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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17> 파란만장··· 피랍인들 생애
‘파란만장’이란 말로는 다 할 수 없다. 임진·정유 양란 때 일본에 잡혀간 사람들의 운명은 파란만장(波瀾萬丈) 파란중첩(波瀾重疊) 같은 말로는 너무 부족하다. 어느 누구의 경우에도 예외 없이 기록이 없어 모르고 살 뿐이다. 설사 기록이 있다한들 적국에 끌려가 겪은 그 간난과 신고를 글로 어찌 다 표현하랴!
잡아간 무장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성공’한 사람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홍호연(洪浩然) 余大男(여대남) 일연상인(日延上人) 같은 이들은 성글지만 기록이 있어, 정신세계의 일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특히 홍호연과 여대남의 고국병과 부모 그리는 정은 너무도 드라마틱하다.
홍호연은 대를 이어 일본인 주군에게 충성을 바치다가 순사(殉死)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순사라니···! 고대 중국에서도 비인간적이라 하여 토우를 만들어 무덤에 넣는 것으로 대신했는데, 17세기 후반까지도 그런 야만적인 제도가 이어져 왔으니 놀랍지 않은가.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무려 26명이었다. 벌어진 입을 다물기 어렵다. 순사자를 따라 죽은 사람도 있다. 그 명단에 조선인이 셋이나 끼여 있어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홍호연은 열두어 살 어린 나이에 사가(佐賀)성 영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군에게 잡혔다. 후손들이 쓴 <洪浩然傳>에 따르면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경남 산청군 산골 어느 동굴에 숨어있던 한 소년이 왜군에게 발견되었다. 왜병 하나가 개짓는 소리가 시끄러워 찾아가 보았더니, 웬 소년이 큰 붓을 어깨에 걸쳐 메고 동굴 속에 숨어 있었다.
그의 장형 홍성해(洪成海)의 문집 <오촌선생실기(五村先生實記)>에 따르면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왜병들이 산청군 오부면 중촌리 남양홍씨 집성촌에 들이닥쳤다. 급박한 피란길에서 그는 가족과 헤어져 바위굴 속에 숨었다. 4형제 중 막내였던 그는 피란길에도 큰 붓을 어깨에 메고 갈만큼 글씨 쓰기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남양 홍씨 족보에 올라 있는 그의 이름은 운해(雲海)인데, 어떤 경위로 호연(浩然)이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나오시게 가문에 전해오는 문서 <나오시게공보(直茂公譜)>에 따르면 “홍씨의 관인이었기에 호연이라고도 했다. 공은 깊은 친절함을 더해 사가 성 아래에 그를 두고 항상 자신의 곁에 불렀다”고 돼 있다.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말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다.
왜병에게 끌려간 소년은 곧 나오시게에게 보내졌고, 피란 상황에서도 큰 붓을 어깨에 메고 있는 것을 범상치 않게 본 나오시게는 그를 부하장수 다쿠 야스토시(多久安順)에게 맡겨 보호케 하였다. 이삼평을 보호했던 다쿠 성 영주이다.
전쟁이 끝나 귀국한 나오시게는 소년을 불러 테스트를 해보고 또 놀라게 된다. 글씨가 보통솜씨가 아니었던 것이다. 글씨뿐만 아니라 시와 경에도 밝은 신동에게 감탄해 곁에 두고 총애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녹미 100석을 내려 넉넉하게 살도록 보살폈다. 포로 신세에서 무사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영주 가문에 전해오는 나오시게 문서에 따르면 진주성 함락 후 본진으로 돌아갈 때 ‘관인의 아들’이 체포되어 데리고 돌아왔다고 돼 있다. “홍씨의 관인이었기에 호연이라고도 했다. 공은 깊은 친절함을 더해 사가 성 아래에 그를 두고 항상 자신의 곁에 불렀다.”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말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다.
성인이 되어 그는 다쿠의 가신 에조에 이우에몬(江副伊右衛門)의 딸과 결혼하였다. 얼마 안 되어 상처를 하자 다쿠의 또 다른 가신의 딸을 후처로 맞아들였다. 이 모두가 주군 나오시게의 배려였다. 그만큼 총애를 받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오시게가 죽고 그의 아들 가쓰시게(鍋島勝茂)가 영주가 되자 그는 교토(京都) 오산에 유학하는 특혜를 받게 된다. 오산이란 불교학과 한학 연구로 유명했던 다섯 개의 사찰(南禪寺 天龍寺 建仁寺 東福寺 萬壽寺)을 말한다.
유학을 마치고 사가로 돌아가 가쓰시게의 가신이 된 그는 학문과 서예에 관한 일을 맡아, 많은 작품을 남겼다. 사가 번과 연이 있는 사찰이나 신사 같은 곳의 편액과 현판, 도리이의 명문, 백낙천(白樂天)의 장한가(長恨歌)등 당송시대 시인들의 시문서 등이다. 그의 글씨는 획의 처음과 끝에 힘이 많이 들어간 것이 특징인데, 획마다 혹이 달린 것 같다는 평판 때문에 ‘혹부리 노인’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타국에 끌려와 누리는 명예와 부귀에 초월한 듯, 그는 만년에 홀로 귀국케 해 달라고 청원한다. <홍호연전>에는 타국인으로서 측근에서 주군을 모시게 된 은혜에 대한 감사를 표한 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좀처럼 도울 일도 없어졌으니 자리에서 물러나 조선으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저를 가엾게 여기신다면 아무쪼록 허락해 주소서.”하는 청원서 내용이 들어 있다.
가쓰시게는 일단 그 청원을 받아들였다. 호연이 행장을 차리고 사가를 떠나 조선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가라쓰(唐津)에 당도할 무렵 관리가 급히 말을 달려 그를 따라잡았다. 국경의 번소(番所)마다 호연을 붙잡아 두라는 명이 떨어진 것이다. “너무 섭섭해서 안 되겠다”는 것이 붙잡은 이유였다.
“지금까지 큰 은혜를 입었는데 지금 또 머물러 있으란 말씀은 참으로 고맙고 송구하옵니다. 그러하오면 늙고 병들었으니 봉록은 반만 주시고 나머지는 자손에게 상속되도록 허락해주시기 바라옵니다.” 번에 되돌아간 호연은 자식의 앞날을 위해 그렇게 부탁했다.
그리고 70세가 되어 다시 한 번 귀국을 시도하였다. “이제 나이가 들어 허리가 활처럼 휘었으니 부디 조선의 선영에 해골이 묻히게 해 달라”는 시를 지어 바쳤다. 이번에도 가쓰시게는 귀국을 허락했다. 그러나 지난번과 똑같이 가라쓰에서 그를 주저앉혔다.
자식에게 봉록을 상속케 해 달라는 부탁으로 보아 혼자 돌아가는 길이었을 터이다. 처자를 남겨두고 혼자 돌아가 고국 땅에 묻히기를 두 번이나 시도했을 만큼, 망향의 한이 깊었음을 말해주는 이야기다.
체념의 나날을 보내던 1657년 어느 날 에도(江戶· 됴쿄)에서 주군의 부음이 날아왔다. 3월 24일 가쓰시게가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로부터 보름째인 4월 8일 그는 아미타지(阿彌陀寺)에서 할복, 주군의 뒤를 따라갔다.
나오시게 문서에는 호연의 순사와 관련하여 “비루불건(悲漏不乾) 제수불감(啼愁不堪)하여 순사를 이루었다”고 적혀 있다. 너무 슬퍼하여 눈물이 마르지 않았고, 수심을 견디지 못 하여 자진했다는 뜻이다. 가쓰시게 2세문서인 <勝茂年譜>에는 그의 이름이 순사자 명단 18번째에 ‘고 요베에(洪與兵衛)’라고 적혀 있는데, 호연(浩然) 말고 무사다운 이 이름도 같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자진하기 전 그는 자식들에게 유명한 ‘인(忍)’자 유묵을 남겼다. 큰 글자 ‘忍’ 아래에 ‘인즉신지보(忍則心之寶) 불인즉신지앙(不忍則身之殃)’이 두 줄로 씌어 있다. 참는 것이 몸에 보배요, 참지 못 함은 몸에 재앙이라는 뜻이다.
마음의 고초가 어떠하였기에 이런 유언을 남긴단 말인가. 평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말해주는 핏빛 생활철학이다. 순사를 결행하려고 아미타지로 떠나는 가마를 가로막은 가족이 지필묵을 건네어 유언을 달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의 인생철학을 말해주는 작품 중에는 유명한 ‘편주의불망(扁舟意不忘)’이 있다. 작은 배를 타고 온 뜻을 결코 잊지 말라는 뜻이다. 작은 배를 다고 온다는 것은 왜병에게 붙잡혀 적국에 온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사후 번 어용화가가 그린 그의 커리커처도 유명하다. 두 손으로 커다란 붓을 든 빡빡머리 노인이 웃으며 섰는데, 바짓가랑이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그는 죽어 아미타지에 묻혔다. 주군 나오시게 가문과 연이 깊은 사찰이니 죽어서도 주군 곁을 떠나지 못 한 셈이다.
아미타지를 찾아가려고 사가 역에 내린 시간은 아침 7시 50분 무렵이었다. 플랫폼을 빠져나가 대합실 문간에 자리한 관광안내소를 찾았다. 하나뿐인 직원이 막 출근해 문을 여는 시간이었다. 용건을 말하자 “자전거를 세우고 오겠다.”하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곧 돌아왔다. 홍호연을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몰라 한자로 써서 보여주었다. “아! 고 코젠데스네.” 성명 모두 음독이구나 싶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가 시가지 지도에 아미타지 위치를 표시해 가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사가 역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곳이었다.
위압적으로 보일만큼 높고 큰 본전 옆이 바로 묘지였다. 몇 백 평 돼 보이는 묘지 한가운데 자리 잡은 묘소에 ‘운해호연거사(雲海浩然居士)의 묘’라 새겨진 돌이 섰고, 그 아래 시들지 않은 화분 둘이 놓였다. 그 앞에 선 말뚝에는 일본어로 ‘홍호연의 묘’라고 씌어 있다. 지금도 홍씨 성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후손들이 자주 참배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찰 본전에는 묘비명과 똑같은 위패가 모셔졌는데, 우리네 지방 틀 같은 위패 모습이 너무 낯익었다. 이루지 못 한 망향의 비원을 품은 듯하였다.
묘 앞에는 파란 많은 그의 일대기가 간략히 적힌 안내판이 서 있는데, 그가 나베시마를 따라 일본에 와 귀화했으며 대를 이어 모신 나베시마의 아들이 죽자 순사했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하여 고 이진희 교수는 “주군의 죽음을 슬퍼해서라가 아니라 너무 늙어서 귀국의 비원을 풀지 못 하게 된 것을 비관한 것이었다.”고 보았었다.
호연과 친하게 지냈다는 여대남(余大男)은 규슈 중부의 거점도시 구마모토(雄本)에서 한 맺힌 일생을 보냈다. 호랑이 같은 무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붙잡혀 온 탓이었다.
그도 교토 오산유학생으로 알려져 오다 최근의 연구에서 교토 육조강원(六條講院)에서 공부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왜병에게 잡힐 때 말이 통하지 않자 지필묵을 청해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유명한 시구를 써 보였다. 그것을 받아 본 기요마사는 놀랐다.
독상한산석경사(獨上寒山石逕斜·홀로 오른 심산에 돌길은 비탈 되어)
백운생처유인가(白雲生處有人家·흰 구름 피어나는 곳에 인가가 있네)
이 신동이 너무 귀엽고 가여워 기요마사는 옷을 벗어 입혀주고 식사 때는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한다. 데리고 돌아가 평생 가까이 두고 자랑 삼을 생각이었을 것이다. 산중에서 붙잡힌 어린아이가 그런 시를 쓰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 때 대남의 나이 여덟 살이었다고도 하고, 열세 살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편지를 받기 전까지는 천애고아라고 생각했다는 편지 글로 보아 여덟 살 때였다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열세 살이었으면 부모와 떨어지게 된 대략의 경위는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편지에는 그 순간 “아버지에게서 배운 대로 시퍼런 칼날도 겁내지 않고 시문을 썼다.”고 적혀 있다.
그는 1611년 12월 24일 주군 기요마사가 죽은 뒤 행한 법문에서 조선 사람이라는 ‘비밀’을 밝혔다. “8살 때 부모를 잃고 전쟁고아로 떠돌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고, 기요마사공의 은혜를 입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실토한 것이다.
호연처럼 그도 진주성 함락 때 포로가 되었다. 경남 하동군 양포면 박달리에서 양반 여수희(余壽禧)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친척이 주지로 있는 근처 보현암(普賢庵)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왜병에게 잡혔다. 진주성 전투 후 울산 본진으로 돌아가던 기요마사 군의 습격을 받은 것이었다.
대남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도 왜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천행으로 귀환한 사람이다. 선조 34년(1601년) 6월 조 실록에 나오는 귀환인 명단에 나오는 여수희가 그이다. 그가 행방을 모르고 있던 아들이 일본에 잡혀갔다는 소식에 접한 것은 1607년 하동출신 통신사 사행원에게서 “교토 오산에서 아들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이 지나, 하동출신 귀환포로 하종남에게서 구마모토 혼묘지(本妙寺)의 승려가 되었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알게 되어 편지를 썼다.
아버지는 이런 경위를 밝히고 30년 만에 아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뛸 듯이 기뻤다는 말끝에 “너는 일본에서 아무런 부족 없이 편안하게 살고 있어서 돌아오려 하지 않느냐. 내 나이 58세, 어머니는 60세다. 전란은 힘들고 괴로웠지만 지금은 식구들도 변함없고 노비들도 많아서 남들이 부러워 하지만 자식을 잃어버린 것이 원통하구나!” 라고 썼다. 1620년의 일이다.
편지를 받은 대남도 기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고심 끝에 보낸 답서에는 남의 녹을 먹고 있는 처지여서 마음대로 돌아가지 못 하는 심경이 길게 설명되어 있다. “원통한 것은 제가 오늘까지 주인의 녹으로 먹고 살고 주인의 의복을 입고 자란 것입니다. 그래서 이토록 참기 어려운 것입니다. 엎드려 아뢰옵니다. 이제 몇 년 마음 편히 기다려 주십시오. 이 편지를 가지고 이 나라 장군과 주수(州守·영주)에게 귀국을 읍소할 생각입니다.”
첫 편지를 보내고 2년 동안 그는 주군의 마음을 사 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것 같다. 눈물로 호소하기도, 절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요마사의 아들 가토 다다히로(加藤忠廣)는 냉혹하였다. 청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감시를 강화하였다. 다음 편지에서 자신의 신세를 새장에 갇힌 새 같다고 한 것이 그 때문이었다.
지금도 혼묘지에는 부자간에 주고받은 편지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영주와 쓰시마(對馬島) 번주에게 선물할 매 두 마리를 보내달라는 편지가 눈길을 끈다. 매 선물로 그들의 선심을 사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 이런 구절도 있다. “(잡혀와 머리 깎고 중이 되라는 명을 받은) 그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만 법화경을 외우고, 아침저녁으로 고뇌에 시달리면서 추위도 굶주림도 잊고 살았습니다. (중략) 우리 선조가 대대로 악업을 지어 재앙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죄가 있어서 외로운 저의 몸이 이토록 오래 멀리 떨어져 내버려지게 된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30년 가까이 부모와 나라를 그리며 괴롭게 산 고초의 흔적이다.
신변에 관한 이야기는 특별한 게 없다. “이 나라에는 미음을 통할 친구가 없습니다. 다만 거창의 이희윤, 진주의 정 적, 밀양의 변사순, 산음(산청)의 홍운해, 부안의 김여정, 광양의 이 장 등 대여섯 명과 아침저녁 고국사정이나 자신의 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눕니다.” 하는 사연으로 보아 외롭게 지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침저녁으로 만난다는 말로 보아 조선포로들이 가까이 살았던 것 같다. ‘산음의 홍운해’는 사가 번의 홍호연을 이르는 것인데, 멀리 떨어진 그와도 만날 기회가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교토유학을 마치고 구마모토로 돌아간 그는 오래지 않아 고승의 반열에 올랐다. 일요상인(日遙上人)이라 불리며 중생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일요는 법명이고, 상인이란 말 그대로 지덕을 고루 갖춘 스님을 이르는 존칭이다. 그는 약관 34세에 기요마사 가문의 보리사인 혼묘지 제3대 주지가 되었고, 79세에 입적하여 그곳에 묻혔다.
상인이라 불리며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은 스님은 후쿠오카(福岡)에도 한 사람 있었다. 일연상인(日延上人)이라 불린 사람인데, 역시 기요마사 군대에 누이와 함께 잡혀온 이 남매의 이름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곱 살 때 끌려온 그는 후쿠오카 호조지(法性寺)에서 출가하여 16세에 교토에 유학하였고, 19세부터 멀리 에도지방까지 다니며 수행에 힘써 39세에 일련종(日蓮宗) 종조의 탄생지에 건립된 단조지(誕生寺) 18대 주지가 되었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바둑의 고수였던 그는 자주 후쿠오카 영주 구로다 다다유키(黑田忠之)에게 불려갔다. 바둑의 수를 배우려는 구로다가 어느 날 아무리 기다려도 일요가 오지 않자 가신에게 까닭을 물었다. 간밤에 내린 비로 성으로 통하는 다리가 끊겼다는 말을 듣고, 그는 웬만한 비에는 끄떡없을 돌다리를 놓도록 지시했다. 그 다리 머릿돌이 지금도 그가 창건한 고세이지(香正寺)에 남아 있다. 상인교로 불리던 다리는 도시계획으로 헐리고 머릿돌만 남은 것이다.
향수병에 걸렸던 일요상인은 만년에 조국으로 통하는 바다가 보이는 땅에 살고 싶다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 바닷가에 묘안지(妙安寺)라는 사찰을 창건했다. 그곳에서 기도생활에 열중하다가 77세에 입적, 그곳에 묻혔다.
그의 누이는 임진왜란의 장수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가신 도가와 다쓰야스(戶川達安)의 측실이 되어 안락한 일생을 보냈다 한다. 그러나 남의 측실생활이 정말 안락했을지···.
일요상인의 흔적을 더듬어보려고 물어물어 고세이지(香正寺)를 찾아갔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상인교 머릿돌이 보이지 않았다. 도리 없이 눈에 띈 사람에게 물었다. 정장 차림의 50대 부인이었다. 부인은 본채 바로 앞 녹지를 가리키며 웃었다. 바로 앞에 두고 찾는 게 우스웠던 모양이다. 머릿돌이 생각보다 작아 눈에 띄지 않았나보다. 그 시절 사람과 우마차 다니던 다리였다는 생각을 못 한 탓이다.
내친 김에 상인의 무덤까지 물었더니 본채 왼편 세 개의 무덤 가운데 오른쪽 것이라 하였다. 가운데 큰 묘석은 영주의 부인 것이었다. 역시 창건자보다 권력자를 더 대접하고픈 게 인지상정인가. 글씨가 잘 안 보여 가까이 가 들여다보니 한자로 ‘日遙聖人의 墓’라는 글씨가 보였다. 상인에서 성인으로 추앙된 것이다. 요인의 무덤이라고 잘 다듬어진 석물을 삼층으로 쌓고 그 속에 골 항아리를 넣었으리라.
후쿠오카 지하철 도진초(唐人町) 역에서 멀지 않은 묘안지에도 그의 묘지가 있다. 조선포로들이 많이 살았다고 도진초라 불리던 곳이어서 유적들이 가까이 있었다. 그가 창건한 사찰이라서 분골을 모셨을 것이다. 사찰과 주택이 밀집한 동네 막다른 골목 안이었다. 입구 오른편 묘역 ‘역대의 묘’ 표석 옆에 우뚝 선 돌에 ‘開山 可觀院 日延上人’이란 글씨가 분명해 식별이 쉬웠다.
고향이 그리워 바닷가에 창건했다는 말이 생각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수백 년 도시가 발전을 거듭하는 사이 계속된 매립사업으로 번잡한 도심지가 된 탓이리라.
또 발품을 팔아 찾아간 묘안지는 인적이 없어 적요하기만 하였다. 묘지에 꽃 한 송이 없는 것이 홍호연과 너무 대조적이었다. 수많은 후쿠오카 관광객이나 현지교민 참배객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하긴, 일요상인이 누구인지, 왜 거기 묻혔는지를 모르는데 찾아볼 사람이 뉘 있으랴! 고향이 그리워 바닷가에 묻힌 사연은 더욱 모르는데 누구를 탓하랴! (4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