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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
대상 |
전 소재지 |
비고 |
1 |
태조고황제 |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
충남 유형문화재 제131호 |
2 |
정종대왕 |
경북 김천시 대항면 향천리 직지사 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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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태종대왕 |
경북 성주군 성암면 대봉리 태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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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세종대왕 |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 27 |
경남 기념물 제30호 |
5 |
문종대왕 |
경북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 명봉사 |
경북 유형문화재 제187호 |
6 |
단종대왕 |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서삼릉 제외) |
경남 기념물 제31호 |
7 |
세조대왕 |
경북 성주군 월향면 선석사 뒤(인촌리산 8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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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예종대왕 |
전북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경기전 |
전북 민속자료 제26호 |
9 |
성종대왕 |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창경궁 내 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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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중종대왕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산 310(상색초등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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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인종대왕 |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479번지 은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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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명종대왕 |
충남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 산1 |
충남 유형문화재 제121호 |
13 |
선조대왕 |
충남 부여군 충화면 오덕리 237 오덕사 |
충남 문화재자료 제117호 |
14 |
숙종대왕 |
충남 공주군 이인면 태봉면 원태봉 |
충남 문화재자료 제321호 |
15 |
경종대왕 |
충북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산 34-1 |
충북 유형문화재 제6호 |
16 |
영조대왕 |
충북 청원군 낭성면 무성리 산 6-1 |
충북 기념물 제69호 |
17 |
장조의황제 |
경북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 명봉사 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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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정조선황제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2리 (KBS 영월방송국내 복원) |
강원 유형문화재 제114호 |
19 |
순조숙황제 |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산 1-1(법주사) |
충북 유형문화재 제11호 |
20 |
헌종성황제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옥계저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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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순종효황제 |
충남 홍성군 구항면 태봉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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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고종 |
창덕궁 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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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왕세자 |
동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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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인성대군 |
경북 사천시 곤명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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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연산군모윤씨 |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기 용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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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안양군 |
경북 상주시 모동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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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완원군 |
경북 상주시 모동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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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왕자수장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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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견성군 |
강원동 양양군 강현면 하복리 태봉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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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연산군원자금돌이 |
경북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태봉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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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연산군자인수 |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왕릉 2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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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왕녀영수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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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연산군녀복억 |
강원도 삼척시 자원동, 도원동 태봉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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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연사군녀복합 |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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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덕흥대원군 |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태조 태실 뒷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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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인성군 |
충북 청원군 문의면 산덕리 산 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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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인흥군 |
경북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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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숙명공주 |
경북 김천군 지례면 관덕1리(활남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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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숙정공주 |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대안3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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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숙경공주 |
경북 김천군 지례면 관덕1리(활남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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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명선공주 |
충남 보령시 미산면 남심리 태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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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연령군 |
충남 예산군 대술면 궐곡리(고새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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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영조왕녀(화유옹주) |
충남 당진군 순성면 성북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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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
영조왕녀(화령옹주) |
충남 예산군 대흥면 대흥면사무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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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영조왕녀(화길옹주) |
충북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태봉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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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
의소세손 |
경북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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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문효세자 |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용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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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
철종왕세자 |
강원도 영원군 주천면 주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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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
덕혜옹주 |
창덕궁 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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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
고종제팔남 |
창덕궁 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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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고종제구남 |
창덕궁 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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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
진전하 |
동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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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
영상군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객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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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
의혜공주 |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함양리 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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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
경평군 |
대전 서구 과수원동 180-3(향토사료관 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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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릉에 대하여
조선시대의 능과 원은 능,원,묘로 구분하여 조성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서울을 중심으로 집중되어있다. 현재 남아있는 능 40기, 원 13기, 묘 52기가 있으며 북한에 몇 기의 능이 있다. 이 능들은 시대에 따라 택지의 지역이 정해져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상(喪)을 당하면 그때마다 상지관을 보내어 능지를 선택하였는데, 왕이나 왕비가 승하한 뒤 장례기간을 5개월에서 3개월까지 잡았으므로 가능하였다. 왕릉의 택지는 고려시대부터 성행하여 온 풍수지리설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많은 논란을 겪었고 이미 조성한 능이라도 새로운 설이 나와 불길하다하면 천장하는 등 폐단도 적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태조 이래 왕릉 중 13기가 천장되었는데 이중 8기는 풍수설에 의거하여 불길하다는 이유였고, 인조 때 조성된 장릉의 경우 5대 81년간 천장에 대한 논란을 거듭하여 결국 영조대에 천장을 하였다.
능의 위치는 외형적인 것뿐만 아니라 현궁이 들어설 땅의 토질까지 중시하여 흙에 윤이 나고 물기가 없으며 지나치게 건조하지도 않고 다섯가지 색을 내고 고와야 이상적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능역의 택지조성은 국상이 있을때 마다 엄격한 이론과 번거로움이 따랐으며 택지가 된 뒤에도 일정한 구역 내의 개인 재산과 묘까지도 모두 철거되는 변을 당하는 등 그 폐단이 컸다.
조선시대 초기 능의 형식은 대체로 고려의 형식을 따라 현궁을 지하 석실로 하고 그 앞에 부장품을 위한 석실 결방을 내어 지었으며 석실의 덮개석 주위 평지주변에는 호석을 둘렀다. 이들 호석 외면에는 여러 가지 무늬를 조각하였는데 지대석 외면에는 복련(覆蓮)을, 우석에는 구름무늬를, 면석에는 중앙에 12지신과 주변에 구름무늬를, 만석의 바깥 하부에는 앙련(仰蓮)을 새겼으며, 인석 외단에는 모란이나 규화(葵花)무늬를 넣은 뒤 이 위에는 봉분을 만들고 떼를 입혔다. 다시 그 주위에 돌기둥을 둘렀는데, 이 난간과 호석사이에는 박석(薄石)을 바깥쪽으로 경사지게 깔아 배수와 보강을 겸하도록 하였다.
* 복련 : 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무늬 * 앙련 : 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무늬 * 규화 : 접시꽃, 해바라기. |
난간석 밖에는 동,서,북 3면에 높이 3,4척의 담장을 쌓았으며, 담장 안에 석양 넷을 동서로 나누어 세우고 석호 넷은 북쪽에 둘, 동,서의 석양 사이에 하나씩 두어 봉분 밖을 향하게 하고 있다. 능 앞에는 석상을, 좌우로 망주석을 하나씩 세웠으며 이 앞 양쪽에 문석인 한 쌍과 석마 한필씩 세웠다.
석실 남쪽 산기슭에는 정자각을 조성하고 뒤쪽 적당한 곳에 예감(瘞坎)을 만들었으며, 그 동쪽에는 비각을 세우고 남쪽에는 고방(庫房)을 두었으며 재방(齋房)은 그 밑으로 적절히 선지하여 두었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배치상으로 볼때 몇가지 형식으로 나뉜다.
첫째 - 왕이나 왕비 어느 한쪽만을 매장한 단릉(單陵)
둘째 - 왕과 왕비의 능 같은 소구릉에 나란히 배치한 쌍릉
셋째 - 정자각 좌우로 두개의 소구릉에 각기1능씩 두는 형식
넷째 - 부부를 같은 봉토하에 합장하는 형식 등이다.
특히, 쌍릉의 경우 곡장 안에 두 능을 나란히 두어 석상을 제외하고는 석물의 배열을 단릉에서와 같이 한다.
[출처 : 2006 문화재지킴이 활동안내서]
서삼릉이란 한때 이곳에 있었던 중종(中宗)의 정릉(靖陵)을 중심으로 희릉(禧陵)·효릉(孝陵)이 있는데, 그 근처에 왕실 묘지가 이루어져 명종(明宗)·숙종(肅宗) 이후 한말까지 역대의 후궁·대군·군·공주·옹주의 묘가 만들어졌고, 고종(高宗) 원년에 예릉(睿陵)이 들어서면서, 효릉·희릉·예릉의 3능을 일컬어서 서삼릉이라 하였다.
서삼릉 내 문화재 현황표
구분 |
명칭 |
위호 |
비고 |
공개 |
능 |
희릉 |
제 11 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윤씨 |
단릉 |
공개 |
효릉 |
제 12 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 |
쌍릉 |
비공개 | |
예릉 |
제 25 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 |
쌍릉 |
공개 | |
원 |
소경원 |
제 16 대 인조의 아들(소현세자) |
단릉 |
비공개 |
의령원 |
장조(사도세자)의 아들(의소세손) |
단릉 |
공개 | |
효창원 |
제 22 대 정조의 장자(문효세자) |
단릉 |
공개 | |
묘 |
회묘 |
제 9 대 성종의 계비. 연산군의 사친인 폐비윤씨 |
1기 |
비공개 |
의친왕묘 |
고종의 둘째 아들과 어머니 장씨 등 |
3기 |
비공개 | |
경혜옹주묘 |
태조의 장남인 진안대군(방우)의 딸 등 |
2기 |
비공개 | |
경선군묘 |
제 16대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의 아들 |
2기 |
비공개 | |
후궁의묘 |
빈, 귀인, 숙의, 소의, 숙원 등 |
22기 |
비공개 | |
왕자,공주묘 |
대군, 군, 왕자, 공주, 옹주 등 |
22기 |
비공개 | |
태실 |
왕태실 |
제 1 대 태조 고황제 등 역대 왕 |
22위 |
비공개 |
왕자녀태실 |
왕자 왕녀 |
32위 |
비공개 | |
계 |
능 : 3기, 원 : 3기, 묘 52기, 태실 : 54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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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릉(禧陵) : 조선왕조 제 11대 중종의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1491~1515)의 능이다. 왕후가 승하하자 처음에는 능터를 광주(廣州) 헌릉(獻陵) 구역 내에 택정하였으나, 이를 둘러싼 권력다툼의 결과(중종 32년 1537)로서 새로이 길지(吉地)를 찾아 현재의 위치에 천장되었다. 왕후는 파원부원군 윤여필의 딸로서 중종 원년(1506)에 숙의가 되었고 그 이듬해에 비가 되었다. 왕후는 중종 10년(1515)에 원자인 인종을 낳고, 7일후에 산후병으로 25세나이로 경복궁에서 승하하였다. 중종의 정릉이 희릉 곁에 정해지면서 정자각(丁字閣)을 양릉 사이에 옮겨 세우고 동원이강형식(同原異岡形式)을 취하게 되었다. 능제도는 병석 없이 난간만 두른 단릉(單陵)으로 석물의 배치며 장명등(長明燈)·석망주(石望柱) 등의 수법이 전기 능석물(前期陵石物) 양식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2) 효릉(孝陵) : 조선왕조 제 12대 인종(仁宗)과 그 비(妃)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朴氏)의 능이다. 인종은 중종의 맏아들로서 중종 15년(1520)세자에 책봉되고 1544년 창경궁에서 즉위하였다. 인성왕후는 금성부원군 박용의 딸로서 중종 19년(1524)에 세자빈에 책봉되고 인종 즉위와 더불어 비가 되었다. 선조 10년(1577) 64세로 경복궁에서 승하하여 인종과 함께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효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난간(欄干)으로 연결하였으며, 왕릉에는 양우석(兩隅石)에 운채(雲彩)와 면석(面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진 병석(屛石)을 돌렸다. 당초 시대적인 상황으로 상례절차를 감쇄(減殺)하여 산릉(山陵)공사에 소홀한 점이 많았던 모양으로 선조(宣祖) 10년에 효릉의 개수를 명하여 병석 등 석물(石物)을 다시 고쳐 넣었다.
(3) 예릉(睿陵) : 조선왕조 제 25대 철종(哲宗)과 철인왕후 안동김씨(哲仁王后安東金氏)의 능이다. 철종은 정계대원군 광의 셋째아들로 순조 31년(1831)에 탄생하였다. 헌종(1833~1849 재위)이 재위 15년만에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그 이듬해 대왕대비(순조의 비 순원왕후)에 의하여 강화도 촌거로부터 영입되어 19세때 인정전에서 즉위하였다. 제위 14년동안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그 뒤로는 외척의 세도로 인하여 국정을 바로 잡지 못하고, 철종 14년(1863) 12월에 33세로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철인왕후는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로서 철종 2년(1851)에 비로 책봉되고, 고종 15년(1878) 42세로 창경궁에서 승하하여 남편과 함께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양릉을 나란히 놓아 난간으로 연결된 쌍릉은 능석물 양식상 융건릉(隆健陵)의 영향이 보인다. 즉, 융릉(隆陵)에서 8각 장명등과 4각 장명등의 운족양식(雲足樣式)을 합하여 새로운 양식을 이루고 있다. 능전 3계(陵前三階)는 이미 2계로 줄어들었고 장명등이 전방으로 나와 있는 것이 특이하다.
(4) 소경원(紹慶園) : 조선 제 16f대 인종와 인열왕후 한씨 사이에 태어난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원이다.
소현세자는 조선 제 17대 효종의 형으로 광해 4년(1612) 1월 4일에 출생하여 인조 3년(1625) 세자에 책봉되고 1627년 정묘호란때 전주로 내려가 남도 민심을 수습하고 이해에 가례를 올렸다. 1637년 병자호란 때 동생 봉림대군과 함께 볼모로 청나라 심양에 잡혀갔으며 그곳에서 단순한 인질이 아닌 외교관 소임을 도맡아 청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짓거나 막기도 하였고, 서양 문물에 심취하여 천주교 신부인 아담 샬 등과 친교를 맺고 그를 통하여 서양의 천문학, 수학 등을 접하였다. 인조 23년(1645)에 9년 동안의 인질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였으나 그해 4월 26일 원인모를 병으로 급사하였다.
(5) 의령원(懿寧園) : 이곳은 의소세손의 묘소이다. 세손은 조선왕조 제 21대 영조의 세손으로 장조(사도세자)의 제1자이며, 영조 26년(1970) 8월 27일 태어나 동왕 28년(1752) 4월 4일에 3세로 조졸하여 양주군 탄현에 초장하였으나 1949년 6월 이곳에 천장되었다.
(6) 효창원(孝昌園) :
조선 22대 왕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무덤이 있어 효창원(園)이라고 불렸다. 인조 성씨의 소생으로 정조 6년(1782) 9월 7일에 태어나 동왕 10년(1786) 5월 11일에 5세로 조졸하여 효창동(효창공원 내)에 있었으나 1944년 10월 이곳으로 천장하였다. 순조의 후궁 박숙의(朴淑儀)의 무덤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묘역이 광활하고 송림이 우거져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구용산고지(舊龍山高地)라고 불렸으며, 일본군이 한때 야영지로 삼기도 했었다. 일제강점기의 경성부(京城府)가 효창원의 일부인 8만 1460평을 공원용지로 책정한 것은 1924년 6월의 일이며, 순환도로 ·공중변소 등을 갖추어 일반에게 공개한 것은 같은 해 8월부터였다.
(6) 경선군(慶善君), 경완군(慶完君)의 묘 :
조선 제 16대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1612~1645)의 장남 및 차남의 묘이다.
경선군은 소현세자의 장남으로 인조 16년(1638)에 민회빈 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이석철이며, 효종 5년(1654) 8월 17일에 제주도 유배지에서 하세하였다.
경완군은 인조의 손자이며, 소현세자의 차남인 이석린으로 제주도 유배지에서 하세하였다.
(7) 경혜옹주묘
조선 제 1대 태조의 장남인 진안내군(방우)의 경혜옹주묘과 사위의 묘가 있다. 조선초기 묘 형태로 특이하게 방형(사각형)무덤형태이다.
(8) 회묘(懷墓, 연산군 생모 폐비 윤씨 묘)
성종의 비로써 폐비후 사사된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묘로써 양주군 천장산(경희대학교 경희의료원 자리) 아래에 민묘(民墓)로 있었던 것을 연산군이 즉위 후 왕비릉으로 조영하고 회릉이라 하였으나 연산군이 폐위된 후 회묘로 강등되었고 1969년 10월 25일 지금의 곳으로 천묘되었다.
(9) 왕자, 공주묘
22기가 있는데 원래 왕릉권역 내에는 있는 수없는 것이나 경술국치후 일본 국내성 소속의 이왕직(李王職; 대한황실을 감시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기구. 조선시대의 궁내부(宮內府)와 비슷)이 설치되어 서울, 경기 일원에 산재한 묘들을 집중 관리한다는 명복으로 이곳에 천묘하였다. 대군(중전이 낳은 왕자)묘 4기, 왕자묘 4기,중전이 낳은 딸인 공주묘 6기, 후궁이 낳은 딸인 옹주묘 2기, 기타 왕녀묘 6기가 있다.
(10) 귀인, 숙의묘
조선조 후궁 내명부의 빈(정1품) 묘 5기, 종 1품의 귀인묘 8기, 종 2품의 숙의묘 6기, 정 2품의 소의묘 1기, 종 4품 숙원묘 1기, 기타 1기가 있다.
<옹주[翁主]란?>
고려 ·조선시대 국왕의 첩 또는 국왕의 서녀(庶女) 등에게 준 작호(爵號).
고려 초기에는 내 ·외명부에 일정한 제도를 설치하지 않았으나 현종 때 국왕의 첩에게 귀비(貴妃) ·숙비(淑妃) 등의 호(號)를 주었고, 정종(靖宗) 때에는 이들을 원주(院主) ·원비(院妃)와 궁주(宮主)라 하던 것을 충선왕 때 궁주를 옹주로 개칭, 정1품의 품계를 주었다. 그 뒤 옹주라는 칭호가 남용되어 논란이 있자 1391년(공양왕 3) 왕자의 정비(正妃)와 왕의 유복(有服) 동성자매(同姓姉妹), 조카딸, 군(君)의 정처(正妻) 등에 한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후궁(後宮) 소생의 딸에게 주던 작호이다. 공주(公主)와 함께 품계(品階)를 초월한 무계(無階)로, 외명부의 가장 윗자리이다. 옹주에게 장가 든 자는 처음에는 종2품의 위(尉)로 봉(封)하였다가 나중에는 정2품으로 올려주었다. 또한 옹주의 처소를 옹주방이라 하였다.
<십이지신상 [十二支神像] 배워보기>
십이지를 상징하는 수면인신상(獸面人身像).
십이지라는 개념은 중국의 은대(殷代)에서 비롯되었으나, 이를 방위(方位)나 시간에 대응시킨 것은 대체로 한대(漢代) 중기의 일로 추정된다. 다시 이것을 쥐[子]·소[丑]·범[寅]·토끼[卯]·용[辰]·뱀[巳]·말[午]·양[未]·원숭이[申]·닭[酉]·개[戌]·돼지[亥] 등 열두 동물과 대응시킨 것은 훨씬 후대의 일로, 불교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대(唐代)에 와서는 십이지생초(十二支生肖)를 조각한 석재 및 토우가 묘지장식에 나타났다.
한국의 경우는 호석(護石)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경주(慶州) 괘릉(掛陵)이나 김유신묘(金庾信墓)가 최초의 것으로 보인다. 성덕왕릉(聖德王陵)은 호석이 넘어지지 않도록 삼각형 수석(袖石)을 받치고 그 사이에 따로 환조(丸彫) 십이지신상을 세운 특이한 예이며, 그 이후의 왕릉에는 괘릉과 마찬가지로 호석면에 십이지신상을 양각하였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입상(立像)뿐만 아니라 좌상(坐像)도 나타나고, 신라의 예처럼 면석(面石)에만 조각한 것과 반대로 안에 끼운 널판돌에 새기기도 했으며, 음각(陰刻)한 것도 간혹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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