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불 삼박자 / 용성 스님
일단 스스로 활불(活佛)임을 선언하자고 했습니다.
활불인 이유는 체(體)로 보면 이미 부처요,
용(用)으로 보아도 그만큼의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활불이라고 자인(自認)한다면 지금 바로 활불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행복을 원하는 것이 인생일 터, 지금 바로 활불로서 행복하십시오.
행복은 기다려야 할 어떤 무엇이 아니고
지금 바로 선택하며 누려야 할 권리입니다.
활불인 당신은 지금 바로 행복해야 합니다.
혹여 지금 바로 행복할 일을 억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깨달아갈수록 누구나 이미 지극히 행복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수긍하게 되겠지만, 행복을 원한다면
이 순간 바로 행복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물론, 미래의 보다 더 높은 행복을 위해서
행복을 준비하는 일〔思言行〕을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닙니다.
보다 높은 행복을 위한 어떤 준비는 하더라도
지금 바로 행복을 결단하여 누리는 것은 최우선적으로 중요합니다.
나는 맨 먼저 표정을 유념합니다.
‘표정’하면 행복해 하는 표정과 불행해 하는 표정으로
일단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는 대체로
마음이 행복한 사람은 미소 띤 표정으로 사는 경향이 있을 것이요,
마음이 불행한 사람은 우울한 표정으로 사는 경향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 깨침이 있어야 합니다.
즐거우면 웃음이 나오지만 웃으면 즐거워진다는 이치입니다.
전자를 심리주의(心理主義)라고 한다면 후자는 행동주의(行動主義)이지요.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이 다 행복해진 다음에 웃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일단 웃으면서 행복해지시겠습니까?” 하고 묻곤 합니다.
그러면 거의가 일단 웃으며 행복해지겠다고 답합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듯, 하지만 나는 아주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활불인 자가 일단 활불을 드러낼 일은 웃음입니다.
방그레요, 빙그레요, 스마일이요, 미소요, 가가대소(呵呵大笑)입니다.
우리 불광인(佛光人)부터 미소 띤 표정 운동을 해보면 어떨까요?
불광법회의 장은 언제나 환한 얼굴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몇 차례 가가대소의 웃음을 웃는다면 어떨까요?
나는 그것을 적극 권장합니다.
하루에 10분 정도씩 온 몸으로 소리 높여 자지러지게
가가대소하는 일을 100일간 이행한다면 어지간한 암(癌)도 퇴치한다고
우리는 듣고 믿고 있습니다.
생각해야 할 시간에 행동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듯이
행동해야 할 시간에 생각만 하고 있다면 역시 어리석음입니다.
미소에 대해서, 웃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도 의미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바로 미소를 지어보는 것, 웃음을 웃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눈을 감고 빙그레 미소의 표정을 지으면서
어떤 느낌이 드는지 경험해보세요.
가가대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온몸으로 1분쯤 가가대소해보세요.
웃음이 얼마나 위력적인가를 불원간에 깨닫게 될 것입니다.
활불인 자는 행복한 자요, 행복한 자는 표정이 밝은 자요,
밝은 표정은 웃을 때 오는 결과물입니다.
활불은 일단 미소입니다.
웃어야 합니다.
한 개인이 웃어야 하고, 한 가정이 웃어야 하고,
한 회사, 한 나라, 이 지구가 웃어야 합니다.
활불은 밖으로는 미소로 드러나지만 안으로는
스스로의 행복을 확인합니다.
행복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행복하지도 않은데 행복을 선언하는 것은 억지라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행동해야 할 순간에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활불인 나는 행복하다’라고 속 소리로
혹은 드러나는 큰 소리로 여러 번 선언을 해보세요.
행복을 머리로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안으로이든 밖으로이든 행복을 선언하고 있노라면
점점 행복해지며 행복 수위가 높아지며 나아가서는
이미 행복한 처지에 있다는 것이 사실로 느껴지게 됩니다.
건전한 정신이 있다는 것, 몸이 이 정도로 건강하다는 것,
보고 듣는 눈과 귀가 있고, 맑은 공기, 푸른 하늘, 흐르는 물,
새들의 노래 등등 이미 무진장한 행복의 조건들에
휩싸여 있다는 것은 눈물겹게 인식하기에 이릅니다.
‘활불인 나는 행복하다.’는 선언이 억지가 아닌 지극한 사실입니다.
끝으로 ‘나 없다’ 혹은 ‘공하다’라고 선언합니다.
허공에 구름 한 조각이 흐를 때 그것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구름조차 사라질 때 허공은 더 개운하고 시원합니다.
빙그레 미소 짓고, 행복해 보이는 활불은 그대로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공한 활불일 때 활불은 드디어 무한으로 열린 해탈을 누립니다.
나는 많은 법회에서 활불 삼박자를 법문의 기초로 전합니다.
‘웃기-행복을 선언하기-무아(無我)를 선언하기’는 행동주의 행복론,
심리주의 행복론, 초월주의 행복론입니다.
자지러지게 온 몸으로 가가대소를 하게하고,
바로 이어서 ‘활불인 나는 행복하다’를 양 팔을 번쩍 들면서
세 번 외치게 하고, ‘나 없다’를 조용히 선언하게 합니다.
놀랍게도 법회장의 거의 모든 분이 잘 적응하는 것을 보면서
세상의 가능성을 확인하곤 합니다.
보다 드높은 행복 해탈을 위해 심도 있는
사언행(정사유-정어-정업)의 계획을 세워서 실천 궁행해야 할 것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바로 지금 행복을 누려버리는 사언행은 더욱 필요합니다.
거창한 언행 이전에 빙그레 웃는 밝은 표정을 지어보는,
혹은 하하하하 자지러지게 웃어보는 단순한 언행(言行)이
얼마나 위력적인가를 실천해보는 사람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행복선언이나 무아 선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삼법인(三法忍)이니,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니 하는
무게 있는 철학적 명상도 끝내는 중요하지만,
유치원생의 오락과 같이 극히 단순한 ‘나는 행복하다’
혹은 ‘나 없다’를 군소리로 뇌까려보는 것이
마음을 천국으로 이끄는 신묘한 선약(仙藥)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실천만 해본다면 크게 수긍하게 됩니다.
이 ‘활불 3박자’는 25여 년 간 5박 6일의 수련을
200여 회 실시해오면서 그 긍정성이 충분히 증명되었습니다.
‘생활불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의 하나로
이 간단한 활불 3박자가 얼마나 위력적인가를
불광인의 운동 차원에서 증명된다면 한국불교에
신선한 기여를 하게 될 것입니다.
* 용성 스님 행장
용성(龍城, 1864~1940) 선사는 1864년(고종 1)
전라북도 장수(長水)에서 아버지 백남현(白南賢)과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법명은 진종(震鍾),
호는 용성(龍城), 속명은 상규(相奎)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혀 오던 중, 어느 날 꿈속에서 부처님을 친견하며
마정수기(摩頂搜記, 부처님께서 보살들에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음 세상에 반드시 성불하리라는 것을 한 말씀)와
부촉(付囑, 부처님이 불법의 유통을 촉탁하는 일)을 받고는 곧바로 출가를 결심,
남원 덕밀암(德密庵)에서 출가하였다.
그런데 덕밀암과 그곳의 부처님이 바로 꿈속에서 만난 절과 부처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 곧바로 부모에 의해 강제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가
1879년에 해인사 극락암에 다시 출가하여 이곳에서 득도하였다.
그 뒤 경상남도 의성 고운사(孤雲寺)의 수월(水月) 장로와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무융(無融) 선사에게 불법을 익혀 나가
1885년 해인사에서 두 번째 득도를 하였다.
이듬해 경상북도 구미 아도모례원(阿道毛禮院)에서 세 번째 득도하였다.
이후로 전국 각지의 명산대찰을 순례하면서 수도 정진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이때 선회(禪會)를 개설하며 선(禪) 포교를 하기 시작한다.
1910년 꿈에서 다시 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불교의 교리를 일반사람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한문으로 되어 있는 경전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지름길임을 인식,
불교경전 번역과 저술에 큰 뜻을 두었다.
또한 이때 다른 종교가 불교를 비방하고 배척하는 것을 논박하는 내용의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짓기도 했다.
1911년에는 대각사를 세웠고, 이듬해에는 조선시대 불교배척정책에 의해
쇠잔된 불교를 부흥시키고자 부산 범어사(梵魚寺)와 양산 통도사(通度寺)를 연합하여
서울에 선종교당(禪宗敎堂)을 세우고 교화에 전력하였으며
또한 1913년에는 서울 안국동에 선학원(禪學院)을 세우기도 했다.
당시는 불교뿐만 아니라 한일합방으로 인해 우리 민족의 정기가 크게 억눌린 시대였는데,
용성 스님은 만해 한용운(韓龍雲) 스님과 더불어 불교부흥과 민족의 장래를
함께 논의하기도 하여 만해 스님과 함께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불교대표로 서명하였다.
이로 인해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서대문 감옥에서 6개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21년에는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본격적이고
활발한 불경번역사업에 들어갔으며 전통불교가 퇴색하고 일본화 되어 가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불교운동이 필요함을 절감,
대각교를 창업하였다.
본부를 대각사에 두었고 한편으로는 만주 간도에 대각교당을 설립하여
이곳으로 유랑온 동포를 상대로 한 포교사업에 열중하였다.
1926년 용성 스님은 한국전통불교를 지키기 위해 승려들의 엄격한 계율생활을 촉구한
『건백서(建白書)』를 두 차례에 걸쳐 조선총독부에 제출한다.
당시는 일제가 발표한 사찰령에 의해 비구승의 가정생활이 허용되어
많은 승려들이 처자와 가정을 거느리게 되는 등
승려들의 계율생활이 형편없이 문란해지던 무렵이었다.
따라서 각 사찰마다 대처와 육식이 공공연한 사실로 묵인되었으며
심지어 조선총독부에서는 주지자격에 비구 조항을 없애려는 움직임마저 있는 등
한국불교가 매우 어지러워지는 때였다.
이때 용성 스님이 『건백서』를 통해
과감히 승려의 파계를 강력한 반대하는 내용을 발표한 것인데,
이 일로 인해 용성 스님은 조계종 정화의 초조(初祖)로 숭앙되기도 한다.
1927년 경상남도 함양에 화과원(華果園)을 세우며
수행과 일을 다 함께 힘쓸 것을 내용으로 하는 선농불교(禪農佛敎)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삼장역회의 기관지로 『무아(無我)』를 발행함으로써
대중포교에 더욱 힘을 쏟았는데, 이 잡지는 아직까지 계속 발행되고 있다.
동년 64세 때에는 『대각교의식집(大覺敎儀式集)』을 발간하면서
왕생가(往生歌), 권세가(勸世歌) 등 창작국악조의 창작찬불가를 최초로
작시, 작곡하여 이 분야에서는 국내에서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대각사에 일요학교를 설립하여 오르간을 손수 치기도 하였으며,
한문으로 된 불교의식을 한글화하여 불공, 제사 등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꾸준히 불경을 번역하고 선회를 개설하며 대각교를 발전시켰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34년 대각교 재산이 신탁되어 사실상 몰수되었다가
1938년에는 결국 대각교가 해산 당했다.
그러나 그 뒤로도 계속 포교사업에 힘을 쓰다 1940년 77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용성 스님의 일생은 조선시대의 불교배척으로 인하여 쇠퇴한
불교를 부흥시키는 것을 핵으로 하여, 외세침략으로 인한 민족의 시련기 속에서
외래종교의 범람과 그로 인해 주체성을 잃어 가는 국민들에게
민족주체성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호국의 법을 설하고
호법의 불교운동을 쉼 없이 이끌었던 생애였던 것이다.
스님이 평생의 과업으로 여긴 불경번역사업의 결과,
한글로 번역된 많은 경전을 남겼고, 한글학회에 의해 스님의 그 같은
한글번역사업이 높이 기려지기도 하였다.
[출처] 블로그 (부처님 찾아 떠나는 여행) | 작성자 아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