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건국사(34) :
돌아온 영웅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 인보길 기자
입력 2023-04-27
•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귀국후 연설하는 이승만 박사.ⓒ연세대이승만연구원
어느 날 갑자기 항일 독립운동이 끝났다.
독립투쟁이 아닌 미국이 일본을 원폭 두 방으로 항복시켰다.
독립운동가들은 허탈했다. 남의 힘으로 투쟁 대상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다음 순간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꿈에 그리던 ’우리 땅‘을 찾았다는 기쁨은 짧았다.
독립운동가들은 놀라고 당황했다. 어느날 갑자기 한반도 허리를 38선이 가로막았다.
“일본만 없어지면 삼천리 금수강산은 우리 나라인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북한은 소련이 점령하고 남한은 미국이 점령했다. 한반도는 승전 강대국들 차지다.
전혀 새로운 세상, 새로운 판세!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나. 독립운동가들은 우왕좌왕이다,
미국과 소련을 상대로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독립국가를 세워야 하는데 속수무책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때를 만난 듯 북한의 소련 품으로 몰려갔다. 항일투쟁의 목표가 이것 아닌가. 그동안 갈고 닦은 코민테른의 전략전술대로 삼천리 붉은 강산 ’인민공화국‘을 만들면 된다. 중국에서 해방순간 그들은 임시정부를 해체하라 외쳤다. ”너희는 이제 용도폐기야.“
그 임시정부는 어떤가. 소위 민족주의 세력의 대표기관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와 임정인사들은 안절부절이다. 항일투쟁밖에 몰랐던 그들은 상상도 못했던 상황 전개 앞에서 갈팡질팡이다. ”소련이나 미국은 곧 물러가겠지. 임정이 귀국해서 집권하면 만사해결 되겠지...“ 하지만 자신이 없다. 중국 장제스에 구원을 청해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장제스는 해방후에도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다.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라’는 명령에 망연자실이다.
이승만이 돌아온다. 37세에 떠난 조국, 70세에 귀국하는 이승만은 달랐다.
해방순간 그는 허탈하지도 않았고 38선 출현에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예견했고 얄타회담의 ’밀약‘을 예상하고 분노하였으며 미국과 소련을 상대로 싸워왔기 때문이다.
”일본이 물러가면 소련이 점령하고 공산정권 세운다”는 예고와 경고를 얼마나 했던가.
세계는 이미 항일투쟁 단계를 넘어선지 오래다. 소련 공산세력과 자유세계의 이념전쟁 시대가 다가왔음을 미국보다 먼저 느끼고 확인하고 이에 대비하려 주먹을 쥔 이승만이다.
해방되자마자 ’건국외교‘부터 시작한다. 이승만은 미국, 영국, 중국과 소련 스탈린까지 강대국 정상들과 유엔 사무총장에게 축전을 보내고 대한민국 독립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 외교를 서둘렀다. 침략 예상자 스탈린에겐 ’한반도 평화‘를 특별히 강조하였다.
여기서 ’유엔‘에 주목해야 한다. 해방 전부터 그는 유엔의 힘을 독립에 이용하고자 결심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2년 후 유엔의 결의를 얻어내 대한민국을 건국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해방정국 3년간 이승만의 독립투쟁이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차원이 달랐던 까닭이오, ‘1인 투쟁’ 이승만만이 건국할 수 있었던 새 역사 창조의 글로벌 리더십이다. 그것은 약소국 지도자로서 불굴의 신념과 불굴의 신념이 낳은 불굴의 용기와, 평생 공부한 동서양의 지혜, 세계판도를 아우르는 투철한 통찰력과 예지력이 네트워킹한 전략전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선견지명의 역사적 혜안이 설계한 ‘이승만표 건국전쟁’의 발길을 따라 가보자.
• ▲ 독립운동가 이승만 박사와 미국무부 실세 소련간첩 알저 히스.ⓒ뉴데일리DB
◆미국, ‘반소주의자’ 이승만의 귀국을 막다
소련 빨치산 33세 김성주가 평양에서 ‘김일성’으로 변신하여 첫 공개신고식을 마친 이틀 후, 10월16일 오후 김포공항에 미군 군용기가 내려앉았다. 맥아더의 전용기 ‘바탄’(The Bataan)이다.
그가 나타났다. 만70세 넘은 이승만이 미군복차림으로 내린다. 군복은 군용기 탑승의 매뉴얼이다. 망명 33년 만에, 유학부터 치면 41년 만에 돌아온 조국, 환영인사는 아무도 없다. 미국이 이승만의 귀국을 비밀로 했기 때문이다.
왜 해방을 두 달이나 넘겨서야 귀국했나? 소련과 신탁통치를 추진해야하는 미국은 ‘반소’ 이승만의 귀국을 원하지 않았다. 더구나 미국무부의 소련 간첩들이 가만있겠는가.
그 때까지도 ‘무국적’을 고수하고 있던 이승만은 일본이 1차 항복의사를 밝혔던 8월10일 귀국 여권을 신청하였다. 미국무장관 번스가 한 달 지나서 일단 여행권을 재가하였다. 하지만 출국을 위해서는 일본 점령사령관 맥아더의 ‘입경허가’를 받아야하고 교통편의를 허용하는 전쟁부의 보증을 받아야 한다. 아직도 한반도는 일본 땅, 아니 미국의 점령지다.
차일피일 세월만 흘러가는 가운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여권 취소‘ 통보였다.
이유는 여권신청서에 기재한 ‘주미고등판무관’이란 신분이 부절적하다는 것, 그 신분명칭은 4년전 임시정부가 부여한 ‘주미외교위원장’이란 직명을 ‘High Commissioner to the United States’로 영어 표기하여 사용해온 것인데 이제 와서 새삼 왜 시비일까.
또 일주일이 지난 9월21일 다른 통보가 왔다. 이승만의 신분을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는 한국인’(Korean national returning to Korea)이나 그 밖의 다른 용어로 바꿔서 신청하라고 했다. 즉, 임시정부 직함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 무명의 개인자격으로 가라는 이야기이다.
이승만의 직명표기대로 ‘입경 허가’를 내준 합동참모본부의 스위니 대령은 이미 ‘처벌’까지 받았다고 했다. (올리버 [신화속의 인물 이승만] 앞의 책).
이승만의 귀국을 돕기 위해 앞장선 굿펠로가 이리저리 뛰어도 ‘국무부는 더 이상 이승만의 여행계획을 지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입을 막았다.
이런 시비의 주역은 새로 부임한 극동국장 빈센트(John C. Vincent)와 일본과장 딕오버(Dickover)였다. 중국 근무시 중국공산당에 기울었던 빈센트는 루즈벨트 측근이자 소련 간첩인 알저 히스(Alger Hiss)와 함께 사상적 문제아임이 밝혀진다. 1951년에 전 소련간첩에게 고발당한 빈센트는 ‘공무수행 부적격’ 판정을 받고 1953년 덜레스 국무장관 요청으로 축출된다.
이승만은 10월1일자 메모랜덤에 ”이들 국무부 안의 친공친일분자들이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아래 두기로 스탈린과 비밀협약을 만든 자들이고, 자신의 여행까지 막고 있다“고 적었다.(이정식 [해방전후의 이승만과 미국],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우리 대통령 왜 안데려 오느냐“ 국민들 성화에 하지 나서다
이승만의 조속한 귀국은 주한미군정 사령관 하지(Hodge)도 원하고 있었다. 지방시찰한 민정장관 아널드가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왜 데려오지 않느냐’는 주민들의 성화에 놀라 건의하자, 이를 하지가 직속상관 맥아더에게 요청한 것이었다.
”워싱턴에 있는 이승만이라는 한국인을 찾아서 서울로 보내라“는 합동참모본부의 전문을 받은 전쟁부 소속 군사정보부는 이승만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비밀리에 동양노인을 찾았다
마침내 이승만은 10월4일 밤 민간 비행기로 워싱턴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하와이에 도착, 군용기로 바꿔 타고 멀리 괌(Guam) 섬을 경유하여 10월10일 도쿄 아쓰기(厚木) 기지에 도착한다. 하지는 10월12일 도쿄로 건너가 이승만을 맞이하였다.
이승만은 하지와 만나 국내상황을 점검한 뒤 맥아더와 장시간 요담한다. 맥아더는 하지에게 ”이승만을 국민적 영웅으로 환영하라‘고 권고, 하지는 먼저 서울로 돌아왔다.
(임병직 ’워싱턴 외교위원부 장거리 전화‘ [북미시보] 1945,10.18일자. 손세일, 앞의 책)
이승만은 맥아더와 회담을 더 한 뒤, 10월16일 맥아더가 내준 전용기 ’바탄‘을 타고 김포에 내린 것이다. 이제부터 진짜 독립운동이다. 아니 ’건국전쟁‘의 첫 걸음이다.
• ▲ 하지 미군정사령관은 망명33년만에 귀국한 이승만 박사에게 조선호텔 최고의 스위트룸을 제공하였다. 사진은 일본이 1914년 건축한 경성철도호텔의 일제시대 모습. 오른쪽 건물은 1966년 철거후 신축한 오늘의 조선호텔ⓒ뉴데일리DB
◆“나는 평생 싸움꾼...건국 위해 당당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