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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7:1-17, 14:1-5> 구원받은 지상교회, 천상교회의 모습, 구원받은 백성들의 큰 무리인 144,000명, 열두지파, 열두 제자를 통한 영적 이스라엘
1. 말씀배경
오늘 말씀은 인침을 받은 144,000명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살펴보고, 우리들이 어떤 자가 되어야 그 구원의 무리에 들어가는지를 깨닫고자 합니다.
▶ 계시록 6장에서부터 하나님의 인 재앙이 시작됩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오래전부터 “여호와의 날”이라고 하여 예언된 심판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 2:12,13:6,9, 겔 13:5, 30:3, 욜 1:15,2:1,11,3:14, 암 5:18, 20, 습 1:7,14슥 14:1)
[이사야 13:6]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종말론적으로 다가오는 심판은 삼대칠중 재앙으로 인 재앙, 나팔 재앙, 대접 재앙이 있습니다. 점점 재앙의 강도가 강해지고 범위도 넓어집니다.
→ 하나님께서 기분에 따라서 갑자기 인류를 심판하시지 않으십니다.
오랜 기간동안 죄인들에 대한 심판이 있음을 경고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지 않도록 충분한 회개의 기간을 주고 계십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도 최소한 120년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창 6:3)
→ 오늘날 한 개인인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양한 모습으로 경고해 주십니다. 빨간 신호들을 무시할 때에 사고가 나듯이, 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할 때에 심판과 같은 어려움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 오늘 말씀 7장은 8장에 기록된 일곱째 인이 떼어지고 나팔재앙이 일어나기 전에 마치 삽화처럼 기록된 말씀으로, 6장에서 재앙을 당하는 자들이 있는 반면에 7장에서는 이렇게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있다고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이 말씀에 대한 답변이며, 구원을 받아 설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을 통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말과 같은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박해를 가한 그들은 심판을 받고, 박해를 당하는 너희들은 144,000명처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박해를 당하는 그들에게는 이 말씀이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믿음을 가진 이유로 여러가지 시련 속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위로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6장, 8장, 16장에 기록된 재앙을 받고 죽을 것인가?, 아니면 7장, 14장에서 보여주는 구원받은 백성이 될 것인가? 둘 중의 한 무리에 포함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읽는 모든 사람들은 아직 살아 계시는 분이므로 구원을 받을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 오늘 말씀의 144,000명에 대한 내용은 계 14:1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같은 구원을 받은 무리들입니다.
▶ 그런데 각 지파에서 인쳐진 십사만 사천명 (144,000명)에 대한 해석에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① 먼저, 이 숫자가 상징적인 숫자냐? 아니면 문자적으로 144,000명이냐?는 것입니다.
주로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이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144,000명 만이 구원을 받는데 자기들에게 속해야 144,000명에 들어간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너무 적은 무리들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자의 수에 들어 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숫자입니까? 믿으면서도 구원에 대한 자신이 없어지는 수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틀렸습니다.
문자적으로 144,000명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들의 상징적인 완전한 숫자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굳이 144,000명이 인침을 받는다고 했을까요? 이 숫자가 어떻게 나온 숫자일까요? 여기서도 많은 주장이 또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열두 지파(12)와 열두 제자(12)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 12 * 12 = 144
그래서 유대인, 이방인을 포함한 영적 이스라엘 열두 각 지파(12)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열두 제자(12)처럼 된 자의 큰 무리(1,000)가 구원을 받는 수로 보는 것입니다.
→ 12 * 12 * 1000 = 144,000, 성경적으로 1,000은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 144,000명을 “큰 무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충만하게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가룟유다와 같은 자 외에, 예수님께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수가 144,000명 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또, 우리를 구원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의 수 3)께서 구원을 받는 동서남북 땅에 사방 사람(땅의 수 4, 1절의 땅의 사방, 네 천사 참조)들 중에서 열두 제자(12)가 된 충만한 수(1,000)가 구원받은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 (3 + 4)* 12 * 1000 = 144,000
구원의 역사는 성삼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열방 구석 구석 사방에 있는 백성들이 구원을 받기 원하십니다.
이제 구원받는 자의 수에 들어가는 것이 안심이 됩니까?
그렇지만 구원은 좁은 문입니다. 좁은 길임을 기억하시고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마 7:13, 눅 13:24, 빌 2;12)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② 그리고 4-8절에 기록된 십사만 사천명이 9절 이후에 기록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큰 무리가 같은 사람들인가? 다른 사람들인까? 입니다.
어떻게 해석해도 예수를 믿는다면 구원에는 영향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자기 주장대로 피 터지게 싸울 이유도 없습니다.
▶ 저도 오래동안 다른 무리로 보았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분하고, 144,000명을 유대인의 구원으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이유로 같은 무리로 봅니다.
① 4-8절까지의 십사만 사천은 지상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9-17절까지는 천상교회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무리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지상교회의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천상교회의 무리 속에 들어갈 것입니다.
지상교회 무리에도 속하지 않는 자가 천상교회 무리 속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지상교회가 천상교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만약 9-17절의 큰 무리가 지상교회라면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의 교회로 보고 다른 무리라고 할 수 있지만, 9-17절의 큰 무리는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구원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천상 교회가 분명합니다 (9절)
②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모두 인침을 받아야 하는데, 인침 받은 자의 수가 십사만 사천이기 때문입니다.
9-17절의 큰 무리는 인침을 받는 장면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상교회에서 인침을 받은 자가 다시 천상교회에서 인침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는 자는 모두 인침을 받아야 하는데, 오늘날 믿는 자들은 성령으로 인침을 받습니다(엡 1:13)
※ 참고로 사탄도 자기 백성들에게 이마나 손에 표를 받게 합니다 (계 13장)
③ 성경 여러 곳에서 예수를 통하여 믿는 무리를 오늘날 교회, 이스라엘, 예루살렘, 열두 지파 등으로 부르기 때문에 7:4절의 각 지파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④ 계시록 14장에서도 구원을 받은 자로서, 어린 양과 함께 선 십사만 사천명이 시온 산에 서 있는데, 이들이 7장에 기록된 인침받은 자들입니다.
시온 산은 이 땅의 시온이 아니고 하늘 시온입니다.
⑤ 열두지파의 유대인들도 모두 예수를 통하여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들도 9절, 14절의 말씀대로 예수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흰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인침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인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4-8절을 자세히 보면, 이스라엘 혈통적 열두 지파 중에서 지파 전체가 인침을 받지 못한 지파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 이 두지파는 동일하게 송아지 우상이 세워져 있던 지파들입니다. 단은 단 지파, 벧엘은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성읍입니다 (왕상 12:29)
아무리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도 영적으로 우상숭배를 하고 죄 사함 받지 못하면 인침을 받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 인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명은 누구입니까?
우리들이 여기에 속해져야 합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중에서 나온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에 속하여,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구원의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① 이들은 당연히 인침을 받은 자들입니다 (7:4-8)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령을 받은 자들입니다.
[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또 다르게 표현하면, 그들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된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그러므로 인침을 받지 못한 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 단과 에브라임과 같이 인침을 받지 못한 지파도 있지만, 인침을 받는 지파중에서도 인침을 받지 못한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이런 표현은 모두가 아니라 그 무리 중에서 일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혈통적인 지파라고 할지라도, 믿는다는 이름을 가지고 교회를 다닌다고 할지라도 다 인침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② 고난과 환란을 이기고 승리한 자들입니다 (7:9, 14)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모습은 고난을 통과한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일주일 간 종려나무 가지로 집을 짓고 초막절을 지내는 것은 힘든 광야를 생활을 마치고 승리하여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함입니다 (레 23:40, 느 8:15)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수많은 유혹과 아픔, 핍박이 큰 환란으로 다가왔지만 마침내 승리한 자들이 천상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하면서 맞이하는 모습은 바로 9절의 모습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 12:13)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광야와 같은 인생길은 주릴 수도 있습니다. 목 마를 수도 있습니다. 이런 환경, 저런 환경 속에서 상하기도 합니다 (7: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가나안 땅,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가 마침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 것입니다.
출애굽 1세대와 같이 중도에 힘들어서 포기하거나, 원망 불평하거나 다른 유혹에 넘어가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③ 어린 양 피에 그 옷을 씻어 흰 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7:9, 14).
흰 옷은 세마포입니다. 구약시대 제사장들이 입는 옷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을 상징합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된 자들이 입는 옷인 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오직 어린 양의 피로 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 양의 피어 씻어 희게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죄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 옷을 희게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들이 죄를 대속받은 것은 은금으로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는 죄의 댓가로 벌금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안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입니다.
[베드로전서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④ 땅에서 속량함을 받고 아무나 부를 수 없는 새노래를 부르는 자들입니다 (계 14:2-3)
새 노래는 구원의 노래와 구원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노래일 것입니다 (계 14:3-4)
[요한계시록 7: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새 노래는 한번도 불려지지 않은 노래입니다. 하나님 보좌 앞에서 서는 경험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고 하나님 영광의 보좌 앞에서 완전한 새 마음이 되어져서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들과 함께 거문고를 타는 것처럼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의 음정, 박자 이런 차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영으로 내용과 리듬이 온전한 하모니를 이루어진 노래일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찬송도 강력합니다. 원수 마귀를 물리치는 힘이 있습니다. 여호사밧 왕이 노래하는 자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나아가게 할 때에 적군들이 자멸하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대하 20:21-22).
그런데 하나님의 보좌 앞 영광 가운데서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은 가장 온전한 예배이며, 감격의 예배인 것입니다.
이 땅의 찬송과 비교도 되지 않는 새 노래인 것입니다. 속량함을 받은 자만이 배우고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요한계시록 14: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여기서 “능히 배울자가 없다” (헬, 우데이스 에디나토 마데인)은 원어적으로 배울 능력 있는 자가 없다는 뜻이므로 구원을 받은 자 외에는 아무나 이 새 노래를 배워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도 찬송도 아무나 부르지 못합니다. 하물며 천상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그 누가 부를 수 있겠습니까? 오직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믿는 자가 부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인 것입니다.
→ 여기서 찬송을 많이 부르세요. 찬송 자체가 제사이며, 예배입니다. 찬송이 성문이므로 구원의 문을 여는 키인 것입니다.
[시편 100:4]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이사야 60:18]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국경 안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부를 것이라
⑤ 이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순결한 자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자(헬, 귀네)는 원래는 악함, 선함과 상관없이 단지 남자에 대비되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의미적으로는 거룩한 예수님의 신부와 대비되는 계시록 17장에 기록된 “음녀”와 같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순결을 잃게 하는 자들입니다. 다른데 마음을 빼앗게 하는 음녀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은 순결한 자들은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가 아닙니다 (계 14:9) 경배하지 않음으로 환란이 다가와도 죽음이 다가와도 인내로서 이기는 자인 것입니다 (계 14:12-13), 음녀의 유혹인 세상의 화려함과 부유함과 가치관에 따라 살지 않는 영적 여자인 것입니다. 영적 정절을 지키는 여자입니다.
⑥ 그래서 어린 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며 어린 양에서 속한 자들입니다.
순종하는 자입니다. 따라가는 자입니다. 그런데, 어린 양이 가는 길은 대체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힘이 듭니다. 순탄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목자되신 어린 양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지 않고 제 멋대로 가면 망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그릇 행하여 제 길로 많이 갔습니다.
그래서 많은 부분 넘어지고 상하고 빼앗기고 했습니다.
[이사야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들이 처음 익은 열매로 어린 양에서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소속이 어린 양에서 속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내 것이라고 주장하면 예수님의 소속이 될 수 없습니다.
▶ 처음 익은 열매 (헬, 아파르케)는 항상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제물로 드려진 자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산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산 제물이 된 자가 천국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첫 열매는 이스라엘 장자와 같은 존재로 소유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⑦ 그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마귀가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에 마귀를 따르는 자는 거짓이 입에 배어 있습니다 (요 8:44).
요한계시록에서도 거짓말 하는 자는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고 성 밖에 있게 되고, 유황 불못에 던져진다고 했습니다(계 21:8, 27, 22:15).
구원을 받은 자의 가장 큰 특징은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과장도 축소도 변개도 거짓입니다.
흠이 없는(헬, 아모모스) 것은 어린 양의 피로 씻겨진 모습입니다.
▶ 지금까지 구원을 받은 자들의 모습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들을 구원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이들을 인치시고 구원을 하신 분은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예수님인 것입니다 (10절)
3. 구원의 결과로 이들이 누리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① 하나님 보좌 앞에 있고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보좌 앞에 서는 경험을 누군가가 경험을 했다면 가히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장면일 것입니다. 거저 몇 가지 성경 구절을 근거로 머리 속으로 상상해 볼 뿐입니다.
섬기는 (헬, 라트류오)것은 제의적 섬김이므로 예배로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어로 “아바드”인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예배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렇다고 단조로운 삶이 아닙니다. 시간 시간 새로운 삶입니다.
아마 항상 충만한 새 기쁨 속에서 새로움과 경이로움 속에서 살 것입니다.
②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실 것입니다.
장막은 (헬, 스케노오) 거주하다, 임재하다는 뜻이므로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들과 임마누엘로 항상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해 왔습니다. 이 땅에서의 임재도 놀라운 체험인데, 그 임재를 영원히 체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구약 성막에서 지성소에 영광으로 임재한 것은 이것의 예표인 것입니다.
구약 성전에 임한 영광에도 죄인들인 사람들은 감당을 하지 못했습니다.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어진 그 때에는 그 영광 속에서 온전히 거할 것입니다.
③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도 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동안 이런 영적 환경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목자를 잃어서, 생명수를 찾지 못해서 헤메이면서 주리고 목마르고 피할 곳 없는 광야 같은 곳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온 것인데 이제는 이런 것이 다 없어졌습니다.
그동안 영적 전쟁터 속에서 힘겹게 싸우느라 힘이 들었습니다. 넘어지면서 상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위로 받지 못했습니다. 하소연할 때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 앞에 나와 눈물로 간구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때로는 너무 지켜 포기하고 싶은 때도 있었습니다.
그저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장막을 치심으로 갚아 주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 21장에서 생명수를 먹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으므로, 오늘 말씀 7장에서의 이 말씀은 21장에서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삶을 미리 결론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요한계시록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초청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초청에 다 응하셔서 생명수 샘물을 다 마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