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다산기행 감상문
글쓴이 : 이혜숙(소설가, 이대 국문과)
다산의 발자취를 찾는 답사 여행은 7월 9일 아침 7시 경, 양재동 구민회관 앞에서 버스가 출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일행은 30여명 남짓. 엄마와 함께 온 초등학생도 있었고, 직장에 휴가를 내고 참가했다는 20대 신혼부부, 정년퇴직한 공무원과 회사 운영자, 30대의 출판사 여직원과 50대 중년 부부까지 남녀노소가 총 망라된 데다가 하는 일도 가지가지였다. 평소 같으면 아직 잠자리에 들어있을 이른 시간에 엄마 손을 잡고 따라나온 초등학생 꼬마들의 초롱한 눈빛이 새벽하늘에 떠 있는 별빛 같았다.
첫 도착지는 남양주의 다산유적지. 신 새벽에 길을 떠나 모두들 빈속인 것을 배려한 듯, 아담한 한정식집에서 아침 식사부터 했다. 간단한 요기 수준이 아닌 아니 ‘밥 따로, 국 따로'의 정식 밥상을 받고 누군가 감동(?)의 일성(一聲)을 내놓았다. “답사여행이라면 나도 꽤 따라다녀 본 셈인데 이렇게 정식으로 아침 밥상부터 받아보긴 처음이네.” 라고.
다산의 생가와 묘역, 기념관과 문화의 거리 등으로 잘 정돈된 다산 유적지를 돌아본 다음수원의 화성(華城)으로 갔다.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면서 성곽을 한 바퀴 도는 동안, 화성이 다산의 과학적인 축성법과 예술적 감각이 잘 조화된, 견고하고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성임을 한 더 실감했다. 게다가 축성의 계획, 제도, 법식과 동원된 인력의 인적 사항, 성을 쌓은 재료의 출처와 용도, 공사일지 등의 기록이 『화성성역의궤』라는 한 권의 책으로 완벽하게 남아 있다지 않은가.
그 덕분에 화성은 1997년 12월에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 유산에 등록될 수 있었다. 원래 문화재의 경우, 세계문화유산에 등록이 되려면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야 하는데, 화성은 몇 번의 전란을 거치면서 무너져 보수한 곳이 많지만 『화성성역의궤』라는 완벽한 기록 덕분에 원형 그대로를 재현할 수 있어서 등록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산은 화성을 축성하면서 무거운 돌을 들어 운반할 수 있는 ‘거중기'와 ‘녹노'라는 두 가지 기계를 발명해 씀으로서 공사비를 4만 냥이나 절약할 수 있었다 한다. 다산이 그런 기계를 발명한 데에는 단지 물자를 절약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이 덜 힘들고 안전하게 일하게 해주려는 마음도 담겨있지 않았을까?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합쳐진 결과가 기계의 발명으로 나타났을 것만 같다.
다산과 혜장 그리고…
일행을 실은 버스는 화성을 떠나 서해안 고속도로를 4시간 이상 달려서 다음 목적지인 해남에 도착했다.
지나치는 길목마다 무리 지어 피어있는 보라색 도라지꽃, 주황색 나리꽃, 진분홍색 접시꽃이 눈에 싱그러웠다. 대흥사 근처의 민박집에 여장을 풀고, 남도 특유의 가지가지 맛깔스런 반찬과 토종 돼지고기 숯불구이가 민박집 주인의 인심만큼이나 푸짐하게 곁들여진 저녁밥을 포식한 후에 찐 감자와 옥수수, 수박을 나누노라니 일행은 어느새 십년지기처럼 다정해졌다.
이튿날 일정 역시 새벽 6시에 시작되었으니, 아침밥도 먹기 전에 버스에 몸을 싣고 대흥사로 향한 것이다. 대흥사는 해남군 삼산면 두륜산 중턱에 있는 큰 절로 우리나라 31 본산(本山) 중의 하나인데 다산의 발자취를 따라 길을 떠난 우리 일행에겐 혜장(惠藏) 스님의 존재 때문에 더 의미가 있는 절이기도 했다. 다산으로부터 아암(兒菴)이란 호를 지어 받기도 한 혜장 스님은 강진 유배 시절의 다산에게 소중한 글벗이 되어 주었던 분으로, 대흥사에 있는 혜장 스님의 탑에는 다산이 혜장 스님의 입적을 애도하며 지은 탑명(塔銘)이 새겨져 있다.
절 입구로 들어가는 넓은 길 양쪽에는 아름드리 노송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적어도 몇 백 년은 되었음직한 그 나무들은 다산과 혜장 스님이 함께 거닐며 학문과 예술을 논하던 모습을 보았으려니. 일행과 함께 걷고 있던, 연구소 소장이신 박 석무 선생께서 문득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수학여행을 와서 이 절에 들렸었다”고 이야기를 꺼낸다. 누군가 지금 다시 오게 된 소감을 물으니 “그 후로 나는 이 절을 여러 번 와 봤어요. 그러니 지금 새삼스런 느낌이랄 것은 없고, 내가 그때 수학여행을 마치고 돌아가서 교지에 기행문을 썼는데, 수학여행 버스를 타고 이 근처까지 왔을 때 밭에서 일하던 처녀들을 보고 손을 흔들었더니 모두들 수줍어하며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던 광경을 인상깊게 썼던 기억이 나요. 요즘 여자들 같으면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을 텐데 그땐 그렇게들 순박하고 수줍음이 많았던 거예요.”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소박한 차림새의 40여년전 농촌 처녀들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는 듯하다. 그들의 모습과 행동은 다산이 살았던 시절의 처녀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만 같다. 짙은 화장에 배꼽이 훤히 드러나는 옷차림으로 지하철 속에서라도 더벅머리 남자 친구의 손길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는 요즘 젊은 여성들. 그들의 치장 솜씨가 아무리 세련되었다 해도 그 옛날 호미자루를 쥐고 밭에서 김을 매던 처녀들의 수줍음 속에 피어나는 자연미만은 결코 따라 잡지 못할 터이다.
대흥사 경내의 산비탈을 한참 올라간 곳에 있는 일지암은 다산이 초의(艸衣) 선사와 함께 앉아 차를 마시던 곳이다. 우리 일행이 찾아가니 암자를 지키던 스님이 암자 앞의 약수물로 차를 끓여서 한 잔씩을 따라 주었다. 차에는 이제 막 아침 햇살을 받고 깨어나는 숲의 공기처럼 맑은 향기가 어려 있었다. 답사를 떠난 때가 마침 장마 도중이라, 떠나기 전날까지 비가 내렸는데 답사 기간 이틀 동안은 일행들의 머리 위에 이슬비 한 방울 흩뿌리지 않은 것도 어쩌면 다산의 음덕이나 아니었을지.
"못과 누대 초라해도 이만하면 살만하지"
대흥사에서 내려와 어제 묵은 민박집에서 아침을 먹은 후에 고산 윤선도의 고택인 녹우당에 들렀다. 다산의 어머님인 해남 윤씨가 고산의 후손이니, 다산의 외가를 찾은 셈이다. 유적지 뒷산의 500년 된 비자나무 숲은 천연기념물 241호로 지정이 되어있고, 사적 167호인 녹우당을 비롯해서 선조인 어초은과 고산의 사당, 추원당 등의 건물과 고산 유물관에 보관 중인 윤 공재 자화상을 비롯한 다수의 보물들까지, 고산 유적지 한 곳만으로도 하루 일정의 여행으로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해남의 윤선도 고택에서 강진의 다산 초당까지는 버스로 약 40분 거리였다.
다산 초당은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와서 살았던 18년 중의 후반 10년을 보낸 곳이며 『목민심서』를 비롯한 많은 저술이 이루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다산 초당은 원래 해남 윤씨들의 정자였는데 윤씨들의 호의로 다산이 와서 거처하게 된 것이라 한다. 다산은 이곳이 매우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손수 대(臺)를 쌓고, 못을 파고, 꽃나무를 심고, 물을 끌어다 폭포를 만들고, 동쪽 서쪽에 두 암자를 짓고, 서적 천여 권을 쌓아두고 글을 지으며 스스로 즐겼다는 것이다.
사는 곳 정처 없이 안개 노을 따라다니는 몸
더구나 다산이야 골짜기마다 차나무로다.
하늘 멀리 바닷가 섬에는 때때로 돛이 뜨고
봄이 깊은 담장 안에는 여기저기 꽃이로세.
................중략................
못과 누대 초라해도 이만하면 살만하지
(박석무 번역)
다산이 다산 초당에서 지내며 처음 지었다는 이 시 귀절만 보아도 당시 다산이 초당 안팎을 가꾸고 사랑하던 정경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 그 흔적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다산이 거처할 때 초당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암자를 지어 동암과 서암이라 했다는데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는 건물들은 1950년 대 이후 다산 초당을 복원하고 보수할 때 새로 지은 것이라 한다.
초당 옆에 만들어진 연못은 다산이 그 자리에 손수 만든 것이라지만 그것도 해방 후에 보수를 잘못 해서, 원래 가득 차야 할 물이 지금은 제대로 고이지를 않는다고. 또 다산이 쓴 기록에는 초당 아래 가파르지 않은 언덕에 사다리 모양의 밭을 개간해서 미나리를 심고 인공연못에서 흐르는 물로 길렀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 역시 남아 있지 않았다. 현재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초당 뒤 석벽에 새겨진 ‘정석(丁石)' 두 글자와 마당 가운데 차를 달일 때 쓰였다는 ‘다조'라는 넙적 돌 정도인 것 같았다.
암자 뒤쪽으로 올라가니 벼랑 위로 내밀게 지어진 천일각이란 누각이 있다. 잠깐 들어가 내려다보니 저 밑에 골짜기와 숲을 건너 아득히 강진만 구강포가 내려다보인다. 하지만 이 건물은 다산 당대의 것이 아니라 50년 대 이후 두어 차례 초당을 복원하고 보수할 때 새로 지은 것이라 한다. 어쩐지 주변 풍광을 무시한 채 혹처럼 붙어있는 모양이 초당의 소박하고 고아한 느낌과도 어울리지 않더라니. 그 자리는 아마도 다산이 아침저녁으로 오르내리며 멀리 바다 쪽을 바라보고 흑산도에 유배 당한 사랑하는 형님 정약전과 돌아갈 기약 없는 고향을 그리던 바로 그 자리일 것이다. 그 쓸쓸하고 울울한 심사에 누각은 차라리 사치였을 것이니, 다산의 당시 심경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라도 누각은 세우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사족을 붙여서 오히려 유적지를 훼손하고 있는 셈이 아닌가.
이튿날 일정 역시 새벽 6시에 시작되었으니, 아침밥도 먹기 전에 버스에 몸을 싣고 대흥사로 향한 것이다. 대흥사는 해남군 삼산면 두륜산 중턱에 있는 큰 절로 우리나라 31 본산(本山) 중의 하나인데 다산의 발자취를 따라 길을 떠난 우리 일행에겐 혜장(惠藏) 스님의 존재 때문에 더 의미가 있는 절이기도 했다. 다산으로부터 아암(兒菴)이란 호를 지어 받기도 한 혜장 스님은 강진 유배 시절의 다산에게 소중한 글벗이 되어 주었던 분으로, 대흥사에 있는 혜장 스님의 탑에는 다산이 혜장 스님의 입적을 애도하며 지은 탑명(塔銘)이 새겨져 있다.
모두가 다산교(茶山敎)의 신자
백련사에서 다산의 발자취 찾기는 끝이 난 셈이지만, 서울로 출발하기 위해 강진 읍내로 나와서 점심을 먹고 떠나기 전에 영랑 생가까지 들렀으니 이틀 동안의 아침부터 저녁까지를 한시도 허투루 쓰지 않은 일정이 되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일행 한 사람 한 사람이 소감을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 경우에 흔히 듣게 되는 틀에 박힌 소감을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들 자신이 처한 입장이나 상황에 따라 다산을 이해하고 받아드리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으니, 모두가 다산교(茶山敎)의 신도가 되어버린 것 같다는 점이었다. 이제 각자 일상으로 돌아간 후에도 답사의 소감을 말하던 그 순간처럼 다산의 정신을 잊지 않고 산다면 우리 모두는 세상의 어두운 곳을 밝히는 한 자루 촛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필자 이혜숙 /
1947년 서울에서 출생 / 1982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모집에 당선 / 그 동안 <바람 속의 얼굴들>과<마음이 하는 일> 두권의 소설집과, 장편소설 <먼 길 위의 약속>을 펴냈음. / 최근에는 창비사의 어린이 고전 시리즈로 <토끼전>과 <도깨비 손님>을 출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