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씨의 사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책에는 정축시라고 되어 있으나 정축시가 되면 정관이 두개가 되어 이쁜 모양이 아니며, 재벌회장 등급의 사주가 되기 어렵다 보인다. 물론 그 자식의 흉사는 정축시나 병술시나 다 안고 있다 보이지만 병술시가 더 뚜렷하다 할 것이다.
월지 식신격으로 생재로 흐름이 뚜렷하다. 이 사주의 용신을 목으로 잡느냐 화로 잡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으나 어느 것으로 잡아도 무방하다. 겨울 금은 화의 조후를 바라는 바이므로 조후용신은 화가 되고 목은 화를 생하는 도구로 보아도 되고 자체적으로 용신이 된다고 보아도 된다. 여하튼 목화가 좋은 운에 해당한다.
사주의 흐름이 금생수 수생목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으로 생생원류가 되어 있어 사실 운의 흐름에 어느 운도 크게 꺼리지 않음은 있다. 대격이 되는 이유가 이에 있다 할 것이다.
초년에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갑신 을유운에 집을 나와 미곡상을 하면서 어렵게 사업을 했다고 한다. 계미대운 36세 들어서면서 비로소 기가 발한다 할 것이다.
66세 이후 10년 경진대운이 어려운 시기가 된다 할 것이다. 많은 젊은 여자 탈렌트나 가수들과의 생활이나 또 그들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음도 사주로 보면 사실로 짐작이 된다.
몇명의 자식을 앞세워 보낸 점도 이 명에 정확히 쓰여져 있다 할 것이다.
건설 자동차 중공업 등에서 크게 성공한 것도 명조에 나타나 있다 하겠다. 금수목화토의 흐름이 이 정도로 순하게 갖추어진 사주도 찿아 보기 어렵다 할 것이다.
정주영의 사주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명리학자들이 분석을 해 본 바 있었고, 보편적인 견해중의 하나가 재성 목을 용으로 식신생재격으로 보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겨울 경금으로 보아 화를 용으로 보는 것이었는데, 나의 의견도 목화를 반기는 것으로 보았으니 별로 이에서 차이가 없는 것이 었다.
최근에 영웅시대를 보면서 현대의 사업중에서 제일 잘 나가는 것이 자동차, 중공업, 건설이라는 측면에서 토금의 사업만이 명맥을 잇는 점이 의아스러웠는데, 어느 분이 정주영씨의 생애를 역학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메일로 보내 왔는데, 그 글에서 의령교 공사나 이런 부분이 나와 있었다.
연도를 따져서 헤아려 보면서 아, 내가 잘 못 보았구나, 기존의 전통적 견해들에 함몰되어 분석을 제대로 못했구나 하는 생각을 떠 올렸다.
고령교 공사는 1953년 38세 임진세운의 일이다.
회복의 기반을 따게 된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 수주는 42세 병신세운의 일이다.
최근에 이 사주를 다시 생각해 본 결과는 토가 용이요, 화가 희가 되며, 목이 병이 되므로 금이 약이 되는 구조다. 결국 크게 보면 수목이 기신이고, 화토금을 반갑게 쓰는 구조이다. 그리 놓고 보면 초년 병술대운부터 경진대운까지 무려 70년의 흐름이 나쁘지 않게 연결되어 있다. 단지 고령교 공사로 20년 갚아야 할 큰 빚을 지게 되는 36세 이후 10년 계미대운만이 좌절하는 대운이다. 이렇게 운이 흐르니 평생 실패는 있어도 좌절은 없다고 하는 본인의 신념이 관철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초년 갑신 을유 대운에 일찍 성공할 수 있었으며, 계미대운에 해묘미 합목하여 고령교 공사로 20년을 갚아야 되는 큰 빚을 지게 되었다.
대운 임오도 좋은 운에 속한다 하겠지만, 신사 경진대운에 국내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것으로 본다.
76세 되는 기묘대운 부터 말년 나쁜 운으로 접어 든다 보인다.
92년 임신세운 77세 되는 해에 대권에 나섰다가 실패하면서 현대그룹 전체가 큰 어려움을 맞게 되었다. 기묘대운의 시작즈음이다.
미8군 공사로 건설업의 기반을 닦은 현대건설은 1953년 4월 고령교(高靈橋) 복구공사를
맡게 되었다. 대구와 거창을 잇는 이 교량은 지리산 공비토벌을 위해 복구가 시급한 처지였고, 계약금액만도 5천4백78만환으로 당시 정부 발주 공사로는 최대 규모였다.
이보다 한 해 전인 1952년 10월에 현대건설은 다소의 적자를 예상하고 조폐공사의 동래 사무실과 건조실 신축 공사를 수주하였다. 그러나 공사 착공 5개월도 안 된 1953년 초 정부의 「긴급 통화 조치」로 화폐 가치가 1백원대 1환으로 평가절하되었다.
이와 함께 전쟁 직후의 물가는 다락같이 치솟았다.
이러한 시기에 현대건설이 의욕을 가지고 추진한 고령교 복구공사는 처음부터 난항일 수밖에 없었다. 착공한지 1년이 지났는데도 교각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장비도 부족한 데다, 그나마 인력에 의한 원시적인 방법으로 세워놓은 교각이 홍수에 쓸려 떠내려가버린 것이었다. 거기에다 건자재값과 노임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무려 1백20배나 상승하였다.
이미 현대건설은 미8군 공사로 번 돈을 몽땅 돈 찍어내는 조폐공사 짓는데 다 털어넣었기
때문에 재정이 바닥 난 상태였다. 그러니 고령교 복구공사를 계약기간 2년 안에 끝마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낙관론자인 정주영도 이때만큼은 잠시 앞길이 보이지 않았다. 독서를 즐긴 그는 문득
「채근담(菜根譚)」에서 보았던 글귀를 떠올렸다.
「득의지시 편생실의지비(得意之時 便生失意之悲)」,
즉 「뜻을 이룰 때 실패의 뿌리가 생긴다」는 의미의 글귀였다.
『이대로 손 들고 주저앉을 수는 없다. 집이라도 팔아야겠다』
정주영은 동생들과 가까운 친척을 모아놓고 회의를 하였다. 그때 동생들이 선뜻 나섰다.
『형님! 조상 차례 지낼 집은 한 칸 있어야 합니다. 형님 집은 그대로 놔두세요.
우리들의 집을 팔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네 사람의 집을 팔았다. 동생들과 가까운 친인적의 집 네 채를 판 돈은
9천9백70만환, 여기에다 현대건설 설립 당시의 자본금 30만환을 합쳐 총 1억환을
만들어 다시 고령교 복구공사에 박차를 가하였다.
1955년 5월 현대건설은 마침내 악몽의 고령교를 당초 계약 공기보다 2개월 늦게 완공하였다. 공사에 들어간 총투자비는 계약 금액보다 약 1천여만환 더 많은 6천5백여만환으로, 결국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엄청난 적자를 본 것이었다.
정주영은 오히려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그가 끝까지 공사를 마무리지은 것은 「신용」때문이었다. 신용을 잃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내 사전에는 영원한 실패란 없다」
정주영은 이렇게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채근담」에 나오는 글귀처럼 그는 「실패의 뿌리」를 꼭 움켜쥔 채 전화위복의 기회를 노렸다. 그 기회는 오래 기다리지 않아 찾아왔다. 1957년 여름,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가 공개입찰에 붙여진 것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현대건설은 이름이 알려진 업체가 아니었다. 고령교 복구공사에서 부도가 나서 곧 문을 닫을 거란 소문만 과다하게 나돌던 회사였다.
그런데 1957년 9월, 입찰 결과는 정주영에게 여의주를 물어다 주었다. 현대건설이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따낼 수 있었던 것은 적자를 무릅쓰면서까지 완공함으로써 신용을 지킨 고령교 복구공사 덕분이었다. 현대건설은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에서 계약금의 40%나 웃도는 이익을 창출하였다.
그리고 이 공사를 하면서 현대건설은 매스컴을 통해 유명해졌고, 국내 5대 건설업체로 급부상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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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몽의 고령교 공사 〓 대구와 거창을 잇는 고령교가 6·25 전쟁통에 파손되자 정부는
1953년 이를 복구하기로 했고 전쟁전에 현대건설을 세웠던 정주영은 이를 맡았다.
그러나 이 공사는 정주영에게 골칫덩어리로 변하고 말았다. 계절에 따라 다른 낙동강 수심과
열악한 장비시설, 예기치 않은 홍수 등이 공사를 방해했다.
가족과 동료들은 공사를 중단하자고 했으나 정주영은 ‘사업에는 신용이 최우선’이라는
신념으로 형제들의 집을 팔고 얻을 수 있는 빚은 모두얻어 1955년 결국 계약한 기한보다
2개월 늦게 공사를 완공했다. 계약금액이 5478만환이었고 적자는 6500만환이었다.
그는 이 공사의 적자로 빛더미에 올라 빛을갚는데만 20여년이란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이로 인해 정부로부터 크게 신뢰를 얻었기 때문에 현대건설이 정부공사를 대부분 수주하는
계기가 됐다.
만년에 이르면서 이런 역전도 어려워졌다. 진짜 시련은 뒤늦게 찾아온 셈이다.
5~6공 시절 다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정치헌금 요구에 시달렸고,
또 정치헌금을 냈다는 이유로 5공 청문회장에 서기도 했던 그는 6공 시절에는
정치헌금을 중단하자 세무조사를 받기도 한다. 그는 이에 92년 스스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다. 그는 92년 새해 첫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맨주먹으로 시작했으니,
다시 맨주먹으로 돌아가도 아무런 원이 없다. 우거짓국 먹고 살 각오를 해두라”고 말하며
국민당을 창당해 정치에 뛰어든다. 그러나 그해 12월 대선에서 그는 쓴 잔을 들이키고
말아야 했다. 처음으로 역전에 실패한 셈이다. 이후 김영삼 정권의 삭풍이 휘몰아칠 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이 내릴 때는 마당을 쓸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인생신조처럼. 사업확장도 모두 중단한다.
그리고 정권이 바뀐 98년 그는 일생의 숙원사업인 대북사업에 마지막 정열을 바친다.
그해 6월 통일소 500마리와 함께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한 그는 그해 가을 금강산을 우리 눈앞에 안겨줬다. 대선 이후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졌던 그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 마지막 1년은 차라리 겪지 않았어야 했다. 지난 1년여동안 그는 현대그룹의 자금난과 `왕자의 난'으로 불리는 자식들의 경영권 다툼 등으로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그는 지난 해 `3부자 퇴진'을 선언하고,
자신의 전재산을 다 내놓기까지 했으나 현대건설이 여전히 자금난에서 벗어나지 못해 빛을 보지 못했다. 더욱이 최근에는 그가 마지막 심혈을 기울였던 대북사업마저 중단위기에 처해있어, 가는 길을 더 무겁게 하고 있다. 그가 떠난 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희용에 대한 부분은 저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셔서 기쁘네요 식신생재로 흐르는 구조에서 많은 재를 감당할 수 있는 운이 온다면 얼마든지 사업가 사주로 손색이 없는것 같습니다. 정주영은 식신용인격으로 재가 기신이 되므로 비겁또한 약이 될수 있다고 봅니다.
이사주는 좀처럼 흔치 않은 대격사주로써 금생수,수생목,목생화,화생토,토생금으로 접속상생인 사주로 사주자체가 흠이없어 나쁜운이와도 그리 나쁘지 않으며,좋은운이와도 그렇게 좋다고 느껴지지 않는운입니다.원래 접속상생이 잘된사주라 크게 기신이나구신,희용신에 의지않을 정도이며 단지 충이나극되는 세운과 월운
첫댓글 하하..내방에 내가 올린글을 누군가 메일로 보냈군요 ^__^ <그는 이 공사의 적자로 빛더미에 올라 빛을갚는데만 20여년이란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는 원래 글엔 없는내용인데 내가 보충해 넣은글이니.. 하하 ..하여튼 공부많이 되시길 ...
희용에 대한 부분은 저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같은 생각을 하고 계셔서 기쁘네요 식신생재로 흐르는 구조에서 많은 재를 감당할 수 있는 운이 온다면 얼마든지 사업가 사주로 손색이 없는것 같습니다. 정주영은 식신용인격으로 재가 기신이 되므로 비겁또한 약이 될수 있다고 봅니다.
이사주는 좀처럼 흔치 않은 대격사주로써 금생수,수생목,목생화,화생토,토생금으로 접속상생인 사주로 사주자체가 흠이없어 나쁜운이와도 그리 나쁘지 않으며,좋은운이와도 그렇게 좋다고 느껴지지 않는운입니다.원래 접속상생이 잘된사주라 크게 기신이나구신,희용신에 의지않을 정도이며 단지 충이나극되는 세운과 월운
과사주에 대입하여 계산함이 좋은듯합니다.그리고 그 시절의 환경이나 마음의심정과관계,그리고 행동들도 모두가 포함된듯 하고요.
금수상관격에 화를 용신잡고보면 이사주는 대입이 가능할것 같습니다... 목운도 화를 생하여 주니 좋은 운으로 봅니다... 대쪽같은 성격과 지혜로운 두뇌의 결과치라 봅니다... 그러므로 사주는 통합적인 관찰이 필요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