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감상문을 남기게 됐네요. 월차를 써서 쉬는 김에 남기자 싶어서 말이죠.
이번 작품은 웬일로 로맨스입니다. 처음 듣는 작가의 작품인데, 소재도 제목도 마음에 들어서 다운받게 됐답니다.
도서명: 손끝에 너를
저자: 강부연
* 이 소설은 넓은마을 도서관 1번 소설에 2번 로맨스 코너에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 소개글 서평
처음 귀를 사로잡은 건 매우 낯익은 제목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손끝’이라는 단어가 그야말로 확 꽂혔다. 어디의 간행물 이름과 비슷하지 않은가? 아는 사람은 다 알고 몇몇은 구독도 하고 있을지 모르는, 본인이 매달 교정을 보고 출판사에서는 guk이라는 파일명을 기본으로 126, 127처럼 뒤에 붙는 숫자만 바뀌는 96P짜리 간행물.
그런 익숙한 제목 탓에 소개글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캐릭터가 남처럼 여겨지지 않아서 다운받게 되었다. ‘손끝에 너를’, 답지 않게 로맨스 소설을 든 스스로가 민망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묘한 끌림에 무작정 책을 덮기는 싫었다.
세상을 볼 수 없는 여자, 세상에 보이고 싶지 않은 남자, 그 둘의 우연한 만남.
로맨스답게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고 이야기도 그 둘의 사랑에 대한 것이다. 역시나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로맨스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여자 주인공이 시각장애인이라는 부분에서 조금은 그 전개가 남다르다. 사실 로맨스 중에 여자 주인공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설정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이다. 뭐, 원래도 로맨스를 잘 들지 않기도 하지만 말이다. 아마 찾아보면 더 있을 것도 같고, 본인이 잘 몰라서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어쨌든 그 덕분에 더욱 관심이 갔는지도 모른다.
7살, 원인 모를 고열로 평생의 빛을 빼앗긴 그녀, 정시진. 그러나 안내견 버디를 데리고 늘 힘차게 걷는 그녀. 친구와 함께 치맥도 하고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시진. 그녀는 언제나 세상 앞에 당당하다.
7살, 한순간의 사고로 부모님을 모두 잃게 된 그, 선우준. 과거 아역스타로 주목받던 시기의 빛은 이제 그에게 없다. 대신 스스로를 어둠에 숨기고 세상과 등을 진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고단함이 있을 뿐. 빛을 놓아버린 준에게 세상은 무채색이다.
그런 둘이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첫 번째, 카드사 텔레마케터와 불특정 고객으로. 피로에 찌든 남자의 짜증스러운 응대와 예기치 못하게 봉변을 당한 여자의 짜증 가득한 투덜거림만 남았다.
두 번째, 날 좋고 볕이 좋은 정오의 공원, 도시락을 먹던 여자와 우연히 산책을 나온 남자. 그는 여자의 목소리에 호기심을 가졌고, 그녀의 장애에 어쩔 줄 몰랐다. 그녀는낯선 남자에게 가시를 세웠고, 그러다 그의 내면의 상처를 알아챘다.
그리고 세 번째, 준은 전날 시진과의 약속을 의도치 않게 지키지 못했고, 그를 사과하려 그녀를 찾아간다. 그리고 흰지팡이를 잡고 점자 유도블록을 노란 카페트 위를 걷듯 당당하게 걷는 그녀를 보았다. 한편 안내견 버디 대신 케인 보행을 하던 시진은 갑작스러운 봉변을 당한다. 그리고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고 외면하는 상황 속에서 무뚝뚝하고 어색하지만 손을 내미는 온기를 만났다.
아무도 모르는 첫 만남, 우연히 마주한 두 번째 만남, 그리고 만날 것을 기대한 세 번째, 의도적인 만남. 우연이 세 번 겹치면 그건 곧 필연이라는데.
점자 유도블록 사이에서 피어난 노란 민들레처럼, 보이지 않는 세상 앞에 당당한 여자, 정시진과 빛을 잃고 냉소적인 성격이 되었어도 곤경에 처한 이에게 손을 내밀 줄 아는 남자, 선우준. 그 둘의 인연은 어떤 색을 띠고 어떤 꽃으로 피어나게 될까?
보다, 보이다, 비치다. 우리는 어떻게, 어떤 눈으로 세상을 담아내고 있을까?
우리나라 말에는 유독 ‘눈’과 관련된 표현이 많다고 들은 적이 있다. 보다, 바라보다, 응시하다, 살피다, 주시하다, 비치다, 보이다, 이목을 끌다, 관찰하다. 어디 사는 어떤 전문가가 그랬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그 표현의 기저에는 민족의 문화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그만큼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다는 의미고, 상대에 대한 판단 기준에 보여지는 모습을 주요한 근거로 삼는다는 뜻이라고. 그의 말에 전부 동의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맞는 소리 같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게 시각이라지 않던가. 그만큼 보는 것, 보여지는 것에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반증이리라.
그러나 본다는 행위에 오직 눈만을 쓰는 것은 아니다. 시각은 단지 사물을 비추는 감각일 뿐, 그것을 담아내 판단하는 것은 머리가 한다. 애초에 눈에 비친 사물은 옳바르게 비치는 게 아니라 그 형상이 거꾸로 맺힌다고 한다. 단지 머리가 그것을 똑바로 구성해서 우리가 책상을 책상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판단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건 다름 아닌 마음이다.
즉, 보는 시력을 잃었다고 해서 볼 수 없는 게 아니고, 제대로 본다고 해서 판단 또한 정확하다고 할 수 없는 거다. 특히 요즘은 명확하게 보아놓고도 담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왕왕 있다. 어쩌면 ‘본다’는 행위는 눈과 머리, 그리고 가슴이 동시에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 ‘손끝에 너를’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여러 모로 보여진다는 것에 민감한 캐릭터들이다. 시진은 시각장애인이기에 스스로를 볼 수 없다. 아니, 세상 자체를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자신이 어떻게 비춰질까에 대해 무심하게 지나친다는 뜻은 아니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시선을 느낄 수 있다는 시진의 말은 비유나 관용구만은 아닌 것이다. 이건 정말 시각장애인 독자 입장에서 맞는 표현이다.
한편 준은 세상 앞에 보이기 싫어 숨어버린 인물이다.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꺼리고 누가 말을 붙일라 치면 경계부터 세우고 본다. 한마디로 사교성 전무. 애초에 그가 시진에게 거부감을 품지 않은 이유도 그녀가 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오직 시진만이 준이 품고 있는 내면의 상처를 보았다는 점에서 꽤나 아이러니하다.
시진과 준의 만남은 마치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 무언가를 본다는 건 반드시 눈으로 행해지는 것만은 아니라고. 한순간, 손끝에 닿는 가벼운 접촉, 그것만으로도 사람과 사람이 교감을 나누는 데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데는 충분하다고.
준은 시진과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그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여의게 되면서 눈을 돌렸던 연기의 꿈을 손에 쥐기로 결심한다. 시진의 당당함을 옆에서 지켜보며 자극을 받은 덕분이다. 어둠 안에서도 살면 다 살게 되어 있다던, 죽는 것도 아닌데 넘어지는 게 뭐 어떠냐는 시진의 당찬 한마디 한마디가 그를 빛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이쯤 되니 정시진이라는 여자가 명랑 소녀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녀도 한때는 방을 나서는 것도 두려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중도 시각장애인이 된 건데 오죽했을까. 그러나 애정과 지지로 바라봐주는 부모님과 친구 정은, 안내견 버디 덕분에 밝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럼에도 간혹 주변에서 던지는 편견과 불이해의 눈길은 상처가 되고, 자신으로 인해 주위 사람까지 곤란을 겪을까 하는 우려는 그녀의 어깨를 좁아지게 만든다. 그 위축감은 우정을 우정으로, 호의를 호의로, 그리고 가장 예쁜 감정인 사랑을 그저 사랑으로만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답답하게 보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본인은 시각장애인으로서, 그리고 여자인 시진의 입장이 이해가 간다. 아직 남녀간 사랑이라는 것을 겪어본 적은 없다. 그러나 만약 본인이 시진과 똑같은 상황이었다면 분명 한번은 망설였을 거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한번쯤 틀림없이 고민했을 거다. 내 장애로 인해 상대가 맞닥들여야 하고, 감수해야 하는 그 무수한 불편함을. 그 곤란이 겪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는, 자기 때문에 난처한 상황에 같이 처하게 되었다는 그 부담감을. 눈이 불편하고, 귀가 잘 들리지 않고, 손이나 다리가 부자유하다는 장애. 사실 장애란 그런 물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런 것보다 더 큰 장벽은, 심리적인 부채감이다. 그리고 그 ‘빚’을 느끼게 되는 순간 장애는 그때부터 진정한 핸디캡이 된다.
그런 이유로 시진은 준과의 관계에서 애써 선을 그으려 한다. 그녀의 소울메이트인 진석이 시진의 절친인 정은에게 그러했듯이. 장애로 인해 지레 겁먹고 도망치려 했다. 어떤가, 이래도 정시진이라는 사람이 마냥 긍정 소녀로 보이는가. 어쩌면 그녀는 장애 때문에 더 강한 성격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본인도 어느 정도 부모님께 듣던 말이니까. 세상의 시선은 그리 따뜻하지 않다는 식의 당부. 그렇다, 세상은 약육강식이다.
그렇다고 준에게 하자가 없는 건 또 아니다. 그는 가난하다. 부잣집 제벌도 아니요, 백마 대신 하얀 리무진을 끌고 다니는 연예계 왕자님도 아니다. 과거에는 잘 나가던 아역배우였다지만, 지금은 그저 이름없는 연극 배우일 뿐이다.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고, 저축해 둔 돈도 없고, 그냥 건강한 몸뚱이가 가진 게 전부.
그러나 장애와 가난은 그저 그뿐이었다. 시진과 준에게는 각자가 가진 핸디캡은 핸디캡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물론 이 대목에서 현실적이지 않다는 둥, 너무 이상적이라는 둥의 반박이 나올 수도 있겠다. 연애는 연애고, 사랑은 사랑이고, 현실은 현실이니까. 아니, 막말로 사랑이 밥먹여 주던가?
그래도 예쁜 두 사람을 고까운 시선으로 볼 수는 없었다. 어떻게 봐도 예쁜 사랑이었으니까. 비록 첫 시작은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짜증으로 가득했지만, 찬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강한 꽃을 닮은 시진과 어떤 꽃바람이 불어도 웃지 않을 것 같은 준이 서로 섞이고 어우러지는 과정이 참 애틋하고 설레었다. 그래서 중반부까지는 두근거리며 읽었던 것 같다. 현실감이 넘쳐서 몰입이 굉장했으니까.
식당, 놀이공원, 은행 등에서 시각장애인이 겪을 수 있는, 혹은 겪고 있는 현실, 마주할 수 있는 난처함, 그것을 시진과 준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장면이 아주 사실적이었다. 그런데 초점이 시진과 준이 아닌 다른 인물에게 옮겨졌을 때는 다소 읽기가 힘들었다. 둘만의 세상에서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 대한 성장통이었을까. 그것을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뿐 아니라 독자인 본인도 같이 앓게 된 걸까. 갈등을 만들어 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건 이해한다. 그래도 두 사람의 감정선에 더 비중을 실었다면 어땠을까.
아무래도 준과 시진의 감정이 예쁜 탓에 벌어진 부작용인 듯도 하다. 그렇다고 진석과 정은의 관계, 탑 여배우 류성희의 마음, 막판에 나쁜놈으로 끼어들어 한 활약을 선보여주신 악덕 기자 A와 개념을 밥말아먹은 놈 B., 그런 갈등 요소들이 아주 쓸데없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시선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둘의 세상, 둘만이 있을 때는 갈등도 없지만,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시진과 준이 받게 되는 어떤 인식의 종류, 그것을 다소 드라마틱하게 드러낸 게 아닐까 싶다.
“세상의 시선이라는 게 원래 그랬다. 속이 빈 액자를 들고서 그 틀 안의 것만을 받아들이고 외적인 부분은 부정하고 싶어 했다.”
세상 이목이라는 게 담고 있는 속성이 위의 문장에 아주 잘 드러나 있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받아적고야 말았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그 말이 실현된 셈이다. 준과 시진의 사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만난 것.
좋은 것을 그저 좋게 보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비록 눈은 떴지만 어쩌면 가장 최악의 1급을 넘은 0급 시각장애인이 된 건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시진이 탄식하듯 떠올린 문장이 더 공감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맨눈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사람은 없어져 버린 건지도 몰랐다. 저마다 끼고 있는 색안경이 그들이 보고 있는 것들을 온통 편견의 색으로 물들여 놓았는지도. 기왕이면 사물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돋보기 안경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뒤틀리고 왜곡된 가치를 보게 하는 렌즈가 아니라,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그런 안경이었더라면.”
시각장애인은 시력이 없다. 물론 급수에 따라 다르지만, 어느 정도 시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보아야 할 것을 본다면, 제대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을 과연 시각장애라고 불러야 할까. 본다는 의미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과연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돌아보게 되는 것 같고. 로맨스 소설인데, 사랑보다 다른 주제로 빠지게 만드는 이 신묘한 문장들.
그러면서도 준과 시진을 응원하게 되니, 스스로의 감성도 아직 멸종하진 않은 모양이다. 사실 작가가 요즘 여자들의 취향을 살짝 적중시킨 감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시진의 밝음과 용기, 오직 시진만을 바라보는 준의 철벽, 절로 미소짓게 하는 무한매력의 안내견 버디, 시진과 준의 사랑을 응원하는 주변인들, 시진과 준이 나누는 따뜻하고도 마음에 와닿는 대사들.
솔직히 여름보다는 봄에 들기를 추천하고 싶은 로맨스 소설이다. 민들레가 점자 유도블록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 때, 초록빛 새순이 나뭇가지 틈을 비집고 나올 때, 그런 계절에 이 작품을 들기를.
물론 지금 당장 펼쳐도 별 문제 없다. 한편 단순히 두 사람의 사랑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시각장애인인 시진의 삶과 시선을 통해서 장애인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표현했다는 부분도 제법 마음에 든다. 일곱 살에 시력을 잃은 시진과 일곱 살에 부모를 잃은 준. 둘 다 일곱 살에 삶의 전환기를 맞았는데 둘이 서로를 만나고 사랑을 하게 되면서 행복한 터닝포인트를 다시 한 번 겪게 되다니. 역시 강부연 작가가 노리고 설정을 짠 게 틀림없다. 운명적인 사랑 컨셉으로. 뭐, 본인에게는 그런 설정조차 예쁘게 다가오니 그냥 넘어갔다. 로맨스 치고 신데렐라 증후군도 아니고, 백마탄 왕자, 유리성에 사는 공주, 뭐 이런 비현실적 요소도 없어서 읽기 깔끔했다. 사랑을 현실로 끌어와 소박하게, 그러면서도 이상적으로 그린 부분이 공감이 갔던 작품이었다.
PS. 단지 한가지 의문이 있는데. 선우준, 남자 캐릭터 말이다. 어릴 때 아역배우로 활동했다는 건 알겠는데, 10여 년이나 지나고도 알아보는 사람이 나오다니. 그게 가능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