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사크하면 연식이 좀 되는 분들은 타라스 불리바(율부린너 주연의 대장 불리바)라는 영화를 기억하실 겁니다.
술과 춤을 좋아하던 기병대, 몽골 군과는 판이하게 다른 어수선함이 먼저 떠오르는 코사크 족의 이야기가 다음 차례입니다.
원래 계획에는 없었지만, 13C 코사크 부대에 대해 관심이 많은 분이 있어서 찾아보니 16~17C의 코사크 해적에 대한 자료가 있어서 급하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코사크가 해적질을 했다는 것도 관심이 가는데, 대제국인 오토만을 상대로 수도까지 다섯 차례이상을 털었다는 사실은 저도 이번에야 알았습니다. 그리고 코사크가 단순히 해적이 아닌 정식군대로, 나아가 우크라이나 건국의 초석이 된데에는 페트로 코나쉐비치 사하이다츠니(Sahaidachny)의 리더십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소비에트 연방 역사만큼 리더십에 따라 급변하는 국가도 없을 것입니다. 타타르의 노예사냥터였던 러시아가 강대국으로 나서게된 뾰뜨르 이야기, 신이 모든 것을 줬지만(심지어 석유까지) 리더만은 주지 않았다는 루마니아 이야기처럼 리더십은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작은 씨족사회에서 대제국에 이르기 까지 반드시 필요한 조건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국민 수준에 맞지 않는 리더가 기원전 이집트에서나 하던 토목사업에 국운을 걸어서 여러분도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아실 겁니다. 좀 더 공부하고 자료가 준비된다면 '역사의 한 장면으로 본 리더십'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해볼까도 생각합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보충자료가 많기 때문에 여유있는 시간에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오토만 제국은 우리나라에서는 오스만 제국으로 부릅니다. 이번 이야기부터 오스만 제국으로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크롬에서는 다음 에디터가 오류를 일으킵니다. IE로 보셔야 오류가 없습니다.)
대제국의 심장까지 노린 흑해의 코사크 해적
Ronald B. Sorobey (Military History 2003년 6월 기사)
흑해의 코사크 해적들의 대담한 모험덕분에 우크라이나는 투르크의 침공을 벗어날 수 있었다. 코사크의 전설은 현재의 우크라이나 해군에게 이어지고 있다.
그림 설명: 메흐메드 4세가 1672년 코사크와의 동맹을 요구했지만, 그는 조롱 조의 답변만을 받았습니다. 러시아 현대화가 일리아 레핀이 그린, 술탄에 덤비는 자포로지(Zaporozhi) 코사크입니다.
클릭하면 멋진 그림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제가 20여년 전에 타임지를 읽을 때에 아주 작은 그림으로 보고, 너무 인상적이어서 기억이 남았던 그림입니다. 제가 생각하던 코사크의 모습이 너무나도 잘 표현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배나온 족장, 웃통벗은 전사, 귀족 풍의 훈남, 술취한 늙은 전사가 모두 총출동하고 있습니다. 등에 총을 메고 싱긋이 웃고 있는 좌측의 훈남이 리더인 사하이다츠니가 아닐까 합니다.
"코사크(Cossack)"라고 하면 유라시아 스템을 질주하던 기병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만, 16~17세기의 코사크 해적은 오스만 제국을 약탈해 중남미 해적 못지 않은 공포와 전설을 남겼다.
초원에 살던 코사크가 바다로 향하게 된 동기는 노예였다. 1500년, 투르크는 크리미아 타타르(Tartar, 크리미아에 정착한 몽골을 포함한 유목민족)를 복종시켰고 카파(Kaffa) 항에서 우크라이나 노예를 사고팔기 시작했다. 타타르 인은 남부 우크라이나를 약탈하면서 납치한 젊은 여성을 투크르 하렘의 후궁으로 팔아 넘겼다. 남자 아이는 노를 젖는 사공이 되거나 운이 좋으면 예니체리가 되었다. 당연히 카파의 노예시장은 우크라이나 인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고 스텝지역의 코사크는 같은 민족이 노예로 거래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투르크에 팔려간 우크라이나 노예를 풀어주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코사크가 늘어나면서 점차 조직적인 군대의 모습을 갖춰갔다.
1240년 재앙과 같았던 몽골의 약탈을 피해 북해 북쪽의 스텝에 정착해 살던 코사크는 러시아 사회에 흡수되지 않은 채 자유롭게 살아가던 농부나 농노로, 스텝의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그리고 크리미아 타타르, 투르크의 약탈을 막아내면서 자연스럽게 전사민족으로 바뀌어갔다.
이렇게 전사로 변화한 코사크의 가치는 곧 임자를 만나게 된다. 1553년, 우크라이나 귀족 드미트로 비쉬네베츠키(Dmytro Vyshnevetsky)는 흩어져 있던 코사크를 모아 하나의 부대로 만들고 주둔지를 요새로 만들었다. 요새는 드니에페르 강 하류 폭포(Zaporohamy)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자포로지아 코사크(Zaporozian Cossack)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비쉬네베츠키는 조국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흑해 연안의 투르크와 타타르 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코사크 해적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비쉬네베츠키는 1563년 몰다비아 부근에서 작전을 펼치던 중에 투르크 군에 잡혀 처형을 당한다.
자포로지 코사크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1538년 코사크의 소규모 함대가 오스만 제국의 오차키프(Ochakiv) 요새를 습격한 기록이 있다. 드니에페르 강 입구의 서쪽 강변에 위치한 이 요새는, 반대편 강변까지 포탄을 날릴 수 있는 포대가 있었다. 오차키프에는 2,000명 정도의 투르크 주둔군이 있었지만 코사크는 기습에 성공해 요새 일부를 허무는 성과를 올렸다.
그림 설명: 오차키프 요새를 오토만제국에게서 빼앗는 것은 100년을 훌쩍 넘긴 후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림은 제정 러시아 시대에 오차키프 요새를 함락시키는 러시아 군의 모습으로 역시 현대화가의 작품입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공산주의 국가답게 이념고취를 위해 이런 그림을 많이 남겼습니다. 클릭하면 멋진 그림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요새 습격에 자신감을 얻은 코사크는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는 변방을 보다 조직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코사크의 최고 목표는 노예해방이었지만 약탈로 들어오는 부수입을 노리는 경우도 많았다. 당연히 코사크의 성과는 당시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던 유럽국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고 교황,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국은 투르크에 대한 공동전선을 제안한다. 합스부르크 외교관 에리히 폰 라소타(Rasotta)의 일기에 따르면, 1594년 6월 공동전선의 임무 중 하나로 1,300명의 코사크가 50척의 배를 타고 약탈에 성공했다고 한다.
1600~1624년의 기간 동안, 자포로지 코사크의 원정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코사크는 주로 갈매기라고 불린 작은 갤리선 40~80척을 나누어 타고 원정에 나섰다. 갤리선은 18m의 길이에 4m 정도의 넓이와 깊이로, 17세기 지중해에서 사용되던 일반적인 전투함의 절반 정도의 크기였다. 코사크의 갤리선은 드니에페르 하류에서 자라는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부양을 돕기 위해 양 옆에 갈대줄기를 묶어보강했다. 갑판이 없는 배는 이런 부양장치를 하지 않으면 바다에서 가라앉기 쉬웠기 때문이다. 갈대는 부양효과 외에도 적의 불공격을 막아내는 효과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림 설명: 캠프로 귀환하는 코사크와 갤리선입니다. 코사크 해적함대의 규모가 커지면서 전함수준의 투르크 갤리선도 갖추게 됩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갤리선은 20~24개의 노와 1~2개의 돛으로 항해를 했는데, 날씨가 좋은 날에만 돛을 사용하고 전투 직전에는 돛을 모두 내렸다. 노와 돛을 모두 사용하면 10노트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있는 비교적 빠른 배로, 40시간 정도면 강 입구에서 흑해를 건너 아나톨리아 해변에 상륙할 수 있었다고 한다. 코사크 갤리선의 또 다른 특징은 선수와 선미에 모두 키가 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이 키 덕분에 그들은 배를 순식간에 180도 돌리는 뛰어난 기동력을 가질 수 있었다. 4~8문의 작은 포를 장비하고 있었으며 코사크 해적은 화승총과 검으로 무장했지만 적의 배에 오르면 큰 위력을 발휘하는 나팔총(총구가 넓은 산탄권총의 초기형)을 특히 선호했다. 코사크 갤리선은 크기가 작은데도 독특하게 모두 나침반을 가지고 있었다.
코사크 함대에는 작은 갤리선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지휘관의 투르크 갤리선도 여러 척 합류하고 있었다. 투르크 갤리선은 30개 이상의 노와 3~4개의 돛, 그리고 훨씬 많은 수의 포를 가지고 있었다. 그 외에 병력과 군수품을 수송하는 강 화물선도 필요에 따라 원정에 포함시켰다.
코사크는 입는 옷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매우 활달한 개인주의자들이었다. 대부분 큰 판탈롱 바지에 달라붙는 린넨 셔츠를 입고 허리에는 띠를 둘렀는데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독특하게도 셔츠는 반드시 바지 안에 넣어 입었다. 코사크 사이에서는 하층민 농노만이 셔츠를 꺼내 입는다는 오래된 속담이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는 양가죽 모자 또는 밀짚 모자를 썼으며 그 당시 유럽전체에 유행했던 긴 콧수염을 사랑했고 머리는 앞머리 한 줄기만을 남겨 왼쪽 귀로 흘러내리게 했다.
1613년까지, 코사크의 바다원정은 크리미아 해변, 흑해의 서쪽 해안이나 다뉴브 강 입구까지만 약탈하는 단기간의 원정에 머무르고 있었다. 공격대상도 투르크 배와 소규모 교역중심지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약탈은 대규모의 잘 기획된 원정으로 발전해 크리미아의 대규모 투르크 도시를 목표로 삼더니 심지어는 콘스탄티노플(오스만 제국의 수도, 지금의 이스탄불)까지 노리기 시작했다. 코사크의 원정이 이렇게 대담해지고 규모가 커진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모스크바 왕조 전쟁에 참전했던 수 백명의 코사크 병사가 귀향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로마노프(Romanov) 왕조가 열리면서, 일거리를 잃은 코사크 병사는 자연스럽게 투르크 원정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림 설명: 자포로지아 코사크가 살던 지역입니다. 클릭해서 지명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두시면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지휘관 중 한 사람으로 페트로 코나쉐비치 사하이다츠니(Sahaidachny)가 1613년에 선출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서부 출신의 정력적인 귀족으로, 군사학교를 마친 다음 바르나(Varna 1606), 오차키프(Ochakiv 1607), 페레코프(Perekop, 1607/1608), 킬리아(Kilia, 1609), 이스마일(Ismail, 1609), 아케르만(Akkerman, 1609) 등의 흑해 연안의 투르크 거점 공격을 성공시키면서 지휘관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전임자와 달리, 자포로지아 코사크가 폴란드 왕조의 변방에 고용되던 용병집단에서 벗어나 우크라이나 건국이라는 큰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오토만 제국을 공격하면 발칸 반도와 동유럽에서 오토만 제국에 대항하고 있던 유럽국가에게서 경제적 지원뿐만 아니라 정식 국가로서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1618년, 자포로지아 코사크는 반 투르크 동맹의 일원이 되었다. 사하이다츠니는 지휘소를 아예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에프(당시는 키이프, Kyiv)로 옮기고 폴란드 왕조의 묵인아래 외교정책까지 펼치며 독립을 노리게 된다.
(우에스기 왈: 여기에서 잠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당시 상황을 설명해야 좀 이해가 쉬워질 겁니다. 저도 폴란드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위키의 자료를 인용합니다.
1587년 폴란드왕으로 선출된 지그문트 3세(Zygmunt Ⅲ, Waza)는 교황청과 함스부르크왕과의 지원을 바탕으로 강력한 왕권 체제의 확립을 시도했다.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과 싸우는 한편, 이반 4세의 사망후 러시아의 내정이 후계문제로 혼란에 빠져있을 때 모스크바를 영향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이반 4세의 아들임을 자처하는 가짜 드미트리를 지원하였다. 1605년 가짜 드미트리는 모스크바 대토지 귀족들인 보야르(boyar)의 지원을 받아서 차르가 되었지만, 1606년 바실리 수이스키(Vassilij Szujskij)가 주동이 된 모반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그 후에 수이스키가 차르가 되었다.
1609년 폴란드군은 스몰렌스크를 점령하고 대항하는 모스크바 군대를 패배시키고 모스크바에 입성하였다. 지그문트 3세는 스스로 러시아의 차르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러시아의 보야르들은 그를 원하지 않았다. 지그문트 3세는 1596년 수도를 크라푸트에서 바르샤바로 옮겼다. 그가 지배하는 동안에 폴란드는 음악과 미술 등 예술의 일대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편 우크라이나는 폴란드 귀족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피지배계층인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폴란드인들과는 달리 대부분이 러시아 정교회신자였기 때문에 폴란드 인들과는 종교적으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다. 또한 우크라이나 인들에 대한 폴란드 귀족들의 지배는 탄압과 착취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폴란드인들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1648년 귀족 출신인 보흐단 흐멜니츠키(B. Chmielnicki)가 코사크 지도자 헤트만으로 선출된 후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고 1648년 그는 그때까지 숙적관계였던 크리마아 타타르와 동맹하고 반폴란드 봉기를 일으켰다. 그후 코사크-타타르 연합군과 폴란드군이 충돌하였지만, 1649년 즈보루프 평화 협정으로 전투가 종결되어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다. 1655년 4만 명 규모의 스웨덴 군대는 두 개의 군단으로 나뉘어서 리투아니아와 대폴란드 지방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폴란드의 오팔린스키와 리투아니아의 라치비우는 저항하지 않고 구스타브 군에 항복했다. 라치비우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해체되었다고 선언했다. 바르샤바는 9월에 함락되었다.
그 후의 폴란드 역사는 제가 정리했던 폴타바 전투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스웨덴과 러시아 두 강대국 사이에서 좀 불쌍한 역사가 계속됩니다.)
1613년에 있었던 두 번의 대규모 원정은 카파와 크리미아의 투르크 교역중심지를 노렸다. 코사크가 두 번이나 침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흐메드 1세는 대함대를 급히 보내 오차키브 근처의 드니에페르 강 입구를 봉쇄했다. 코사크는 대함대와의 정면대결은 무모하다고 판단해, 밤이 될 때까지 숨어 기다리다가 투르크 함대에 몰래 다가갔다. 돛과 마스트를 내리면 거의 물에 잠겨있는 갤리선은 투르크 해군의 감시를 피해 다가갈 수 있었다. 절반은 노를 젖고 다른 절반은 배 위에 오를 준비를 한 100척의 갤리선은 투르크 갤리선을 포위공격했다. 기습을 당한 투르크 해군은 아무런 힘도 못썼고 코사크는 배에 있던 우크라이나 노예를 풀어주고 무기와 값나가는 물건을 챙긴 후에 투르크 배를 모두 불태웠다.
그림 설명: 영국화가가 그린 아흐메드 1세입니다. 한 때 전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오스만 제국이 1615년에는 수도까지 약탈당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극심한 후계자 싸움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왕자들은 어쩔 수 없이, 후궁, 수상, 예니체리 지휘관과 결탁할 수 밖에 없었고 술탄에 오른 다음에도 권력은 이들에게 빼앗긴 채로 제국의 몰락을 하렘에서 잊고 지내게 됩니다.
강력한 방어시설을 갖춘 오차키프 요새는 항만 시설이 부족했고 주변의 해안은 방어시설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투르크 해군은 드니에페르 강 입구에 계속 주둔하면서 코사크를 봉쇄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코사크는 흑해까지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었다.
1614년에 있었던 코사크의 첫 번째 원정은 흑해에 나가기도 전에 불어 닥친 봄태풍으로 배를 잃으면서 잠시 주춤했지만, 초 여름이 되자 40척의 배와 2,000명의 전사가 아나톨리아 해안을 향해 항해했다. 아나톨리아 해안의 마을과 도시는 주로 투르크 상인들이 살던 부유한 곳이었다. 코사크는 거침없이 나아가 첫 번째 희생물인 트레비존드(Trevizond)를 마음껏 약탈했다. 이곳을 시작으로 투르크에서 추방당한 사람과 노예였던 사람을 길잡이로 앞세워 투르크의 휴양도시 시노페(Sinope)를 기습했다. 내륙에서 항구방향으로 공격한 코사크는 성을 점령한 다음 도시를 약탈하고 항구에 정박해 있던 갤리와 갤리온(배형범선)선을 불태웠다. 그리고는 시노페를 구원하러 온 투르크 군을 피해 재빨리 항구를 떠났다.
일설에 따르면, 이 소식을 들은 아흐메드 1세는 수상의 목을 자르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분노가 진정되자, 그는 수상의 처형을 취소하고 콘스탄티노플 군대를 보내 오차키프 근처에서 코사크 함대를 가로막게 했다. 황금, 페르시아 양탄자, 실크, 면과 같은 온갖 약탈품으로 가득 실은 코사크의 배 중 절반은 오차키프 동쪽에 상륙한 다음 드니에페르 지류까지 육로로 배를 옮기기로 했는데, 날씨가 도와준다면 2~3일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배 밑에 나무를 깔고 이동시키던 도중에 타타르 기병의 공격을 받은 코사크는 큰 피해를 입었다. 투르크 해군을 피할 방법이 없었던 나머지 절반의 코사크는 싸우기로 결정하고 약탈품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렸다. 일부 코사크가 포로로 잡혔고 그 중 20명은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져 시민들의 보복에 온몸이 찢기는 운명이 되었다.
17세기 오스만 역사가인 나이마(Naima)는 코사크 해적에 대해 마지못해 칭찬하는 기록을 남겼다. "이들보다 자신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뛰어난 해전기술과 대담함을 갖춘 코사크는 그 어떤 적보다도 훨씬 위험한 존재들이다."
코사크가 이렇게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무라드 3세부터 무라드 4세(1574-1623)까지의 오스만 술탄은 모든 권력을 빼앗긴 허수아비였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귀족출신으로 해적에 납치되어 무라드 3세의 하렘에 팔려왔던 술타나 바포(Sultana Baffo)가 실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궁중의 암투와 무기력한 술탄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코사크의 침범에 대해 단호한 대처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1615년은 코사크 최대의 탐험이 있었던 한 해였다. 코사크는 "무력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벽을 넘을 수 있다"라고 감히 장담하고 있었는데, 헛소리에 멈추지 않고 실행에 옮기기로 한다. 80척의 배에 탄 코사크가 콘스탄티노플의 두 항구, 미제브나(Mizevna)와 아르키오카(Archioca) 사이에 상륙해 두 항구를 동시에 습격한다. 오토만 기록에 따르면, 술탄 아후메드 1세는 사냥을 즐기던 중에 항구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고 30,000명의 예니체리를 보내 코사크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지만, 코사크는 예니체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재빨리 약탈품을 챙겨 배에 올랐다.
그림 설명: 코사크가 흑해 연안에서 노예를 수송하는 투르크 선박을 습격하고 있습니다. 코사크는 항구도시 약탈뿐만 아니라 투르크 상선도 나포했습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4일 동안 계속된 추격적 끝에 투르크 해군은 다뉴브 강 입구에서 코사크를 따라잡았다. 바로 이 순간에 180도 선회할 수 있는 코사크 갤리선의 뛰어난 능력을 이용해, 갑자기 배를 돌려 선두에서 추격하던 투르크 배를 나포했는데, 거기에는 해군제독이 타고 있었다. 지휘관을 잃은 투르크 해군은 더 이상 싸울 용기를 잃고 남쪽으로 배를 돌려 달아난다. 의기양양해진 코사크는 나포한 갤리선을 오차키프 요새 앞까지 끌고 와 수비군 앞에서 불질러 태웠다. 코사크는 단순한 시위에서 그치지 않고, 수비군이 불타는 아군의 배에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요새에 몰래 잠입해 소와 말을 끌고 캠프로 귀환한다. 해군 제독의 몸값으로 30,000개의 금화를 요구했지만 술탄이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아, 불쌍한 제독은 포로로 죽고 만다.
캠프로 돌아온 코사크 해적은 약탈품을 나눠가진 후에 강변의 비밀장소에 숨기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드네에페르 강 하류는 "코사크의 보물창고"라고 불렸다.
코사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직접 공격하면서, 1571년 10월 7일의 레판토(Lepanto) 해전 이후로는 투르크 해군에 가장 큰 골치덩어리가 되었다. 기독교 국가에게서 수도까지 위협을 받자, 오스만 제국은 드니에페르 강 입구를 아예 봉쇄해서 코사크가 흑해에 나오지 못하게 했다. 1616년 봄에는 25척의 대형 코사크 갤리선과 100척의 소형 지원선이 드니에페르 강 입구를 봉쇄하고 있던 투르크 선단과 전투를 벌여 투르크 선박을 나포하거나 도망가게 만들었다. 코사크는 크리미아 해안을 약탈하고 카파를 아예 점령해버렸다. 코사크는 항구를 떠나면서 노예시장에 있던 노예들을 모두 풀어준 후에 항구를 불태웠다.
1616년 가을에 있었던 두 번째 원정은 해전에서 이기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적에게 이기고 싶으면 먼저 발견해야 한다'라는 원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원정이었다. 원래는 삼숨(Samsum)의 아나톨리아 도시를 약탈하려고 했었는데 너무 강한 바람이 불어와 2,000명이 승선한 코사크 함대는 트레비존드(Trebizond) 방향으로 표류하고 만다. 트레비존드를 약탈하고 불태우던 코사크를 6척의 투르크 갤리선이 공격을 했지만 곧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친다. 술탄 아흐메드 1세는 코사크가 약탈품을 가지고 곧 물러날 것으로 짐작하고, 투르크 함대를 총동원해 드니에페르 강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내린다. 노쇠한 오토만 제국을 너무 잘 알고 있던 코사크는 이런 움직임을 미리 예상하고, 수비군이 모두 떠나 무방비 상태가 된 콘스탄티노플을 노리기로 한다.
그들은 수도 외곽을 여유있게 약탈을 했는데, 심지어 술탄의 하렘까지 침입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예전과 같이 드니에페르 강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크리미아의 동쪽 해안을 따라 아조프 해로 들어섰다. 그런 후에 지류를 타고 육로로 배를 옮겨 투르크 대함대를 따돌리고 드니에페르 강 안쪽으로 올라갔다.
술탄의 처벌이 두려웠던 투르크 지휘관은 1616년 11월에 함대를 이끌고 드니에페르 강을 거슬러 올라가 코사크의 캠프를 공격하기로 한다. 코사크 캠프가 있는 쉬차르브니자 보이스코바(Shcharbniza Voyskova)는 방어와 기습에 너무나도 좋은 장소였기 때문에, 투르크 해군이 강 안쪽으로 25km 이상은 올라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번만큼은 그냥 돌아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더구나 코사크는 전략요충지에 단 몇 시간 만에 대포를 설치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춰놓고 있었다. 소수의 수비병만 있을 줄 알았던 투르크 해군은 코사크 기지에 도착하자 마자, 코사크 해적이 모두 귀환했다는 것을 알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코사크는 쓸데없는 정면대결로 피를 흘리기 보다는 내륙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고 투르크 해군은 강변에 버려진 오무막과 배 몇 척만을 불태웠다. 그리고는 코사크가 버린 배를 끌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 코사크를 토벌했다고 떠들어댔다. 투르크 해군의 바램과 달리, 코사크의 약탈은 그 다음 5년 동안 계속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은 1620년에 한 번, 1624년에 세 번이나 공격을 받는다.
1621년 4월, 16세의 숱탄 오스만 2세가 100,000이 훨씬 넘는 군대와 300문의 대포를 이끌고 남서부 우크라이나로 진격하자 코사크는 육상전투에도 참전하게 된다. 술탄은 몰다비아를 관통해 폴란드를 정복하려고 했던 것인데, 폴란드 왕 지그문트(Zigmunt) 3세 바사(Wasa)는 40,000명의 병력을 보냈지만 드니에페르 오른쪽 강변의 초심(Chocim) 요새에 이르렀을 때에는 5,000명이나 탈영한 다음이었다. 위기에 몰린 폴란드 군은 폴란드 의회에서의 더 많은 권한과 정교회(Orthodox)을 보호한다는 조건으로 코사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사진 설명: 당시까지는 강대국 중 하나였던 폴란드의 왕 지그문트 3세입니다.
코사크 지휘관인 사하이다츠니는 이 조건을 받아들여 1621년 늦여름에 소규모 부대만 이끌고 먼저 초심을 향해 떠나고 주력부대가 뒤를 따른다. 사하이다츠니는 행군 중에 기습을 받아 입은 상처가 낫지 않아 1622년 4월 10일 키이프에서 목숨을 거둔다. 동부 코사크 족의 지휘관이었던 야키프 보로다프코(Yakiv Borodavko)는 코사크의 반란으로 9월 12일에 사형당한다. 오스만 제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코사크와 단독 강화를 시도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9월 20일에, 40,000명의 코사크가 초심에 포위된 폴란드 군의 구원하게 된다.
그림 설명: 초심 요새에서 투르크 군에 맞서 출격하는 폴란드의 유명한 후사르 기병입니다??? 뭔가 이상하죠? 잘 보면 자동차도 있고 안전바도 있고...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고, 덕후 중에 최고 덕후는 양덕이라는 말대로 재현 이벤트(Reenactment) 중입니다. 2차대전 이벤트에서는 실제 전차까지 등장하는데, 우리처럼 정부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장비를 가지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초심 전투 이벤트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몇 장면 더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폴란드 군은, 요새의 성벽과 8,000명의 강력한 기병 후사르(Hussar) 덕분에 가까스로 버티던 참에 코사크 구원군이 도착한 것이었다. 코사크가 전열을 갖추기 전에 폴란드 요새를 함락시키기 위해, 투르크 군은 전면공격에 나서 방어선을 무너뜨렸지만, 곧바로 후사르 기병대의 반격에 밀려나고 만다.
그림 설명: 지금 이야기보다 50년 후의 후사르와 예니체리의 한 판입니다. 물론 보병인 예니체리가 단독으로 유럽최강의 후사르에게 맞설 수는 없죠.
코사크는 기진맥진한 투르크 군의 캠프로 들이닥쳐 포대를 부수고 군수품을 약탈한 다음, 폴란드 군의 좌익에 진영을 차린다. 9월 28일, 투르크 군은 마지막 공격에 나섰지만, 연합군에 밀려 큰 피해를 입었고 결국 술탄은 패배를 인정하고 귀환길에 오른다. 투르크 군은 이 원정에서 전투, 질병, 탈영으로 30,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술탄은 귀국하자 마자 국방개혁에 나서 이미 술탄의 영향력을 벗어난 예니체리를 해산시키려고 하지만, 예니체리가 먼저 움직여 1622년 5월 19일에 그를 목졸라 죽이고, 훨씬 보수적인 삼촌 무스카파(Mustapha) 1세를 술탄으로 옹립한다.
위기에서 벗어난 폴란드 왕 지그문트는 코사크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6,000명의 코사크가 폴란드 의회에 등록하고 폴란드 군에도 입대했지만 비용을 전혀 지급하지 않았고 오토만 제국과 맺은 평화협정 때문에 코사크가 크리미아와 흑해에 진입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다고 멈출 코사크가 아니어서, 1624년 말까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원정을 계속한다.
그 이후에는 코사크 해적의 활동이 갑자기 사라지는데, 코사크가 쇠퇴하거나 오스만 제국의 대처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대가가 훨씬 푸짐한 수요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30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곳곳에서 경험있는 용병을 찾았고, 코사크는 합스부르크와 프랑스 편에게 고용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드니에페르 강까지 이르렀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어 현재의 루마니아까지 밀려났고 결국 제국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자포로지 코사크의 해적활동은 17세기 우크라이나 건국의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그들의 정신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해군에게도 이어져, 1992년 러시아 흑해 함대의 작은 배 한 척이 우크라이나 국기를 게양한다. 러시아 전함이 크리미아 해변에서 오데사(Odessa) 항까지 추격해 반란선원들을 체포하려고 했지만, 선조 코사크의 전설 그대로 추격을 뿌리치고 오데사 항구로 도망치는데 성공한다.
(우에스기 왈: 러시아, 보다 정확하게는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역사도 아주 복잡한데, 러시아 공산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제정 러시아의 영토는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몰도바,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나이나, 라트비아, 에스토리나, 조르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핀란드, 폴란드와 터키, 이란과 중국의 국경 일부, 알래스카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제국이었습니다.
1차 대전에 패배하고 공산혁명을 거치면서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했고 2차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친 후에 경제위기에 몰린 러시아의 영향력이 떨어지면서 민족주의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구시대를 그리워한 군대의 쿠데타가 시민저항으로 무산되고 개방을 추진했던 고르바초프가 실각하면서 간신히 버티던 러시아의 통제력이 사라지면서 1992년부터 급속한 연방해체가 진행됩니다.
마지막 내용은 우크라이나가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하던 중 일어난 한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코사크에 대한 보충자료입니다. 먼저 그림부터 설명하고 멋진 영화를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초심요새를 공격하는 투르크 군입니다. 100,000명이 넘고 300문의 대포라더니? 하는 분들... 이건 양덕들의 재현놀이 입니다. 클릭해서 큰 그림으로 즐겨주세요.
재현놀이이지만 고증에 맞게 진행됩니다. 급히 투입되는 코사크 선발대입니다.
코사크 포대의 공격입니다. 투르크 군은 대구경의 공성표가 있었지만, 야전에서는 이런 소구경 대포가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효과는 없는 것보다는 낫다입니다.
이건 아무래도 전문 재현배우가 동원되었을 것 같은데, 투르크 기병의 공격입니다.
폴란드/코사크 연합군이 투르크 군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두 장면은 모두 코사크 군대의 사격장면입니다. 당시의 화승총은 무게와 반동이 상당했기 때문에 이런 지지대를 꽂고 사격합니다.
좀 생소한 모습의 코사크입니다. 우리가 익숙한 코사크의 복장은 17세기 이후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고 그 이전에는 정체성이 없는 다양한 복장이었습니다.
이 두 그림은 클릭해도 커지지 않습니다.
아마도 폴란드 지역이 아닐까 하는데, 연대와 장소 미상의 두 장면입니다.
코사크 연합군이 투르크 국기를 두고 기병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한 코사크가 투르크 국기를 땅에 끌면서 귀환하고 있습니다.
승전을 거둔 후에 적국의 깃발을 땅에 끌면서 모욕을 주는 것은 일반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다음은 여러분에게 강추하는 코사크 영화, 1962년 작품 Taras Bulba입니다.
먼저 지금도 가슴이 뛰는 명장면인 불리바의 부름에 호응하는 코사크 기병대 합류장면입니다. 이제는 만들 수 없는, 대작바람이 불었던 당시의 헐리우드 덕분에 이런 장면이 100% 인력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반드시 소리 키워서 보셔야 합니다.
다음은 마지막 전투 장면입니다. 불리바가 사랑때문에 동족을 배신한 큰 아들을 죽이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지만, 원작은 불리바도 죽는 비극입니다. 안타깝게도 스페인어 자막밖에 못구하겠군요.
2009년 작품의 Taras, Bulba입니다. 영어 자막이 있어서 다행이고, 어떤 미친(?) 매니아 덕분에 전편을 즐길 수 있습니다. 아래 링크로 여유있게 즐겨보십시오.
http://www.youtube.com/watch?v=k2Pplbq3TJw
출처 :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 글쓴이 : Uesgi |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