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의 깊이, 은유의 광휘 [제1편]
-처음 시를 접하는 사람들은 시의 낯섦이나 해독의 어려움에 부딪치며 멈칫한다. 뭔가에 가로막히는 기분이 드는 것은 시가 일상적으로 쓰는 생활 어법과 다른 어법을 쓰기 때문이다. 시는 은유라는 이상야릇한 수사법을 품는데, 은유는 일상 화법과 다르게 말하기다. '비가 온다'라고 해도 될 것을 굳이 '하늘이 운다'라고 쓰는 것이다. 시를 가르치는 모든 교과서들은 한결같이 은유에 대해 말하는데, 그만큼 은유의 비중이 큰 까닭이다. 시는 은유에서 시작해서 은유에서 끝난다. 그 은유에 대해 얘기해보자.
“하늘이 운다'가 뭐지?”
“비가 오는 거죠.”
“그래. 그게 은유야.”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이탈리아에서 망명생활 중 겪는 이야기를 담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영화 <일포스티노〉로 더 많이 알려졌다)에서 시인이 우편배달부와 나눈 대화의 일부다. 우편배달부는 시를 전혀 모른다. 시인은 시를 배우고 싶다는 우편배달부에게 ‘은유’ 대해 가르친다. 시가 바로 은유니까! 그렇다면 시는 왜 항상 은유로 돌아오는가. 모든 시는 은유의 태동, 은유의 발생에서 시작한다. 은유는 하나의 사물, 하나의 말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 시만 은유를 독점적으로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은유 없는 시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월트 휘트먼이 풀잎을 “내 기분의 깃발, 희망찬 초록 뭉치들로 직조된 깃”"(「나 자신의 노래」)이라고 쓸 때, 이건 멋진 은유다. 고양이를 “밤의 야경꾼”이라고 쓰고, 비 온 뒤 길에 고인 물 웅덩이를 “길의 눈동자”라고 쓴다면, 이것도 멋진 은유다. 어디 그뿐인가. “세상의 모든 펄럭이는 것들은 사실은 혀일지도 모른다”, “사루비아가 붉은 혀를 내밀어/무수히 지나는 발자국에 대해 지껄이기 시작했다”(임승유, 「수화(手話)」), “아직도 나는 밤의 설교자들이 끌고 다니는 낙타의 발바닥이다”(「홍일표, 구두」), “당신은 태양의 흑점/겨울은 폭약을 달고 날아가는 새”(함기석, 「오렌지 행성」), “계단을 펼쳤다 접으며 아코디언을 켜고/계단은 사람들의 귓속으로 밀려들어왔다가 밀려나가고”(강성은, 「아름다운 계단」),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오, 저렇게도 순하고 둥그런 감옥이여.”(김기택, 「소」), “저 연못은/눈까풀이 없는 눈동자”(채호기, 「연못1」), “땅의 푸른 뿔인 풀잎들”(최승호, 「가죽 뒤로 펼쳐지는 것」) 따위가 다 멋진 은유다. 은유는 시에서 가장 흔한 수사법 중의 하나고, 따라서 시는 은유들의 보석상자라 할 만하다.“
장석주 「은유의 힘」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