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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13;1-17,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2. 2018.9.30.
오늘 본문은 나오는 내용과 감추어진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월절을 준비하는 하루 전, 그 날은 어린 양을 잡는 무교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 유월절 저녁 모임을 준비케 하셨습니다. 눅 22:7-13입니다.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 날이 이른지라.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여짜오되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저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하라 하시니 저희가 나가 그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 하니라. 이 다락방은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고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던 다락방입니다.
이렇게 준비했던 유월절 만찬, 최후의 만찬은 마 26, 막 14, 눅 22, 고전 11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베드로와 함께 만찬준비를 나섰던 사도 요한은 정작 자신이 기록한 요한복음에서는 이 부분을 살짝 언급만 하고 있을 뿐 대부분 생략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인 3절입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마, 막, 눅인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유월절 만찬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부터 매우 중요하게 여겨왔습니다. 얼마만큼 중요하게 여겨왔느냐면, 모일 때마다 그때의 그 만찬모임을 똑같이 재현하며 기념할 정도였습니다. 교회역사의 초기부터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던 그 모임이 오늘날 우리가 매월 첫째주일이나, 절기예배 때에 실시하고 있는 성찬예식입니다. 그런데 고전 11:23-26에 이 내용이 잘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초대교회 공동체는 모일 때마다 예수님께서 부탁을 하셨던 마가의 다락방에서 행하셨던 성찬식을 가졌습니다. 그 성찬식을 통하여 예수님을 기념했으며, 주님의 죽으심을 오실 그날, 재림 때까지 전하는 공동체로 존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중요한 성찬식을 사도요한도 당연히 알고 있었으며, 그 역시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성찬식을 거의 기록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요? 먼저는 마, 막, 눅인 공관복음서에서 이미 비중 있게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은 의도적으로 중복된 내용은 생략했습니다. 대신 ἐγώ εἰμί 에고 에이미, 나는 ~이다, 라는 주님이 누구이신지에 집중을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은 같은 복음서인데도 불구하고 공관 복음이 아닙니다. 관점이 다릅니다. 그 관점이 에고 에이미, 나는 무엇이다. 나는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라는 것입니다. 나는 목자이고 나는 떡이고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라는 것인데 이 내용이 영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상관이 있느냐입니다.
두 번째는 오늘 본문에서 성찬식을 제외한 데에는 중복된 내용을 생략하려는 것 이외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4절 이하에서 나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 세족식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다시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는 모두 왜 세족식 사건을 생략한 채 성찬식 중심으로 마지막 유월절을 기술했는데, 왜 유독 요한은 성찬식을 생략한 채 세족식 중심으로 전해주고 있을까요? 이 것이 본문의 내용과 함께 드러나지 않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그 이유가 주는 메시지와 함께 오늘 이렇게 주시는 메시지가 어떤 것인지 은혜를 받고 믿음 가운데 바로 세워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아시고입니다. 예수는 ... 아시고. 예수님은 에고... 에이미인데 나는 누구인데, 누구이고 무엇이고 어디서를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3절에, 저녁 먹는 중이라는 때와 장소를 동시에 추측 가능한 언급을 합니다. 이어 요한은 그 전체 문장을 마무리하는 품사로 끝부분에 아시고 라는 동사를 기록했습니다. 보다 상세히 말씀드리면, 유월절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식사 중에 주님께서는 3가지를 아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엇을 아셨습니까?
1-1.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수님의 손에 맡기신 것을 아셨습니다. 이것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 하나님의 신뢰가 얼마나 컸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신실하셨는지, 그 신실함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 신실은 일반적으로 믿음직하고 착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어떤 모습이 믿음직하고 착한 것입니까? 그냥 신실하다고 판단하는 이의 주관적인 생각의 정도가 아니라, 좀 더 가늠할 수 있는 측정치가 있습니까? 한문에서 신실(信實)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 말(言) 옆에 자신(人)이 서 있는 것입니다. 말한 것에 대한 책임을진다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따로 놀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말이 열매(實)로 드러나는 삶입니다. 이것이 신실(信實)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삶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일치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 결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하나도 버려지지 않고, 모두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런 주님의 삶에 비하여 우리의 말과 삶은 참 가볍습니다. 하루의 늦은 밤 긴 하루를 되돌아보면 하루 했던 말에 대하여 지키지 못한 말 때문에 가슴을 쳤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요?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그렇지요? 내가 어려서부터 말로 저지른 모든 잘못과 비방과 오해의 말들을 경솔한 속단과 편견과 위선으로 표현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은, 그 은총 속에 거하는 사람은 그의 말이 그의 삶 곁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기 위하여 날마다 말의 언어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그 걸음을 걸어가는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까? 그런데 주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맡기신 것을 그대로 이루신 신실함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상에서 스스로 죽으셨습니다. 죽음으로 신실함을 보여 주셨고 최종 열매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과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상관이 있습니다.
1-2. 주님은 주님이 하나님께로 오셨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근원입니다. 누구로부터 되어졌는가? 입니다. 여러분, 인종, 자손, 근원, 기원을 뜻하는 영어단어 origin이나 동양을 뜻하는 단어 orient는 전혀 다른 단어 같지만, 일어나다, 발생하다, 태어나다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oriri를 같은 어원으로 두고 있습니다. 라틴어를 모어로 사용하던 로마제국 시절 동쪽을 가리켜 해가 일어나 오르는 방향이라고 명명한 데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기원, 근원이은 존재가 일어나 떠오른 곳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이런 근원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정체성과 직결하기 때문입니다. 그 정체성은 곧 자신을 규정합니다. 동시에 스스로를 존대하는 자존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기원이 하나님이심을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권력이든 물질이든 가진 것으로 상대방을 누르고 부리려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셨습니다. 동시에 가진 것이 없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면서 겸손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이는 주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떠오르셨듯이, 주님의 가지신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 기인된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이 옥중에서 빌립보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입니다. 빌 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러분, 사도바울이 어떻게 성장한 사람인데, 궁핍과 비천 속에서도 자족할 수 있었습니까? 배부름과 풍부 속에서도 교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의 기원, 그 허락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족,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삶이 가능했습니다. 그것을 배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가난한 갈릴리 나사렛 촌부로 시작하셨지만, 예수님의 공생애가 모든 것을 하시는 삶,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이루는 삶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기원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천할 때나 풍부할 때나 배부를 때나 배고플 때나 그 어떤 상황이든지 자족하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존재와 소속은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자족하면서도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그래서 주님과 상관이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3. 주님께서는 주님이 돌아가셔야 할 곳이 하나님이심을 아셨습니다. 여러분, 목적지를 정확히 알고 여행하는 사람과 되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는 사람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목적지를 정확히 알고 여행하는 사람은 신앙 안에서는 순례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떠돌아 다니는 사람은 방랑자, 나그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간단합니다. 둘 다 모두 길 위에 있습니다. 호도스, 로도스입니다. 그러나 같은 길 위에 서 있다하더라도 차이점은 분명합니다. 방랑자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그 자유는 정처 없이 헤매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 자유로움 속에는 근심과 걱정이 있습니다. 앞날에 대한 불안으로 옮기는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순례자는 불확실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옮기는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불확실한 내일에도 불구하고 근심과 걱정 대신 소망을 노래합니다. 이 차이가 어디에서 유래되었습니까? 목표의 유무입니다. 목적지를 아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이처럼 삶은 목적지의 여부에 따라 순례자와 방랑자로 나누어집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의 주님의 삶이 턱없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넘볼 수 없고, 흔들리지 않고 강렬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그 누구보다도 흔들리지 않는 목적지를 품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은 인류가 존재한 이래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질문입니다. 하지만 숱한 사람들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채 방황하고 삶을 소진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세상에서 살고, 훨씬 짧은 삶을 살았음에도 신앙과 믿음의 선배들은 주님을 위하여 생을 불꽃처럼 태우며 아름답게 살다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 출발지와 목적지를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어떠했든지, 상황이 어떠했든지 출발지와 목적지가 분명한 사람의 삶은 미궁 속에 빠지거나 허무 속에 잠식되지 않았습니다. 그 삶 자체가 인생의 출발점이자 목적지인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미국의 행태 심리학자 에이브라함 매슬로우(Abraham Maslow 1908-1970)는 인간의 욕구단계를 5가지로 정리했습니다. 1단계-생리적 욕구, 2단계-안전욕구(Safety Needs), 3단계-소속감과 애정욕구(Belongingness and Love Needs), 4단계-존경욕구(Esteem Needs), 5단계-자아실현욕구입니다. 이 중에 3번째 단계가 바로 소속감의 단계입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어딘가에 소속되어 사랑받고 교제나 동행을 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소속감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매일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갑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자아실현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자연스런 한 단계입니다. 그래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공동체는 이를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데, 학생에게 뱃지를 달아주고 정당인에게 당원증을 만들어주며 군인에게 제복을 입히는 것은 모두 소속감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소속감은 자신이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음을 느끼는 마음입니다. 만약 어느 성도가 주일마다 예배는 드리러 오는데 다른 지체들과 전혀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신앙생활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소속감은 커피나 밥 몇 번 먹는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마음을 나누며 말씀을 통하여 위로와 평강을 얻게 될 때에 그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 생기게 됩니다. 때문에 교회 공동체는 지체들 간의 깊은 애정과 관심 그리고 섬김의 생활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따라 아담을 만들어 교제하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속한 자였습니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속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시119;94, 나는 주의 것이니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자신의 소속이 어디에 있는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그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것을 여러 곳에 밝힙니다. 시135;4,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슥2;12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말3;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함이니라. 롬1: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모두 소속입니다. 우리의 소속을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을 지불하고 저와 여러분을 구속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내, 자신을 주장하거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을 위하여 자기 몸을 바치듯, 그리스도인은 자기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고전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벧전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골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그분이 나의 주인이시고 나의 구원자이신 이 소속을 잊지 않는 여러분이 되어서 때마다 은혜와 은총의 복을 내려 주시는 주님으로 목적지가 분명한 그래서 주님과 상관이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씻으시고, 닦기를 시작하여.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닦기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세족식을 하셨습니까? 주님은 하나님을 출발점으로 삼고, 목적지로 삼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님께 그 모든 것,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맡기셨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것을 인식한 순간 전지전능하신 권세를 가지고 무언가를 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4-5,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이 땅에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실 때가 되셨음을 아신 주님께서 하신 일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일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이엄중한 때에 무엇을 하시는 거야? 라는 의문입니다. 여러분, 하늘의 모든 권세와 능력을 지니신 주님께서 이 일을 하셨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유와 의도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성찬식 대신 다른 복음서에선 언급도 하지 않은 세족식을 많은 지면을 들여 기록해 둔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드러난 이유와 감추어진 이유가 있습니다.
2-1. 그러면 먼저 드러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족식을 하신 이유는 제자들 때문이었습니다. 눅 22:24입니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크냐에 대한 서열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눅 22:21-23,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주님은 제자들 중에 한 사람,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팔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시는데, 그들은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곧이어 자기들끼리 다투었습니다. 무엇 때문에요? 누가 큰지, 서열을 정하는 것 때문에요. 기가 차고, 기가 막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떠와서 자기가 잘 났다고 하는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죽음의 십자가를 하루 앞둔 이 엄중한 때에 주님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주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기고 닦아 주셨습니다. 왜요? 그렇게 해서라도 한심한 제자들이 좀 알아차리고 철이 들기를 바라셨습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주변을 좀 살피며 대접받기 보다는 섬기는 제자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유요, 사도요한이 성만찬을 생략하는 대신 세족식을 기록해 놓은 드러난 이유입니다.
2-2. 감추어진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세족식을 기록해 둔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하던 시기의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기록 연대는 사도 요한이 밧모섬으로 유배 가기 전, AD85년 - 9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시기 교회는 각종 파벌과 분쟁이 있었고, 다른 사람들보다, 다른 교회들보다 높아지려는 경쟁의식이 심화되어 있었습니다. 밖으로는 기독교에 대한 유대교와 로마의 탄압이 점점 더해 갔고, 안으로는 가현설, 영지주의, 말시온주의 등의 이단들의 위협이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초기 신앙의 역동성을 잃어가던 교회는 자리다툼과 권력욕에 편 가르기를 했습니다. 이에 요한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상을 섬기는 그 모습을 회복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제자로서의 모습을 되찾기를 소망했습니다. 내가 크다고 서로를 향해 과시하며 분쟁하는 것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상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친히 발을 씻어 주시던 주님의 모습을 새겨놓았습니다. 상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천국을 만들어 가는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천국은 어떤 사람의 것입니까? 천국은 누가 만들어 갑니까? 경쟁이 아니고 자리 다툼이 아니고 친히 밑으로 내려가서 상대방의 발을 씻겨주고, 닦아주는 사람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이루어가고, 십자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이 적용되지 못하고 퇴색되어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섬김과 사랑을 몸소 보여 주셨는데 이 것이 무너질 때에 교회는 본질을 잃어 버렸습니다. 주님과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했던 체코의 후스는 1415년7월6일 화형을 당하면서 100년 후에 백조가 나타나서 유럽이 성령의 불바다가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100년 후에 1505년7월2일 루터는 벼락 치는 곳에서 회심을 하고 1517년10월31일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에 붙였습니다. 그랬더니 숨어 있던 작은 복음의 불꽃이 여기저기에서 활화산처럼 타 올랐습니다. 이 것이 종교 개혁입니다. 그런데 300여년이 지나자 다시 미국이 침체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미국도 1857년9월23일 람피엘이 정오에 혼자서 기도 하는데 하나 둘씩 모여 기도하더니 마침 2년 만에 2백만 명이 회심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야 예수님의 세족식처럼 섬기며 세우며 살아갈까요? 마지막 때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을 부어 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 약속대로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행하신 일을 제자들이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저와 여러분이 함께 회개하고 함께 씻고 닦아 주면서 기도하면 제2의 기적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런 한 영혼을 사랑하는 주님의 뜨거운 마음과 한 영혼을 세우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의 섬김을 이루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의 적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적용이 되는 기초가 너무 허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허약한 기초 위에서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도 주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떻게 그 순간에도 자기우열과 자리다툼에 여념이 없었을까요? 그 이유는 3절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맡기셨다는 것, 자신의 출발점, 그리고 목적지를 아느냐? 알지 못하느냐의 차이였습니다. 그래서 그 엄중한 시기에 자리다툼이나 하다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때에 모두 배신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한심했던 제자들이 어떻게 한번 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드리면서 교회를 섬기고 주님을 전하는 사도로 바뀔 수 있었습니까? 그것 역시 주와 선생이 되어 자신들의 발을 씻어주신 주님을 기억함으로써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깨닫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삶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출발점과 목적지를 모르는 사람은 단 한번 뿐인 인생이 그들에겐 중요하지도, 의미가 있지도 않습니다. 한번 뿐인 생은 없는 것이나 매 한가지입니다. 그래서 주변이 어떻고, 시대가 어떠하든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오로지 누가 크냐를 위해 살 뿐입니다. 하지만, 생의 출발점을 알고 목적지를 분명히 인식하는 이들에게 한번 뿐인 인생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삶을 삽니다. 한번 뿐이기에 더 의미가 있고, 더 진지하게, 더 신실하게 가꾸어 갈 수 있습니다. 내 삶의 출발점이요, 목적지인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위해 이 시대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합니다. 살펴봅니다. 찾습니다. 그래서 주와 선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친히 제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발을 씻겨주신 주님처럼 서로의 발을 씻겨주는 그리스도인, 교회로 살아가는 겁니다. 여러분, 세상은 말합니다. 당신의 발을 내려다보지 말고 고개를 들어 별을 보십시오. 네, 그러고 싶습니다. 슬픔과 아픔이 서린 발아래를 보지 않고 아름답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 싶습니다. 네, 봐야지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별을 봐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발아래 우리를 보내신 곳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가정과 이 땅의 기독교와 우리 사회가 얼마나 허약한 기초 위에 서 있는지를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 때 묻음과 더러움을 씻겨주는 주님의 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누가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우리가요. 여러분, 베프(Best friend)가 무엇입니까? 베스트 프렌즈입니다. 이니셜로 의미가 더욱 다가옵니다. B elieve는 항상 서로를 믿고 E njoy는 같이 즐길수 있고 S mile은 바라만 봐도 웃을 수 있고 T hanks는 서로에게 감사하며 F eel은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고 Respect 는 서로를 존경하면서 I dea는 떨어져 있어도 생각하고 E xcuse는 잘못을 용서하고 Need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Develop는 서로의 장점을 개발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진정한"베프"는 어느 상황에서든 나를 믿어 주고 내가 힘든 상황에 처해 있으면 위로해 주고 정말 그런 사람입니다. 여러분, 한 번 뿐인 인생이기에 하고 싶은 대로, 이끄는 대로 질주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시대가 어떻든 사회가 어떻든 고고하게 하늘의 별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바로 이 자리에 우리를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그 하나님께로 우리 삶이 향해야 함을 안다면, 우리가 어찌 내가 크다고 다투며 살 수 있습니까? 초기신앙의 역동성을 잃어버리고 자리다툼과 권력욕으로 물들어갔던 초기교회처럼 이 땅의 교회도 스스로 뿐 아니라, 서로를 파괴하고, 이전의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빈약한 우리 기초를 직시하는 그리스도인 되고 어떻게 전해져 온 복음이고, 어떻게 지켜온 신앙인데. 하면서 이 엄중한 시기 주님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헤아리는 그리스도인 되어 이 땅의 허약한 기초를 다져가는 무릎을 꿇은 주님의 사람과 더러움을 씻겨주는 주님의 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아셨던 것처럼 아시고 주님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행하시는 복된 삶을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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