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노벨상 제정
노벨상이 1901년 11월 27일 제정됐다. 노벨상이 제정된 후 12월 10일 오후 4시 30분, 스웨덴 스톡홀름에선 제1회 노벨상 시상식이 열렸다. 창시자 알프레드 노벨의 5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물리학상 뢴트겐(독일), 화학상 호프(네덜란드), 생리·의학상 베링(독일), 문학상 프뤼돔(프랑스), 평화상 앙리 뒤낭(스위스). 각 수상자들에게는 각각 메달과 함께 4만3000달러의 상금이 수여됐다. 지금은 상금 5천만엔 짜리 교토상 같은 것도 있긴 하지만, 당시로선 파격적인 액수였다. 그러나 뜻밖에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우선 시상자인 오스카르 2세 스웨덴 국왕이 시상식 참석을 거절했다. “이처럼 막대한 상금이 외국인들에게 빠져나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이유에서였다. 스웨덴 학계는 “국내 연구비도 없는 판에…”라며 심사 자체를 거부했다. 노벨상의 가장 큰 역설은, 물론 폭약으로 번 돈이 인류평화를 위해 쓰인다는 그 드라마틱한 전변이다. 또 하나는 처음엔 가족과 조국으로부터도 외면당했다는 것. 그러나 만약 노벨이 ‘국적 불문’ 조건을 달지 않았다면 노벨상은 스칸디나비아 조그만 나라의 집안 잔치로만 끝났으리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니트로글리세린과 검은 폭약을 혼합한 다이너마이트를 포함, 평생 355개의 특허를 획득한 이 거부가 노벨상을 구상한 것은 55세 때인 1888년, 형 루드비히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잘못 안 프랑스 한 신문이 ‘죽음의 상인 알프레드 노벨’이란 제목으로 오보한 데 충격을 받으면서였다.
[1927년] 도살풀이춤의 명무(名舞) 김숙자(金淑子) 출생
1927. 11. 27 경기 안성~1991. 12. 23 서울. 6세 때 아버지 덕순(德順)에게 판소리·가야금을 익히고 입춤·진쇠춤·제석춤·터벌림춤·깨끔춤·올림채춤 등을 배웠다. 예로부터 남사당패와 걸립패 등 특수예인집단이 많이 활동하던 안성에서 보개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당대의 명인 조진영(趙鎭永)에게서 가무(歌舞)를 배웠다. 17세에 조선총독부에서 보낸 위문대에 들어가 만주일대와 남방군도(南方群島)를 순회공연하면서 승무·한량춤·입춤 또는 판소리나 악극(樂劇)에서 주역을 맡았다. 28세에 대전에서 무용학원을 경영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경기무속과 도살풀이춤을 후진들에게 가르쳤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1976년 무속춤을 발표했고, 1990년 도살풀이춤은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로 지정되었다. 모든 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 정적(靜的)으로 맺어주거나 긴장상태로 제자리춤을 추는 것이 그녀 춤의 특징이다.
이은관(李殷官) 출생
1917. 11. 27 강원 이천~.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배뱅이굿〉의 예능보유자. 1931년 철원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21세 때 철원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민요부분에 1등으로 당선되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해도 황주로 가서 서도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서도소리 가운데 특히 〈배뱅이굿〉에 흥미를 느껴 즐겨 불렀다. 〈배뱅이굿〉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50년대말 그가 영화 〈배뱅이굿〉과 각종 연예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음반활동을 활발히 하면서부터였다. 〈배뱅이굿〉은 1900년경 용강군 출신의 김관준이 처음 불렀고, 그의 아들 김종조에게 전해졌으며 최순경· 이인수 등이 부르게 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이은관은 이인수에게 사사받았다. 그는 '신불출 만담일행'과 전국순회공연을 가졌으며 1941~45년에는 무대생활을 했다. 1946년에 대한국악원에 입단했고 '민요국극단'을 조직·운영했는데 이때 주로 〈배뱅이굿〉을 공연했다.
[1970년] 청계피복노동조합 결성 1970년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청계천변 평화시장의 재단사 전태일은 1969년 재단사들의 친목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는 한편, 근로기준법을 탐독하면서 평화시장의 노동실태를 철저히 조사하여 그 개선방안을 노동청(지금의 노동부)에 제출했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으로 해고를 당했지만 1970년 9월 다시 재단사로 취직해 '삼동친목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곧바로 설문지를 돌려 노동실태를 파악하고, 그 결과를 분석해 노동청에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이 진정서는 철저히 무시당했다. 전태일은 11월 13일 동료들과 함께 피켓 시위를 벌이기로 했으나 그날 시위는 원천 봉쇄되고 말았다. 이에 전태일은 자기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분신을 감행했다. 그는 불길에 휩싸인 채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절규하며 항의하던 끝에 목숨을 잃었다. 그의 이같은 희생을 바탕으로 결성된 청계피복노동조합은 유신체제로 치달으며 살벌했던 독재 치하의 1970년대에 선구적인 노동운동을 벌였다.
[1953년] 극작가 유진 오닐 사망
1953년 11월 27일 미국 보스턴의 한 호텔. 극작가 유진 오닐이 불행했던 말년을 마감하며 내뱉듯 말했다. “제기랄, 호텔에서 태어나 호텔에서 죽다니...” 그의 말마따나 그는 유랑극단 배우였던 아버지를 둔 덕에 뉴욕의 호텔에서 태어나 호텔방, 열차, 무대뒤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극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1912년부터 손이 마비돼 사실상 집필을 중단할 때까지 그는 대표작 ‘느릅나무 밑의 욕망’ 등 총 63개의 작품을 세상에 토해내며 단순한 오락거리에 불과했던 성인연극을 수준높은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고, 연극을 상업적으로도 성공시켰다. 그사이 퓰리처상을 4번이나 받고 미국 극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며 미국 최고의 극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오닐의 말년은 깊은 좌절감속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는 세월이었다. 10여 년 동안 글을 쓸 수 없었던 무력감도 그를 괴롭혔지만 3번째 부인의 학대와 3자녀의 온전치 않은 생활도 그의 비극적 인생관에 끼어들었다. 40세에 자살한 장남과 정서적으로 불안했던 차남, 더구나 막내딸은 오닐과 동년배였던 찰리 채플린과 결혼해 그를 분노케했다.
[1921년]김수영 金洙映 출생
1921년 11월 27일 태어남 / 1968년 6월 16일 죽음 "나이가 들어가는 징조인지 몰라도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는 빈도가 잦아진다. 모든 것과 모든 일이 죽음의 척도에서 재어지게 된다. 자식을 볼 때에도 친구를 볼 때에도 아내를 볼 때에도 그들의 생명을, 그들의 생명만을 사랑하고 싶다." - 김수영, <나의 연애시>
김수영은 특히 문학의 현실참여와 관련하여 한국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196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1947년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한 이래 200여 편의 시와 많은 시론을 발표했다.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하는 시를 발표했다. 그러나 4·19혁명을 기점으로 현실과 역사, 시대와 사회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면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이 담긴 참여시를 썼다. 그의 문학적 경향이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으로 바뀌면서, 작품 세계 역시 초월적 태도와 조화의 논리에서 참여적 태도와 분열의 세계관으로, 또 세련된 간접표현에서 독설과 요설이 뒤섞인 직설법으로 변모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순수참여문학논쟁에도 참여했다. 그는 한국문화의 다양성과 활력을 깨치는 무서운 폭력을 정치적 자유의 결여라고 규정하고 자유의 참된 의미를 되살리고자 노력했다.
[1878년]오르펀[Orpen, Sir William Newenham Montague] 출생 1878. 11. 27 아일랜드 더블린 스틸오르건~1931. 9. 29 런던. 영국의 화가. 강한 개성을 지닌 초상화로 유명하며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정부가 인정한 공식 미술가였다. 오르펀은 더블린 시립미술학교와 런던의 슬레이드 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뉴 잉글리시 아트 클럽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으며 1900년에 클럽의 회원이 되었다.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초상화들에는 마네의 영향이 보인다. 〈마네에게 바치는 경의 Homage to Manet〉(1909, 맨체스터 시립미술관) 같은 풍속화도 그렸는데 이 작품은 당대 영국 미술계의 유명인사들이 마네의 유명한 초상화 아래 앉아 대화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사유 평화회담의 공식화가로 지명되어 〈베르사유 평화조약 체결〉(1919~20, 런던 대영제국전쟁박물관)을 그렸다. 오늘날에는 부담없고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경박한 화가로 간주되고 있지만 당대에는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1918년 대영제국 상급훈작사작위를 받았으며 1919년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77년] 홍수환 4전5기 신화
홍수환(오른쪽)이 공항에 나온 어머니와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 1977년 11월27일(한국시간), 신설된 WBA 주니어페더급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기 위해 파나마로 날아간 홍수환 선수가 링 한켠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상대는 11전 11KO승을 자랑하는 파나마의 신예복서 헥토르 카라스키야였다, 3년전 남아공 더반에서 벤텀급 챔피언 자리에 올라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로 장안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홍수환으로서는 이날 경기에서 승리하면 한국 프로복싱 사상 최초로 2체급을 석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1회 난타전이 끝나고 2회가 시작되자 홍수환은 카라스키야의 무차별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거푸 4번이나 쓰러졌지만 홍수환은 일어서고 또 일어섰다. 3회 공이 울리자마자 홍수환은 카라스키야를 로프쪽으로 몰아 양 훅과 어퍼컷으로 혼을 빼놓더니 커버없이 로프에 기댄 그의 오른쪽 옆구리에 레프트훅을 작렬시켰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넘어지고 있는 카라스키야의 턱에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3회 48초. 그것으로 끝이었다. 프로복싱사상 단 한 차례도 없었던 4전5기의 신화는 이렇게 이뤄졌다. 열광하던 2만여 파나마 관중들의 침묵 속에서 홍수환은 예의 입심을 또 한 번 과시했다. “어머니 정말 대한민국 만세입니다.”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 십자군 파병 제창
←십자군이 세운 국가(12세기) 1095년 11월 27일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 공의회에 모인 기사들에게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비롯한 성지를 지켜달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점점 강성해지는 이슬람교의 보호자, 셀주크 투르크의 위협을 받자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우르바누스 2세의 연설 이후 몇몇 기사들이 군대를 일으켰고, 모험가나 광신자들로 조직된 소규모 비조직적인 부대도 여기에 가세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 전쟁 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슬람교도들을 내몰고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기도 했으나, 제4차 십자군 원정 때에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당하고 약탈당하는 등 전쟁이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1270년 프랑스 왕 루이 9세는 마지막 십자군인 제8차 십자군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튀니지에 상륙한 직후 대부분의 군사와 함께 병에 걸려 죽었다.
[1959년] 임화수 반공예술인단장, 희극배우 김희갑 폭행
임화수에게 전치 1개월의 부상을 당한 후 입원 중인 김희갑씨. 1959년 12월 5일 촬영한 사진. 희극배우 김희갑씨가 폭력단의 거물이며 반공예술인단 단장인 임화수에게 폭행을 당해 갈비뼈가 세군데나 부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임화수는 1959년 11월 27일 서울 충무로3가에 있는 반공예술인단 사무실에서 쇼 출연과 관련해 항의하는 김희갑씨를 구타, 전치 1개월의 부상을 입혔다. 김씨는 사전에 출연을 거부했는데도 불구하고 반공예술인단에서 자신의 양해없이 국도극장에서 열릴 시민위안공연에 장기간 출연한다고 일방적으로 광고한 것을 항의하다가 폭행을 당했다. 그러나 관할 중부경찰서는 이 사건 가해자가 반공예술인단의 단원인 박호라고 발표, 사건의 진상을 숨기고 있다가 김씨가 기자들에게 내막을 폭로하자 뒤늦게 임화수를 입건했다. 동대문일대 깡패 출신이며 전과3범인 임화수는 당시 한국연예주식회사 사장,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 등의 직책을 갖고 있으면서 연예인들을 정치적인 시민위안공연 등에 강제 출연시키는 등 온갖 횡포와 폭력을 자행했으나 누구도 이를 제지하지 못했다.
그밖에 2002년 부시 미 대통령, 한국 여중생 2명 사망과 관련해 사과표명 2000년 노르웨이 오슬로-베르겐 간의 세계최장(24.5km) 고속도로 터널 ‘라에르달 터널’ 개통 1995년 윈도95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2.0 최종 버전 출시 1991년 최첨단 `신경망 칩` 국내 첫 개발 1990년 존 메이저 영국 재무장관, 보수당 당수경선에서 당선 1990년 싱가포르 새 총리에 오작통 취임 1989년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 별세 1984년 미국 FBI, 통일교 박보희씨 납치소동 1983년 필리핀 아키노51회 생일맞아 20만명 반정부 시위 1983년 나카소네 일본수상, 중의원 해산 1983년 미국 크루즈미사일 이탈리아 도착 1983년 우루과이 30만 반정부시위 1982년 독립기념관 건립예정지 충남 천원군 흑성산으로 확정 1982년 나카소네 내각 출범 1978년 관광객 유치 100만명 돌파 1978년 부산 자유시장 화재. 점포 1,031개 소실, 50억 피해 1978년 북경서 사상처음으로 자유요구 데모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발족 1964년 한국, 대만과 우호조약 체결 1962년 교통부, KNA를 취소하고 대한항공(KAL)에 취항권을 부여 1961년 유엔, 식민지 독립선언 이행상황에 관한 결의안 채택 1959년 효창공원 국제축구경기장 착공 1955년 소련, 서베를린 자유시화(自由市化) 제안 1954년 제2차 개헌(초대대통령 중임제한 철폐 등) 부결 1953년 이승만 대통령 대만 방문해 장개석과 회담(28일) 1953년 부산 대화재. 건물2천여동 소실 1951년 휴전회담, 30일간 잠정적 군사경계선 확정 합의. 전전선(全戰線)에 공격중지령 1950년 중국군 60만 한국전 개입 1950년 대한적십자사 창립 1946년 주48시간 노동제 실시 발표 1945년 강원일보 창간 1943년 카이로선언 채택(12.1 발표) 1940년 홍콩 영화배우 이소룡 출생 1925년 제1차 공산당 사건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정치가 알렉산더 둡체크 출생 1921년 최초의 신문-잡지 기자단체인 무명회 결성 1920년 미국대통령에 하딩 당선 1919년 일본-불가리아 평화조약 조인 1910년 독립운동가 장태수 선생 순국 1894년 일본의 사업가 마쓰시타 고노스케 출생 1598년 임진왜란 종식(선조 31년) 1095년 교황 울바누스 2세, 십자군 제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