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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11 - 2번째 무사들의 정부인 아시카가(무로마치) 막부의 흥망!
(1) 아시카가 다카우지 足利尊氏
1) 아시카가 다카우지 (足利尊氏) : 일본 가마쿠라 시대 말기 무장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첫 쇼군인데, 첫 이름
'高氏' 는 가마쿠라 막부의 집권(싯켄) 인 호조 다카토키 (北條高時) 로 부터 편휘를 받아 지은 이름
이었고, 바꾼 이름인 '尊氏' 는 협력 관계였던 고다이고 덴노의 휘인 '다카하루' (尊治) 에서 편휘를 받았습니다.
시조는 세이와 덴노 (천황) 의 손자이고, 사다즈미노미코의 아들인 진수부장군 미나모토노 츠네모토
(源經基) 로 그의 14세손이고.... 당시 무장인 닛타 요시사다의 7종제 (七從弟, 16촌 아우) 입니다.
가계는 미나모토노 츠네모토 (源經基) → 미쓰나카 (滿仲) → 요리노부 (賴信) → 요리요시 (賴義) → 요시이에
(義家) → 요시쿠니(義國) → 요시야스(義康) → 아시카가(足利) 요시카네(義兼)[2] → 요시우지(義氏) →
야스우지(泰氏) → 요리우지(賴氏) → 이에토키(家時) → 사다우지(貞氏) → 다카우지(尊氏) 로 이어졌습니다.
다카우지 (足利尊氏) 의 집안은 카와치 겐지 계열의 명문 무가였으니 하치만타로 (八幡太郞)
로 불린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넷째 아들 요시쿠니(義國) 는 시모츠케국 아시카가
(足利) 에 자리를 잡았고, 그의 차남 요시야스(義康) 가 성씨를 아시카가 (足利) 로 바꾸었습니다.
2) 다카우지의 세평 : 미나모토 요리토모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막부 창건자들은 냉정하고 비정한 정치가형
인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으니 요리토모는 친동생이자 겐페이 합전의 영웅인 요시쓰네를 토벌한 일로,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로 손녀 사위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압박해 오사카 전투에서 죽였습니다.
그럼에도 저 두사람은 당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가마쿠라 막부와 도쿠가와 막부를 수립해 질서를 회복한
정치가였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만 평가되지는 않으며 특히 이에야스는 센고쿳시대
130년의 전란을 시대를 끝내고..... 통치의 안정성과 인내와 실용주의적 정치술은 긍정적으로 평가됩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낮은 평가를 받고 있는 막부 창건자이니
에도 시대 이후 유학의 유입, 그리고 메이지유신 이후 덴노 (천황) 중심주의
사관이 확립되면서, 고다이고왕(천황) 과 내란을 벌인 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덴노 (천황) 에 대한 도전과 배반의 이미지는 유교적 존왕 (尊王) 사상 아래에서는 그가 위계질서를 무너뜨린
역적으로 간주되었고, 메이지시대 이후 제국주의 체제에서는 덴노를 서양식 절대군주에 준하는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신격화했기 때문에, 그에 맞선 다카우지는 역사적 반역자로 낙인찍힐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시라카와왕(천황) 과 60년간 남북조시대 내란을 치룬 다카우지와 요시아키라는 물론이고 요시미쓰도 명나라
로부터 일본국왕 (日本國王) 칭호를 받고, 덴노(천황) 앞에서 외교적으론 군주로 군림한 탓에 ‘역적’
으로 취급받았는데 훗날 1868년 보신전쟁시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일왕
(천황) 군에 끝까지 저항하지 않고 에도성을 내준 것도 다카우지 같은 역적으로 비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메이지 유신후 남조 정통론이 대세가 된 이후 1934년에도 사이토 마코토 내각에서 상공대신 나카지마
구마키치가 어느 잡지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인간적으로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라고 기고
했다가 귀족원의 화족들에게 역적 소리까지 들으며 상공대신을 사직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3) 재평가 :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후,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으니 전후 민주주의
체제에서 덴노 중심주의 사관이 약화되면서, 다카우지를 역적으로 규정하는 시각은 힘을 잃으며 역사학계
에서는 “어떻게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역적으로 규정되었는가” 라는 문제의식이 제기되어 재평가가 이뤄진 것입니다.
또한 요시카와 에이지가 쓴 역사소설《태평기》를 통해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이미지가 개선되었고, 인간적인
면모를 갖춘 인물로 재구성되었으니 이 소설을 바탕으로 1991년에는 동명의 제목으로 보다 입체적이고
인간적 면모를 갖춘 인물로 재해석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주인공인 NHK 대하드라마 까지 나오기도 했습니다.
일대기에 보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은 다른 막부 창건자들에 비해 다카우지는 정치적
기량이나 부하 관리면에서 한계를 드러낸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는데, 물론 군사적 재능도 갖추고 있었고,
덴노군의 반격을 받아 규슈로 퇴각하던 중에도 지방 무사들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외교력과 수완을 발휘합니다.
또한 자신이 불리한 처지에 놓였을 때에도 공을 세운 부하들에게는 아낌없는 포상을 내렸으며, 필요할 경우에는
은밀한 정치 공작도 주저하지 않는등, 리더로서의 기민함과 자질은 평균 이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의 생전에는 남북조의 통일을 이루지 못했고, 뒤를 이은 손자 아시카가 요시미쓰 시대까지
남북조 통일이 지연되며 내전이 장기화되는 결과를 초래했으니.... 요리토모나 이에야스 처럼
권력 구조를 정비하고 장기 체제를 마련한 인물들에 비해 여전히 낮은 인기를 얻는 이유이긴 합니다.
다만 요리토모나 이에야스보다 개성적인 점을 들면 풍류인 및 예술가로서의 기질이 두사람 보다 뛰어났으니 무사임에도 시나 그림 등 예술활동을 좋아했고,《쓰구바슈》(菟玖波集)라는 남북조시대의 렌가(連歌)집에 60여수의 렌가를
남겼고,《신센자이와카슈》(新千載和歌集) 라는 와카집을 만들도록 했으며 또한 지장보살을 직접 그리기도 했습니다.
(2) 무로마치 (窒町) 막부의 흥망
1) 아시카가 막부 수립 : 1336년 1월 아시카가 다카우지 (족리존씨 足利尊氏) 씨는 일왕(천황)
군의 3면의 포위를 뚫고 교토로 입성하니 고다이고왕(천황) 은 남쪽 나라현 요시노로
달아나는지라 아시카가씨는 고메이왕(천황) 을 세우니 일본은 남북조 시대로 내란에 들어갑니다.
고다이고왕(천황) 은 요시노산에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닛타 요시사다등
남조의 주력 무장들이 잇달아 전사하니 1339년 노리요시 친왕에게 양위하고 ‘조적토멸 · 교토탈회’
의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52세였는데.... ‘이화집’ 과 ‘신엽화가집’ 에 와카가 몇수 전합니다.
이후 남북조 전쟁은 계속되어 아시카가 막부는 요시아키라를 거쳐 요시미쓰가 10세의 어린 나이로 3대 쇼군(장군)
이 되었는데 1378년 교토 무로마치에는 훌륭한 저택이 들어서게 되니 쇼군은 수호대명들을 대동하고 6년
에 걸쳐 미노, 오와리, 이세의 수호인 도키씨와 다지마등 11개국을 차지해 기세를 떨쳤던 야마나씨를 타도합니다.
1392년 아시카가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 는 요시노의 남조 고카메야마왕(천황) 이 북조 고코마쓰왕(천황)
에게 천황 지위를 양보 하는 대신 남조측의 황자를 황태자 로 삼는다는 조건을 제시하니...
남조는 승낙하고 교토로 귀환해 북조에 신기(神器) 를 넘기고 퇴위하니 1336년 시작된 내란이 56년만에 끝납니다.
2) 막부의 융성 : 무로마치 (아시카가) 막부 3대 쇼군 (정이대장군) 인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강력한 다이묘 (大名 영주) 를 견제하고 일왕(천황) 의 조정을 조종
했는데 교토 무로마치와 기타야마에 정원수를 갖춘 대저택을 지어 천하에 위압감을 주었습니다.
아시카가 막부는 교토 무로마치의 저택에서 다스리다 보니 무로마치 막부로도 불리는데,
키타야마 저택 연못가의 3층 사리전 (舍利展 : 로쿠온사, 일명 金閣寺
킨카쿠지) 은 건축비가 쌀 1백만석에 달했다고 하니 그 호화로움은 헤아릴수가 없습니다!
3) 막부와 슈고 (守護 수호) : 가마쿠라시대의 시소 (侍所 : 무사관리), 정소 (政所 : 재정),
문주소( 問注所 : 재판) 외에 은상방등을 새로 설치하여 그 장관들로
평정중 (評定衆: 의사 수렴기구) 을 구성하여 정이대장군의 자문에 응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아시카가 일문의 유력한 자를 집사에서 관령 (管領) 으로 개명하여 실권을 가지고 행정을
담당해 장군을 보좌하게 하였으며 전국에 아시카가의 부하들이 슈고(守護) 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쪽 지방은 호족들이 오래 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직할지로 삼기가 어려워 가마쿠라
에 관동부를 설치하여 간접 통치했으니 관동부는 초대장군 다카우지의 아들인
모토우지가 관동장군으로 부임했는데, 3대째에는 12개국을 통치하면서 불온한 기색을 보이기도 합니다.
4) 막부의 재정 : 전쟁에서 이겨 얻은 토지는 보통은 부하 무사들에게 하사하였으니 따라서
재정은 장군의 직할지인 23국에 걸쳐 있는 60여개 장원의 수입이 그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 밖에 전국 각지의 슈고 (守護 수호) 들에게서 거두는 토지세와 상납이 그 뒤를 따랐으며 여기에다가
교토 등의 술집과 상인에게서 거두는 세금과 명나라와의 무역에서 얻는 이익이 더해지는 것었습니다.
5) 막부의 동요 : 4대 쇼군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치는 부친이 생전에 동생을 편애한데 대한 감정
으로 아버지의 정책을 파기하게 되는데, 키타야마 저택도 대부분 해체했으며 또한 명나라에
대한 조공도 굴욕적이라 하여 막대한 금전적 이득을 포기하면서 까지 중단하고 국교를 단절합니다.
이에 기회를 노리던 동생 요시쓰구가 동쪽 관동부의 관령 (공방 다음 직위) 젠슈와
연결하여 모반을 일으켰으나 패하게 되지만 이후 관동을 비롯 전국의 토호
들의 불온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되어 무로마치 (아시카가) 막부는 흔들리게 됩니다.
6) 장군에 대한 모반 : 형인 장군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유언 없이 죽자 관령 하타케야마
를 비롯 유력대명들이 모인 가운데 동생들이 제비뽑기를 하여 5대
장군에 둘째인 요시노리가 환속하여 취임하게 되는데...... 연호를 영향이라고 고칩니다.
그러나 동쪽 관동장군 (12개국 통치) 아시카가 모치우지는 딴 뜻이 있어, 새 연호
사용을 거부하는등 이에 응하지 않으니 이를 말리던 관동공방의
관령 (2인자) 노리자네는 그만 자기 영지인 고즈케( 군마현) 로 낙향해 버립니다.
그러자 공방인 관동장군 아시카가 모치우지가 고즈케의 노리자네를 공격하자 교토
무로마치 막부에서 구원에 나서게 되니...... 가마쿠라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
져서 마침내 함락되니 관동부(관동공방) 는 4대 100년 만에 종언을 고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토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장군) 은 자신의 위력을 과신한 나머지 조정의 공경대부 70여명에게 죄를
주는등 인심을 잃게되며 사찰들이 토지 문제로 싸움을 벌이자 영이 서지 않는다고 히에이산을 공격해
본당을 불사르고, 그 토벌에 공이 큰 장수들을 사소한 이유로 목을 베니 슈고(수호) 들이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마침내 하리마등 3국의 슈고(수호) 아카마쓰가 쇼군(장군) 타도의 깃발을 드니 쇼군을 자신의 저택에 초치
하여 암살하게 되니 이에 관령 요리유키는 쇼군의 아들 요시카쓰를 장군으로 세우고 1개월후에
야마나씨에게 명하여 아카마쓰 토벌에 성공하니 야마나씨는 중신 호소카와씨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됩니다.
(3) 고려말 조선초의 다이묘 백제계 오오우치씨 (大內) :
1) 선조의 유래 : 14~ 16세기 오오우치 (大內) 씨는 일본 전체 66국 중에서 주코쿠 (中國: 야마구치와 히로시마)
4국과 북규슈 2국등 6국을 지배하는 다이묘(영주)로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의 후손이라고
하며 그 25세손인 오오우치 요시히로는 오늘날의 시모노세키등 야마구치 일대의 슈고(守護 수호) 가 되었습니다.
2) 오우치 요시히로는 남북조가 통일된 3년 후인 1395년에는 북규슈까지 지배하게 되고, 1399년 신생 조선에 사신을
보내 팔만대장경 불경을 주면 "왜구(倭寇) 를 소탕" 해 주겠다고 제의했으며 이후 계속 사신을 보냈으니
조선왕조실록에는 “大內展(대내전)” 으로 기록됐으며 동생 오우치 모리미는 조선 및 중국과 무역을 독점하였습니다.
오우치 요시히로는 1399년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오오사카의 사카이로 올라왔으니 쇼군(장군) 의 전횡
에 불만을 품은 단바, 미노, 오미의 수호들에 남조와도 연결하여 일대 결전을 벌였으니
오오에이의난 (응영의 난) 이라 불리는데 여기서 승리한 요시미쓰는 확고하게 전국을 장악하게 됩니다.
오우치 요시타카는 히로시마의 카야마(香山) 공원에 루리코지 (瑠璃光寺 유리광사) 절을 세우고 5층탑을
지었는데.... 히노키피즙을 입힌 저 5층탑은 일본에서 3대 명탑에 속하므로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이후 오우치 요시타카씨는 1467년 무로마치 (室町) 막부 후계자 전쟁인 오닌의난 (応仁の乱
응인의난) 에 2만 대군으로 참가하여 후계자 중에 아들편에 섰으나
센슈에서 패해 전사하는데, 그는 일본 노래인 와카(和歌) 와 렌카(連歌) 에도 능했다고 합니다.
오오우치 요시타카는 야마시로(교토) 까지 손에 넣어 7개국 슈고(수호 守護) 로서 스페인인으로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 사비에르의 기독교 전도 사업을 지원했으며 아시카가씨 쇼군(장군) 을 옹립
하는등 막부를 죄지우지하다가 신하의 배반으로 멸망하게 되고 이후 모리씨가 새로운 영주로 등장합니다.
오우치 요시타카가 교토에 올라가서 아시카가 쇼군과 관령 호소카와씨 후계 문제에 개입하느라
오래토록 야마구치의 영지를 비우게 되고 또 야마구치에 귀향해서도
정무를 소홀히 한채 문학이며 음악등 놀이 에 빠지니 중신인 스에 하루타카가 모반을 일으킵니다.
스에 하루타카는 사심이 있었다기 보다는 야마구치 가문이 망하는 것을 못견뎠던 것일까요?
한편 불우한 처지에서 몸을 일으킨 모리 (毛利) 모토나리는 오우치 요시타카
에게 귀부한후 요시다군 산성 전투에서 이즈모의 아마고 3만 대군을 물리치고 명성을 얻습니다.
모리 모토나리는 스에 하루타카 가 주군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자 군대를 이끌고는....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스에씨를 유인하여 급습해 죽이고 서부 일본 6개국
수호가 된후 이어 이즈모로 진격해서는 아마고씨를 죽이고 7개국을 차지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시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 나베시마 나오시게, 고바야카와
다카가와, 우키다 히데이에, 구로다 나가마사, 시마즈 요시히로등이
1만을 동원한데 비해, 모리씨는 혼자 3만 대군을 동원했으니 영지의 크기를 알만 합니다?
모리씨는 그 후에는 자기 분수를 알고 교토 조정에 대적하는 일을 삼가니.... 후일 그 손자인 모리
데루모토는 1600년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 에서도 오사카성에 머무르며 몸을 보전 합니다.
이 모리씨가 비명에 죽은 오우치 요시타카 (大內義隆) 를 위해 그 저택 자리에 세운 절이 야마구치 시내에
류후쿠지 (龍福寺 용복사) 절이며 조선왕조 실록 에 보면 태조에서 명종 까지 大內殿(대내전) 이라는
이름이 무려 248회나 나오는데.... 조정은 그가 보낸 사신에 우호적 이니 바로 오우치(大內)씨 를 가르킵니다.
오우치씨 는 1379년 고려에 사신을 보냈고 조선과 오래토록 사신을 보내 무역 했으니 신숙주 는 해동제국기
에서 오닌의 난 과 오우치(大內) 씨 를 상세히 기술 했습니다. 2009년에 오우치씨의 45대손 인
오우치 기미오와 부인 오우치 다카꼬가 전북 익산을 방문해서는 미륵사지를 보고 부여 까지 둘러보았습니다.
(4) 오닌(응인) 의 난 :
1) 아시카가 요시마사 : 아버지가 아카마쓰에게 암살되고 형 요시카쓰 마저 8개월 만에 병사하자 요시마사는
불과 10세의 나이로 8대 쇼군(장군) 에 취임했는데 쇼군의 성격이 소심한데 비해 부인
도미코는 정치에 참견하는 여장부에다가 고리대금과 투기에 손을 대어 축재하니 부부 금실이 나빠지게 됩니다.
1460년경 한발과 홍수로 인해 전염병이 돌자 교토에 난민들이 모여들면서 덕정령을 발표하기는 했으나 그 효과가
없자 무로마치 막부의 무능이 들어나기 시작하는데 요시마사 쇼군이 아들이 없어 동생 요시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호소카와씨를 후견인으로 붙였는데.... 그후 뒤늦게 아들 요시히사가 태어나니 실로 난처하게 됩니다.
부인 도미코는 아들을 후계자로 삼기위해 호소카와씨에 세력이 맞먹는 야마나씨를 후견인으로 선택하니 바야흐로
분쟁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지방에서도 상속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호소카와 씨와 교대로 막부 관령
의 직위에도 오른적이 있는 가와치 등지의 수호 하타케야마씨는 아들이 없어 조카 마사나가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후 아들 요시나리가 태어나자 양자인 조카를 추방하니 불만을 품은 부하들이 호소카와씨의 후원을 얻어
마사나가를 옹립하자 쫃겨난 요시나리는 나마나 쇼젠씨에게 구원을 청하니 장차 오닌(응인)의 난이
일어나는 단초가되는 것으로 막부의 실력자 호소카와씨와 나마나씨는 사돈을 맺고 양자를 주는등
처음에는 동맹관계였으나..... 이처럼 여러 분쟁에 상대방이 됨으로써 마침내 일전을 벌이게 되는 것입니다.
2) 동군과 서군의 싸움 : 1467년 1월 교토 시내에서 하타케야마 가문의 조카 마사나가와 아들 요시나리군이 마침내
격돌하여 전투가 벌어지는데 쇼군(장군) 은 이들 싸움이 전국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 엄중 중립을 지시
했으나, 나마나 쇼젠이 이를 어기고 요시나리를 응원했기 때문에 하타케야마 마사나가는 도망칠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투에 이긴 나마나씨와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측의 압박에 대해 호소카와 가쓰모토씨도 응전태세를 취하니, 장군은
평화를 기원하는 뜻에서 연호를 오닌(응인) 으로 바꾸기 까지 하였으나 허사였으니 이어 교토 시가지에 진지
를 구축하는데 동군은 호소카와 일족에 마사나가, 시바 요시토씨, 아카마쓰, 교고쿠 등 24개국 16만이 집결합니다.
서군은 야마나씨 일족에 시바 요시카도, 요시나리, 잇시키, 롯카쿠등 20국 9만명으로 응전하니 군세가 모자랐지만
히로시마의 다이묘 오오우치(大內) 씨 2만이 참전하면서 전세는 비등해졌는데 그후 또 호소카와 가쓰모토는
쇼군(장군)의 군기를 받고 일왕(천황) 을 쇼군(장군) 저택에 모시고는 서군을 역적으로 선포하여 기선을 제압합니다.
그러나 이듬해인 1468년 서군은 반대편이던 쇼군(장군) 의 동생 요시미를 새 쇼군(장군)으로 추대하고 서국의
대명 야마나 마사히로를 끌어들임으로써 전투는 호각지세를 이루게 되었고 교토 시내에서 벌어진
이 전쟁은 무려 7년을 끌었으니.... 교토는 쓱대밭이 되어 황폐화 되었고 쇼군(장군)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집니다.
한번 시작한 싸움은 후회해도 늦어 야마나씨와 호소카와씨 두 대신이 죽은 후에야 가까스로 휴전을 하는데,
막부에서는 오우치(大內) 와 마사히로에게는 북규슈의 여러 고을을 주어 달래어 귀국시키고
요시히로도 가와치로 돌아가니 1467년에 시작된 전쟁은 1477년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교토 부근 토착 무사들이 자기 상전인 슈고(수호) 를 타도하거나 그 영향아래에서 벗어나 자립하기 위해 상대방
진영에 가담함으로써 전쟁이 오래 끌게 된 면도 있다겠는데 10년을 끈 전쟁이 승패가 나지 않았으니
논공행상이 없는지라..... 지방 무장들은 전쟁 비용으로 인해 빚더미에 올라앉자 더욱 자립해 다이묘가 됩니다!
3) 야마시로국(교토) 의 자치 : 1485년 전투로 황페화 된 고향 땅에서 전투에 지친 미나미(南) 야마시로의 토착 무사와
농민들이 일치 단결해 마사나가와 요시나리등 양 하타케야마군의 철수를 요구하였으며 다음해에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고 36인 대표를 뽑아 총국을 설치하니 일본 역사상 전무후무한 주민 자치 국가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야마시로국(교토) 은 재정을 위해 반제법을 시행하여 토지세를 거두니 막부의 체면은 땅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자치는 막부가 임명한 슈고(守護 수호) 인 사다무네의 입국을 저지하면서 절정에 달했으나 국인
중에서 세력을 탐하는 자가 있어 분열이 일어나니 8년만에 야마토의 호족인 후루이치씨의 군대에 무너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