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보*
집착인지 모른다. 나이로비로 가는 직항이 없을 때다. 홍콩에서 갈아탔다. 기내에 들어서자 검은 열기로 가득하다. 여기저기서 잠보 잠보 하는 소리가 들린다. 영상 속에서 보았던 친숙한 얼굴이다. 의자에 앉자마자 덩치 큰 승무원이 기내의 냄새를 없애느라 방향제를 뿌린다. 이어서 슈카**를 두른 승무원이 빵과 우유를 들고 와서 던질 시늉을 하기에 순간 두 손을 벌려 받았다. 처음 보는 기내풍경이라 낯설고 어설펐으나 오히려 자연스러운 분위기다. 아프리카 외방 선교회 신부 이야기를 듣고 마사이족에 대한 신비감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사자를 때려잡던 순수한 영혼과 전사를 만나보고 싶어서 무작정 가는 길이다.
생각보다 날씨가 좋다. 나이로비공항을 나오자, 초가을 날씨처럼 선선하다. 긴소매 옷을 걸치고 다닌다. 케냐가 해방된 날이란다. 거리에 사람들이 많다. 독립 기념일인 셈이다. 케냐는 과거 서구열강들이 눈독을 들였던 땅이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많아서다. 그들은 오랜 기간 독일과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토지를 탈취당하면서 백인 농장에서 강제노역을 당했다. 그중 마사이족은 백인에게 열등한 인종으로 취급받았다. 그들은 침략자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사이족은 사자뿐만 아니라 외부 침입자들이 두려워했던 부족이다.
차 타는 곳이 북적댄다. 잠시 주변을 살피자, 운전기사와 여행자가 흥정하는 눈치다.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으로 가려는 이도 보였다. 키가 헌칠한 젊은이가 다가오더니 사진 한 장을 들어 보인다. 그는 자신이 사자를 잡은 마사이 전사라고 소개하며 사파리 안내 자격증까지 보여 준다. 올림픽에 출전한 마라톤선수처럼 키가 크고 다리가 가늘다. 하얀 이와 입가에 미소가 호감이 가서 그의 차에 무작정 올랐다. 그는 운전기사 겸 안내자다. 마침, 독일에서 온 부부와 동행하게 되었다.
시내를 벗어나자, 비포장도로다. 군 복무 시절 다니던 작전도로 같다. 흙가루가 풀풀 날리고 낡은 차창 틈 사이로 흙먼지가 연신 들어왔다. 길섶에 기린은 다 말라가는 아카시아 잎을 뜯으려고 길게 목을 뻗는다. 가는 길에 둥근 지뢰 모양의 거북이가 길을 막아선다. 차를 세워 놓고 꼼짝하지 않는 거북이를 옮겨놓고 다시 갔다. 한나절 달린듯하다. 넓은 평원에서 처음 만나는 건물이라 반가웠다. 마사이 부족이 운영하는 전통공예품 가게다. 그는 벽에 붙어있는 큰 사진을 가리키며 자신이라고 뽐낸다. 사자를 제압하고 나서 서 있는 모습이다. 바로 옆에 바오밥 나무로 만든 목걸이를 하나 주워 들고 사 달란다. 원래 마사이족은 물질에 관심 없이 유목 생활하며 사냥으로 연명했는데 이상한 일이다.
다시 평원을 달린다.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서자, 마사이족이 거주하는 집이 눈에 들어왔다. 진흙으로 만든 집이다. 주위에 크고 둥근 가시나무 울타리 안에 댓 가구가 모여서 산다. 일부다처제의 집 구조다. 남자는 사냥할 수 있어야 전사라는 칭호를 받고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 전사는 맹수 속에서 가족을 위해 사냥하거나 부족을 위해 싸우느라 고단하다. 사냥이나 싸움 뒤에는 늘 전사의 희생이 뒤따른다. 마사이족의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하여 남겨진 부녀자나 아이들을 보듬는 일부다처제 방식이다.
해 질 무렵 롯지에 도착했다. 롯지는 강가 구릉에 돌로 만든 숙소다. 달빛도 없어서 캄캄하여 더듬더듬 기어서 롯지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먼 길을 왔는지 바로 곯아떨어졌다. 새벽녘 동살이 들어오자 잠에서 깨어났다. 나지막한 벽면에 한 뼘 정도 되어 보이는 파란 도마뱀이 도배하고, 돌 틈 사이로 하마가 주둥이를 벌리고 혀를 널름대서 기겁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가 오더니 심드렁한 표정이다. 다른 방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하자 추가로 돈을 내란다.
사흘 동안 사파리 하면서 무서움에 지쳤다. 차량은 녹슬고 오래되어 박물관에나 가 있어야 할 차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차가 초원을 달리다가 수렁에 빠져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구릉에서 지켜보던 사자 무리가 몰려왔는데 속수무책이다. 수사자가 이빨로 차 유리를 득득 긁고 예리한 발톱으로 녹슨 철제문을 후벼팠다. 나는 녹슨 철제문을 붙잡고 한나절 사자와 대치하느라 초주검 상태였다. 그는 차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동행했던 독일인이 가져온 마취총으로 수사자를 제압하자 다른 사자들이 달아났다. 자칫, 사자의 밥이 될뻔했다.
내 잘못이 크다. 가만히 보면 어설프고 어수룩하다.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을 구분할 줄 모른다. 마사이마라 국립공원 탐방은 급한 일이 아니었다. 차분히 따져보고 갔어야 할 일이다. 나이로비공항 앞에서 호객행위조차 알지 못하고 갔었다는 게 부끄럽다. 어쨌든 호신용 마취총을 준비해온 독일인 부부가 고맙다.
아직 미련이 있다. 시달린 육체와 너덜거리는 영혼이 비틀거린다. 신비감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던 마사이족은 어딘가 있을 듯하다. 오늘도 붉은 태양이 변함없이 아프리카 지평선 위로 솟아오를 거다. 빨간 슈카를 두르고 창조의 영감을 얻으러 뛰고 있을 마사이 전사가 보고 싶다. 잠보!
* 잠보(Jambo)는 스와힐리어의 인사말이다.
** 슈카(Shuka): 아프리카 마사이족의 전통 의상이다.
첫댓글 수필 잘 읽었습니다..
좋은 작품을 읽게 되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