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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수 서울미술고등학교 교장선생님> |
김정수 서울미술고등학교 교장은…
1967년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4학년 재학 당시 봉천동에 청계천 철거민이 집단 이주해 달동네가 생겼지만 학교가 없어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고 있다는 뉴스를 듣고, 부친으로부터 결혼자금 35만원을 미리 받아 봉천동 야산, 관악산 산기슭에 천막학교를 지었다.
가난을 물리치는 방법은 오직 배움밖에 없다고 믿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주거지를 아예 봉천동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천막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때로는 무허가란 이유로 철거를 당하기도 하고, 군부대 관사를 짓는다고 학교터를 빼앗기는 등 숱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만, 고 육영수 여사(고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이자 박근혜대통령의 모친)의 격려와 지원, 부친을 비롯한 지인들의 후원으로 천막학교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천막학교가 한흥학원을 거쳐 한흥공예기술학교로, 서울예림미술학교로, 오늘날 서울미술고등학교로 발전되었다.
2015년 5월 25일로 개교 40주년이 된 서울미술고등학교는 그간 화가와 교수, 미술교사는 물론 패션, 자동차, 건축, 미디어 등 대한민국 산업 각 분야의 디자이너를 수없이 배출하였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참사람
67년 김정수 교장이 봉천동에서 천막학교를 시작한 지 어느 덧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가난해서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배움의 터전을 마련해주고 싶어서 세운 천막학교는 50여 년이 지난 지금, 전국에서 유일하게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예술계 미래형 자율학교로 지정된 서울미술고등학교로 성장하였다.
김 교장은 서울미술고를 통해 학문과 예술에 바탕을 둔 전인적 인간,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참된 예술인을 육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가에 봉사하고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참 한국인을 육성하고 싶었다. 그래서 학교의 교훈도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참사람이 되자’로 정했다.
공부하는 아이들이나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해 준 덕분에 현재 서울미술고의 대학 진학률은 단연코 전국 최고이다. 해마다 졸업생 2백 명 중 180명 이상이 대학에 진학한다. 대학진학률이 90%가 넘는 학교는 전국에서도 유일할 것이다. 비록 미술만 가르치는 전문학교지만 일반 인문계학교 못지않게 수능을 대비한 과목을 집중적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서울미술고는 여기에 만족치 않고 앞으로도 더욱더 학생들이 원하는 대학을 얼마든지 선택해서 갈 수 있도록 정규교과의 학업성취도와 실기 역량을 혁신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여러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 학교의 모든 교직원들은 서울미술고가 전국 최고의 명문 예술고로서 누구나 오고 싶은 학교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정말 헌신적으로 수고하고 계십니다. 저는 우리 서울미술고가 언젠가는 세계적인 화가를 배출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서울미술고가 예술을 통해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예술이 최고의 국가경쟁력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기여하는 학교가 되기를 꿈꿉니다.”
미술공부를 하려면 학원을 다녀야 하는 등 사교육비가 특히 많이 든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서울미술고에서는 방과후에도 학생들이 실기를 연마할 수 있도록 방과후 실기수업을 실시하고 있다. 유능한 실기 강사 50여 명이 학생들을 밤늦게까지 가르친다. 뿐만 아니라 정규교과의 수업혁신을 통해서 서울미술고의 교실은 말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교실’이다. 특히 미술수업 집중편성으로 인해 부족한 교과 수업을 방과후 수업을 통해 모두 보충할 수 있도록 유능한 교과 강사 선생님을 모셔서 학업 성취도를 획기적으로 높이고 있다. 학생들은 교과수업을 위해 굳이 학원을 가지 않아도 된다.
잘 먹고 함께 웃는 세상을 꿈꾸며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건강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그동안 이루어놓은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죠. 그래서 우리 학교는 급식에 있어서 항상 최고를 고집합니다. 매일 신선한 채소와 단백질을 공급해 균형 잡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대다수의 학생들이 아침을 거르고 오기 때문에 점심 식사를 통해 충분한 영양소를 공급받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저는 천막학교 시절부터 학생들의 급식에도 최선을 다했어요. 가르치는 일 다음으로 중요하게 신경 쓴 것이 급식문제였습니다. 돈이 없어 국수를 삶거나 수제비를 끓여도 학생들의 영양을 고려해서 멸치 한 마리라도 더 넣으려고 애썼어요.”
학교를 설립한 이후 한 번도 변하지 않은 김 교장의 철학이기도 하다.
지금은 학교에 전문 영양교사와 조리사들이 있지만 과거에는 직접 먹거리를 사오고, 음식을 장만했었다. 한 마디로 교장선생님이면서 조리사였고, 언니였으며 누나였다. 학교를 설립하겠다고 아버지에게 결혼자금을 받아온 것도 모자라 매달 용돈을 받아, 그 돈으로 모두가 함께 먹을 찬을 만들었던 것이다. 비록 돈은 부족했지만 항상 제일 신선한 것만 샀었다. 이른 새벽에 시장에 나가면 신선한 재료를 비교적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기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새벽시장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김 교장은 “우리 학생들 먹을 거니 가장 좋은 것으로 주세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제 아무리 값이 싸도 시들고 오래된 재료로 식사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 내가 세운 원칙이다. 더욱이 서울미술고등학교 학생들은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늦은 밤까지 실기를 해야 하니, 특히 잘 먹어야 했다.
그 초심을 잃지 않고 지금도 학생들의 급식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친환경 급식을 실천하기 위해 식재료부터 꼼꼼히 챙긴다. 학생들이 매일 먹는 김치 같은 주 반찬은 영월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친환경 배추로 담근다. 급식에 대한 학생들의 만족도도 매우 높다. 졸업생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가장 그리운 것이 선생님이 아니고 학교급식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급식에 대한 학생들의 만족도가 유별날 정도로 높다. 점심뿐만 아니라 저녁까지도 직영으로 급식해서 한창 집중해서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의 건강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참된 교사가 되려면……
김 교장은 보잘 것 없던 봉천동 천막학교가 오늘날 서울미술고로 발전하기까지 참으로 많이 수고하신 선생님들의 헌신과 은혜를 잊을 수 없다. 김 교장께 인생의 등대요, 길잡이가 된 스승님들도 수없이 많다. 그런 분들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인생을 배우는 동안 김 교장은 교사처럼 멋진 직업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물주가 세상을 창조한다면, 스승은 학생들의 꿈과 미래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보다 더 멋진 직업이 어디에 있겠는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 교장은 서울미술고의 모든 선생님들에게 늘 이런 말을 들려준다.
“참된 교사가 되려면 먼저 학생들의 미래를 창조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과 인격을 갖춰야 합니다. 누구나 교사가 될 수는 있지만 참된 스승이 되기는 그만큼 어렵죠.”
서울미술고등학교의 모든 선생님들이 이와 같은 능력과 인격을 갖추어주기를 희망한다. 아이들에게 학문만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창조할 수 있도록 등대가 되고 길잡이가 되는, 참된 스승이 되기를 원한다.
천막학교 1회 졸업생 중에는 올해 나이 65세가 된 제자도 있다. 2,3회 졸업생 중에는 지금 서울미술고 선생님도 있다. 김 교장은 특히 서울미술고를 졸업한 제자가 서울미술고의 선생님이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나이 많은 제자들이 카네이션 한 송이를 들고 김 교장을 잊지 못해 찾아오기도 한다. 그들은 비록 가정이 어려워 천막학교로 왔고, 취직을 하려면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한 장 있어야 하던 시절 졸업장이 필요해서 천막학교를 다닌 제자들이었다. 그렇게 맺어진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지만,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그 인연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사랑이 대물림되는 학교
“그 천막학교에서 배운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었죠.”
그렇다. 어느 한 제자의 고백처럼 김 교장은 봉천동 천막학교 시절부터 오늘날 서울미술고에 이르기까지 50년 동안 제자들에게 오직 사랑을 가르쳤다.
“서울미술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모두 92명이나 됩니다. 국어를 가르치든 영어, 수학을 가르치든 또 미술을 가르치든, 정교사이든 전임강사이든 저는 이 모든 선생님들이 우리 학생들에게 사랑을 가르쳤으면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스승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저 3년 동안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학생들이 졸업하면 잊혀지는 그런 선생님이 아니라 평생 학생들의 가슴 속에 남아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영원한 스승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김 교장은 자신의 학창시절에 스승으로부터 받았던 그 사랑들이 우리 모든 학생들에게까지 잘 이어졌으면 한다.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그 ‘사랑의 대물림’이 학교의 전통이 되기를 소원한다.
“지난 50년 역사 동안 서울미술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선생님들 거의 모든 분들이 사랑으로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잘 섬겨주었습니다. 스스로 수업을 혁신하여 공부에 대한 흥미를 갖게 하고, 뒤처진 아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끌어주십니다. 또한 훌륭한 멘토로서 학생들의 앞날을 잘 이끌어주시죠. 정말 우리 서울미술고등학교의 보배 같은 선생님들입니다.”
아이들이 깨어나고, 교실이 살아났다
학생들의 학습효과를 높이기 위한 서울미술고등학교의 수업형태는 매우 남다르다. 독특하다 못해 파격적이고 혁신적이다.
서울미술고는 학업과 함께 실기를 병행해야하므로 방과 후 실기수업을 진행하는데, 이때 학생들이 스스로 좋은 스승을 만날 수 있도록 학생이 지도교사를 선택하는 방법을 도입했다. 학생이 교사를 직접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혹자들은 교권이 추락한다고 말하지만, 김 교장은 능력이 없는 교사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교권을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수학처럼 예술계 학생들이 포기하다시피 하는 과목의 실력 향상을 위해 학교는 수업혁신부를 만들고, 교사들은 밤을 새워 새로운 수업방법을 연구한다. 그 결과 수업시간에 엎드려 잠자던 아이들은 깨어나고, 교실이 살아났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제도는 교사들에게도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교사 스스로 실력이 녹슬지 않도록 자신을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평생 교육자로 살아온 제가 왜 교권을 추락시키는 일을 하겠습니까? 평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 나아가는 것만이 학생들로부터 존경받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그렇다. 교사란 밥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이 아니다.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과 사랑으로 하는 것이다. 열정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배우는 아이들의 태도가 달라진다. 아이들의 미래가 좌우된다. 그래서 사명감이 필요하다. 사명이 없으면 열정과 사랑도 품을 수 없다.
“한국의 학교교육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오며 이런 말을 들을 때만큼 가슴 아픈 일은 없어요. 다른 학교는 모르겠지만 제 손으로 키운 서울미술고만큼은 학교교육이 살아있는 학교가 되는 것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김 교장은 학교를 운영하면서 법과 도덕, 윤리 이전에 내 스스로 양심에 가책되는 일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학교 운영이 아무리 어려워도 학교의 이익을 위해 학부모들에게 손 벌린 적이 없다. 사학 비리 중 가장 크고 흔한 것이 교직원을 채용하며 돈을 받는 것인데, 법 이전에 김 교장의 자존심이 그런 비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50여 년이 되도록 학교가 ‘이만큼(?) 밖에’ 성장하지 못한 것도 다 이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