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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필라시아(PhilAsia) 원문보기 글쓴이: PhilAsia
현재 한국우취연합광주·전남 지부장을 맡고 있으며, '9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세계우표전시회에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각종 세계우표전시회에서 최고급의 상을 수상하였으며, 특히 '97년 인도 뉴델리 세계우표전시회에서는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테마틱 우취부문 금상을 수상하는 등 우취로 장애를 딛고 일어선 의지의 한국인이며 세계적인 우취가이다.
1987년은 나의 나이 마흔 살, 결혼 1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생(生)에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는 줄도 모른체 뭔가 기념될만한 일을 꿈꾸고 있었던 때였다. 완도읍에서 7년째 외과의원을 운영하고 있던 나는 후배 동료들과 함께 나주시에 종합병원을 설립하기 위해 광주와 완도를 빈번하게 왕복하면서 진료를 계속하며 과로를 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늦게까지 진료하고 피곤하면 음식으로 보충하고 운동할 시간은 거의 없고 보니 체중도 점차 늘어나 있었다.
그 해 5월 18일 1종 운전면허시험에 기분 좋게 합격하고 의료기구 선정약품 선택 등 설립준비를 계속하고 완도에 돌아가서 진료를 하던 20일 뇌졸증(뇌경색)을 맞았다. 광주까지 오는 도중 혈압이 230mmHg까지 올라갔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왼쪽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앉아 있기도 힘들고 마시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밥은커녕 물이 식도로 들어가기가 일쑤여서 재채기가 자주 나왔으며 땀을 많이 흘렸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왼쪽 반쪽에서만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하루에도 너댓번씩 환의를 갈아입어야 하니 간호사들에게 미안했다. 비록 내가 의사라고 하지만 냉정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고 남들 앞에서 '의사가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고....'라는 비난도 두려웠다. 영원히 불구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곧 회복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땀과 씨름하고 있었다.
입원 중 6월에 있었던 캐나다 세계우표전시회(CAPEX'87)에의 출품 마감이 가까워졌다. 이런 상황에 출품이라니... 그러나 주위의 간곡한 권유로 출품하였고 대금은상(大金銀賞. Laege Vermail) 수상의 희소식을 듣게되니 PHILAKOREA'84때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즐거운 마음속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국제심사위원 수습의 요건을 갖추게 되었다.
20여일 입원하고 새 집으로 퇴원하였다. 광주로 이사하려고 사놓은 아파트로 내가 입원해 있는 도중 이사를 했는데 이삿짐이 4톤 트럭으로 3대, 버려야할 것들도 빠짐없이 가져왔고 그 중 2대가 우취와 의학에 관한 것이었다. 새 집에 큰 꿈을 갖고 안착하였지만 집에서는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휠체어에 앉으려다 휠체어가 밀려나 엉덩방아를 찧은 적도 여러 번, 침술도 여러 가지 받아보았다. 마비된 왼쪽 어깨에 한 뼘이나 되는 침을 맞는 것은 아프지 않은데 코 밑 인중에 맞는 것은 왜 그리 아프던지.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침으로 나을 수 있는 병을 발표하였지만 나는 그리 크게 믿지 않았다. 극적으로 호전되거나 단 한 번으로 완치되는 예가 많다는 등 결과가 과장되어 들려왔기 때문이다. 발병 직후 수 시간 내에 침술을 받았다면 크게 원상 회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일이 꽤나 경과된 후에는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어떤 방법이든지, 혈액 용해제 투여, 물리치료 등 적극적인 치료가 초기에 시술되어야 하는데 나 자신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 크게 후회된다.
자연식이요법을 시작하였다. 먹는 것이 즐거웠던 옛날은 가고 아침은 여러 종류의 채소가 혼합된 채소 주스를 마시고 정식은 아침과 점심을 겸하는 소위 brunch로 현미밥을 먹고 이 밥은 천천히 오래오래 씹어야하므로 식사시간이 많이 걸렸다. 채소는 3∼5cm 길이로, 익히지 않고 씹어 먹는데, 턱관절이 아파서 계속할 수 없으므로, 매우 잘게 썰거나 갈아서 먹었다.
힘들고 번거로운 음식을 준비해 주는 아내를 위해서라도 즐겁고 고마운 마음으로「생채식」을 했다. 부산 대구 등 원격지에서 우취모임을 할 때는 짧게 자른 채소를 김밥 비슷하게 김으로 싸서 도시락에 담아가서 남들은 식당에 가서 즐거운 식사를 하는 동안에 나는 여관에 혼자 남아서「김채소」를 먹기도 했다.
그 후 몇 달 후, 단식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체중도 줄이고 숙변도 빼기 위해서였다. 단식의 순서는 밥→된죽→죽→미음→단식. 3∼5∼7일 남자는 홀수일을 하는데 일주일을 못 채우고 말았다. 회복식은 도입과는 반대의 순서: 미음→죽→된죽→밥으로 하는데 먹는 양은 단식 전의 70∼80%. 회복식을 시작할 때 먹었던 사과 한 조각 맛은 얼마나 달던지, 그 맛은 평생 못 잊을 것이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었던 때가 얼마나 그립고 고마웠던지...
두 번째 단식에서는 체중이 55kg까지 줄어들었다. 이제는 뭘 먹고싶다는 것보다는 늘어났던 피부 처리가 문제였다. 눕거나 하면 늘어난 피부가 포개져서 그 통증이 더 심했던 것이다. 운동을 겸했더라면 효과가 매우 컸을 것인데 운동을 못했던 나는 먹기 시작하자 체중이 서서히 늘기 시작했다. 단식 기간 중 부항(附缸 cupping)을 겸하였다. 병변이 심한 부위는 적자색을 띠고 건강한 부위는 짙은 분홍색 정도, 반복 시행하면 점차 분홍색으로 변한다. 컵 안에 알코올을 불붙여 불이 꺼지면서 진공이 되면 컵에 붙게 되는 방법이라 처음에는 매우 뜨거웠다.
발병 후 한달 내에는 마비된 팔과 다리가 눈에 띄게 하루하루 좋아졌다. 조금씩 움직이는 것-나아지는 것이-얼마나 기뻤던지. 3개월까지는 좋아지는 속도가 늦어지더니 6개월이 지나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았다. 겨울이 접어들자 고생이 시작되었다. 질환부위는 추위와 기압에 전보다 훨씬 민감하다. 찬물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다. 특히 마비된 쪽의 왼쪽은 시릴 정도가 아니라 칼로 도려내는 아픔이 계속되었다. 실내온도를 32∼33도씨까지 올려도 왼쪽 뺨의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진통제로도 다스리지 못했던 통증은「참아야하고 마음먹기에 달렸다. 특별한 처방도 없다.」는 선배 교수의 회답에 정신으로 극복하려고 마음먹으니 신기하게도 통증의 정도는 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귀가 울었다.(이명). 밤에는 더욱 심했다. 귀뚜라미 소리, 풀벌레 소리, 매미소리-그러다 보니 불면증에 빠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이명은 원인을 알 수 없고 치료도 어렵다. 처방은 이열치열(以熱治熱)식, 정신을 다른데로 돌려놓기 위해 TV를 보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나는 우표책을 열어보곤 했다. 구한국 우표중 이중원 형으로 소인 때 매료되어 사두었던 우표들, 귀여운 어린이 우표들을 보면 귀가 오는 것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의사가 제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하고 반신불수가 되다니 남 부끄러워서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얼굴이 시려 아프고, 귀가 울 때, 엉덩방아를 찧었을 때는 아파트 5층에서 뛰어내려 죽고만 싶었다. 그러나 내 생애보다는 고생한 아내와 순진한 아들 딸의 어두운 장래를 생각하며, 앞으로는 내 생애보다는 가족의 앞날을 위해 내 삶을 가지려니 생각하니 치료도 힘들지 않게 생각되었다.
다행히 나는 왼쪽이 마비되었고 오른쪽으로 탈 없이 사용하 수 있어 나 혼자서 밥을 먹을 수 있고 옷도 갈아입고 글씨도 쓸 수 있고, 우취 문헌도 읽을 수 있고, 우표도 뒤적거려 찾아낼 수 있고, 입원 기간 중 스승 중 한 분이신 노교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자네는 yellow card를 받은 것이네"라 했을 때, '아 그렇구나'라 생각했다. 만일 red card였다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1988년 2월 대전 한방병원에 입원했다. 한방치료-물리치료와 식이요법을 받아보기 위해서 한 달 정도 있었으며 투약, 침술, 뜸을 받았고 식이요법은 거꾸로 내가 영양사를 가르치게 되었다. 힘들었던 것은 침 맞거나 뜨거운 뜸이 아니라 새벽 5시면 병실로 전화가 온다. "냉온욕 시간입니다." 냉온욕실에 가면 냉탕에 얼음이 얼어있으므로 얼음을 깨고, 한쪽에는 따뜻한 물을 담고, 냉탕에서 1분, 온탕에서 1분씩 교대로 하여 7회를 거듭하고 미지근한 물로 마감한다. 냉온욕은 하루에 3회 계속하였다. 이 때는 보행이 가능해져서 대전 시내 우체국에 가서 제13대 대통령취임 우표s/s를 사기도 하였다.
1990년 12월 31일 미국 시애틀 재활병원으로 갔다. 냉기에 민감한 나는 비행기 안의 찬 공기가 두려웠다. 내의를 입었어도 담요로 좌반신을 두세겹으로 둘러쌌다.(지금도 심사하러 가거나 FIAP 회의에 참석하려고 외국에 나가려면 전쟁 치르러 가는 만큼의 준비가 필요하다. 겹겹이 싸야할 때가 더 많으므로...) 진료 예약하는 데에도 매우 힘들었는데 어렵게 찾아간 의사는 왼쪽 팔꿈치와 그 주위부위를 조심스럽게 눌러보더니 물리치료를 열심히 해보란다. 그런데 이 진찰비는 53달러나 되었다. 국내에서 두뇌CT에 12만원인데 이곳 병원에서는 $1000. 한국의 10배정도 비싼 가격이다.) 물리치료 시설을 둘러보았는데 근력 측정이나 회복력을 수치로 도표로 알기 쉽게 보여주는 것을 제외하면 한국의 기구보다 못했다. 실망스런 마음으로 4시간 동안 차를 타고 Oregon 처남 댁으로 돌아갔다. TV를 보면 좋으나 싫으나 영어 공부(?)를 하게 되는데 Gulf 전쟁이 터지는 순간의 뉴스를 보기도 하고 쉬는 시간에는 몇 군데 우표상을 둘러보았고 우취문헌'This is philately' 한 질(3권)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잡화상에서 세계 최대의 우취주간지인 Linns Weekly도 볼 수 있게 되었다.
1990년, 나와 우표 수집에 변화가 찾아왔다. 완도에서 개원을 해서 많은 환자를 봐왔지만 남은 것이라고는 건물 1채와 빚 뿐. 할 수없이 그동안 모아왔던 이화(李花)보통우표 수집품을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그 동안의 빚도 문제였지만 의학, 적십자 우취자료를 구입하기 위해 외상으로 구입한 자료대금을 계속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빚을 갚고 남은 대금 일부로 대형스티커가 달린 음악감상기기를 구입하였다. 마음의 안정은 중요하니까. 승용차도 샀지만 나는 운전을 못하니까 아내가 1종 보통 운전 면허증을 획득하여 운전을 하게되니 1등 운전수를 고용하는 효과가 있게 되었다. 구한국 전반으로 수집범위를 늘리면서 이 이화 수집품은 5년 후 다시 구입하여 1995년 전국우표전시회에 출품하였다. 이화 수집품으로 이미 세계전에서 대금은상(LV)을 받았지만 구한국 전반으로 범위를 확대한 것은 FIP의 우표해석에 의하면 새로운 작품이므로 국내전시회부터 출품하여 자격을 받아야한다는 것이다. 결국 전국우표전시회에 출품하여 금상을 수상하였고, 다음해 ISTANBUL'96(터키 세계우표전)에서 금상-시상식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내 생에서 첫 금상이라니-나는 들뜬 기분으로 메달을 받았다. 매우 기뻣으며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1991년 4월 싱가폴에서 열린 심사위원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강사의 말을 잘 못 들어서 속으로 답답하고 영어회화를 더 열심히 해야한다는 긴박감을 느꼈다. 동남아 영어는 영국식 영어가 동남아화한 것으로 airmail은 에멜, world는 월...(이 때 폭포를 수집하는 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신혼여행을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는 폭포로 남아공 세계전(ILSAPEX'98"에서 금상을 받았고 BANGKOK'2000 때에는 테마틱부문 심사위원 수습을 하게되어 팀장이었던 나와 보람된 한 때를 보냈다.)
1991년 11월 일본에서 세계우표전시회가 있었다. 부산의 이종구씨는 나에게 인생 최대의 선물-세계우표심사위원이 되는 것-을 하겠다고 결심하시고 심사수습을 적극 권하였고 나는 약간의 두려움에 사양하다가 수습에 참가했다. 수습 심사위원에게는 항공료·숙박비가 지불되지 않고 자비로 참가해야 한다. FIP 총회에도 한국 대표로 참석했지만 체신부나 한국우취연합에서 아무런 지원이 없었고 비싼 동경 물가는 나를 더욱 힘들게 하였다. PHILAKOREA'94를 앞두고 심사위원의 부족, 그리고 강윤홍·이종구·Borje Wallberg 그리고 주위의 도움으로 몇 달 후 좋은 결과를 통보받았다.(대개는 전시기간 중에 합격의 여부가 밝혀진다.)
전시회 당시는 내가 질환을 앓은 지 4년이 좀 넘었기에 활동이 부자연스러웠다. 또 이때는 FIP 공인 언어 중 영어는 물론 불어나 독어도 좀 알아야 했었다. 이에 대비하여 영어 학원에 다녔다. 등록을 하기 위하여 중학생 아들과 함께 새벽 4시 눈밭에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다. 학생 중 제일 나이가 많았고 머리는 희끗희끗한 사람이 열심이니 만나는 학생들마다 뭐 하러 영어를 배우느냐고 물었다. 배운 것이 머리 속에 오래 남아있지 않으므로 두배 세배 노력을 해야했다. 그러다가 심사수습-테마틱 우취에 임했지만 긴장하고, 작품을 빨리 읽고 이해하고 평가해야하지, 말은 잘 안 나오지, 팀원들과의 점수 차이가 크면(너무 높거나 또는 낮거나) 그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표정 관리에 신경 쓸 수도 없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땀에 젖은 셔츠는 쥐어짜면 물이 주르륵 흘렸다. 서양은 우리와 다르다. 상대방의 의견이 틀리면 자기 의견을 주저 없이 반론해야만 했다.. 동양의 예의상 상대방 말이 완전히 끝나기를 기리다가 나의 의견을 말하려면 이미 팀은 다른 작품 앞에 가 있다. 그러다 보니 침묵은 금이 아니라 실패의 녹슨 쉿덩어리에 불과했다. 강윤홍씨와 이종구씨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또 아내와 이종구씨는 멀리서 이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사위원은 주위 사람들-관객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금지되고,(필자는 일본작품에 이상하게 표기된 일본 글자를 주위에 물어보았다가 팀장에게 크게 꾸중을 들었다.) 심지어 어떤 팀 리더는 심사 중에는 다른 팀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게 하므로 겨우 눈인사 정도로 대신한다. 이런 사정을 몰랐던 어느 우취인은 한국 심사위원이 목에 힘주고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고 서운해 하였다.
1992년 말레이자에서 공식 국제 심사위원으로서 처음으로 심사를 했는데 테마틱 우취와 청소년 우취 작품이 대상이었고 하루 10시간 이상을 영어로 말하고, 듣고 읽고 평가하는 매일 반복된 작업, 그리고 회의-평가. 영어가 서툰 나는 영국식 동남아 영어에는 더욱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는 석유 생산국으로 석유 값이 싸서 냉방이 잘 되어 있다. 문 밖으로 나오면 섭씨 35도의 폭염, 문 열고 들어가면 섭씨 20도 이하의 냉방.
1993년에는 무려 네 차례 심사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 가본 폴랜드 포츠난. 폴랜드에서 유일하게 한국식당이 하나 있어서 저녁은 해결했으나 아침은 처음 며칠은 굶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도시는 2차대전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지만 거리와 공원의 푸른 숲은 오래동안 기억에 남아 있다. 개막식에는 바웬사 대통령이 참석하여 전시회를 빛내 주었다.
같은 달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에서 아시아 FIAP전이 있었는데, 한 밤에도 섭씨 28∼30도의 열기와 건축된 지 100년 가까이 되는 궁전호텔의 천장과 벽에 도마뱀이 기어다니는 것보다는 호주와 뉴질랜드 영어에 골탕을 먹었다. 끝날 때 발리에 갔으나 찬물에 민감한 나는 그 좋은 물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배탈이 나 오한에 떨고 곽란에 탈수되고 한국 작품수집위원(커미셔너)인 이종구씨는 작품 관리, 더위, 음식에 바짝 말라버려 자카르타 병원의 응급실에 가서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 수액 주사를 맞으면서(살았구나)하는 안도감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10월에는 BANGKOK'93에서 심사를 했다. 우리나라 보통우표연구회 명예회원인 일본의 곤도씨가 Champion급에서 그랑프리를 받았다. 비록 일본사람의 작품이지만 한국 자료로써 최정상의 상을 수상하였다니 어찌 기쁘지 않았겠는가? 이 때 나는 심사위원과 커미셔너를 겸했었는데, 심사위원과 커미셔너들에게 우리가 개최하는 PHILAKOREA'94세계우표전시회를 홍보하고 참여를 권장하기 위해, 한국우표도감을 선물용으로 준비했는데 세관에서 통관료를 내란다. 책은 무료 통과가 안 된다나? 선물용이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전시회가 끝나도 작품을 건네주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약 600달러를 지불했으며, 작품을 찾아서 발송하는데 또 20여만원이 들었다. 개막전날에는 별도로 우송한 작품 하나가 도착하지 않아 또 마음 졸이며 무더운 밤을 편안하게 보내지 못하기도 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나의 취약점은 혈액 순환과 중앙 콘트롤(뇌신경)이 잘 안되는 좌반신. 왼쪽 눈에 이상이 왔다. 물체가 곡선으로 보이고 물건-특히 우표같이 글씨가 작은 것은 오래 들여다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정밀검사마저도 힘들었다. 망막촬영검사 중, 나중에는 눈이 떠지지 않고 눈물만 계속 흘렀다. 이제는 '눈 뜬 애구눈 Jack'이 되려나. 우표와도, 아름다운 난(蘭), 분재도 못 볼 것 같아 팔다리 마비보다 더 큰 불안감이 엄습했다. 추위에도 내성이 좀 커지고 멀리는 못 가지만 보행도 많이 나아졌다.
강윤홍씨에 이어 1996년부터는 FIAP의 집행위원(이사, 각 국에서 1명씩 선출)으로 선임되었다. 따라서 1년에 두 번씩 회의에 참석하고, 심사할 기회를 자주 갖게 되어 마음에 여유도 생기고, 남의 작품도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되어 내 작품도 깊이가 더해졌다.
1997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세계우표전시회(PACIFIC'97)에 쟁쟁한 심사위원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고, 또 별도로 현대우취작품을 심사하는 위원에 선출되는 기쁨도 있었다. ATA 세미나에서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동양-한국의 테마틱 우취 현황을 소개하는 영광도 있었다. 전시회가 끝나고 미국에 계시는 장인 내외분과 함께 꿈에 그리던 그랜드캐년 구경을 갔었으며, 이 것이야말로 우표수집으로 얻은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어느 우표상의 광고「Have a tong, travel the world」(우표집게 하나면 세계여행)를 실감했다.
1997년 12월 IMF로 온 나라가 고생하고 대통령선거로 들떠 있을 때 인디아'97세계우표전시회 커미셔너로 참가하였다. 인도 뉴델리의 눅눅하고 곰팡이 냄새로 숨쉬기도 힘들고, 열대지역이자만 이상기후로 밤이면 추위에 떠느라고 잠 못 이룰 때는 모든 것이 후회되었지만 출품한 작품마다 좋은 성과를 거두고 특히 내 의학 작품은 금상을 받음으로써 FIAP 국가들 중 호주 뉴질랜드를 제외하고「아시아 국가 중 테마틱 우취에서는 최초로 금상을 수상하였다」는 주위의 축하를 받을 때는 그 고생이 한꺼번에 기쁨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2년전 중국에서 열렸던 CHINA'99에서는 한국 작품들이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고, Champion급 그랑프리를 이종구씨가 수상함으로써 당당히『한국 사람이 한국 작품으로 세계 최정상에 오른 영광』을 얻었으니 이는 아시아 우취계에서 한국우취 기반과 우호관계를 다져왔던 강윤홍씨와 여러 우취인들의 노고 덕분이고, 한국의 국력이 그만큼 신장한 결과라 자랑하고싶다.
새로운 구두를 신었던 탓에 발 여기저기가 헐었기에 귀국해서는 꼼짝하지 않고 여러 날을 보내야 했고, 고생한 탓에 체중이 많이 빠졌다. 좋은 diet가 된 셈이다.
새로운 컴퓨터와 전자기기의 발달로 우취 입지가 좋아지자 우취에서도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광주우취회 30주년을 기념하여「한 틀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2000년에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 20주년 기념으로 Open Class 우표전시회를 개최하여 새 바람을 일으키려 노력하였다. 이때 나는「쌀」작품을 만들었고, 올해 IOC 서울 전시회에는「야구」작품을 만들었다. 모으는 기쁨과 작품을 만드는 재미도 있고, 전시하는 보람도 있었다.
구한국(대조선과 대한제국) 작품으로 이스라엘(ISRAEL'98)에서 대금(大金)상을 받았다. 전통우취 부문에서의 최고상. 그리고 아시아(FIAP 전시회)인 싱가폴 국제전(SINGPEX'98)에서는 국제부문 Grand Prix를 수상하였다. 나는 나의 수상을 자랑하기보다는 우취인 누구든지 작품을 만들 수 있고 큰 상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특히 나와 같은 장애인들도 얼마든지 상을 받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인생에 자신감을 갖게 하고 싶다.
그리고 오늘의 이러한 나를 있게 하여주신 여러분과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장세영(張世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