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영수 대주교와 조환길(오른쪽) 주교가 2007년 4월 30일 교구장 착좌식 및 보좌주교 서품미사 축하식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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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온돌방처럼 따뜻한 분입니다."(조영희 아가타) "본당 신자들 누구하나 싫어했던 사람이 없는 성인 신부님이셨습니다."(김경숙 크리스티나)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알고 뭐든지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형 같은 친구였습니다."(신학교 동기 정홍규 신부)
조 대주교는 대화를 원하면 거절하지 않는 사제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자신의 성격에 대해 "스스로 평가하긴 어렵지만 어떤 사람도 한 면만 보지 않고, 여러 면을 보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선지 그는 신자들과 사제들에게 따뜻한 아버지이자, 형 같은 친구로 통한다. 조 대주교가 포항 덕수본당 주임으로 있던 시절,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한 김경숙(크리스티나)씨는 조 대주교가 20년 전 가방에 몰래 넣어준 200만 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당시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려웠는데, 그걸 어떻게 아시고 봉투를 주셨어요. 이미 본당을 떠나 교구청에 계실 때였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좋은 일로 갚으라고 했던 말씀이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았지만 저만 받은 게 아니더라고요."
▲ 조환길 대주교에게 신앙을 물려준 아버지(조순조 라이문도)와 어머니(나일남 님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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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회장 아버지 신앙 물려받아
조 대주교는 1954년 경북 달성에서 조순조(라이문도, 2000년 선종)ㆍ나일남(님파, 93)씨 부부 슬하에 5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성소의 꿈을 키운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고 이태식 부제의 유고집 「태시기가」란 책을 접하면서다. 그는 "이태식 부제가 사제가 되기 위해 자신을 다듬어가는 아름다운 모습에 충격을 받았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결심을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하지만 사제 성소의 싹이 트기 위한 토양을 다져 놓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당시 경북 달성군 화원본당 관할 강림공소에서 40년 넘게 공소회장을 지낸 아버지다. 조 대주교는 주일마다 공소 앞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아버지 강론에 귀를 기울였다. 조 대주교는 농사일을 도우며 아버지의 나눔 정신과 이웃 사랑을 삶의 현장에서 배웠다. 아버지는 그가 주교품을 받기 7년 전 세상을 떠났다.
▲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성소의 꿈을 키운 조환길(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 대주교의 군 복무 시절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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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장 임명 당일, 조 대주교에게 문자 메시지로 축하 인사를 보냈다는 형 조창길(바오로, 60, 의정부교구 백석동본당)씨는 "어려서부터 친구들을 잘 배려하는 속 깊은 아이였다"며 "훌륭한 목자가 되길 바란다"는 기대를 내비쳤다. # 말보다 행동으로 솔선수범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 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은신지'(시편 34, 9)를 사제생활 성구로 삼은 조 대주교는 10년 전 비영리 장애인복지시설 '베들레헴 공동체'를 설립했다. 베들레헴 공동체에서 전신마비 장애인 6명을 돌보는 조영희(아가타, 51)씨는 "주교님께서 기도하고 쉬러 이곳에 가끔 오신다"며 "주교가 되신 후 더 많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 힘을 더 많이 구하며 사신다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어 "식사할 때는 손발을 쓸 수 없는 장애인들의 손발이 돼 주신다"면서 "주교님을 볼 때마다 말이 필요없는 게 신앙이라는 것을 깨닫는다"고 털어놨다. 기계본당 주임 김호균 신부는 "교구청에 근무할 당시 주교님과 산책하면서 본당에 보내달라고 조른 적이 있다"며 "그때 주교님이 '너거는 좋겠다, 갈 데가 있어서…'라고 한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당시 보좌주교였지만 자유를 포기하고 주교직을 감당해야 하는 부담, 또 교구를 향한 헌신적 책임감을 느껴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고백했다. 2007년 주교품을 받기 전, 26년 동안 본당 및 교포ㆍ군종사목을 두루 거친 조 대주교는 사제생활을 하면서 특별히 힘든 때는 없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다만 매일신문 사장 시절, 정치ㆍ경제인들과 세상적 대화를 나누고 노조와 씨름했던 경험은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 1983년 12월 원동성당 영세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조 대주교.
| 그는 매일신문 사장으로서 가톨릭 언론인들에게 바르게 보고 바르게 쓰는 기자 정신과 함께 교회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교회 정신을 갖출 것을 주문했다. 조 대주교는 또 사목국장과 사무처장을 지내며 교구 발전의 기틀을 다진 것은 물론 1차 시노드를 비롯해 굵직굵직한 교구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관덕정순교기념관장직을 맡아 교구 순교자 시복시성 추진위원장으로서 시복시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2007년 보좌주교로 임명된 후 2년 4개월 동안 전임 교구장 최영수 대주교를 보필해왔다. 교구 사무처장 하성호 신부는 "대주교님은 학교 1년 선배로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녔는데, 정말 마음이 세심하고 유하신 분이다"며 "혼자 일을 결정하기보다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사제단의 일치를 이루고자 힘을 기울이셨다"고 말했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 장애인 복지시설 베들레헴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사진촬영을 하고 있는 조환길 대주교.
베들레헴 공동체는 조 대주교에게 안식처 같은 곳이다.
| 조환길 대주교 약력▲1954년 11월 7일 경북 달성 출생 ▲1972년 2월 대구고등학교 졸업 ▲1981년 3월 대건 신학대학 대학원(현 광주가톨릭대) 졸업 ▲1981년 3월 19일 사제 수품 ▲1981년 4월~1982년 1월 대덕본당 보좌 ▲1982년 1월~1983년 1월 복자본당 보좌 ▲1983년 1월~1988년 7월 군종(육군) ▲1988년 6월~1991년 9월 덕수본당 주임 ▲1991년 9월~1993년 9월 안식년(미국 교포사목) ▲1993년 10월~12월 예루살렘 Ecce Home 신약성서 코스 수료 ▲1994년 2월~1998년 9월 형곡본당 주임 ▲1998년 9월~1999년 8월 교구 사목국 사도직 담당 ▲1998년 12월~2002년 10월 교구 사목국장 ▲1999년 3월~2004년 12월 교구 사무처장 ▲2004년 9월~12월 관덕정순교기념관장 겸임 ▲2004년 12월~2007년 4월 매일신문사 사장 ▲2007년 2월 한국신문협회 부회장 ▲2007년 3월 23일 보좌주교 임명 ▲2007년 4월 30일 주교 수품 ▲2007년 10월~현재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위원장, 주교회의 사회주교위원회 위원 ▲2009년 8월 18일~현재 주교회의 성직주교위원회ㆍ민족화해주교 특별위원회ㆍ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 ▲2009년 8월 18일~2010년 11월 3일 교구장 직무대행 ▲2010년 11월 4일 대구대교구장 대주교 임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