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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경우(張慶遇)
[본관] 인동(仁同)
[진사] 인조(仁祖) 5년(162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進士) 3등(三等) 28위(58/100)
[생졸년] 1581년(선조 14)~1656년(효종 7) / 壽 75歲
[거주지] 인동(仁同)
조선 후기에,『저법육설』,『만회당집』 등을 저술한 학자로, 본관은 옥산(玉山). 자는 태래(泰來), 호는 만회당(晩悔堂). 인동(仁同) 출생. 아버지는 장내범(張乃範)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로 진위장군 이운배(李雲培)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10여세의 나이로 할머니를 모시고 금오산(金烏山)·청송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란하였다. 1608년 난 후 학교를 부흥시키고자「학교의식」을 지어서 학교 교육의 지침으로 삼았다. 이듬해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서울에서 시행하는 식년과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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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조 학사집(鶴沙集)
만회당 장공 묘지명병서(晩悔堂張公墓誌銘幷序)
공은 성이 장씨(張氏)이고 본관은 옥산(玉山)이다. 고려 삼중대광 신호위 상장군(三重大匡神虎衛上將軍) 장금용(張金用) 이하로 큰 벼슬이 수십 대를 이어져 왔다. 11대조 덕녕 부윤(德寧府尹) 장안세(張安世)는 고려조의 구신(舊臣)으로 고려가 망하자 의리를 지켜 은둔하며 고고하게 지냈다.
태조(太祖)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은전(恩典)을 여러 차례 내리고 어찰(御札)로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증조 장헌(張巘)은 제용감 주부(濟用監主簿)를 지냈고, 조부 장사영(張士瑛)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지냈다. 아버지 장내범(張乃範)은 남모르게 쌓은 음덕이 있었으며 자호(自號)가 반계거사(潘溪居士)이다.
선비(先妣)는 한산 이씨(韓山李氏)로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 이계린(李季疄)의 후손이자 진위장군(振威將軍) 이운배(李雲培)의 딸이다. 만력 신사년(辛巳年, 1581, 선조 14)에 공을 낳았다. 9세에 비로소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일찍이 선생을 따라서천군(西川君)과한강(寒岡)과동강(東岡)세 어르신을 가야(伽倻)에서 배알하였는데, 매우 장려하고 허여 하며 경우(慶遇)라는 이름과 태래(泰來)라는 자(字)를 내려 주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 25) 반계공(潘溪公)의 명으로 선생을 모시고 병란(兵亂)을 피해서 떠돌아 옮겨 다니는 중에도 경전(經傳)을 손수 베껴서 강독하였다.
병란이 안정되자 예전에 기거하던 곳으로 돌아와 날마다 스승을 모시며 덕을 상고하였다. 계묘년(癸卯年, 1603, 선조 36)과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1)에 선비(先妣)와 후비(後妣)의 상을 당하여 몸이 훼손되었다가 겨우 소생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627, 인조 5)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경진년(庚辰年, 1640, 인조 18)에 부친의 상을 당하였다. 나이가 이미 노쇠했지만 오히려 자력으로 집상(執喪)하기를 예법에서 정한 것보다 지나치게 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654, 효종 5)에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병신년(丙申年, 1656, 효종 7)10월에 목숨이 다하여 집에서 죽었고, 11월에 정산(鼎山) 을향(乙向)의 기슭에 장사 지냈다.
아아! 공은 타고난 품성이 후덕하고 또 귀의할 곳을 얻어서 정성을 다해 존모(尊慕)하였고, 선생 또한 자식처럼 여기셨다. 일찍이 선생을 위하여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선도하여모원당(慕遠堂)을 짓고, 또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를 지어서 도를 강론하는 장소로 삼자 원근의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며 시종 응접함에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으니 우리 유림에 끼친 공이 매우 크다.
장씨 대종(大宗)의 일을 받들어사시정제(四時正祭)를 제사하는 것 이외에기제(忌祭)와 묘제(墓祭)도 모두 자신이 시행하고 여러 자손들이 돌아가며 지내도록 하지 않았다. 반계공(潘溪公)이 선비(先妣)의 재산(財産)과 가업(家業)을 공에게 전부 맡기자 공이 울면서 사양하였고, 후비(後妣) 출생들에게 나누어주고서 동기(同氣)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 그들이 장성하자 곱게 꾸며 배필을 가려 혼인을 치러주었고, 그들의 곤궁함을 슬퍼하여 자신의 재물을 내놓아 도와주었다.
일찍이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장차 전시(殿試)에 들어가려고 할 때 같은 집안사람이 고관(考官)이 되어 공을 사사롭게 도와주려고 하였다. 공이 이에 응하지 않자 그 사람이 뉘우치고 감복하여 마침내 자신의 처자식을 부탁하였다.
영남의 유림들이 소를 올려 이이첨(李爾瞻)을 죽이라고 청한 뒤에 겨우 고개를 넘어가다가 ‘흉포한 무리들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메긴 채 수륙(水陸)으로 모두 진격한다는 등의 말을 만들어 내어 화(禍)를 전가하는 계책을 꾸민다.’라는 소문을 듣고서 일행들이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공이 태연히 말하기를 “그대들은 모두 떠나라. 나는 마땅히 이번에 가서 죽겠다.”라고 하자 사람들의 의구심이 진정되었다. 아! 평생 스승의 문하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았으니, 보고 느끼는 사이에 얻은 것이 많다. 공이 후덕한 자질을 지니고도 초야에서 늙어 죽었으니 애석하다.
부인은 유인(孺人) 광산 이씨(光山李氏)로 처사 이로(李蕗)의 딸이자 고려 판각(判閣) 이순(李順)의 후손이다. 한강(寒岡) 선생의 집에서 나고 자라서 규방의 범절을 매우 잘 갖추었다. 여헌(旅軒장현광) 선생의 집 곁에 거주하여 문간에 신발이 날마다 가득하였는데, 30년 동안음식을 주관하면서 일찍이 싫어하고 고달파하는 낯빛이 없어 고을 사람들이 그것을 칭송하였다. 공보다 20년 앞서 죽었다. 무덤은 공의 묘소 오른쪽에 봉분하였다.
아들 셋을 두었다. 장남은 해(海)로 생원(生員)이며, 아들 우한(羽漢)ㆍ우천(羽天)ㆍ우항(羽沆)ㆍ우수(羽洙)를 두었고, 딸은 황찬(黃燦)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차남은 학(澩)으로 참봉(參奉)을 지냈고, 아들 우명(羽溟)ㆍ우영(羽瀛)ㆍ우기(羽沂)ㆍ우점(羽漸)을 두었으며 딸은 박창휘(朴昌輝)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셋째 아들은 원(原)으로 아들 우주(羽宙)ㆍ우환(羽寰)ㆍ우신(羽宸)을 두었고, 딸은 신인석(申仁錫)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딸은 둘을 두었다. 장녀는이도일(李道一)에게 시집갔으나 후손이 없다. 차녀는 유여재(柳汝梓)에게 시집가서 아들 경방(經邦)을 두었고, 채영보(蔡瀛俌)ㆍ정상현(鄭尙賢)ㆍ유광국(劉光國)에게 시집간 딸이 있다. 서자가 세 명이 있으니, 홍(泓)ㆍ발(潑)ㆍ만(灣)이다.
공이 만년에 학교(鶴嶠)의 아래에 집을 지었는데, 만회(萬悔)로 편액을 하였다가 얼마 뒤에 “만(萬)은 오히려 한계가 있다.”라 말하고, 만(萬)을 만(晩)으로 바꾸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돈독하여 현인을 낳아 / 天篤生賢
가르침을 열고 학문을 펼치자 / 闡敎敷文
먼 곳으로부터 찾아와서 / 有來自遠
도를 구하는 이가 문에 가득했네 / 求道盈門
온순하고 공손한 사람들이 / 溫溫恭人
때에 맞춰 태어나고 / 應時而生
거처가궐리와 같아 / 居同闕里
가까이서 모시며 지냈네/ 密邇軒屛
위로는스승을 이었고 / 上承皐比
아래로 좋은 손님을 맞이하여 / 下接嘉客
흰 망아지 붙잡아 매어/ 縶維白駒
이틀 밤을 묵게 하였네 / 於焉信宿
게으르지 않고 더욱 힘써 / 不懈彌勤
사십 년을 지내니 / 垂四十年
이름이 영남에 알려져 / 知名嶺表
사림이 현자로 추대했네 / 士林推賢
선발이 상상에 그쳐서/ 選止上庠
첫 벼슬이 또 늦었고 / 一命又晩
산수를 마음으로 즐기며 / 煙霞契心
세속 일을 눈앞에 흘려버렸네 / 世紛過眼
학가산에 자취를 숨기고 / 鶴嶠藏踪
정산에 시신을 묻었으니 / 鼎山埋芬
천년만년 흘러도 / 於千萬秋
어진 자손들이 뒤를 이으리라 / 令子賢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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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옥산(玉山):
옥산은 인동(仁同)의 고호로, 현재 경상북도 구미시 관내에 있다.
[주02] 장안세(張安世):
호는 송은(松隱),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고려 말 여러 벼슬을 거쳐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덕녕 부윤(德寧府尹)을 지냈다. 이어
함주(咸州지금의 함흥)의 부사로 부임하여 해마다 장마 때면 범람하여 폐해가 크던 갈한천(乫罕川)에 길이 70칸이나 되는 나무다
리 만세교(萬歲橋)를 완공하였다.
김집(金集)이 기록한《두문동칠십이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에 16번째로 기록되어 있다.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 옥산사(玉山
祠) 경내에 그의 유허비가 있다. 시문집인《송은실기》가 있다.
[주03] 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崑壽, 1538~1602)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여인(汝仁), 호는 백곡(栢谷)ㆍ경음(慶陰)ㆍ조은(朝隱)이다. 초명은 규
(逵)이며 곤수는 선조(宣祖)의 하사명이다. 1587년(선조 20)에 여러 해 흉년을 겪은 황해도의 관찰사로 특별히 임명되어 진휼 사업
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88년(선조 21)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서천군에 봉해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선조를 호종하였
다.
[주04]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이황(李滉, 1501~1570)과
조식(曺植, 1501~1572)의 문인이다. 천거로 벼슬길에 나아가 형조 참판과 대사헌 등을 지냈다. 근기남인의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
을 주었다. 저서로《한강집》이 있다.
[주05]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으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ㆍ직봉포의(直峯布衣), 시호는 문정(文貞)이
다. 1567년(명종 22)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기축옥사(己丑獄事,1575년 정여립 역모사건) 때 정여립(鄭汝立)과 함께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는 이유로 회령으로 유배되었
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면되어 다시 벼슬을 하였다. 조식과 이황에게 배웠다. 저서로《동강집》이 있다.
[주06] 병신년(丙申年, 1656, 효종 7):
문집에는 두 글자가 비워져 있으나《청천당선생문집(聽天堂先生文集)》권4〈영릉참봉장공묘갈명(英陵參奉張公墓碣銘)〉을
참고하여 몰년 간지(干支)를 추가하였다.
[주07] 모원당(慕遠堂):
경상북도 구미시 인의동(仁義洞) 남산 고택 내에 있는 조선 시대 가옥이다. 장현광이 본래 살던 집이 임진왜란 때 불에 타자 문인 장
경우를 비롯한 제자와 친지들이 1606년에 지어 주었다. 인동 장씨 남산파 종손이 살고 있는 남산 고택 내에 있다.
[주08]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
구미시 낙동대교 옆에 있다. 정사 옆 낙동강 강가에 점점이 수놓은 바위가 있는데,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바위[不知巖]라는
데서 그 명칭이 유래하였다. 그 뒤 부지암정사 옆에 장현광을 모시는 동락서원(東洛書院)이 들어서면서 두 건물이 나란히 있게 되었
다.
[주09] 사시정제(四時正祭):
사계절에 지내는 시제(時祭)이다. 왕가(王家)에서 사시 정제는 맏달[孟月]을 쓰므로 사가(私家)에서는 시제(時祭)를 중월(仲月)에
지낸다는 예문이 있다. 맏달은 정월, 4월, 7월, 10월이고, 중월은 2월, 5월, 8월, 11월이다.
[주10] 기제(忌祭):
해마다 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기(忌)는 휘(諱)의 뜻이다. 효자는 어버이의 돌아가신 날을 차마 어버이가 죽은 날이라
고 하지 못한 때문에 휘일(諱日)이라 한다.
[주11] 이이첨(李爾瞻):
1560~1623.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ㆍ쌍리(雙里)이다. 1608년(선조 41) 문과 중시에 장원 급제
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예조 판서에 올라 임해군(臨海君)과 유영경(柳永慶)을 사사되게 하는 등 소북 일파를 숙청하였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을 일으켜 선조의 손자 진릉군(晋陵君)을 죽였다.
1613년(광해 5)에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떨어뜨려 강화에 안치시키고 김제남(金悌男) 등을 사사시켰다. 이듬해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1617년(광해 9)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을 발의해 이듬해 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등 생살치폐(生殺置廢)
를 마음대로 자행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가족을 이끌고 영남지방으로 도망가던 중 광주의 이보현(利甫峴)을 넘다가 관군
에게 잡혀 참형되었다.
[주12] 음식을 주관:
《주역》〈가인괘(家人卦) 육이(六二)〉에 “다른 일을 이룰 것이 없고, 안에 있으면서 음식을 주관하면 정하여 길하리라.[无攸遂 在
中饋 貞吉]”라고 하였는데, 정전(程傳)에 “부인은 집 안에 있으면서 음식을 주관한다.[婦人居中而主饋者也]”라고 풀이하여, 부인
의 일에 해당시켰다.
[주13] 이도일(李道一):
1581~1667. 본관은 벽진, 자는 관지(貫之), 호는 소우헌(消憂軒)이다. 영산(靈山)에 거주하였다. 정구에게 수학하였다. 칠원 현
감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올렸는데, 이로 인해 특별히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1641년 임해진(臨海津) 가에 정사를 지어 소우
헌, 용슬헌(容膝軒)이라 이름 지었다.
[주14] 궐리(闕里):
중국의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공자(孔子)의 출생지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유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곳을 비유하
여 말한다.
[주15] 가까이서 모시며 지냈네:
원문의 ‘헌병(軒屛)’은 마루의 난간과 방 안에 둘러친 병풍이라는 뜻으로, 어른의 가까운 곁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여헌 장현광
선생을 가까이에서 모셨다는 말이다.
[주16] 스승:
원문의 고비(皐比)는 원래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깔개인데, 송(宋)나라의 장재(張載)가 항상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아서 《주역》
을 강론하였기 때문에 후세에는 스승이 강학(講學)하는 자리를 고비라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는 여헌 장현광의 학문을 이었다는 뜻
으로 말한 것이다.
[주17] 흰 …… 매어:
원문의 집유(縶維)는 인재를 붙잡아 매어 둔다는 뜻이다.《시경》〈소아(小雅) 백구(白駒)〉의 “그대의 흰 망아지가 내 밭의 콩잎
을 먹었다 핑계 대고는, 붙잡아 매어 두고 오늘밤을 길게 늘여, 저 훌륭한 사람을 나의 좋은 손님이 되게 하련다.[皎皎白駒, 食我場
藿, 縶之維之, 以永今夕, 所謂伊人, 於焉嘉客.]”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18] 선발이 상상(上庠)에 그쳐서:
상상은 소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는 말이다. 장경우(張慶遇)는 1627년(인조5) 식년시(式年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
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나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했다.《國朝文科榜目》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권영락 (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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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晩悔堂張公墓誌銘幷序。
公姓張。玉山人。高麗三重大匡神虎衛上將軍諱金用以下軒冕相承數十世。十一世祖德寧府尹諱安世。自以麗朝舊臣。麗亡守義高蹈。太祖有潛邸。恩屢降。天札徵之。終不起。曾祖諱巘。濟用監主簿。祖諱士瑛。掌隷院判決事。考諱乃範。有隱德。自號潘溪居士。妣韓山李氏。韓山府院君季疄之後。振威將軍雲培之女。以萬曆辛巳生公。九歲。始受業旅軒先生門下。嘗從先生。拜西川君,寒岡,東岡三爺于伽倻。甚見奬許。賜名慶遇字泰來。壬辰。以潘溪公命。陪先生避兵。流徙中手寫經傳讀之。亂定還舊居。日侍函丈考德焉。癸卯癸亥。丁先後妣憂。毀而僅甦。丁卯。中進士。庚辰。丁外艱。年紀已向衰。猶能自力。執喪逾制。甲午。除英陵參奉。不赴。▣▣十月。考終于家。十一月。葬于鼎山乙向原。嗚呼。公旣稟厚。又得依歸。血誠尊慕。先生亦視猶子焉。嘗爲先生。倡率同人。搆慕遠堂。又搆不知巖精舍。爲講道之所。遠近學者坌集。而始終接應無違度。其有功於斯文甚大。奉張氏大宗。祀四時正祭外。如忌祭墓祭。皆自辦行。不令衆子孫輪行。潘溪公全付先妣產業于公。公泣而辭。分諸後妣出。愛育同氣。及長。移奩擇配。哀其窮。捐貲以賙之。嘗中解。將入殿試。同宗人爲考官。欲私公。公不應。其人悔服。卒乃托其妻子。嶺儒抗疏請誅李爾瞻。纔逾嶺。聞兇黨做出張弓挾矢水陸竝進等語。爲嫁禍計。一行色悸。公夷然曰。公等皆去。吾當死於此行。群疑乃定。噫。一生薰炙於師門。其得於觀感之際者深矣。以公厚德。終老丘園。惜哉。配孺人光山李氏。處士蕗之女。高麗判閣順之後。生長寒岡先生家。閨範甚備。居傍旅軒先生家。戶屨日滿。而主饋三十年。未嘗色於厭苦。鄕隣稱之。先公二十年卒。墓卽公墓右封。三男。長海生員。男羽漢,羽天,羽沆,羽洙。女適黃燦。餘幼。次澩參奉。男羽溟,羽瀛,羽沂,羽漸。女適朴昌輝。餘幼。季原。男羽宙,羽寰,羽宸。女適申仁錫。餘幼。二女。長適李道一。無后。次適柳汝梓。男經邦。女適蔡瀛俌,鄭尙賢,劉光國。孼子三。泓,潑,灣。公晩卜築于鶴嶠下。扁以萬悔。旣而曰萬猶有限。乃以晩易萬。銘曰。
天篤生賢。闡敎敷文。有來自遠。求道盈門。溫溫恭人。應時而生。居同闕里。密邇軒屛。上承皐比。下接嘉客。縶維白駒。
於焉信宿。不懈彌勤。垂四十年。知名嶺表。士林推賢。選止上庠。一命又晩。煙霞契心。世紛過眼。鶴嶠藏踪。鼎山埋芬。
於千萬秋。令子賢孫。<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