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물건이라해도 맞지 않습니다”
〈66〉남악회양 선사 ①
讓和尙 初參六祖 祖問什處來 曰 崇山來 祖曰 甚物 伊來 曰說似一物 卽不中 祖曰 還假修證不 曰 修證 卽不無 汚染 卽不得 祖曰 只這不汚染底 是諸佛之所護念 汝旣如是 吾亦如是
남악회양 화상이 처음 육조스님을 참례하였다.
육조스님이 물었다.
“어느 곳에서 오는가?”
“숭산에서 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곧 맞지 않습니다.”
“증득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가?”
“증득하는 것은 있지만 더럽혀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더럽혀지지 않는 그것이 모든 부처님의 아끼는 것이다. 그대가 이미 이와 같으며 나도 또한 이와 같다.”
혜능에게서 “무슨 물건이 왔는고”
질문을 받고 8년 정진한 뒤 답변
해설 : 남악회양(南岳懷讓, 677~744) 선사는 청원행사 선사와 함께 혜능스님의 족하에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큰 종장이다. <전등록>에 의하면 선사는 성이 두(杜)씨로서 금주 사람이었다. 15세에 형주 옥천사에 가서 홍경(弘景) 율사에게 출가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뒤에 율장을 익혔는데 하루는 혼자 탄식하기를 ‘출가한 사람은 무위(無爲)의 법을 익혀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동문수학하는 탄연(坦然)스님이 혜안(慧眼) 화상을 소개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혜능스님을 찾아가게 되었다.
위의 대화는 모두가 혜능스님을 처음 만나서 나눈 것처럼 되어 있으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라는 질문을 받고는 8년 동안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끙끙대며 정진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다음의 말씀인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곧 맞지 않습니다”라고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남악스님이 8년간 참구한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라는 말은 간화선(看話禪)을 이야기하는 선가에서는 “이렇게 온 것은 무슨 물건인가?” 또는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시삼마(是甚) 화두의 시초라고 한다. 근세에는 경허스님의 참선곡인 “앉고 서고, 보고 듣고, 착의긱반(着衣喫飯) 대인접화(對人接話) 일체처 일체시에 소소영영(昭昭靈靈) 지각(知覺)하는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글이 널리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는 이 화두로써 참선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멀리는 혜능스님과 남악스님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증득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가?”라는 질문에 “증득하는 것은 있지만 더럽혀지지는 않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불교의 근본 종지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좀 더 부연하자면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살든 지금 이대로 완전한 부처이다. 그러나 그대로가 부처라는 사실을 알기는 해야 한다. 설사 그 사실을 모르더라도 부처가 아니라거나 달리 잘못되거나 하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불교 궁극의 목적은 부처가 되는 것이고, 그 부처가 되는 일은 사람이 본래로 부처라는 사실을 아는 것 뿐이다. 이 사실을 아는 데는 순간에 될 수도 있으며 하루에, 또는 삼일에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기위해서 10년, 20년, 또는 일평생을 정진하더라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더럽혀지지는 않는다”고 하였듯이 사람들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든 본래로 부처인 그 자리는 잘못되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한 불교다. 쉽고 빠른 불교다. 다만 논리적 사유가 아닌 직관이 필요하다. 그 외의 광장설법들은 이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지름길은 접어두고 사람들의 수준과 근기에 따라 먼 길을 휘둘러 가면서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가르친 것에 불과하다.
무비스님 / 조계종 전 교육원장
[불교신문 257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