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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제작 / 국내미개봉 / 140분 / 미성년자 관람불가>
=== 프로덕션 노트 ===
감독 : 피터 그리너웨이
출연 : 마틴 프리먼 & 에밀리 홈즈
거장 렘브란트 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
<셜록>과 <호빗>의 마틴 프리먼 주연
후에 <야경>이라 불리게 된 초상화 작업을 하며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 황금기의 권력과 부에 얽힌 음모를 목도하게 된다. 한 거장을 파멸로 이끌었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자유로운 형식의 전기영화이다.
데릭 저먼의 [카라바조]와 에드 해리스의 [폴록]처럼 [야경]은 삶, 일, 타인의 죽음에 대한 이론들을 작품에서 펼쳤던 한 화가를 조망한다. 이번에 그리너웨이의 주인공이 된 인물은 바로 네덜란드의 거장 렘브란트. 일찍이 렘브란트는 전세계 가장 위대한 화가로 추앙받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결국 불명예를 안고 무일푼으로 세상을 떠났다. 암스테르담 머스켓 민병대의 초상화를 의뢰 받은 렘브란트는 그림을 그리면서 17세기 네덜란드 사회의 음모를 드러내게 되고, 이 작업은 예술가이자 한 인간으로서의 그를 몰락시키는 결과를 몰고 온다. 그리너웨이는 렘브란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에 관한 조망에서 더 나아가, 사회의 규범이 아웃사이더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사회의 모습과, 시대에 의해 규정되고 무시되었던 한 인간을 그리고 있다. 그리너웨이는 예술의 본성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키기보다는 "성과 죽음, 그 밖에 얘기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담아 한 인간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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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정보 1 === <2009년 8월 20일 네이버캐스트>
501 위대한 화가
렘브란트 반 레인 Rembrandt Van Rijn
(1606.07.15 ~ 1660.10.04)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합하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여 ‘야경’과 같은 수많은 걸작을 그렸고 당대에 명성을 얻었다. 인간애라는 숭고한 의식을 작품의 구성 요소로 스며들게 하였으며 종교적인 작품에서조차 이러한 자신만의 특징을 유지했다.
렘브란트 반 레인은 미술사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화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어릴 적에 일찍 학교 교육을 그만두고 화가로서 도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역사화가 야코프 이삭스존 반 스바넨부르크 밑에서 3년간 배운 후,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네덜란드에서 손꼽히는 역사화가 페테르 라스트만 밑에서 짧게 도제 생활을 했다. 새로운 기술들을 익힌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공방을 열었고, 많은 자화상들을 그렸다.
그는 자신의 상을 포착하기 위해 두 개의 거울을 사용하여 다양한 표정을 지어보곤 했고, 자화상뿐만 아니라 다양한 극적인 장면에서도 이런 감정들을 전달했다. 그 당시의 비평가들은 이 방법을 전혀 쓸데없는 짓이라고 충고했으나, 후대의 사람들은 이것은 자아에 대한 탐구였을 뿐 아니라 미술에 대한 탐구였다고 평가했다.
렘브란트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여 물감의 농도와 빛의 역할을 실험했다. 키아로스쿠로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합하는 기법으로,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작품들에서 처음 사용되어 유명해졌다. 렘브란트의 그림들은 밝은 부분이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그 주위와 배경에 어두운 부분이 넓게 배치되어, 마치 어둠 속에서 집중 조명을 받는 것처럼 밝은 부분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는 동시대의 많은 화가들이 표현하던 주제 문제에 있어서의 엄격한 형식성을 제거함으로써 이와 같은 방법을 자신만의 전유물로 만들었고, 인간애라는 숭고한 의식을 작품의 구성 요소로 스며들게 했다. 렘브란트는 비범한 사람들 속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날카로운 시각으로 주목하고, 작품에 일상생활을 그렸으며, 종교적인 작품에서조차 이러한 자신만의 특징을 유지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직접 인쇄한 것으로 여겨지는 수많은 에칭들을 제작했다. 그는 평생 회화로 얻은 명성만큼이나 판화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렘브란트의 작품은 오라니에 공의 비서인 콘스탄테인 호이헨스의 눈길을 끌어 헤이그 궁정으로부터 보수가 큰 몇 건의 주문들을 받았다. 렘브란트는 1631년에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와 미술상인 헨드리크 반 오일렌부르그의 집에서 생활하며 암스테르담에서 유명한 외과의사인 니콜라스 툴프 박사를 그리는 의뢰를 받아 이를 작업했다.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경)는 17세기의 수술실 안에서 벌어지는 움직임들을 세밀하게 묘사한 놀라운 그룹 초상화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가 암스테르담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명함과도 같았다. 그는 곧 부유한 귀족들을 위한 초상화 제작을 독점해가기 시작했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제자들을 양성하고자, 1634년에 성 루가의 길드에 가입했다. 그는 인기 있는 스승이 되었고 그의 공방은 번창했다. 그는 같은 해에 헨드리크의 조카인 사스키아 반 오일렌부르그와 결혼했다.
그들은 임대한 집에서 살다가, 후에 유대인 거주 지역에 있는 호화로운 저택을 샀다. 이 저택의 구입은 말년에 렘브란트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렘브란트는 성서를 주제로 한 연작과 대작 역사화들로 더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작품 중 최고인 <야경>(1642)은 그의 양식적인 발전 과정에서 전환점이 된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렘브란트는 활동 말기를 향해 갈수록 점차 제작하는 작품의 수가 줄어들었으나, 새로운 표현 방식을 모색함에 따라 그의 작품은 서서히 발전했다. 그의 화법은 더 대담해지고 과감해졌으며 전체적으로 활기를 띠게 된 반면에, 그가 그린 인물들은 몸짓과 움직임이 줄어들었다. 많은 비평가들은 이 시기를 렘브란트 미술의 절정기로 여기고 있다. 렘브란트는 더 이상 작품 주문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 소장용으로 미술품들을 계속 사들이다가 1656년에 공식적으로 파산을 선고했다. 그의 저택과 재산은 경매로 처분되었다.
렘브란트는 1669년에 죽을 때까지 그 어떤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과도 견줄 수 있는 걸작들을 제작했다. 그는 붓, 분필, 에칭용 조각칼을 사용하여 최고의 솜씨로 인간의 형상과 감정을 정교하게 묘사해냈다. 렘브란트는 이전에는 결코 본적이 없었던, 그리고 이후에도 좀처럼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관찰했다.
걸작의 보존
<야경>으로 더 많이 알려진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과 빌렘 반 로이텐부르그의 민방위대>(1642)만큼 많은 역경을 겪었다고 자랑할 만한 작품도 드물다. 이 그림은 18세기 말에 암스테르담 시청 내부에 알맞은 크기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사람들이 보는 그림은 원작이 아니다. 이 그림은 1939년에 암스테르담의 국립미술관에 걸려 있었다.
나치가 침공하자 이 그림은 네덜란드의 한 시골로 옮겨졌고, 요새화된 성 안에서 자물쇠가 채워진 채 보관되었다. 주변의 적들 때문에 이 그림은 또 다시 옮겨졌는데, 배로 운반되어 대장간의 창고에 잠시 보관되었다가, 북해 연안의 모래 언덕 아래 깊숙한 지하실의 철제 원통에 담겨 보관되었다. 이 장소도 안전하지 못하게 되자, 이 그림은 마스트리히트 근처 언덕의 지하 동굴 방공호로 급히 옮겨졌다.
전쟁이 끝나자 다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걸린 <야경>은 두 차례의 우발적인 습격을 받았다. 첫 번째는 1975년에 이 그림 속 코크 대장을 악마라고 믿은 한 남자가 조각칼을 휘두른 것이고, 두 번째는 15년 후에 한 남자가 그림 속 알레고리적 여성 인물에 산을 뿌린 것이다. 놀랍게도, <야경>은 이 모든 역경을 견뎌내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그 영광스러운 화려함을 과시하고 있다.
"그에게는 붓과 기교로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제라드 드 레이생
[네이버 지식백과] 렘브란트 반 레인 [REMBRANDT VAN RIJN] (501 위대한 화가, 2009. 8. 20., 마로니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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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정보 2 === <2008년 5월 6일 네이버캐스트>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반 룬의 예술사
렘브란트 Rembrandt
할스는 1666년에 죽었다. 바로 그때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가 암스테르담 근교의 작은 집에서 꾸준히 작업하고 있었다. 플랑드르인 특유의 활력은 없지만 그는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고 에칭을 제작했다. 동판을 너무 오래 들여다본 탓에 그의 시력은 몹시 나빴다. 그는 빚을 갚지 못해 파산 상태였으며, 죽은 아내와 같은 병(결핵)에 걸려 시름시름 죽어가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게다가 어떤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어린 딸도 있었다. 그는 그 여자와 결혼한 상태도 아니었고 결혼할 수도 없었다. 절망적인 파산 상태인데다 첫 아내가 아들에게 물려준 돈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종잇조각에 휘갈긴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의 자화상을 보면 그는 형편이 넉넉해진 뒤에도 늘 평범한 중산층으로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옛 네덜란드 공화국의 주요 공업도시인 레이덴에서 태어났다. 그곳에는 에스파냐와의 그 유명한 전투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 전투에서 시민들은 적을 공격할 선박을 보내기 위해 제방의 일부를 터 인공호수를 만들었다.)
그의 직계 조상에 관해서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제분업에 종사한 보통 중산층이었고 성벽 근처에 있는 제분소에서 곡식을 빻았다는 것만 알 수 있을 정도다. 렘브란트에게는 여러 형제와 자매가 있었으나 전부 평범했다. 예술가의 가족이나 친척들 중에는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의 가문은 아버지, 할아버지, 삼촌 등도 상당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어찌 보면 예술가는 그 가문의 재능을 대표하는 존재라고 할 수도 있다.
화가들은 보석 세공인이나 금 세공인의 자식인 경우가 많았고, 적어도 가끔씩은 내년의 수확량이나 어시장의 생선 가격 이외에 다른 일을 화제에 올리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유년기 환경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환경 결정론자들은 렘브란트 하르멘스존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할 것이다. 이름의 뒤에 '반 레인'이 추가된 이유는 이 가문의 제분소가 '옛 라인강'(로마시대에는 북해로 흘렀다.)의 강둑에 있었기 때문이다.(레인은 라인강의 네덜란드식 명칭이다.)
렘브란트가 태어났을 때 집안은 꽤 유복했다. 형제들 중 그가 가장 영특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그에게 고등교육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는 에스파냐와 용감하게 싸운 보상으로 건립된 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법률가가 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곧 스와넨부르흐(Swanenburch)라는 화가의 화실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 당시 스와넨부르흐는 이탈리아에 유학을 갔다 온 제법 알려진 화가였다. 그 화실에서 3년 동안 공부한 렘브란트는 다시 피테르 라스트만(Pieter Lastman)에게서 6개월 동안 배운 뒤 레이덴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재능을 인정받은 청년 렘브란트는 이탈리아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았으나 사양했다. 그가 보기에는 유학을 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후원자에게 훌륭한 화가는 얼마든지 국내에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여행이 단지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라면 여행을 떠날 이유가 뭐겠는가? 실제로 그는 결혼하기 위해 프리슬란트에 갈 때 조이데르해를 건넌 것과, 가까운 도시 위트레흐트(지금은 자동차로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다.)로 도보 여행을 한 것 외에는 암스테르담 주변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는 1631년 암스테르담에 정착한 이후 내내 거기서 살다가 1669년에 죽었다. 그의 무덤도 그곳에 있었으나 지금으로부터 50년쯤 전에 무덤을 파보니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생전에도 거의 무명으로 살았지만, 모차르트처럼 죽은 뒤에도 익명으로 남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사실 생전에도 무명이었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렘브란트가 명성과 영예를 전혀 누리지 못한 것은 아니다. 암스테르담에서 화가 생활을 시작한 뒤 처음 10년 동안 그는 이 도시에서 가장 인기 있고 유행을 선도하는 화가였다. 암스테르담의 시민들은 취향이 분명했을 뿐 아니라 그 취향을 충족시킨다면 돈을 얼마든지 낼 의향이 있었다. 건축비용이 900만 길더나 들었던 야코프 반 캄펜(Jacob van Kampen)의 새 의사당과 그보다 돈이 덜 먹힌 허드슨강 어귀의 부동산은 그런 시민들의 성향을 반영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나름의 취향이 있으니,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면 아낌없이 돈을 지불하겠다"는 태도가 예술가에게 축복인 것만은 아니다. 대개의 경우 지갑을 가진 사람은 예술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최종적인 판단의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렘브란트는 슬픈 경험을 통해 그 점을 깨달았다. 유행을 좇는 사람들의 자만심을 만족시켜주는 그림을 그리면 돈을 갈퀴로 긁어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내 그런 작품을 따분하게 여기고, 고객을 이상화된 모습이 아니라 실제 모습 그대로 그리기 시작하자 손님이 뚝 끊어졌다. 사람들은 렘브란트처럼 '개성적'이고 '독립적'인 그림을 원하지 않고 다른 화가들을 찾아갔다. 그것이 첫 번째 좌절이었다. 그러나 그의 몰락을 부채질한 것은 두 번째 좌절이었다.
렘브란트는 어느 소녀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좋은 여자였고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아마 그에게 그녀와 결혼하면 화가로서의 생활이 나아지지 않으리라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우선 그녀는 몸이 너무 약했다. 네덜란드처럼 습한 나라에서(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결핵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둘째, 그녀의 집안은 한때 잘 살았고 그런 과거 덕분에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유지했지만 급속히 생활의 기반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렘브란트 같은 소박한 중산층 청년에게 겉만 번드르르한 귀족은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의 형제와 사촌들이 사업을 한답시고 그가 애써 번 돈을 빌려가더니 곧 망해버렸다. 게다가 딱한 렘브란트는, 아마도 처가의 사회적 지위에 마음이 흔들린 탓이겠지만, 그런 환경의 똑똑한 젊은이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허영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처지에 걸맞지 않은 비싼 집을 샀다. 그러나 그는 아직 여유가 있었고 유럽 최고의 부자 도시에서 잘 나가는 화가였다. 최고의 그림 값을 받는 화가일 뿐 아니라 그의 아내는 아버지에게서 4만 길더의 유산을 상속받을 예정이었으므로 돈을 빌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물론 그때까지는 한 푼도 받지 못했지만 부동산이 처분되는 대로 유산을 받게 될 터였다.
그런데 유산을 받고 보니 4만 길더는커녕 4천 길더도 못 되었다. 토지는 많았으나 그 무렵 땅은 별로 돈이 되지 않았다. 토지란 원래 팔려고 하면 값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조금만 기다리면 틀림없이 오르리라. 이런 생각에서 렘브란트는 흥청망청 돈을 썼다. 그림, 에칭, 예쁜 페르시아 양탄자와 도자기 등 모양과 빛깔이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마구 사들였다. 또한 그는 아내를 보석과 비단으로 칭칭 감았다. 이제 그녀는 아버지가 행정장관을 지낸 작은 도시의 수줍은 여인이 아니라 진짜 귀족의 부인처럼 보였다. 거창한 꿈에 젖은 렘브란트는 제분소집 아들이라는 신분을 당당한 귀족의 외피로 감추고, 아름다운 아내를 위해 라인 포도주로 축배를 들면서(샴페인이 이 시대에 발명되었다면 그것으로 했겠지만) 이 세상에 자기 아내보다 더 미인은 없다며 큰소리를 쳤다.
사람들은 고개를 내저으면서 그런 생활이 오래갈 리 없다고 수군거렸다. 과연 그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1642년에 렘브란트는 반닝 코크(Banning Cocq) 대장이 휘하에 거느린 장교들의 단체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는 만찬회에 둘러앉은 장교들의 모습 대신 정오에 성벽 경계를 위해 부대를 나서는 모습을 그렸다. 이 그림에서 그는 명암을 다루는 거장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중천에 뜬 태양은 부대의 경내를 나서는 장교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고, 커다란 성문에 있는 장교들은 흐릿한 그늘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 그림은 지금도 전해지지만 원형 그대로는 아니다. 원래의 전시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그림이 너무 큰 탓에 이 과감한 군인들은 화가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그림의 일부를 잘라서 불태워버렸다. 이런 반달리즘의 결과 그림은 전혀 비례가 맞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그림이 전시된 방은 대형 토탄 난로로 난방을 했다. 토탄의 연기로 그림에 두꺼운 검댕이 덮여 세월이 흐르자 그림은 까맣게 변했다. 심지어 18세기에는 그 그림이 한밤중의 출병을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대낮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 「야경(The Night Watch)」이라는 해괴한 제목이 붙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이 작품은 지금도 원래의 장소에 그대로 걸려 있다. 피부 바로 아래 피가 흐르는 게 보일 듯한 렘브란트의 누드화에 못지않게 생동감이 넘치는 그림이다. 렘브란트는 그의 의도를 밝히지 않았다. 아마 그는 우리 예술사에 자주 등장하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빛과 어둠, 즉 명암을 뜻하는 말인데, 음악으로 치면 음의 강약을 뜻하는 피아노포르테와 같은 의미다.)라는 용어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키아로스쿠로는 원래 목판화의 용어로서, 어떤 부분은 매우 어둡게, 다른 부분은 매우 밝게 인쇄해 명암의 대비로 보기 좋은 배색을 이루도록 하는 기법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시대 이후 화가들은 키아로스쿠로를 통해 그림의 주제가 여백으로 둘러싸인 듯한 질감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중세의 그림들은 대부분 인물이 너무 단조로워 만족스럽지 못했다. 마치 인물이 배경에 딱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레오나르도 이후 모든 화가들은 인물을 배경에서 해방시켜 무대 위의 배우처럼 사방에 여백을 두고 독자적으로 존재하도록 보이게 하려고 노력했다.
렘브란트는 이 기법에 능한 대가였다. 「야경」을 보면 그림 속으로 곧장 걸어들어가 깃발을 든 남자와 수탉을 든 소녀 사이를 통과해 지나갈 수 있을 듯한 느낌이다. 훌륭한 작품이다. 바꿔 말하면 그런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을 지닌 사람이 보기에 훌륭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후원자들이 보기에는 전혀 훌륭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림 값을 똑같이 나누어 지불하기로 약속했지만, 전경에 뚜렷이 보이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잘 보이지 않는 인물도 있었다. 기분이 상한 그들은 "대표 없이 과세 없다!"고 소리치며 돈을 지불하지 않으려 했다.
이 사건은 많은 뒷말을 낳았다. 그 때문에 렘브란트는 앞으로 단체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꼴사나운 분쟁의 와중에 아내 사스키아가 아들을 낳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허세에 가득 찬 남편을 깊이 사랑했다. 그래서 자신의 애정을 보여주고 남편의 성실함을 믿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들 몫으로 돌아갈 돈을 관리하는 유언 집행인으로 렘브란트를 지정했다. 그것은 렘브란트의 파멸을 빚었다.
그는 어린 아들을 위해 아이 보는 사람을 고용했다. 그는 일본의 판화가 호쿠사이(北齋)처럼 그림에 미친 사람이었다. 때로는 몇 주일 동안이나 작업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으며, 옷을 갈아입거나 음식을 먹지도 않았다. 이따금 소파에서 몇 시간씩 눈을 붙이는 게 고작이었다. 마침 그는 농부 출신의 성실한 젊은 여자를 발견했다. 자기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해야 할 일은 본능적으로 아는 여자였다. 그녀는 요리사, 가정부, 보모, 모델을 겸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렘브란트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그의 아이를 낳았다.
암스테르담 전체가 경악하면서도 한편으로 기뻐했다.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주제인 '간통한 여자'가 현실에 나타난 것이다. 흥미로운 일이었으나 엄숙한 칼뱅파 목사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모든 목사들이 설교를 할 때마다 렘브란트의 새 아내인 헨드리키에 스토펠스(Hendrickje Stoffels)를 비난했다. 도시가 온통 야단법석이었다. 렘브란트는 이제 누구에게서도 주문을 받지 못할 게 확실했다.
채권자, 약속어음을 가진 고리대금업자, 1차, 2차, 3차 저당권자들이 맹렬하게 먹이를 덮쳤다. 1657년, 누구보다 그림을 잘 그린다고 자신했던 거장 렘브란트의 집은 빚으로 넘어가고, 가구와 그림, 에칭이 모두 팔렸다. 첫 아내 사스키아와 함께 명성을 누렸던 화려한 시절을 되새길 만한 것은 모두 팔렸다. 렘브란트와 아들 티투스, 헨드리키에 스토펠스와 그녀의 어린 딸 코르넬리아는 교외의 싼 집으로 옮겼다. 거기서 가족은 빚으로 생활하면서(렘브란트의 옷, 헨드리키에의 냄비까지 경매되었다.) 새로운 출발을 준비했다.
렘브란트는 이제 생애의 제3장에 도달했다. 당사자가 불행을 극복할 만큼 강인한 힘을 지녔다면 이 장은 모든 위대한 예술가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제1장에서는 자신을 발견한다. 세상에는 온갖 것들이 있고 이루지 못할 게 없다. 제2장에서는 최고의 명성을 얻는다. 성공한 예술가는 의기양양하게 외친다. "운명의 여신이여, 내가 간다! 어디 한번 해보자꾸나!" 그러나 운명의 여신이 가장 좋아하는 게 바로 우쭐대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조심하지 않으면 운명의 여신은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해온다. 어느 맑은 날, 느닷없이 맹렬한 폭풍이 불어닥치면 당하는 사람은 몸을 휘청거리며 방향을 잃고 제 자리에 서 있기도 힘들어진다. 하지만 그 위기를 넘기면 다른 방식으로는 얻을 수 없었던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 우선 허세가 없어지고, 성공의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수치심과 허식을 벗어던지고 생애 최고의 일을 하게 된다. 이제 그가 만족시켜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밖에 없다.
렘브란트는 생애의 제3장이자 마지막 장을 화려하게 끝맺었다. 이 시기 12년 동안 그린 회화와 거의 삶의 마지막까지 제작한 에칭에는 예전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정신적 특성이 담겨 있다. 16세기의 기준으로 보면 렘브란트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교회에 가지 않았고, 어느 종파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80년에 걸친 오랜 전란으로 수가 크게 늘어난 빈민, 장애인, 맹인 등이 그의 연필과 붓의 충직한 동료가 되었다. 렘브란트는 그들에게 적절한 배경을 주기 위해, 그 시대의 세태에 어울리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성서의 옷을 입히고, 레이덴의 어린 시절부터 익숙했던 신약과 구약에 나오는 인물들 같은 기품을 부여했다.
이따금씩 그린 초상화에서도 마찬가지 변화를 볼 수 있다. 초상화의 주문은 무척 드물었다. 그가 죽기 5년 전에 그린 피복업자 길드 조합원들의 단체 초상화가 그중 하나였다. 이 그림도 고객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그것은 색다른 그림이었다. 비싼 돈을 주고 부탁한 그림이라면 의뢰인은 당연히 '보기 좋은 모습'을 기대할 권리가 있지만, 그 그림에서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야경」처럼 그 작품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가 최근에 복원되었다. 우리는 렘브란트가 말하고자 한 것을 다시 한 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그림은 탁자를 중심으로 앉아 있는 다섯 명의 성실한 포목상을 묘사할 뿐이다. 그들은 그저 성실한 포목상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 완전히 만족하고 있다.
그 뒤 렘브란트는 모델이 없어 자화상을 그리거나 딸, 아들, 아내를 자주 그렸다. 이 그림들은 대부분 지금도 남아 있다. 그는 왜 그런 처지가 되었을까? 알 수 없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은 분명히 아니었다. 아마 사람들은 그런 그림을 약간 두려워한 듯하다. 그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너무 개성이 강한 탓에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그림, 조각, 음악이 있다. 그런 그림의 내적인 특징은 단지 물감과 캔버스로 창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특징을 흔히 '렘브란트의 빛'이라고 부르며, 그 거장이 발명한 일종의 교묘한 기법이라고 말한다. 사실 그것을 기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그 빛을 공식처럼 만들었는데, 그 공식은 너무 간단해 오히려 아무도 흉내를 내지 못했다.
그 유명한 공식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 공식은 어둠이란 빛의 또 다른 형태이며, 모든 색채는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음처럼 진동의 법칙에 따른다는 깨달음이었다. 그 전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뿐이다. 현재 암스테르담에서 볼 수 있는 만년의 작품인 아들과 며느리의 초상화(「유대인 신부(The Jewish Bride)」라는 엉뚱한 제목이 붙어 있다.)는 그런 깨달음을 보여준다. 그 작품은 그림이라기보다는 흐르는 빛이다.
이제 몇 사람의 이름을 생각나는 대로 꼽아보자. 작품과 생애까지 이야기하면 너무 길어지니까 생략하기로 한다. 데벤테르의 시의원을 지낸 헤라르트 테르보르흐(Gerard Terborch, 그는 마드리드에서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보았고 펠리페 4세의 환대를 받았다.) 같은 일부 화가들을 제외하면, 대다수는 단순한 장인으로서 목수나 배관공처럼 작업했다. 예전에 화가들은 자체 길드를 조직할 만큼 인원이 충분하지 않아 나막신 제조공 길드에 가입했으나 수가 늘어나면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대장장이나 벽돌공 장인보다 더 큰 부를 모으거나 더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오른 화가는 드물었다. 그래도 작품들은 생산량도 많았고 품질도 뛰어났다.
예를 들면 유명한 델프트의 얀 베르메르(Jan Vermeer)가 그린 그림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음악처럼 투명하고 깨끗하다. 그가 죽은 뒤 파산에 직면한 그의 아내는 남편의 화실에 팔리지 않고 남아 있던 스물여섯 점의 그림들을 처분하려 했다. 파산 재산관리인은 바로 델프트의 시민이자 현미경의 발명자로 유명한 안토니 반 레벤후크(Antonie van Leeuwenhoek)였다. 저명한 과학자이면서도 현실적인 상인이었던 그는 채권자들에게 그림들을 싼값에 사서 자식들에게 물려주라고 설득했으나 헛수고였다. 결국 가엾은 베르메르는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잊혔다. 다음 세기에 그의 그림은 테르보르흐, 렘브란트, 피테르 데 호흐(Pieter de Hooch, 그도 실내 광선을 마술사처럼 처리했다.), 테르보르흐의 수제자인 가브리엘 메추(Gabriel Metsu)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졌다.
적어도 한때는 잘 나갔던 화가로 바르톨로메우스 반 데르 헬스트(Bartholomeus van der Helst)가 있다. 그의 민병대 그림은 렘브란트의 「야경」보다 더 인기가 높았으며, 렘브란트가 명성을 잃은 뒤에는 암스테르담의 부자 상인들이 좋아하는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렘브란트보다 인기가 높았던 또 다른 화가들로는 독일인이지만 평생을 암스테르담에서 보낸 고베르트 플링크(Govert Flinck), 페르디난트 볼(Ferdinand Bol)과 함께 가장 성공한 렘브란트의 제자인 니콜라스 마스(Nicolaes Maes) 등이 있다. 또한 전도가 양양한 젊은이였으나 요절한 카렐 파브리티우스(Karel Fabritius),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인공광선의 효과를 그리려 했던 헤라르트 도우(Gerard Dou)도 유명하다. 얀 스테인(Jan Steen)도 빠뜨릴 수 없다. 기교가 뛰어났던 그는 라블레(Rabelais)의 정신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그림들 중에서 가장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풍경화다. 그 시대의 풍경화는 우리의 응접실이나 식당에도 터줏대감처럼 걸려 있다. 대표적인 풍경화가는 하를렘의 풍경을 아름답게 묘사한 야코프 반 로이스달(Jacob van Ruysdael), 마인데르트 호베마(Meindert Hobbema, 유명한 호베마 가문의 한 사람), 네덜란드의 카날레토(Canaletto)3)에 해당하는 얀 반 데르 헤이덴(Jan van der Heyden) 등이다. 앞의 세 사람은 가난하게 살았지만 얀 반 데르 헤이덴은 운이 좋았다. 그는 소방펌프를 발명해 상당한 돈을 벌었다. 덧붙이자면, 그는 자신의 제품을 직접 광고하기까지 했다. 실은 신통치 않은 발명품이었는데, 그것을 멋진 동판화 연작으로 제작해 새로운 소방펌프가 양동이로 불을 끄는 기존의 어리석은 방식보다 훨씬 낫다고 선전한 것이다.
바다와 하늘의 나라인 네덜란드에서는 해양화가도 풍경화가에 못지않게 인기였다. 알베르트 코이프(Albert Cuyp)와 얀 반 호이엔(Jan van Goyen)은 고향의 바닷가를 주로 그렸다. 반 데 벨데(van de Velde) 부자(둘 다 이름이 빌렘이었다.)는 먼 바다의 그림이 특기였는데, 명성이 외국까지 전해져 잉글랜드의 초대를 받았다.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는 그들에게 100파운드씩 연금을 주면서 잉글랜드 함대의 해전 장면을 그리게 했다.
렘브란트가 1669년에 죽은 뒤 곧바로 회화의 역사에서 찬란한 한 장이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화파가 끝나고 있었다. 한동안 빌렘 반 미리스(Willem van Mieris), 아드리안 반 데르 베르프(Adriaen van der Werff), 카렐 뒤자르댕(Karel Dujardin, 파울루스 포테르(Paulus Potter)의 제자로서 가장 뛰어난 동물 그림으로 평가되는 소 그림을 그렸다.) 등이 전통적인 양식을 고수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인들의 적절한 표현에 따르면, 그들의 작품에서는 음악이 나오지 않았다. 그 신묘한 불꽃은 꺼져버렸다.
처음에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 너무 험난한 탓에 침묵공 빌렘 같은 사람조차 마지막 결과를 포기할 정도였다. 결국 승리를 쟁취했으나, 그와 더불어 예상치 않게 무역이 급팽창하자 갑작스럽게 얻은 부를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아무도 몰랐다.
저항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던 젊은 세대는 애써 노력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회계사무소에서, 배의 갑판에서, 화실에서, 먼 열대 지방 섬의 작고 외딴 요새에서 늘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평범하고 정직한 상인, 견실한 시민에 만족했으며, 두 다리로 굳건히 대지를 밟고 상식에 따라 살고자 했다. 임시변통으로 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익이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으면 그다지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그런데 그 후손들은 시골의 멋진 별장을 사들이고, 아내와 딸과 아들은 우아한 안토니 반 다이크의 그림에 나오는 선남선녀들을 흉내 내려고 안달이었다. 마치 오늘날 일본인과 중국인이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처럼 되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다만 그때는 할리우드가 베르사유였고,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역할을 특별한 배우의 소질을 가진 한 사람이 도맡은 게 달랐다.
그의 이름은 루이, 조상 대대로 왕위를 물려받은 열네 번째 루이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렘브란트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반 룬의 예술사, 2008. 5. 6., 도서출판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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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정보 3 === <2010년 5월 6일 네이버캐스트 / 미술평론가 김진희 글>
화가의 생애와 예술세계
렘브란트 Rembrandt Harmensz, van Rijn
스페인과의 독립 전쟁에서 승리해 개신교 공화국이 된 네덜란드의 17세기는 전무후무한 황금시대(The Golden Age)이자, (1970~1971년 파리에서 열렸던 전시 제목처럼) ‘렘브란트의 세기(Le Siecle de Rembrandt)’였다. 네덜란드 자체가 ‘렘브란트의 나라’로 불릴 정도이니, 렘브란트라는 이름은 한 시대와 나라를 상징하는 크기를 갖고 있다. 그는 역사화, 초상화, 풍경화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고 유화, 판화, 드로잉 등 회화의 모든 매체를 사용해 ‘렘브란트의 빛’으로 조명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렘브란트 하르멘스존 판 레인(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 ~ 1669)은 당시 네덜란드에서 암스테르담다음가는 공업도시이자 대학도시였던 레이덴의 중산계급 출신이다. 그의 조상이나 형제·자매 중 미술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은 없고, 부친과 조상은 제분업에 종사했다. 그는 라틴어 학교를 거쳐 레이덴대학에 등록했으나 얼마 다니지 않았고, 화가 스바넨부르흐(Jacob van Swanenburgh)에게 그림 수업을 시작하여 그의 도제(徒弟)로 3년을 보냈다. 이후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당시에 가장 유명했던 역사화가 피터 라스트만에게서 6개월간 그림을 배운 뒤, 1626년부터 레이덴에서 독자적인 작업실을 운영했다. 1631년에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여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작업했다.
1630년대 초부터 그는 부친의 이름을 나타내는 ‘하르멘스존’과 집안의 제분소가 라인 강변에 있어서 만들어진 성인 ‘판 레인’을 빼고, 세례명인 ‘렘브란트’만으로 서명한다. 이는 그가 모델로 삼았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처럼 세례명으로 알려지기를 원했던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개신교 공화국 시민계급의 초상
초기부터 렘브란트의 야심은 역사화가가 되는 것이었으나 개신교 공화국이었던 네덜란드에는 종교나 역사, 신화 주제의 대작을 주문할 교회나 궁정이 없었다. 미술품의 주요 수요자는 네덜란드의 시민, 즉 상인을 중심으로 한 중산계급이었다. 활동 초기의 렘브란트는 이러한 고객의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렘브란트에게 처음으로 초상화를 주문한 니콜라스 루츠(Nicolaes Ruts)도 러시아와 모피 무역을 하던 사업가였다. 1631년에 그린 [니콜라스 루츠의 초상]에서 모델의 직업과 부를 상징하는 모피 의상, 편지를 들고 몸을 살짝 돌린 기민해 보이는 자세, 신중하고 능동적인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는 표정으로 화가는, 그때까지 그려지던 왕이나 귀족의 위세 초상(swagger portrait)과 완전히 다른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렘브란트는 새로운 계급 즉 부와 겸양을 함께 갖춘 프로테스탄트 부르주아 초상의 유형을 성공적으로 창조해 낸 것이다. 이 작품은 후에 J.P. 모건이 구입하여 ‘영웅으로 묘사된 사업가’의 이미지가 동업의 후예에게 가진 호소력을 증명하기도 했다.
마르텐 솔만스(Maerten Soolmans)와 오프옌 코피트(Oopjen Coppit)의 초상은 렘브란트가 그린 개인 초상화 중 가장 큰 작품들이다. 남자는 (관람자가 보기에) 왼쪽, 여자는 오른쪽에 걸게 되어 있던 부부 초상화인데, 다른 중산층 부부 초상화와 달리 서있는 전신이 실물크기로 그려져 있다. 전통적으로 서있는 전신 초상화는 왕과 최고위층의 대신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기 때문에, 이 그림의 크기와 모델의 자세로 이 상인 부부의 막대한 부와 명성, 자부심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보이듯 인물의 사실적인 묘사, 음영의 뚜렷한 대조, 엄청나게 큰 솔만스의 구두 장식을 비롯해 다양한 옷감으로 이루어진 의상의 완벽한 재현은 당시에 렘브란트를 가장 주목 받는 초상화가로 만든 요인이었다.
역사화가 된 그룹 초상화
최고의 초상화가로서 렘브란트의 입지를 다지게 한 작품은 그가 처음으로 그린 그룹 초상화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Anatomy Lesson of Dr. Nicholaes Tulp]다. 직업 조합이나 자치 단체에서 주문했던 그룹 초상화는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정수를 드러내는 장르였다. 그룹 초상화를 주문받는 화가는 군주제에서의 궁정화가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암스테르담 외과 의사 조합이 주문한 조합원의 그룹 초상화인 이 작품에서 렘브란트는 비슷한 그림을 그렸던 당시의 화가들처럼 모델을 화면에 나란히 배치하지 않았다. 모델은 모두 그림의 왼쪽에 모여 있고 화면의 오른쪽은 해부대에 눕혀진 시신과 강의 중인 툴프 박사에게 할애되어 있다. 이러한 비대칭적 구도, 다양한 표정과 각도의 인물의 얼굴이 만드는 다이나믹한 구성은 관람자를 긴장감이 감도는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광원이 분명치 않은, 그림의 내부에서 스며 나오는 듯한 렘브란트 특유의 빛과 어둠의 대조도 원숙한 경지에 접어들어 깊숙한 공간감과 구성의 효과를 더욱 높이고 있다. 렘브란트는 그룹 초상화에 역동적인 구성과 이야기를 도입하는 혁신을 통해, 오늘날의 졸업사진처럼 인물을 의미 없이 배치했던 당대의 그룹 초상화 전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야간순찰) The Militia Company of Captain Frans Banning Cocq(Night Watch)]는 렘브란트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하고 가장 큰 작품으로, 그룹 초상화에 렘브란트가 불어넣은 역사화와 같은 역동적인 힘과 드라마를 잘 보여주는 걸작이다. 작품은 새로 지어진 화승총부대의 회관을 장식하기 위한 그룹 초상화들 중 하나이다.
모델은 바닝 코크와 부관인 반 로이텐부르흐, 그리고 16명의 부대원이었으나 렘브란트는 이들을 기념사진 찍듯이 같은 복장으로 나란히 세워 그리지 않았다. 그는 부대원 외에 십여 명의 외부인과, 민병대의 상징인 닭을 매단 소녀와 같은 우의적 인물을 추가했다. 화가는 저마다 다른 복장의 대원들이 각자 다른 동작으로 화면 뒤에서 앞으로 걸어나오면서 대열을 정비하는 혼란스럽고 시끄러운 순간을 화면에 담았다. 그는 이 행렬의 활력넘치는 생동감을 살리면서 강렬한 빛으로 화면을 정돈하고 있다. (밤 장면이 아닌 이 그림에 ‘야간순찰’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은 시민군이 야간에 순찰을 하기 시작하고 그림에 노란 유약이 칠해지면서 더욱 어둡게 변한 1800년경이다.)
암스테르담의 시민군은 14세기에 조직된 것으로 이 도시의 독립과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전통적으로 성문을 지키고 치안을 담당했던 이들은 17세기경에는 일요일마다 시가지를 행진하는 형식적인 모임이 되었다. 이 그림에는 귀족처럼 차려입은 사람도 보이나 시민군 대부분은 부유한 상인들이었다. 렘브란트는 이 작품에서 초상화와 우화, 그리고 역사를 결합하여 이를 이 시대 네덜란드를 기록한 역사화가 되게 한 것이다.
모델과 함께 느끼는 화가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종교화의 주문이 거의 없었음에도 렘브란트는 종교화를 끊임없이 그렸다. 초기에 그는 자신과 가족들을 모델로 한 트로니(tronie)를 많이 그렸다. 트로니는 당시 네덜란드 미술 고유의 장르로, 주문 받아 그리는 초상화가 아니라 화가가 제작하여 일반적인 제목을 붙였던 인물화다. 대부분 얼굴에 뚜렷한 감정과 특징을 드러내면서, 색다른 의상을 입고 있는 경우가 많다. 경매 중독이라고 할 정도로 열정적인 수집가였던 렘브란트는 이국적이고 진귀한 수집품을 트로니를 그리는 데 자주 사용했다. 렘브란트에게 트로니는 초상화와 역사화, 특히 종교화의 중간 지점에 있는 그림이었다.
[눈이 머는 삼손 Blinding of Samson]은 렘브란트의 종교화 중 이례적으로 ‘바로크적’인 격정을 담은 그림이다. 그는 구약 시대의 삼손이 데릴라에게 속아 힘의 원천인 머리카락을 잘리고 불레셋 군인들에게 눈이 뽑히는 순간을 포착했다. 잔인한 폭력의 묘사, 대각선의 구도,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가 연극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이런 극적인 양식의 그림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지만, 이상화되지 않은 현실적인 인물들과 등장인물의 감정을 화가가 함께 느끼는 듯한 친밀함과 인간애는 이후 렘브란트의 작품들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특징이다.
렘브란트의 누드화에도 이상화된 미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얼굴과 손발을 가리거나 생략한 다른 화가의 누드들과 달리, 그의 누드 속 여성은 대부분 얼굴이 공들여 그려져 있다. 구약 성서의 인물로 다윗 왕의 아내가 되는 밧세바(Bathsheba)를 그린 작품에서도 여성의 얼굴과 표정이 세심하게 그려져 있다. 목욕 중에 다윗의 편지를 받아 든 밧세바는 당시에 유부녀였던 까닭에 깊은 갈등에 잠겨 있다. 성서를 주제로 한 수많은 그림이 그려졌지만 이처럼 밧세바를 고뇌하는 여인으로, 여성 누드를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그린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노인, 장애인, 거지, 부랑자 등 결함 있는 인물들을 즐겨 그렸고 그 그림들에서 그려지는 대상에 연대감을 가졌던 렘브란트의 시선은 사람뿐 아니라 동물에게까지 미쳤다. 네덜란드에서 죽은 동물은 장르화의 부엌 장면에 자주 등장해 왔으나 렘브란트의 [도살된 소 Slaughtered Ox]에서처럼 단독으로 그림의 주제가 된 적은 없었다. 거꾸로 매달려 있는 황소의 시신은 잔인하다고 할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단순한 부엌 정물화를 대할 때처럼 그림을 편안히 감상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특징은 섕 수틴과 같은 표현주의적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비슷한 작품들을 낳기도 했다.
진실을 말하는 얼굴, 자화상
사람들이 렘브란트에 익숙한 이유 중 하나는 ‘그려진 자서전’이라고 할 정도로 수가 많은 그의 자화상 때문이다. 초기에 그는 표정 연습과 역할 연기적 성격의 자화상, 판매를 위한 트로니 성격의 자화상들을 그리다가 말년에는 오로지 화가로서의 자신을 탐색하듯 응시하는 자화상만을 그렸다.
1640년에 그린 자화상은 성공한 30대 화가의 지위와 야심을 보여준다. 구도에서 라파엘로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와 티치아노의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렘브란트가 라파엘로, 티치아노뿐 아니라 그들의 모델과도 경쟁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르네상스 시대의 전형적인 궁중 대신 카스틸리오네와, 같은 시대의 시인인 아리오스토를 참조함으로써 화가는 자신이 초상화를 주문한 저명인사와 사회적 신분이 동일하고, 손의 예술로만 여겨져 왔던 그림이 정신적 예술인 시와 동등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부와 명예를 누렸던 렘브란트는 규모 없는 생활로 1656년에 파산을 하고 만다. 집과 작품, 수집품들을 처분해야 했고, 자기 그림을 맘대로 팔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던 말년의 십여 년 동안 렘브란트는 정면을 향하고 있는 자화상을 집중적으로 그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려진 작품 중의 하나인 1659년의 자화상에서는 아무런 가장 없이, 얼굴과 눈빛만으로 위엄을 전달하는 화가의 모습이 화면 밖으로 살아 나올 듯 생생하다.
1642년에 죽은 아내 사스키아 대신 아들 티투스를 키워주고 딸 코르넬리아를 낳았던 헨드리케도 1663년에 죽었고, 1668년에는 티투스도 세상을 떠났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갈수록 심해져 1662년에는 사스키아의 묘지터까지 팔아야 했다. 화가는 가족과 재산과 명예를 잃었지만 그림을 멈추지는 않았다. 1668년경 그는 자신을 화가로 묘사한 최후의 자화상을 그렸다. 이 작품에서 그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못생긴 노파를 그리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숨이 막혀 죽었다는 화가 제욱시스(Zeuxis)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림 표면은 거칠고 자유분방해졌고 화가는 웃음만 남긴 채, 어둠 속으로 휘발되어 사라져 버릴 듯한 모습이다.
평생 외국 여행을 한 적이 없었던 렘브란트의 작품과 명성을 암스테르담 밖으로, 네덜란드 너머로 알린 것은 그의 판화였다. 그는 에칭, 드라이포인트, 인그레이빙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채색된 드로잉이나 회화의 느낌이 날 정도로 자연스럽고 유려하며 풍부한 효과를 내는 판화를 제작했다.
고전주의적 규범이 지배한 18세기에 렘브란트의 거친 사실주의는 아카데미의 변방에 머물 수밖에 없는 규칙의 파괴로 보여 평가절하되었다. 19세기에 들라크루아 같은 낭만주의 작가들이 그를 재발견했고, ‘대중들로부터 외면받는 고독한 예술가’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현대의 대중이 선호하는 표현주의적 화풍을 가진 대부분의 예술가들처럼 렘브란트의 인생에 대해서도 근거 없는 ‘문학’이 많이 덧붙었다.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해서는 확실한 사실이 많지 않고, 위작이 너무 많아 정확한 작품 숫자조차 파악이 안 되고 있는 실정이다. 네덜란드 정부의 기금으로 1968년에 만들어진 ‘렘브란트 조사 계획(Rembrandt Research Project)’은 그의 그림으로 알려진 모든 작품을 대상으로 진위를 검토하고 그 결과를 [렘브란트 회화 전집 A Corpus of Rembrandt Paintings]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로 발표해 왔다. 2005년에 4번째 보고서가 나왔고, 그의 진짜 ‘전집’을 확정하기 위한 조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렘브란트 [Rembrandt Harmensz. van Rijn] (화가의 생애와 예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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