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시 단장면 미촌리의 단장천(남천강 지류) 산벼랑에 칠탄정(七灘亭)이 있다. 칠탄정 일대는 조선시대 오한(漢) 손기양(孫起陽:1559~1617)이 벼슬을 사임하고 은둔하여 소요(逍遙)하던 유허지이다.
칠탄정은 오한의 증손자인 석관(碩寬)·석범(碩範) 종형제가 1725년 중건하여 진암서당(眞巖書堂)이라 하였다가 1748년에 5세손 사익(思翼)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건하였고, 1782년에 종제인 사경(思絅)과 함께 다시 증축한 후 오한이 지은 철조(輟釣)시 구절 중 '칠리탄두일조간(七里灘頭一釣竿)'이란 말에서 취하여 칠탄정이란 이름으로 바꾸게 된 정자이다.
1844년에는 사림(士林)이 칠탄정 경내에 청절사(淸節祠)를 세워 오한을 추모하고 칠탄서원을 세웠으나 대원군시절 훼철된 후 다시 칠탄정으로 남아 있다. 칠탄정은 도지정문화재자료 제72호로 등록된 후 부속건물인 운강루(雲江樓)와 벽립재(壁立齋) 등이 정부보조금으로 복원되어 있다.
#정유재란 때 공산전투에서 분투한 오한 손기양
오한 손기양은 본관이 밀성(密城)이다. 자(字)는 경징(景徵)이며 밀양 용성리에서 태어났다. 말을 배울 시절에 이미 육갑(六甲)을 외우니 부친인 성균생원 손겸제(孫兼濟)는 아이의 조숙함을 꺼려 열 살이 되어서야 학교에 입학시켰다고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지은 행장(行狀)에 전한다.
26세 무렵 향시에 연이어 장원을 한 뒤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30세에 문과 급제를 하였다. 31세에 성주학교수(星州學敎授)로 부임하고 이듬해에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찾아 도학(道學)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되었다. 34세 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양친을 호거산으로 피란시키고 호거산 아래 석동촌에서 이경승(李慶承) 등과 함께 향병을 모집, 의거(義擧)를 하였다.
당시 부사 박진(朴晉)과 군사를 합쳐 작원관(鵲院關)을 막은 기록이 밀주지(密州誌)에 남아 있고, 망우당 곽재우 장군 진영에서 분투한 기록이 화왕창의록에 남아 있다. 또한 팔공산 회맹에 참여한 기록이 이눌(李訥) 의사의 회맹록에 남아 전한다. 그뿐 아니라 정유재란 때는 공산전투에서 분투한 기록을 손수 정리하여 공산지(公山誌)를 남겼다.
오한은 임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때로는 의병으로, 때로는 지방관으로서 오직 구국에 성혈을 바쳤다. 전란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오니 옥토가 황무지로 변하였고, 주인 잃은 전사자들의 토지는 비어 있었다.
어떤 자가 이 기회에 개간하여 훗날을 꾀하자고 권하자, 오한은 그를 노려보며 말하기를 "재난을 잠시 겪는 순간에 남의 죽음을 이용하여 이익을 도모하자는 게냐(劫火俄經, 其將利人之死乎)"라고 꾸짖었다.
원근의 유민들을 보호해주고 그들이 농장을 조성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 행적은 훗날까지 미담으로 전해졌다.
#벼슬살이에 연연하지 않고 더 큰 세계를 추구한 오한
성주에서는 한강에게 도학을 얻어들었고, 경주제독(慶州提督) 시절에는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선생에게서 선비가 추구해야 될 정신이 뭔지를 확인하였다.
지방관으로서 임무를 다하다가 1603년 부모의 상례 6년을 마치고 다산(茶山) 아래에 터를 잡아 초당을 짓고 도학을 밝혔다. 1610년에는 창원부사로 부임했으나, 광해혼조(光海昏朝)의 실정과 정인홍(鄭仁弘)의 대북정권에 큰 실망을 하고는 임자년(1612)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나라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훗날 사헌부에서 사간원(司諫院)으로 임명하였으나 철조(輟釣)시를 지어 조롱할 뿐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자손들에게도 임자년 이후 나라에서 내린 관직은 자신의 사후에 기록하는 일이 없도록 유언을 내렸다.
#중국 엄자릉과 칠탄정
철조(輟釣)란 '철관조어(輟官釣魚:벼슬을 그만두고 고기 낚는다)'의 준말로, 오한의 문집에 철조록(輟釣錄)이 남아 있다. 철조시 4수 중 첫 수는 이러하다.
'칠리탄 어귀에서 한 낚싯대 드리우니(七里灘頭一釣竿)/ 푸른 강물 맑고 얕아 부딪쳐 흩어지며 흐르는 물결 차기도 하구나(碧江淸淺浪花寒)/ 한나라 그 당시 양털 옷 걸치고 은둔한 엄자릉에게(當年却笑羊子)/ 끝까지 인간세상의 간의(諫議)벼슬 내리려고 했던 사실이 도리어 우습기만 하여라(終帶人間諫議官)'
오한은 동한(東漢)시대에 광무제(光武帝)가 그의 벗 엄자릉(嚴子陵)을 불러 간의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거부한 사실을 들어 끝까지 세상에 나갈 뜻이 없음을 밝혔다.
엄자릉은 엄광(嚴光)을 말한다. 광무제 유수(劉秀)와는 함께 공부한 벗이었다. 유수가 황제에 즉위하자 엄광은 성명을 바꾸고 부춘산(富春山) 동강(桐江)에 은둔하여 농사짓고 낚시하며 일생을 보내었다. 광무제는 그를 찾으려고 화상을 그려 전국을 수색한 끝에 동강에서 그를 발견, 낙양으로 모시고 와서 간의대부(諫議大夫) 벼슬을 내렸으나 엄광은 황제를 옛 벗으로 대할 뿐 작록에 마음을 두지 않고 다시 동강으로 돌아가 엄산(嚴山) 아래 칠리탄(七里灘)을 거닐고 낚시하면서 생애를 물외(物外)에 두었던 인물이다. 엄광이 80세의 장수를 누리고 죽으니 황제도 그를 애석히 여겨 100만전의 돈과 1천섬의 곡식을 하사하였다. 지금도 부춘산 동강에는 그가 낚시하던 조어대(釣魚臺)가 남아 있다.
오한은 어지러운 시대를 만나자 엄광처럼 살고자 염원하며 그를 사모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호가 송간(松澗)이던 것을 오한(漢)으로 바꿔 버린다. 즉 '귀먹은 사람'이란 뜻으로, 세상사를 듣고 싶지 않음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사는 다산 남쪽에는 진암(眞巖)이 있고 그 아래로 7리의 맑은 단장천이 흐르며, 북쪽에는 또한 엄산(嚴山)이 있는 점을 착안하여 그곳을 칠리탄으로 명명하고 철조시를 읊조리며 그곳에서 59세의 생애를 마쳤다.
오한이 만일 한나라 때의 인물이었다면 필시 엄광과 같이 고사열전(高士列傳)에 들고도 남을 인물임에 틀림없다. 혼탁한 정계에서 혼탁한 삶을 살고간 자들과 어찌 함께 나열하여 인물을 논하겠는가.
#오한의 저서들
오한은 조지산과 정한강의 문하에 출입하였고, 우복(愚伏) 정경세와 월간(月澗) 이전, 창석(蒼石) 이준, 부용(芙蓉) 성안의, 검간(黔澗) 조정, 낙재(樂齋) 서사원, 모당(慕堂) 손처눌 등과 종유(從遊)하면서 학문을 토론하고 우국지정(憂國之情)을 나누었다.
오한은 칠리탄 조어(釣魚) 시절 주자서(朱子書)에 공력을 기울여 주자서절요와 주자대전 등의 판본이 상이한 곳을 관본(館本)과 성산본(星山本), 정주본(定州本)을 대조, '주서고증(朱書攷證)'을 내기도 하였다. 그의 문집은 전란에 흩어지고 불타 버렸는데 다행히 배민록(排悶錄) 2권과 철조록 1권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