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8.주일낮예배 설교
*본문; 롬 6:15~23
*제목; 로마교회에 보낸 사도바울의 편지(11) 당신은 예수님을 믿으려고 무엇을 잘랐습니까?
1. 구원과 구원받은 삶
구원은 단숨에 일어납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우리는 구원의 자격을 얻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삶, 구원에 합당한 삶은 단숨에 일어나기도 하고, 점진적으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는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에 따라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고백하는 순간 성령이 폭포수처럼 쏟아져서 “변하여 새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예수를 고백하고도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니 자꾸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게 됩니다. 당연히 구원받은 자의 삶에는 너무도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을 사탄은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그의 고백조차 빼앗아가 버립니다. 고백이 없다면 당연히 구원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받은 유일한 조건이 바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고백하고도 “변하여 새 사람”이 되지 못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는 끊임없이 이를 고백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내 삶의 모양이나 느낌을 붙잡으려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말씀을 구원의 근거로 붙잡아야 합니다. “말씀이 그러하다 하면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실한 말씀을 붙잡고 살아갈 때, 어느 날 말씀이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어지니 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통치함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천국)”입니다.
이를 통해서 나중에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도, 우리는 이미 천국을 소유하고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왜 여전히 변화하지 못하는가?
그런데 이 역사하심(믿어지고, 순종하고, 하나님 나라 통치하심 속에 들어가고,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습니다.
예수를 고백한 지 혹은 믿은 지 수 년 혹은 수십 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죄값은 완전히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선포하고 믿지 못해서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삽니다. 그리고 나서는 ‘회개와 용서’를 반복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값을 완전히 해결하시고, 우리가 이렇게 살기를 바라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종’, ‘거룩(순종)의 종’으로 살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20~22절’입니다.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 6:20~22)
그런데 왜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한 것은(말씀대로) “고백”하는 순간 구원의 자격을 허락받습니다. 이는 명확하게 이야기하면 “자격의 변화”입니다.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지옥의 백성에서 천국의 백성으로 그 자격이 바뀐 것입니다.
사실 고백도 성령이 하신 역사이지만, 이 후로 성령은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어지게” 하십니다. ‘17~18절’입니다.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 6:17~18)
그리고 당연히 “마음으로 믿어지니” “마음으로 순종하게” 하십니다. 이후 천국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통치하심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자격의 변화” 다음의 “마음의 변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격의 변화”와 “마음의 변화” 사이를 잇는 것은 무엇입니까?
역시 먼저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이 그렇게 하시도록 인도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가길 원하고”, 죄를 쫓아가는 것을 더 익숙하고 편하고 행복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도 너무 중요합니다. “마음의 변화”이 단계는 머리로 입으로 고백하는 것과는 다르게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어지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육체의 유익을 놓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면 손해 보게 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것이 싫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라고 핑계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 못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진짜 힘듭니까? ‘시 84:5’을 봅시다.
“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 84:5)
여기에 보면 “시온의 대로”라고 표현합니다.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생기면 시온(하나님, 천국)으로 편안하게 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위해 주께 힘을 얻어야 하는데, 주님은 주시는데,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포기해야 할 무엇인가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사실 포기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일본에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설교 전 특송 순서가 있었는데, 덩치가 산만한 세 남자가 나와 특송을 하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 온 몸에는 문신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목사님 표현에 너무 찬양을 잘하는 데, 그들을 보니 무섭더라는 것입니다. ‘눈을 감으면 은혜가 되고, 눈을 뜨면 시험이 들고’ 그랬답니다.
그런데 이들이 특송을 마치고, 한 사람이 대표로 간증을 하는데 자기들 세 명에게는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모두다 ‘야쿠자’ 출신이고, 두 번째는 다 한국인 아내를 맞이하였고 그들이 크리스찬이라 우리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세 번째는 새끼손가락이 모두가 없다는 것입니다.
새끼손가락이 없는 이유는 아내 따라 예수를 믿고 야쿠자생활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어서 탈퇴하려 할 때, 반드시 자기 스스로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야 탈퇴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같은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믿기 위해서 잘라낸 것이 무엇입니까? 누구를 예수님과 천국을 소유하려고, 손가락까지 직접 잘랐는데 우리는 아직도 죄의 종의 되어 붙잡고 있는 육체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3. 구원의 네 단계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구원의 모두 네 단계로 진행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 6:22)
먼저는 죄로부터 해방됩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셋째로는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습니다.
마지막으로 영생에 이릅니다.
우리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영생을 누리려 합니다. 그러나 이는 두 번째와 세 번째 단계를 거치지 않은 것이고, 그러니 당연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믿고 죄 사함 받고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고 나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음을 선언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따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당연히 “거룩한 삶의 열매”가 맺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자가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은혜로운 여정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내가 버리지 못하는 ‘육체의 이익’입니다. 이를 이기는 자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머리로 고백되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가 마음으로 믿어지고, 마음으로 순종하게 되어, 구원에 합당한 하나님의 종의 거룩한 열매가 맺어지는 삶이 됩니다. 이를 위해 우리 목을 막고 있는 "인간의 생각과 육체의 유익"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