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전라남도 신안군(당시 무안군) 암태도에서 일어난 ‘암태도 농민항쟁’은 일제 식민지 지배정책과 고리의 소작료를 착취하던 지주들에게 정면으로 저항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암태도 농민항쟁의 성공은 서해 남부의 자은‧도초‧지도 등지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일제하 농민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 암태도 농민항쟁을 이끈 주역이 바로 서태석 선생이다.
서태석은(1884-1943)은 암태면 기동리 오산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고 시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소년으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농민항쟁 당시 그의 집안은 3정보 이상을 소유한 자작상농층으로 소작농이 아니면서 농민운동에 앞장섰던 것은 일찍부터 일제 치하의 민족적 모순에 눈을 떠 농민운동을 통해 구국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서태석은 1910년대를 전후하여 암태면장으로 일하였다. 면장 재임 중 구황작물로 무상분배 된 메밀씨앗을 팔아먹은 관리를 고발하는 등 부정척결에 앞장섰다.
서태석은 1920년 2월 29일 3.1독립선언 1주년 기념일을 기하여 ‘대한독립 1주년 기념 축하경고문’(이동욱 집필)과 태극기를 자은도 소작회회장 표성천과 함께 목포부 송도공원과 철도정거장 앞 광장에 부착, 배포하여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때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1922년부터 서울을 왕래하는 한편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하여 그곳의 한인 독립투사들과 만나 민족해방투쟁 방략의 일환으로 사회주의사상의 형세를 관찰하고 받아들였다.
1923년 3월 암태도로 귀향하여 높은 소작료로 고통 받는 농민들을 보면서 경제적 약자들의 집단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그해 12월 ‘암태소작회’를 창립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이미 암태도에서는 1920년부터 의식개혁 및 교육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1921년 암태면 청년회가 여자강습원을 개설하고, 1922년에는 암태사립 3.1학사를 설립하여 조직적인 교육이 실시되고 있었다. 또한 민중극단을 조직하여 인근 각 면을 순회공연하면서 각 섬끼리의 연대 투쟁의식을 고취시켰다. 암태소작회 창립 후 야학부를 운영하여 문맹퇴치는 물론 민족과 계급의 모순을 일깨워주는 의식개혁 교육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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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년 서태석묘소 옆에 세워진 추모비(사진출처:신안문화원), 묘는 2008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됨. |
1923년 지주들이 소작료로 무려 7, 8할을 요구하자 서태석의 지휘 아래 문지주가를 상대로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시위와 항쟁이 벌어졌다. 1924년 서태석이 조선노농총동맹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뽑히면서 암태도 농민항쟁은 활발한 외부 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 해 4월 경찰은 노농대회에 참석한 서태석을 대전에서 검속하고 소작회 간부 12명을 마구잡이로 구금하였다. 이때 암태도 농민 600여 명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아사동맹을 결의하고 목포에 집결하여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사회여론이 확산되자 당국은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태도를 바꾸었고 지주들도 머리를 숙였다. 항쟁의 승리로 지주 대 소작인의 몫이 논의 경우 4 : 5가 되었다. 그리고 종래 마름들이 소작인 개개인의 집에서 소작료를 집행하던 방식이 한 마을의 모든 수확물을 한 장소에 모아 소작료를 한꺼번에 지주에게 주는 합복(合卜)제도로 바뀌었다.
1926년 암태소작회는 서태석의 권유에 따라 농민조합으로 이름을 바꾸고 1927년 3월 암태농민조합 제1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농민운동의 방향 전환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 결과 기존의 농민항쟁이 대 지주투쟁에서 독립투쟁으로 발전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서태석은 1927년 조선농민총동맹 중앙집행위원, 제3차 조선공산당 선전부장으로서 민족해방운동에 활발히 참여하다가 신의주에서 일경에 붙잡혀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1930년 대 이후 서태석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말년에는 수차례 옥고의 후유증으로 정신병을 앓으며 신안군 압해면 여동생 집에서 지내다가 들녘에서 벼 포기를 움켜쥔 채 삶을 마감했다.
서태석이 1928년 8월경에 지은 시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민족해방투쟁을 향한 서태석의 마음이 담겨 있으며 그가 암울한 식민지시기에 살았던 옹골찬 독립투사임을 알 수 있다.
울어볼까 우서볼까
산을 넘고 또 넘어도 앞에는 더 큰 산이오
물을 건너고 또 건너도 앞에는 더 큰 물이다.
이 산 이 물 또 건너도 또 산 또 물이 있으려니
갈까보나 말까보나 험한 산 험한 물길을
가고 가고 또 가오면
진리가 말하는 그 유토피아는 응당 있는 줄은 알지마는
피곤한 팔다리 더 갈 줄 바이 없다.
오냐 동무야
가자 가자 또 가보자
무쇠다리 돌팔뚝에 풀린 힘을 다시 너허
칼산 넘고 칼물 건너 쉬지 말고 또 가보자
이 팔과 이 다리 부서져
일점육일지골(一點肉一支骨)이
다 없어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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