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서울 선당교당을 세워 3천여명 포교
1919. 3. 1. 독립선언서에 불교계 대표로 서명(만해 한용운 스님의 스승)
10만여권의 불교서적(경전과 어록)발간
선농일치의 이상적 수도 주창(경남 함양 백운산에 30여 정보의 화과원 조성)
1962. 건국공로훈장 복장 추서
1998. 3월의 독립운동가 지정(국가보훈처)
1998. 4 유허비 건립(번암 죽림)
■ 모든 행이 떳떳함이 없고 만법이 다 고요하도다. ■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 삼밭 위에 한가로이 누웠도다.
1940년 음력 2월 24일은 관음재일이었다. 용성선사의 나이 어느덧 77세, 일제 식민통치자들은 마지막 극성을 떨고 있을 무렵이었다. 선사의 기개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때에 선사는 목욕재계한 뒤 깨끗한 가사를 수하고, 제자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내가 오늘 열반에 들고자 하니 너희들은 슬퍼하거나 효도를 행하려 하지 말고 오직 무상대열반(無上大涅槃)이 원명상적조(圓明常寂照)라는 법구(法句)만을 염송하라”고 유교(遺敎)하고, 수법제자(受法弟子)인 동헌완규(東軒完圭)에게 유훈십사목(遺訓十事目)을 주며 “사십구재를 지낸 후에 개봉해보라”하였다.
동헌수자(東軒受子)가 묻기를 “큰 스님께서는 어느 곳으로 향하여 가시렵니까?”하니,
모든 행이 떳떳함이 없고 만법이 다 고요하도다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 삼밭 위에 한가로이 누웠도다
라는 임종게(臨終偈)를 읊고 나서 “시자여! 대중이여! 그 동안 수고 했도다. 나는 간다.”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빙긋이 웃으며 입적(入寂) 하였다. 이 때의 세수(世壽)는 77세요, 법랍(法臘)이 61세였다.
암울했던 시대에 의롭게 살다간 용성 진종 대종사는 관향(貫鄕)이 수원 백씨(水原白氏)이다. 부친의 휘(諱)는 남현(南賢)공이고 모친은 밀양 손씨(密陽孫氏)로서, 갑자년 조선 제 26대 고종 1년(서기 1864년) 음력 5월 8일에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全羅北道 長水郡 蟠岩面 竹林理)에서 탄생하였다. 속명은 상규(相奎)이고, 법명은 진종(震鍾)이며, 법호가 용성(龍城)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유별났던 소년 상규는 열네살이 되던 어느 날 꿈속에서 부처님을 친견하였다. 소년은 꿈속에서 부처님으로부터 마정 수기(摩頂授記)와 불조혜명(佛組慧命)의 부촉(付囑)을 받았다. 그 며칠 후 소년 상규는 남원 교룡산성 덕밀암(德密庵)에 출가한다. 소년은 소년과 똑같은 꿈을 꾼 적이 있던 주지 스님으로부터 “꿈에 부처님이 서상으로 일러준 대로 법명은 진종(震鍾)이요, 남원 고호(古號) 가 용성(龍城)이고, 용성 고을은 성자가 출가한 성지이니 법호를 용성 (龍城)으로 하라”는 분부를 받게 된다.
이후 약 3년 동안 주지 스님의 각별한 가르침으로 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을 봉독하니 마음 깊은 곳에 와 닿았다. 그러나 부모에 의해 용성은 강제로 환가한가. 하지만 소년 상규는 이에 굴하지 않고 16세 되던 해에 극비밀리에 남원 덕밀암 주지 스님의 인도로 경남 합천 가야산의 해인사 극락암 에 재출가 한다.
극락암에서 용성선사는 화월화상(華月和尙)을 은사(恩師)로, 혜조율사 (慧造律師)를 계사(戒師)로 하여 정진한 끝에 득도한다. 용성대사는 그 후 5대수행(五大修行) 가운데 하나인 주력수행(呪力修行)으로 성도(成道)한 경북 의성 등운산 고운사(孤雲寺) 수월영민 (水月永旻) 장로를 친견하고, “무상(無常)이 신속하니 어떻게 해야 견성(見性)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이에 수월영민(水月永旻) 장로가 답하길,
부처님 가신지 오래된 때라 마군은 강하고 법은 약하며 지나간 세월 업의 장애가 무거웁고 선은 약해 물리치기 어려우니 삼보전에 예경을 정성스럽게 하며 부지런히 대비주를 염송하면 자연 업장이 소멸되어 마음 광명을 뚫어 통하리라.
하였다. 그 후 용성선사는 대비주(大悲呪)와 옴.마.니.반.메.훔 육자주 (六字呪)를 9개월 동안 독송하여 업장을 소멸하기에 이르른다. 그러나 용성선사의 의문은 끝없이 이어졌다. 한번은 양주 보광사 (普光寺) 도솔암에서 홀연히 “이 천지세계가 무엇으로써 근본이 되었는가”라는 의문이 일어났다. 이 엄청난 화두에 용성선사는 깨우치기 를, “천지를 말할 것 없다.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데 천지의 근본을 알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먼 일이다.”용성선사는 더 깊은 상념에 빠지게 되어, “그것도 그만두고 지금 이 생각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라는 의문을 품는다. “생각이 본래 공(空)하여 생멸(生滅)이 없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더라.”
이렇듯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과 의문 속에서 엿새 동안을 정진한 끝에 용성선사는, “천지의 삼라만상과 안으로 나의 몸과 분별하는 마음 전체가 본래 공하여 한 물건도 없더라”라며 깨우치고 견도송 (見道頌)을 읊었다.
몸 생각 뜻 가운데에 불성을 찾는이가 텅빈 집에 둥근 달이 훤히 비치는데 홀로 앉았도다 모나고 둥글고 길고 짧은 이것이 누구의 도이랴 일단의 불꽃이 번뇌망상을 불태워 버리는도다.
20세 되던 해에 용성선사는 큰 깨우침을 위해 보광사 도솔암에서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을 봉독하고 마음에 계합하여 육조혜능 대사를 만대의 스승으로 모실 것을 서원했다. 1년 후, 경남 양산 영추산 통도사(通度寺)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선곡율사(禪谷律師)로부터 비구계(比丘戒)와 보살계(菩薩戒)를 받아서 해동율맥(海東律脈)을 오늘에 계승하는 중흥조가 되었다. 또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무융대선사(無融大禪寺)를 참례 방문하여 '조주 무(無)' 자 화두를 결택(決擇)받고 정진하다. 용성대사는 보광사 도솔암으로 다시 돌아와서 용맹결사 정진하고, 오랜 정진 끝에 깨우침을 얻어 수도송(修道頌)을 읊으니,
번뇌의 먹구름을 물리치고 망상의 안개 덫을 놓아 불성을 찾았더니 비로소 불성 있는데 이르르니 확연히 공이로다 색색공공이 다시 공으로 돌아가고 공공색색이 거듭 다함이 없도다.
1885년 9월, 선사의 나이 22세 때에 순천 송광사(松廣寺) 삼일암 (三日庵)에서 정진하면서 틈틈이 경덕전 등록을 보다가 금륜가관(金輪可觀)선사의 법어인 “월사만궁(月似彎弓)하니 소우다풍(小雨多風)” 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마음의 눈이 열리고 뜻이 통하여, 일면불 월면 불화(日面佛 月面佛話)와 무자화두(無字話頭)까지도 확연히 깨우치게 되었다.
또한 용성선사는 23세 되던 해 8월에 신라불교 초전법륜(初轉法輪) 성지인 경상도 선산 도개동(道開洞) 아도모례원(阿道毛禮園) 모례정 (毛禮井) 근처에서 용맹결사 정진 끝에 또 한번 크게 깨우치고 낙동강을 건너면서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금오산 천년의 달이요 낙동강 만리의 파도로다 고기잡이 배는 어느 곳으로 갔는고 옛과 같이 갈대 꽃에서 자도다.
용성대사가 읊은 이 오도송은 뒷날 대각교(大覺敎)를 창설하였을 때 종지천명(宗旨闡明)의 구(句)로 삼았다. 이렇듯 견도(見道)하고, 수도(修道)하고, 오도(悟道)한 용성대사는 가야 불교 초전법륜 성지이고, 신라 구산선문중의 제 8봉림산문(鳳林山門)인 창원 봉림산 봉림사 봉림선당(鳳林禪堂)지와, 선산 도개동 아도모례원과, 호국호법 도량인 신라 경주 남산 가운데의 고위산 천룡사 (天龍寺)지와, 남산 칠불암(七佛庵), 신선대(神仙臺)와, 백제불교 초전 법륜 성지인 서울 우면산 대성초당(大聖草堂)을 위시하여, 14년 동안 전국의 명산대찰을 다니면서 정진하며 안거하고, 경전과 어록을 궁구 하고, 보림정진(保任精進) 하기에 이르른다.
용성선사는 주력수행(呪力修行)인 대비주와 육자주를 먼저하여 업장을 소멸케 하고, 바로 선정(禪定)에 들어 오도(悟道)한 후에, 경전과 어록을 열람하는 간경수행(看經修行)을 하였다. 순천 송광사 감로암(甘露庵)의 호붕강백(湖鵬講伯)에게서 기신론과 묘법연화경을 수강하고, 선객(禪客) 33인과 함께 지리산 상선암(上禪庵)에서 하안거(夏安居)를 마치고, 곡성 태안사 수경강백(水鯨講伯)으로부터 선요(禪要)와 서장(書狀)을 독파하였다. 이어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동안거(冬安居)하고, 석교 (石橋) 율사에게서 범망경(梵網經)과 사분율(四分律)을 청수(聽受)하면서 하안거(夏安居) 하였다.
다시 송광사 호붕강백에게서 대방광불화엄경을 수강하였으며, 화엄사의 월화강백으로부터는 선문염송을 수청하다가 월화강백이 문경 대승사 (大乘寺)로 이석(移錫)하자 월화강백을 따라가서 화엄경십지품(華嚴經十地品)과 치문경훈(緇門警訓)을 열람한 것이 바로 선(禪)과 교(敎)를 쌍수(雙修)한 것이다.
가야산 해인사의 교려대장경(高麗大藏經)의 판식(板飾)이 너무 오래 되어 대부분의 경판 판각(板刻)의 철장식(鐵裝飾)이 떨어져 나가고, 많은 자획(字劃)이 마멸한 것을 본 뒤 용성대사는 경판보수불사(經板補修佛事)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임상궁(林尙宮)에게 부탁하였다. 임상궁의 주선으로 이만냥의 국고금을 받아 이것으로 원만하게 수판 불사(修板佛事)를 마치는 세심함도 보여주었으니 이 때가 선사의 나이 43세였다.
1910년, 이 나라가 일본제국주의 수하에 완전히 들어가고 뜻 있는 애국지사들에 의해 각 곳에서 항일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라 안팎이 어지럽고 민중이 고난에 처해 허덕이고 있던 때, 용성대사는 오도 후의 보림수행을 거쳐 제방의 납자(納子)들을 접인(接人)해 바른 종풍 진작(宗風振作)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혼란한 모습과 시대사조의 변천을 보고는 통탄하며 다음해 상경을 한다. 이 때가 용성선사의 나이 47세 였다.
서울에 올라온 용성선사는 백제불교 초전법륜 성지인 서울 서초동 우면산 대성초당 구기(舊基)에 세워진 초당에서 석가여래부촉법 제 67세 환성지안(喚醒志安) 대선사의 영정을 모시고 주석하며 종로 봉익동 1번지에 민가를 손수 구입하여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한다. 이곳에서 용성은 교화에 전력하는 한편 선사의 선포교(禪布敎)에 영향을 받은 뜻 있는 사람들과 힘을 합하여 안국동에 선학원(禪學院) 을 건립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각사와 선학원은 바로 민족종교의 심오한 뜻과 민족의식 고취를 일깨워 주는 터전으로 커나갔다. 용성은 한걸음 더 나가서 호국호법(護國護法)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함경도 북청에서 금광도 운영하였다.
1918년, 선사의 나이 55세 되던 해 대성초당에서 만해(卍海) 한용운 (韓龍雲)대사와 자리를 함께 한 용성선사는 국제 정세와 국내 사정, 그리고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 대해 은밀히 의견을 교환하고는 마침내 항일독립운동에 분연히 일어서기로 다짐을 한다.
용성선사가 체(體)가 되고 만해대사는 용(用)이 되어 호국호법을 서원하여, 만해대사는 용성대사를 심중의 스승으로 모시고 호국을 담당하는 대용(大用)이 되고, 용성대사는 호법을 담당하는 대체(大體)가 되었다. 이 대체와 대용은 천도교와 기독교 장로회, 감리회 그리고 불교 지도자들이 호국의 손을 맞잡게 되는 3·1운동 정신의 씨앗으로 발전한다.
이듬해인 1919년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이 자리를 함께 하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서명을 한다. 1번 서명자에 천도교 대표 손병희 교주, 2번 서명자에 기독교 장로회 대표 길선주 목사, 3번 서명자에 기독교 북감리파 대표 이필주 목사, 그리고 4번 서명자엔 불교 대표로 백용성 대사께서 서명을 함으로서, 불교와 천도교와 기독교가 각 종교 를 떠나 하나의 얼이 되어 3·1운동을 일으키는 큰 힘이 된 것이다. 용성을 비롯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모든 분들은 서대문 구치소 에서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고난의 길로 들어선다.
용성대사는 감옥에 있는 동안 다른 종교의 경전은 모두 한글로 되어 있어서 민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반면에, 유독 불교의 경전만이 한자로 쓰여져 민중들에게 쉽게 읽힐 수 없음을 새삼 깨닫는다. 그는 필생의 작업으로 경전 번역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서, 58세가 되던 1921년 3월, 출옥을 하자마자 경전 번역을 위한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한다. 그리고는 첫 번째 작업으로 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을 저술 한다.
한편, 일부 몰지각한 승려들에 의해 우리의 전통 불교가 퇴색되고 일본불교화 되어가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국내에서는 조선 배불정책 의 뿌리가 남아서 스님들을 천시하고 불자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용성대사는 이러한 병폐를 없애고 새로운 불교 운동을 온 겨레의 마음속에 심어 주기 위한 새 불교 운동을 전개하고 자 한다.
선사는 우리나라 불교도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기 위하여 불교의 불(佛)을 번역한 대각(大覺)의 뜻을 살려서 1921년 대각교(大覺敎)를 창립한다. 대각교를 창립하면서 선사는 화공(畵工) 동호(東湖) 거사를 불러 대사의 진영(眞影)을 그리게 하고, 시를 지어 당시의 세태를 실랄히 비판하였다.
물과 물 산과 산은 부처님 모습이요 꽃과 꽃 풀과 풀은 조사님 뜻이로다 한가로움을 기다려 왔다가 한가로움을 기다려 가는데 달이 밝게 비침을 맑은 바람이 돕는구나 개새끼에게 불성이 없다함은 조주선사의 망령된 분별이요 동호의 봄 물은 푸르른데 백구는 뜨고 잠김을 임의로 하는구나 내가 이 너인가 네가 이 나인가 초당의 봄날이 따뜻하니 백화가 익어 방자하게 피었도다.
이렇게 통분을 하며 이 민족의 잃었던 기운을 되찾기 위해 정진해 온 용성선사는 호국호법을 위하여 중국 만주 간도성 연길현(延吉縣) 명월촌(明月村)과 봉녕촌(鳳寧村)에 각각 70정보의 농지를 확보하고 농장을 마련한다. 이 곳에 대각사(大覺寺) 선농당(禪農堂)을 설립하고 일본제국주의의 압박에서 살지 못하고 유랑한 동포들을 맞이하여 이 곳에 머물러 생활의 기초를 세워 나가도록 하였다. 대각사 선농당은 거처가 없는 동포를 불러들여 어한을 막게하며 불교 포교를 시작하였 으니, 나라를 잃은 서러움을 달래주면서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는 구심 점이 되었다.
사리와 관련된 용성선사의 일화는 유명하다. 선사의 나이 61세 되던 해, 1921년 1월 28일, 대각사에서 안거 중에 왼쪽 송곳니에서 오색이 영롱한 사리가 나왔는데 부처의 머리 모양을 닮았다고 한다. 멀리서 보면 마치 불이 난 것처럼 밝게 3번 방광(放光)하였고, 현재 가야산 해인사 용탑선원 옆의 용탑(龍塔)에 모셔져 있다.
1911년부터 입적하시던 하루 전날까지 선남선녀 3만여명에게 삼귀 의(三歸依) 오계(五戒)를 수계(授戒)하였고, 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 가 되도록 비구계, 비구니계, 사미계, 사미니계를 설하여 참선(參禪), 염불(念佛), 간경(看經), 주력(呪力), 불사(佛事)인 5대수행(五大修行)을 제창(提唱)하였다.
일본제국주의는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말살하려는 식민정책의 일환으로서 우리나라 불교의 전통과 사상을 일본불교화 하고자 승려 에게 대처식육(帶妻食肉)과 음주솔가(飮酒率家)를 암암리에 조장하였다. 용성선사는 쓰러져가는 불법을 바로 세우기 위해 1926년 5월, 그의 나이 63세 때에 범계생활금지(犯戒生活禁止)에 대한 1차 건백서(一次建白書)를 127명의 비구 명의로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였고, 9월에 다시 지계건백서(持戒建白書)를 제출하여 강력히 항의하였다.
조선불교가 본래 전통을 망각하고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 정잭에 휘말려 각 사찰마다 대처식육하는 것이 공공연하게 묵인되었으며, 심지어 조선총독부에서는 주지 자격의 비구계 조항을 삭제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자 용성대사는 분연히 일어나 건백서를 낸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용성대사는 우리나라 근세 불교 정화(淨化)의 초조(初祖) 가 되었다.
선농불교(禪農佛敎)에 대한 선사의 신념 또한 확고하였다. 경남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백운산에 임야 삼십여 정보를 확보하고, 또 산 아래에 많은 전답을 구입하여 과수 수만주를 심어서, 일하면서 참선하고, 참선하면서 수행하는 선농불교(禪農佛敎)를 일으켜 조선불교의 참선 수행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곧, 참선수행 오도(悟道)한 후의 보림 수행을 선농불교를 통해 타력 생활에서 자력생활로 돌리는 데 솔선수범한 것이다. 이는 식민통치 아래서 힘겹게 꾸려가는 사원 경제를 살리고, 나아가서 자력갱생의 경제력을 일으켜서 민족경제를 회복시키려는 이유에서 였다. 중국 연변 용정에 또 하나의 대각사를 창건하여 서울 종로의 대각사를 중심으로 함양 화과원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장으로 삼았다. 전국 불교계에서 모인 독립운동 자금을 일단 함양 화과원에 모아서 일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일부는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가 에게로 전달하여 조국 광복운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식민통치 쇠사슬 의 감시를 피하여 눈 푸른 승려들로 하여금 수행하면서 일하게 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만주 북간도 용정 대각사에 운반토록 해서 항일 독립운동에 활력소를 불어넣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 복잡 다양한 불교 의식을 간단하게 정리한 《대각교의식(大覺敎儀式)》을 저술 간행하였다. 이렇듯 용성선사는 선농불교, 생활불교, 행동하는 불교사상을 전파한 최초의 스님이었다. 선사의 나이 65세 되던 1928년, 우리말과 한글의 중요성을 전파하는 데 주력 하였으니 천지팔양신주경(天地八陽神呪經)을 번역 간행하고, 팔십화엄경(八十華嚴經)을 번역한 《조선글 화엄경》12권을 간행 하였으며, 또《조선글능엄경》도 간행하였다.
교육, 교화를 통하여 온 겨레가 깨우치지 못 하면 조국의 광복도, 불교의 중흥도 어렵다는 신념을 지녔던 용성은 “대각일요학교”를 설립하여 어린이 교육과 포교에도 더욱 박차를 가했다. 구태의연한 조선불교를 과감히 개혁하기 위해 의식과 염불을 우리말로 하였고, 찬불가를 직접 만들어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즈음 삼장역회의 기관지인 《무아(無我)》가 창간되었고, 이 잡지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용성선사의 이와 같은 일들이 순탄할 수만은 없었다. 선사의 나이 71세 되던 1934년 9월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대각교의 재산을 몰수, 또는 신탁하므로써 사실상 대각교의 활동을 억제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계속되는 일제 식민통치의 탄압으로 인해서 부득이 대각교의 명칭을 “대본산범어사 경성포교당(大本山梵魚寺 京城布敎堂)”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탄압을 계속하여 18년 동안 활기찬 활동을 펼친 대각교(大覺敎)를 1938년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나 용성대사는 이런 야비한 식민통치에 굴하지 않고 대각교당 을 "조선불교 선종총림(朝鮮佛敎 禪宗叢林)"으로 개편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약사여래본원경(藥師如來本願經), 대보부모은중경(大報父母恩重經) 원고를 탈고하고, 이른바 조선판 불소행찬(佛所行讚)에 해당 하는 《석가사(釋迦史)》를 간행하고 《팔상록(八相錄)》을 저술하였 으니, 이 겨레의 육신보살(肉身菩薩)이 아니고는 도저히 일생에 다하기 어려운 일들을 했던 것이다
. 용성선사는 외래 종교가 범람하고,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고난과 역경의 민족적 시련기에 민족 주체성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호국호법 의 불교 운동을 일관되게 펼치며 힘차게 살다 가셨다. 땅에 떨어진 계맥(戒脈)을 다시 불러 세웠고, 숨겨?던 법맥(法脈)을 다시 찾았다. 석가여래부촉법(釋迦如來付囑法)을 제 68세로 이었고, 이 석가여래 부촉법은 제 69세 동헌완규(東軒完圭)대사에게 전법되었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여 스님들을 천시하는 경향을 교화하였으며, 여지없이 곤두박질친 불, 법, 승 삼보(三寶)의 계율을 회복하는데 헌신하였다.
용성대사가 일생 동안 끊임 없이 번역한 경전 20여종과 저술한 어록 20여종, 도합 40여종 60여권의 서책, 경전들의 바른 뜻이 온인류, 온겨레, 만중생의 수도의 표본이 되고, 교화의 지침이 되기를 두손 모아 합장 하고 발원할 뿐이다.
백용성조사 탄생성지 성역화계획
조사님은...
1864년 (음) 5월 8일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252번지에서 탄생
1940년 (음) 2월 24일 세수 77세 법랍 61하로 입적
1919년 기미년 3.1 독립운동시 민족대표 33인중 불교계 대표 및 막후기둥으로 참여 1년 6개월 옥고를 치름
20여종의 경전 번역과 20여종의 어록을 저술, 10만여권의 경전과 어록 발간
14세에 남원 지리산 교룡산성 덕밀암으로 출가
16세에 합천 가야산 해인사 극락암에 재출가 화월화상을 은사로 혜율조사를 계사로 사미 10계를 수지함
1910년 48세 한일합방 경술치욕을 당하여 하동 지리산 칠불선원에서 상경하여 선종교단 창건으로 대중불교 전파
경남 함양 백운산에 30여정보의 화과원 조성과 중국 만주 연길 70정보의 농토 구입 선농일치 주창하고, 중국 만주 용정에 대각사 포교원을 설립 독립운동의 근원지로 함
일제시대 부패된 조선 불교를 개혁하기 위하여 대각회를 설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