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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kama)에 대하여
구월의 첫날 드려진 예배에서 김한중 목사님께서는 마가복음 8장 22~38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특별히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정체인 크리스토(Χριστός) 즉 메시아( מָשִׁיחַ )에 대해 유대전통과 힌두전통을 통해 설명하셨다. 그러면서 이 세상이 욕망(kama)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욕망하는대로 다 채워 이룰 수 없을 때 고통이 따라 온다는 것이다.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神으로 부터 보내진 사람이 곧 메시아라는 것이다. 신의 직접적인 개입 즉 타력으로 해결하려는 메시아 사상과는 별도로 힌두전통은 여러 수행을 통해 자력으로 해결하려는 노력도 제시 하셨다. 나는 여기서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될 욕망(kama)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그 이해를 돕기 위해 짧게 쓰고자한다. 여기서 나는 욕망(kama)에 대해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힌두전통에서 살펴 보고 각각 다르게 보는 견해에 따라 다루는 방법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 보고자 한다. 기독교에서는 까마를 극복해야 될 부정적 대상으로 본다. 처음 성서에 나타난 것은 창세기 1,2장의 창조 기사에 이어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6)"라는 말씀에서 "본즉" ,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라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에 대해 욕망(kama)이 구체적으로 표출 된다. 이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라는 말씀에서와 같이 까마인 욕심이 죽음에 이르는 고통의 뿌리라고 보고 자기가 창조한 세계의 까마로 인한 타락의 결과 죽음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개입하는 방법으로 메시아인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 해결한다는 선한 의지의 창조-> 욕망에 의한 타락-> 예수를 통한 구원 이라는 대서사로 집약된다. 이는 신학적 교리든 성서 자체든 개인적 믿음이든 모든 기독교 전통을 망라한다. 흔히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말로 까마로 인한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라는 가스라이팅과 개신교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루터의 강령인 셋솔라(Three Solas) 즉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 ‘Sola Gratia (오직 은혜로)’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가 까마로 인한 죽음으로 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 김한중 목사님은 성서에는 제시 되지 않았지만 성령의 인도로 修道라는 노력이 이에 더해져야 된다는 입장이고 이병창목사님은 솔라그라티아의 입장임을 밝혔다. 나는 어떤 입장에서 자유와 평화의 두 날개로 사랑과 자비의 하늘을 날며 하나님나라를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찬양으로 살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할렐루야!
힌두전통에서는 까마를 결코 극복해야 될 부정적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것은 까마가 세계를 유지하고 증장 시키는 하나의 질서며 에너지로 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성애적 까마가 없이는 생식을 통한 종족의 존속과 번창이 어렵지 않겠는가? 그래서 긍정적인 면에서 까마수트라와 같은 문학 작품을 써 성애를 승화시켜 인생의 네가지 목표인 푸루샤르타(पुरुषार्थ) 중 하나인 까마를 완성하는 수행의 방편으로 삼기도 한다. 부정적인 까마를 몸과 마음으로 부터 정화 시키는 제사문화와 더불어 여러 수행방법이 계발 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수행이 여러 요가수행이다. 힌두전통에서 까마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업(業,karmma, 팔리어 kamma)인데 이 업으로 인해 윤회의 사슬이 연결 된다. 고대 힌두전통에서는 까마와 업 그리고 윤회가 한 세트로 브라만으로 부터 수드라에 이르기까지의 카스트 신분제 사회를 유지하는데 종교권력의 이데올로기로 악용되어 지금까지 내려 오고 있다. 그러나 우파니샤드 이후 그런 종교 사회적 의미 보다 해탈(Moksha)을 통해 극복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힌두전통에서 인생의 성취해야될 네가지 목표인 푸루샤르타(पुरुषार्थ)가 카마(사랑), 아르타(재물, 권력, 명예), 다르마(종교적 도덕), 모크샤(해탈)인 것만 봐도 까마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견해를 막론하고 삶에서의 위치와 얼마나 소중히 다루는지 알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힌두전통의 부정이나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붓다가 창시한 불교에서는 까마를 철저히 부정적인 극복해야 될 대상으로 보고 극복하기 위한 교리체계를 세우고 여러 수행방법을 계발 하였다. 불교에서는 정신적 깊이나 수행의 정도에 따라 우리가 사는 물질적 세계와 마음의 세계 모두를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삼계(三界, tebhuumaka)로 구분하는데 욕계(欲界, kāma-dhātu)는 감각적 욕망(kama)에 머무는 (ava cara) 세상이나 마음을 뜻한다. 그리고 색계(色界)는 물질(ruupa, 色)을 대상으로 하여 증득한 본삼매의 경지에, 무색계(無色界)는 정신의 영역 (aruupa, 無色)을 대상으로 하 여 증득한 본삼매의 경지에 머무 는 세상이나 마음을 뜻한다. 중생계는 갈애(渴愛, tanha)를 근본으로 한다. 그래서 욕계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가 지배하는 곳이고 색계와 무색계는 존재 자체에 대한 갈애(有愛)가 남아있는 곳이 라고 말한다. 불교는 까마가 어떻게 발현되고 증장 되는지 구체적이며 단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어떻게 다루어 극복해야 하는지 수행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견해와 수행방법이 초기불교인 상좌부 계통인 테라와다불교와 대중불교화한 대승의 중관파(中觀派)와 유식파(唯識派)가 다르고 지역적으로도 스리랑카와 미안마 태국 중심의 남방불교와 북방 티벳의 금강승불교, 중국과 한국, 일본의 대승불교가 다르다. 여기서는 주로 남방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누어 살펴본다. 어느정도 겹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공통적인 것과 다른 것으로 구분하여 살펴 보기로 한다. 먼저 남방불교 입장에서 본다. 남방불교에서는 까마를 물질과 마음 작용의 실체로 본다. 물질과 마음이 합쳐진 욕망(kama)이 지배하는 욕계는 오욕락(pañca kāmaguṇā)이 먼저 기초가 되어 발현 한다.
오욕락(pañca kāmaguṇā)은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열망하는 매혹적인
眼, 耳, 鼻, 舌, 身, 意 라는 감각기관으로 각각의 고유영역인 色, 聲, 香, 味, 觸, 法들을 감관의 감성물질에 의해 색들, 소리들, 냄새들, 맛들, 감촉들로 분별되어지는 물질적 욕망을 말한다. 여기에 마음으로 부터 일어나는 욕망이 더해져 감각적욕망(kama)이 됩니다. 까마는 당연히 오욕락을 포함하여 갈애(渴愛, tanha)와 집착으로 나타 난다. 흔히 탐진치(貪嗔癡) 삼독 중 탐(貪,raga)을 뜻하기도 한다. 불가에서는 까마가 지배하는 세상과 마음으로 부터 오는 갈애와 집착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팔정도(八正道) 수행을 한다. 팔정도 수행 중 정념(正念: 바르게 깨어 있기)과
정정(正: 바르게 삼매 하기)이라는 선정에 들면 처음 근접삼매에 들고 초선정에서 사선정까지 욕계를 벗어나 색계로 들어가고 더욱 정진하면 무색계로 들어간다. 무색계의 선정은 완전히 초월한 선정, 즉, 욕계의 조대한 물질과 색계의 미세한 물질 모두를 초월한 선정으로 오직 마음(citta)과 마음작용(cetasika)만이 남아 있게 된다. 그 때서야 비로소 까마로부터 오는 갈애와 집착을 벗어난 해탈 열반의 경지를 증득하는 것이며 따라서
번뇌의 불이 꺼지고 모든 行을 하되 신구의(身口意) 로 업(業, karmma, kamma)을 짓지 않아 윤회의 사슬이 끊어 진다. 이러한 지관(止觀)인 사띠(sati), 사마타(samatha)와 위파사나(Vipassanā)가 까마를 정화하며 극복하고 까마가 형성 되는 원인과 조건, 그리고 까마에 緣하여 일어나는 갈애와 집착의 緣起的 관계를 고찰하여 끊어내는 남방불교의 수행전통이다.
중관의 입장에서는 까마를 실체로 보지 않고 연기법에 따라 조건에 의지해 생멸하는 空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까마를 긍정적으로 보지도 부정적으로 않고 중도(中道)의 입장에서 쌍차쌍조(雙遮雙照)
의 정혜쌍수(定慧雙修)로 극복하려 한다. 한국 불교는 달마 혜능 임제의 법맥을 이어받아 주로 퐈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이 중심이었으나 간화선으로 공부하는 승려들이 공부의 진척을 쉽게 확인할 수 없고 하대명년 앉아 있기에 조급증이 생겨 남방전통의 사마타와 위파사나가 단계별로 공부의 진척과 확립의 정도를 스스로 확인하기 쉽기 때문에 현지의 수행터에 가 수행법을 익혀 돌아와 급격히 확산 되고 있다.
또다른 유식파(唯識派)의 입장에서는 까마가 오직 識의 의타기성(依他起性)에 의해 연기적으로 조건을 만나면 현행하는 識의 작용으로 본다. 따라서 전5식(前五識,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으로 부터 까마가 형성 되어 제6意識과 제7말라식으로 마음에 자리 잡고 제8 아뢰아식에 씨앗으로 저장되어 익다가 어떤 조건을 만나면 제7, 제6, 전5식으로 현행되는 메카니즘의 경로를 차단하거나 전변시키는 수행방법을 계발하였다. 유식수행으로는 수행5위(修行五位)로 단계별 제시하고 있다.
1. 자량위(資糧位) : 복덕과 지혜의 2자량을 축적하는 수행의 준비 단계
2. 가행위(加行位) : 주관과 객관이 각각 공함을 관찰하여 유식의 수행이 진전함으로써 유식에 통달한 단계
3. 통달위(通達位) : 주관과 객관이 공함을 통달하여 집착이 없어져 주객의 분열이 없어지고 상대를 떠난 무분별지 즉 공의 지혜를 통달한 단계
이 통달위는 성자의 부류에 속하며, 십지(十地) 중 최초의 환희지에 든 단계
4. 수습위(修習位) : 다시 수행을 계속하여 십지(十地)수행에 들어가 무분별지를 수습하고 번뇌장과 소지장을 끊어 무심(無心)의 상태에서 전의(轉依)를 실현하는 단계
번뇌장을 떨어버림으로써 대열반을 얻고 소지장을 떨쳐버림으로써 대보리를 얻는 단계
5. 구경위(究竟位) : 불과(佛果)로써 보리와 열반을 얻어 성불하는 단계
이상 까마에 대하여 기독교 힌두교 불교의 입장에서 각각의 견해와 견해에 따른 해결방법을 개략적으로 살펴 보았다. 몸과 마음에서 타오르는 불덩어리를 끄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너무 겉핧기로 써서 구체적인 내용은 스스로 공부해 터득하기 바란다.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 🙏🙏🙏
첫댓글 귀한 영성으로 9.1일 목사님 말씀을 해석해 주시고 설명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