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광전(秦廣殿)의 왕_부동여래(不動如來) part. 3
커다랗고 벌건 눈동자를 상하로 굴리며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진광왕 앞에 태휘는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나가 예의바른 몸짓으로 진광왕에게 목례를 했다.
"장태휘라 합니다."
"호오, 그것 참 맹랑한 사내일세. 내게 그런 가벼운 목례를 하는 건 너 뿐이다."
"... ..."
진광왕에게는 죽은 자라면 모두가 두려워하는 명도국의 죄업을 묻는 심판관인 자신에게 큰절이 아닌 목례를 한 태휘라는 사내가 못마땅하기 보다는 오히려 맹랑하고 당차보여서 흥미로워 보였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아도 태휘는 전혀 기죽는 기색이 없었다.
"하하하!"
한 번 호탕하게 웃은 뒤 진광왕이 다시 그 누런 책들을 훑더니 부동자세로 서 있는 초유오를 불렀다.
"헌데, 초유오."
"예, 말씀하십시오."
"그 사내가 장태휘라면 응당 이 명부에 있어야 하거늘... ..."
"짐작되는 바를... ... 아뢰도 되겠습니까?"
"말해보거라."
일개 저승사자는 자신의 생각을 상관에게 말할 때에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듯 했다. 초유오는 진광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차분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지장왕님, 그리고 진광왕님의 명을 받들어 불기 2540년의 대한민국에서 명을 다한 장태휘를 인도해 왔습니다."
"그래, 그랬었지. 염라왕께서 나에게도 그리 말씀하셨다. 그 사내를 너를 시켜 직접 데리고 오라고 말이다. 그런데 왜 그 시기의 명부엔 저 사내와 혼(魂)이 일치하는 이름이 없을까... ..."
"저도 오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 사내가 지금 사바의 사람들과는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을 풍기는 것 같다 생각했습니다."
"그래? 그런 느낌이었단 말이지? 아!!"
진광왕은 손뼉을 '짝' 하고 쳤다.
"그러고 보니 장태휘 너의 행색이 지금 사바의 사람들과 사뭇 다르구나. 이질적이라... ..."
진광왕은 부리부리한 눈매와 길고 숯처럼 짙은 큰 눈썹이 붙은 눈두덩이를 연신 씰룩거리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더욱 조심스러워진 초유오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사실 초유오는 진광전 소속의 월직사자였다. 그래서 진광왕은 그녀에게 있어 절대적인 존재였기에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두려웠다.
초유오가 말을 잇지 못하자 태휘가 앞으로 나서며 말을 이었다.
"제가, 도중에 끼어들어 말씀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음... ... 말해보거라."
"아까 불기 2540년이라 했습니까?"
"그래, 그랬지."
"이 곳 명도국에선 불기력을 씁니까? 조선에선 단기력을 씁니다."
"그래, 명도국에선 불기력을 쓰지. 단기력도 알고 있으니 편히 말하거라."
태휘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그 불기 2540년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세상으로 가기 전의 세상은... ... 정조 24년, 그러니까... ... 음... ... 단기로 치면 4133년이었습니다."
"뭣이?! 그게 정말이더냐? 초유오!!"
"예, 진광왕님."
"혹시 내가 듣지 못한 명령을 염라왕께서 네게 하시더냐?"
"무슨... ..."
진광왕은 몹시 혼란스러운 듯 방금 전까지 훑고 있던 책들을 마구 내팽개치고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재차 물었다.
"장태휘, 너의 나라 국호가 무엇이냐?"
"조선입니다."
"조선이 맞더냐? 지금 현재 명도국의 날짜가 어찌 되는지 아느냐... ... 니가 말하는 단기력으로 치면 4329년이다."
"그렇습니까... ..."
"그렇다니? 넌 알고 있었단 말이냐? 무척이나 태연하구나. 이건 하늘의 순리가 흐트러진게야."
"... ..."
태연한 태휘와는 달리 몹시 흥분한 진광왕은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랴.
조금 누그러진 마음을 다시 잡고 진광왕이 좀 전보다 침착해진 말투로 말했다.
"현재의 죽은 자를 기록하는 명부에 네 이름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넌 지금이 아닌 조선이라는 나라의 사람이니까... ... 어찌된 것이냐?"
"어서 아뢰십시오."
진광왕이 묻자, 옆에서 초유오가 본인도 아까부터 궁금했던 부분이라 빨리 말하라고 채근했다. 어떻게 조선시대 사람인 태휘가 200년이란 세월을 뛰어 넘어 대한민국이란 땅에서 죽어 이 곳까지 오게 되었는지가 무척 궁금했다.
태휘는 그 자리에서 그간의 있었던 일을 소상히 말했다.
귀천성의 기운을 타고 태어난 귀인, 그 귀인을 암살하려는 자객단, 그들로부터 귀인을 지키려 하늘의 순리를 어기고 시간의 문 '귀천대(歸天臺)'에 올라 세월을 뛰어넘은 것, 그리고 결국 모든 자객단을 죽이고 자신 또한 죽게된 것까지. 길다면 긴 이야기를 빠짐없이 말했다.
다 듣고난 진광왕은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말을 하지 못했다. 초유오는 초유오대로 아무 연유도 모르고 죽은 태휘를 데리고 왔기 때문에 상관인 진광왕에게 송구할 따름이었다.
진광왕이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였다.
"나 명도국 제 1전 진광전의 주인 진광왕은 생전의 죄업의 경중을 물어 죽은 자인 장태휘 너를 심판해야 하나... ... 그보다 앞서 이 일이 하늘의 순리에 역행된다 판단한 바, 너의 죄업을 따지지 않고 염라왕님을 알현할 것을 이르노라."
"에~에? 송구하옵지만, 진광왕님. 지장전으로 가라하시면... ..."
진광왕이 초유오의 말을 딱 자르고 눈을 부릅뜨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걸쭉한 목소리로 엄포를 놓았다.
"초유오!! 이 일은 하늘의 순리가 흐트러진 것. 그러니 누구도 알아선 안된다. 너는 지금 바로 장태휘를 데리고 지장전으로 가거라."
"하지만 그 곳을 지날 때마다 받는 심판은 어찌 합니까?"
"내 그것도 생각 안했겠느냐. 염라왕님이 친히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장태휘를 데리고 오라고 한 것은 필시 깊은 뜻이 있어서일게다. 그러니 넌 내 왕령옥을 가지고 지장전으로 가거라."
"월직사자 초유오, 분부 받들겠습니다."
초유오가 진광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명도국의 왕들의 영력이 담긴 구슬인 왕령옥(王靈玉)을 받아들고는 부동자세로 서 있는 태휘에게 가자고 눈짓을 보냈다. 태휘는 가기 전에 탁자 위에 턱을 괴고 있는 진광왕에게 아무 말없이 목례를 해보였다. 진광왕 또한 더는 말하지 않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초유오와 태휘가 다시금 바닥의 우웃빛이 감도는 선반 위에 발을 들여놓자 진광왕이 언문을 읊으며 그들을 향해 '후-' 하고 입김을 불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진광전에서 그들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초유오와 태휘는 진광왕의 영력으로 인해 인문을 나서는 일 등을 생략하고 곧바로 진광전 밖으로 이동되어 왔다.
여전히 그 밖은 척박한 땅에 잿빛 구름이 침울함을 뿌리내리고 있었고 낮과 밤이 없는 명도국의 슬픈 하늘 아래서 흐느끼는 바람이 춤추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歸天道哀 두 번째_ 진광전(秦廣殿)의 왕_부동여래(不動如來) part. 4 "주석편" 이 이어집니다.
첫댓글 배경이 조선인가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