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월중에는 특별히 마라톤대회가 없었는지라 국종달이 끝나면 나태해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일상을 탈피해보고자 처음으로(2001년.1.14) 100Km울트라마라톤에 참가했던 일본 미야코지마(宮古島)마라톤 조직위원회에 전화를 걸어봤다.
"저는 2001년 1.14일에 그 대회에서 달린 이윤희라는 사람으로, 참가신청을 하려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잠시 후 서류를 뒤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2001년 대회리스트를 확인하는 중이며, 당신이 완주한 기록을 찾았다. 참가가 가능합니다" 라는 대답이 들려온다. 그것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2002. 1.12 토.
오키나와로 향하는 발걸음은 기분이 좋았다. 순전히 마라톤 하나만을 위하여 나간다는 것이 나에게는 자유로, 기쁨 그 자체였다. 이번 여행은 다른 사업상 했던 여행과 마찬가지로 혼자서 출발하여 홀가분하기도 했지만 복장이 한없이 편하여 훨씬 여유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서울마라톤"클럽티셔츠, 유니폼, 모자, 가방 하나, 얼마만의 자유로움인가......!!
2시간 비행 오키나와 나하 공항에 도착하여 바로 미야코지마行 국내선으로 바꿔 타고 1시간 비행. 남국 특유의 달콤하고 따뜻한 바람이 몸에 휘감겨 온다. 대회장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 주변풍경은 작년과 같으나 생경한 느낌이 전혀 없이 친근한 마음으로 다가온다. 옆에 타신 분이 관심을 표명한다. "내 아들이 100Km에 도전하는데 가족이 응원차 온다" 라는 것이다. "아 예 그러세요!! 저는 작년에 한번 이곳에서 첫경험을 했습니다. 덥지만 할 만 한데요" 아들이 여러 가지를 물어온다. 고도는?, 기온은? 힘들지 않느냐? 몇 시간 걸렸느냐?....
선수접수창구에 일렬로 줄을 서서 일일이 확인을 받은 후 참가물품을 받아 각자 호텔로 향한다. 나는 "외국인이라 별도로 준비가 되었다" 면서 친절하게 도와줘서 고맙기 그지없었다. 또한 여기서 지난 3월 서울마라톤 대회, 11월 서울울트라대회에 참가했던 일본인 세분, 6월 사로마 울트라 대회에서 같이 달려서 얼굴이 익은 분, 일제시대에 한국에서 국민학교, 중학교를 다니셨던 분 등 여러 일본인들을 만나 반갑게 해후하였다. 잠시 후 코스 사전답사가 있다는 안내방송이 나왔지만 이미 코스를 대충 알고 있는지라 휴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1.13 일 02:30
이상하게도 그냥 자연스레 눈이 떠진다.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어제 준비해 놓은 대로 복장을 갖추고 출발장소로 걸어갔다. 작년에 처음 느꼈던 100Km거리에 대한 두려움, 약간의 공포, 설렘, 완주의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 등은 하나도 없다. 이미 두 번의 100Km 경험이 조금은 여유로워진 것일까?
단지 하나 작년에 힘이 부쳐 걸을 수밖에 없었던 80Km지점의 강한 바닷바람, 96Km 지점의 무척이나 가파른 약 1.5Km의 하늘에 닿아 있는 고갯길 등 "나를 끝없는 절망으로 몰아넣었던 그 코스를 걷지 않고 달려서 극복해 보겠다" 라는 의지만을 확인해 본다.
주변의 어둠을 뚫고 사람들이 몰려온다. 시각장애인, 반주자도 있어 기념사진을 같이 찍었다. 50Km중간휴게소에 보낼 짐을 맡기고 출발선에 섰다. 1년 전의 그 자리를 꼭 1년 후에 다시 서게 된 것이다. 기분이 좋았다. 사진기자에게 손을 흔들어 답했다. 잠시 후 출발이라는 방송만이 시간을 흐름을 알게 해준다.
시장님의 출발총성과 함께 350여명이 일제히 함성을 올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20여℃는 되는 것 같다.
작년에는 잘 몰랐는데 출발하자마자 가파른 Up-down의 연속인 주로이며, 전체 100Km중에 평탄한 주로는 10Km미만인 정도이다. 힘도 있고 천천히 달려서 인지, 그런 점을 모르고 지나간 것뿐이다. 정말 편안하게 달리는 기분이다. 년말 11월의 뉴욕대회, 12월의 호놀루루, 호미곶 등 3번의 풀 코스, 2주 동안의 국종달 참가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10Km통과는 55분 정도로 계획대로 잘 돼 가는 느낌이다.
30Km지점쯤 가자 해가 뜨고 어둠이 걷히면서 남국의 사탕수수밭, 멋있는 풍경을 보면서 달리는 상쾌감을 만끽한다. 아름답게 기억되었던 형형색색의 바닷가, 색깔 등이 한눈에 들어오며 신선한 기운이 짜릿함을 더해준다. 나는 이 재미로 달리는지도 모른다.
35Km지점쯤일까? 작년에 우승했던 선수(야나기끼 요시로: 올해도 7시간 35분으로 2년 연속우승) 선두로 다가오고 있다. 서로 안면이 있는지라 반갑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40Km통과 시간 3시간 45분. 계획 대로이다. 오르내리막의 연속인 주로는 피로를 일찍 느끼게 하는 특징이 있는데 50Km쯤 되자 약간의 피로가 느껴진다.
출발한지 4시간 50분쯤 흘러 50Km중간 휴게소에 단팥죽, 주먹밥, 레몬, 바나나 등을 되도록 오래 씹어서 많이 먹고, 충분히 쉬기로 하고 휴대품을 찾아, 30Km지점쯤에서 적응이 됐다고 판단했던 새로 산 운동화가 결국 말썽을 일으켜 양쪽 엄지발가락에 잡힌 피멍, 물집을 터뜨리고 예비 신발, 양말로 갈아 신었다.
약 20분쯤 누워서 휴식을 취하니 한결 가뿐해졌다. 다시 달려 나가자. 경사가 훨씬 심한 오르막을 약 70Km지점까지 가야되니 속도를 조절해 나가기로 했다. 약 15Km정도의 계속되는 오르막은 사람을 훨씬 힘들게 한다. 그늘도 별로 없고 느낌으로는 우리나라 여름 한낮 땡볕이다. 기온도 올라가 25℃이상 되는 것 같다. 추운데 있다가 와서 그런지 체감온도는 30℃ 정도로 느껴지며 무지하게 덥다는 것뿐이다. 급수대에서 찬물을 머리위에 뿌려봐도 그 때 뿐이다.
더운 숨을 몰아쉬면서 70Km지점에 도착하여 바닷가를 쳐다보며 스트레칭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약간의 내리막 경사를 주행하는데 무릎에 충격이 오는 듯하여 속도를 늦추어 본다. 이제 급수대마다 마시는 물의 양이 늘어난다. 저 만치 80Km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기쁘다.두 번째 관문이지만 이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작년보다 15분 정도 일찍 9시간 정도에 통과했다.
지난해 기억에도 새로운,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정도로 센 그 강풍(철인경기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넘어지기도 한다고 함)을 곧 맞이할텐데.... 라고 하면서 몸을 추슬러 본다. 약간의 힘과 여유가 있어서 그런지 강풍을 걷지 않고 당당히(?) 달려서 2.5Km구간을 통과하면서 기분 좋게 소리까지 쳐보았다. 목표했던 첫 번째(걷지 않고 달려서)를 극복한 것이다.
나머지 20Km는 2시간 30분 정도로 잡고 주로를 진행하기로 하니 마음은 훨씬 편안하고 여유롭게 다가온다. 주로의 각 급수대마다 참가자 명단이 있어 자원봉사자들이 이름을 부르며 응원을 하는데 저는 외국인인지라 2번(1번은 지난해 우승자)을 부여받아 훨씬 쉽게 알아보게 되어 "안녕하세요" "김치" 등 한국말로 인사말을 꽤나 많이 들어 색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운동복에 쓰여있는 한글(앞면: 서울마라톤, 뒷면: SEOUL MARATHON)때문에도 눈에 잘 띄는가 보다.
전반보다 훨씬 심한 고개를 몇 개 넘어 95Km를 지나자 작년에 통한의 쓰라린 패배를 안겨준 1.5Km의 하늘벽(상당한 오르막 급경사)을 만났다. "그래!! 올해는 내가 너를 이긴다" 라는 다짐을 새롭게 하며 팔을 힘차게 내저어갔다. 그래도 약간은 두려운 마음에 시야를 앞당겨 운동화 코만을 보면서 13-14분 안에 통과해야지 하며, 힘은 별로 없지만 나를 다독이며 고개를 올라간다. 앞서 가던 사람들이 한 명씩, 한 명씩 내 뒤로 쳐진다.
그들도 막바지에 이 급한 언덕길을 달려 올라가는 강고꾸진(韓國人의 일본발음)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간바레, 화이또" 하며 응원을 해준다.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지고 다리는 더욱 후달거렸지만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몸부림은 결국은 나를 13분만에 고개를 넘게 해주었다.
두 번째 목표이자 약속을 지킨 것이다. 작년에 고개마다 걸었던 그 길을 한 번도 걷지 않고 달린 것이다. 이번 참가의 목표와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면서 순간적으로 하늘을 보며 기쁨의 눈물이 핑돌았다.
あと1Km(나머지 1Km)라는 표지판이 눈앞에 선명히 나타난다. 작년에 이 표지판을 보고 무척이나 감동을 먹었는데, 올해는 안도의 반가움으로 다가온다. 힘들고 더웠지만 참 기분 좋은 하루였다. 앞에 아무도 없는 빨간 카페트가 깔린 골인주로에 다다르자 나를 소개하는 안내방송을 또렷이 두 번이나 들을 수 있었다. (일본말이 짧아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이런 뜻으로 들렸다: 유니폼번호 2번 한국인으로 2년 연속 참가한 이윤희氏 ....)
이곳 소학교, 중학생으로 구성된 고적대의 북소리에 맞춰, 몸은 약간은 힘들었지만 두 손을 번쩍들어 결승테이프를 무한한 감동으로 받아들였다. 여중생이 다가와 완주메달을 걸어주며 축하해 준다. 동시에 완주기록증을 찾았다.(잘 준비되고, 갖춰진 시스템이다) 11시간 32분 59초.(75위/359명) 작년보다 약 5분 정도 좋은 기록으로 만족한다.
짐을 찾은 후 기념사진을 찍어 두려고 하는 도중에 여러 명의 기자가 다가와 소개를 하며 인터뷰, 사진촬영을 요청한다. 이미 그들은 내가 유일한 외국인이자 2년 연속 참가한 한국인이라는 것, 작년 기록도 알고 있었다. 내가 직접 영어가 가능한 자원봉사자(전날 친절히 접수를 대행해준 예쁜 미국언니)를 찾아 그녀를 통역으로 하여 여러 가지를 묻는 것에 대하여 대답해 주었다.
문)혼자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느냐? 답)인생은 어차피 혼자고, 마라톤도 결국은 혼자 하는 것으로 어려운 것을 극복하는 것이 즐겁고 기쁘다.
문)왜 오게 되었느냐? 답)경치가 아름답고, 주로를 끼고 있는 바닷가 색깔이 나를 다시 찾게 했다.(다크 블루, 네이비블루, 크리스탈 블루, 에메랄드 그린이 서로 어루어져 정말 환상적임)
문)오늘 주로와 날씨는? 답)한국은 영하의 겨울인데 여기는 기온도 작년보다 높고 습도가 높아 힘들었다.
문)코스컨디션과 자원봉사자, 진행정도는...? 답)100Km중 90여Km가 고개로 이루어져 몹시 힘들고, 자원봉사자는 잘 교육되어 좋은 서비스를 받았다.
문)다른 100Km대회도 참가해 보았는가? 답) 2001년 6월 북해도 사로마 100Km대회에 참가했었다. 미야코지마 코스보다는 덜 어렵다고 생각한다.
문)작년에 이어 올해도 왔는데 내년에도 참가하겠는가? 답)지금은 힘들어서 확답은 곤란하나 반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