반민특위활동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겨온 이인이 맡게 되었다. 이인은 특위직원을 새로 임명하고 결원된 특별검찰관 및 재판관들을 보강하여 7월부터 잔무처리에 들어갔지만 특위는 이미 사양길에 들어섰다.
민족정기 사라지고 친일파 세상
반민특위가 다시 한 번 좌절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은 6월 26일 김구 선생 암살사건이다.
소장파 의원들의 정치적 배경이자 정신적 지주이던 김구 선생이 친일ㆍ분단세력의 사주를 받은 현역군인 안두희에 의해 암살된 사건은 반민특위의 마지막 의지처마저 붕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김구 암살사건의 규명책임을 맡은 헌병사령관 전봉덕이 반민특위가 친일파로 지목한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사건의 상징성은 지대했다.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특위의 업무는 형식적이나마 대법원과 대검찰청으로 이관되었다.
대법원과 대검찰청은 집행유예 5명, 실형 7명, 공민권정지 17명 등 30명에게 제재를 가했으나 실형을 선고받은 7명도 이듬해 봄까지 재심청구 등으로 모두 풀려나 친일파 숙청작업은 용두사미가 되고 반민특위는 흐지부지 해체되었다. 이리하여 해방 후 친일파 및 친일잔재 처리문제는 청산하지 못한 과제로 남겨졌다.
반민특위의 좌절로 민족정기는 굴절되었으며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친일반민 세력의 장기독재 체제의 전기가 되었다.
반민특위는 해방된 국민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기대를 모으며 1949년 1월 8일부터 활동을 개시하여 6.6사태 전날까지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권력을 쥔 이승만과 이에 기생하는 친일세력의 조직적인 도발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국회프락치사건, 김구 암살사건 등 정치적 외압과 “반민특위는 빨갱이”라는 친일세력의 반격과 음해를 견디지 못하고, 공소시효 기간이 단축되는 등 반신불수 상태를 겪은 끝에 당초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좌절되었다.
반민특위의 좌절은 곧 민족양심과 사회정의, 나아가서는 민족정기의 패배였다. 바른 역사의 붕괴를 불러오는 서곡이기도 하였다.
반민자들에게 암살 당할 뻔했던 반민특위 강원지부장 김우종은 6.6사태와 관련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많은 국민의 안타까움과 분노를 대변하는 말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 대통령의 지시와 경찰 쿠데타) 저들이 저지른 무서운 죄로 인해 공포 속에서 떨고 있던 친일 반민자들이 가슴을 펴고 활보하게 되었다. 그 뿐이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종교 등 각 분야에 또 다시 군림하게 되었다. 이 나라는 그들의 무대가 된 것이다. 이 중대한 과오가 오늘날의 우리 민족의 가치관을 흐려놓은 동시에, 정신계에 혼란을 가져오게 된 원인이 된 것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35년 동안 저질러진 민족반역자들의 반민행위가 깨끗하게 심판을 받아 우리 민족의 정기를 확립했어야, 앞으로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매국노 민족반역자들이 생기지 않을 것인데, 이 반드시 거쳐야 할 역사적인 과업이 중단되고 말았으므로 민족정기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는 새로운 역사가 아니라 일제의 잔재에 의해 엮어지는 낡은 역사가 된 것이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국내외에서 목숨바쳐 순국한 선열들과 생존해서 조국광복을 본 애국독립지사들은 모두 어리석은 존재들이 되었고, 반민족자들은 일제에 충성을 다함으로써 부귀영화를 누렸고, 해방 후에도 미군정 3년여 동안 약삭빠른 그들은 기회를 잃지 않고 각계각층을 뚫고 들어가 있다가, 우리 정부가 수립되자 정권욕에만 눈이 어두운 이승만 박사를 끌어안고 또 부귀영화를 누리는 권력층, 부유층, 유력층이 된 가장 지혜로운 자들이 된 것이다.
1949년 7월 6일 이인, 곽상훈 의원 등이 주동이 되어 반민특위의 공소시효를 이 해 8월 31일까지로 단축하자는 반민법 개정안이 표결에 붙여져 재석의원 136명 중 찬성 74, 반대 9로 통과되었다.
김구 암살, 진보성향 의원들의 국회프락치사건 연루 구속, 반민특위 사무소 습격 등을 지켜본 국회의원들이 공포감에 사로잡혀 74대 9라는 압도적 차이로 ‘반민법 사망 선고서’를 통과시킨 것이다.
이와 관련 김상덕 위원장을 비롯하여 특위위원, 재판장, 검찰관 등이 사퇴서를 제출함으로써 반민특위는 조직이 마비되었다. 국회는 형식적인 절차를 통해 이들의 사퇴를 반려했지만, 김상덕 등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상덕은 반민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특위위원 10명 전원과 사퇴서를 제출하고, 7월 7일 국회 본회의에서 사임의 뜻을 천명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승만, 반민특위 흔적 말살 획책
이승만의 반민법과 반민특위에 대한 ‘증오심’이 극심하였다. 반민법의 ‘청소작업’을 철저하게 진행하였다. 공소시효가 끝난 9월부터 반민특위 해체와 반민법 폐지 작업이 신속하게 추진되었다.
1949년 9월 5일,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이승만 대통령, 국무총리, 국회의장, 특위위원 등의 토의과정을 거쳐, 도조사부는 1949년 9월 말까지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1949년 9월 22일 이인 등은 특별조사기관조직법 및 특별재판부 부속기관 조직법을 폐지하고, 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는 전부 해체하며, 기존의 특별검찰부의 업무는 대검찰청이, 특별재판부의 재판은 대법원이 담당한다는 반민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0월 4일부로 반민법은 폐지되었다.
이 시기 이승만과 그를 둘러싼 권력자들이 친일파들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여기저기에 흔적이 남아 있다.
이승만 정권은 특히 악락한 수법으로 김상덕 등 퇴직한 반민특위 위원들을 괴롭혔다.
심계원(현 감사원)을 통해 이들의 뒷조사를 실시하고, 예산을 유용했다고 수사기관에 조사토록 하였다. 하지만 위법 사실은 적발되지 않았다.
개정된 반민법에 따르면 1949년 8월 31일이 공소시효의 만기가 된다. 따라서 이인 체제의 반민특위가 7월 14일 업무를 관장했으므로 활동기간은 한 달 보름에 불과했다. 그나마 친일파 처리에 관심도 의욕도 없었던 2기 특위 지도부였다.
과도기의 특위위원장 이인과 위원들은 9월 21일 반민특위 특별조사기관 조직법 및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 부속기관 조직법 폐지안과, 특위가 진행해왔던 업무는 대법원과 대검찰청에서 계속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반민족행위처벌법 중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국회는 9월 22일 제84차 본회의에서 통과되어 반민자 처벌은 종지부를 찍게 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반민특위 관련 정치보복 가혹
이승만과 친일세력은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반민법을 폐지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6.25 전쟁의 와중에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한 것으로 인식한 반민특위(법) 관련자들에 대해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이승만의 반민법(특위)에 대한 증오심은 상식을 넘어섰다. 이미 특위가 해체되고, 반민법의 시효가 끝나 사문화됐는 데도, 그 흔적마저 지우려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까지도 반민법과 반민특위의 완전 제거를 꾸준히 계획했다. 전시중인 1951년 2월 8일 국무회의에서는 ‘임시조치법’ 폐지를 재차 논의했다. 친일파 숙청의 작은 흔적도 제거하겠다는 발상이었다. 국무회의 결정에 따라 1951년 2월 14일 반민족행위재판기관 임시조직법은 다음과 같이 폐지하기로 결정되어 친일파 숙청의 법적근거는 모두 제거되었다.
반민족행위재판기관 임시조직법.
(폐지 1951. 2. 14. 법률 제176호 전 부처)
부칙(반민족행위처벌법 등 페지에 관한 법률) <제176호, 1951. 2. 14> 본법은 공포일로부터 시행한다.
폐지된 법률에 의하여 공소 계속 중의 사건은 본법 시행일에 공소취소 된 것으로 본다. 폐지된 법률에 의한 판결은 본법 시행일로부터 그 언도의 효력을 상실한다.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특별법의 법적근거마저 모두 제거되면서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은 모두 자유인이 되고, 각종 ‘완장’을 찬 이들은 독립운동가들을 더욱 적대시하면서, 이승만의 충복이 되었다. 애국지사 암살, 사법살인, 부정선거, 시민학생 살상, 6.25 전쟁기 민간인 학살에는 어김없이 이들이 개입하였다.
6.25 한국전쟁은 이들이 음지에서 활동하기에 안성맞춤의 계절이어서 의열단장 김원봉을 비롯하여 많은 항일지사들이 노덕술 등 일제 경찰에서 옷을 갈아입은 국립경찰에 의해 온갖 수모와 고문을 당하게 되고, 이들 중에는 해방된 조국의 비통함속에서 월북을 결행하기도 하였다.
결국 친일파 처단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한국현대사에 막대한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정부수립 후 친일파는 자신들의 반민족 행위를 반공 이데올로기로 은폐시키고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에 충성을 다하여 독재정권의 영속을 추구했으며, 분단체제의 고착화에 앞장섰다.
또한 친일파가 단죄를 받기는커녕 권력의 요직을 장악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제 분야에서 지도층임을 자처하며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모습은 국민에게 엄청난 의식의 혼란을 초래케 했다. 즉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거기에 합당한 처벌을 받는다는 상식은 물론 사회정의가 무너져 가치관을 극도로 혼란에 빠뜨렸고, 이기주의와 부정 등이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자 기본으로 삼게 했다.
“해방 이후 정신사의 제1대 사건”
단재 신채호 선생은 1920년대 중국 망명지에서 한국고대사를 연구하여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를 발표한데 이어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 대사건'이란 논설을 집필하였다.
이 논설은 단재의 역사관을 보여주는 괄목할만한 내용이다.
서경전역을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사(王師)가 반적을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그 실상은 이 전역이, 즉 낭(郎), 불(佛) 양가 대 유가의 전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전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전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전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이었던 것이다.
이 전역에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하였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 -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하였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1천년 래 제1 대사건이라 하지 않으랴.
단재가 고려, 조선 1천 년의 역사에서 칭제건원, 자주연호사용, 금국정벌, 서경천도를 내걸고 추진했던 개혁의 좌절을 ‘제 1대사건’으로 기술하면서 “낭.불 양가 대 유가의 전이며, 국풍파대 한학파의 전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전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전”이라고 지적한 것은 탁견이다.
단재의 사론 중 이 대목을 꺼낸 데는 까닭이 있다.
1949년 6월 6일 이승만은 경찰을 동원,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요원들을 폭행하고 서류, 자료를 탈취하고, 특위활동을 사실상 중지시켰다.
이와 관련 단재의 사론을 패러디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 어떨까.
“독립운동세력 대 친일파의 전이며, 민족주의세력 대 사대세력의 전이며, 통일자주세력 대 외세의존의 전이며, 진보세력 대 보수반동세력의 전이다” 라고.
필자는 반민특위를 짓밟은 1946년 ‘6.6 사태’를 감히 해방 이후 민족정신사의 제1 대사건이라 불러왔다. 이로써 한국현대사는 항일독립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 정통세력이 패배하고, 친일 분단 외세 지향의 반민족 변통세력이 해방 조국의 주체, 주류가 되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매국 친일 부일의 대가로 취득한 물적 인적 기반을 토대로 정치, 경제, 군, 검, 경, 대학, 문예, 언론 등 한국사회 전반의 핵심이 되고, 이것은 메인 스트럼으로 세력화하여 세습되고 있다.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의 소련 봉쇄정책의 일환으로 전개된 반공노선의 첨병 역할을 하면서 친일 반역세력의 등에 업혀 천추에 오점을 찍은 패악을 저질렀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식민지에서 해방된 국가에서 반민족 부역자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국가는 대한민국과 남부베트남 뿐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나라는 분단과 내전을 치렀고, 긴 세월 종주국 군인 출신에 의한 군부쿠데타를 겪어야 했다. 이승만의 죄과는 너무 크고 무겁다. 한때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처지에서 동지들을 배신하여 반민특위를 강제로 짓밟고, 민족 반역자들을 한 사람도 처벌하지 않은 것은 민족정기나 역사정의는 물론 일반 상식에도 크게 배치되는 일이었다. 이것은 국민에게 엄청난 의식의 혼란을 일으켰다.
친일의 뿌리, 현재도 번창해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감옥에서 한을 품고 숨지거나 고문으로 불구가 되고, 해외에서 풍찬노숙을 하며 일제와 싸울 때, 일제에 협력하며 온갖 호사를 누렸던 자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주류세력이 된 것은 하늘 두려운 줄 모르는 역천이었다. 역사 만대에 용납되기 어려운 불의다.
정부수립 후 1960년 4월까지, 즉 이승만 정권 12년간의 각료는 국무총리 이하 115명이다. 이 중 재임 또는 2부(部) 이상을 역임하고 19명을 추리면, 그 실질 연인원은 96명이다. 이들 중 해외 독립운동자는 단 4명, 국내 민주투사 8명을 합해서 그 비율은 12.5퍼센트이다.
반면에 부일협력의 전력자는 31.3퍼센트인 무려 30명이나 된다.
직계혈족 - 조부나 부친 또는 형제 - 에게 그 비율은 34.4퍼센트가 된다. 이승만 정권의 권력구조가 민족 정도(正道)에서 크게 일탈되어 있었음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수치이다.
정부뿐만 아니었다. 제2대 국회에는 친일파들이 대거 등장하고, 사법부, 검찰, 군, 검경, 재계, 언론계, 대학 할 것 없이 친일세력이 요직을 독차지하여 ‘해방조국’이란 용어가 부끄럽게 되었다. 다음의 자료를 보자.
남한의 역대 고위직에 얼마나 친일파가 포진해 있는지를 분석한 ‘반민족문제연구소’(현 민족문제연구소 - 필자)의 자료에 의하면 전체 고위직에 골고루 포진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치안국장은 1대 이호에서 7대 윤후경까지 잇따라, 서울시 경찰국장은 2대 김태선에서 7대 변종현까지 잇따라, 합참의장은 1대 이형근에서 14대 노재현에게까지 잇따라, 육군참모총장은 1대 이응준에서 21대 이세호까지 잇따라, 대법원장은 7, 9, 11, 12, 13, 14, 15, 17, 18, 19, 20, 22, 23, 24, 25, 26, 27, 28, 30, 31, 32, 36, 37대 김치열에 이르기까지 일제 경력자가 독식했다.
반민특위가 짓밟히면서 친일세력이 등장하고, 그로부터 65주년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에서는 항일독립군에 총질을 했던 백선엽이 구국의 영웅으로 추종되고, ‘백선엽한미동맹상’이 시행되고 있는 것이 현 주소이다.
첫댓글 한국 독립 유공자 협회분들....멀고도 험한 여정입니다.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