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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지나가는 한여름의 도심은 마치 후~욱하고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을 듯 후끈하다.
한여름의 열기로 몸이 뜨거워 질수록 마음은 오히려 허허로워 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 같다.
마포 쪽의 거래처에 들렀다 귀사 하던 길의 버스가 막 종로 통으로 진입할 무렵 난 그 허허로움을
달래기 위해서였던지 무심코 차에서 뛰어 내렸다.
실로 십 수년 만에 들른 광화문 교보빌딩 지하의 교보문고….
무엇을 사야 할지도 모르면서 그 넓은 매장을 한 시간 여나 돌아 다니다 문득 번역본으로 발간된
한 권의 책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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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수년전의 도쿄(東京)……
그 해의 여름도 무척 더웠다. 그 곳은 습도가 높은 탓에 ‘무덥다’를 ‘무시아쯔이’(蒸し暑い)라고
표현한다. 찐다는 증자와 덥다의 서가 결합한 말이 더위의 정도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도쿄(東京) 신쥬쿠(新宿)에 있는 키노구니야(紀伊国屋)는 우리의 교보문고가 생기기 오래
전부터 있었던 대형 서점이었다. 난 그곳에서 오늘 보았던 한 권의 책을 샀었다.
단신으로 날아간 젊은 날의 일본…
난 그날 신쥬쿠에서 아르바이트하는 회사의 물건을 가지고 요코하마(横浜)로 가야 했다.
신쥬쿠에서 요코하마로 가려면 서울의 2호선 같은 순환선인 야마노테센(山手線)을 타고 에비스
(恵比寿)역에서 사철(私鐵)인 도요코센(東横線)으로 갈아타는데 왕복 2~3시간은 소요되는
거리였다. 그래서 서점에 들러 전철에서의 무료함도 달래고 어학 공부 겸으로 문고판
추리소설을 한 권 샀던 것이다.
모리무라세이치(森村誠一)의 추리소설 ‘인간의 증명’(人間の証明)은 그를 일본을 대표하는
추리소설가로 만들어 주었고 가도가와(角川)문학상을 수상 하는 등 소설적인 가치로서도
인정을 받은 작품이다.
항구도시인 요코하마는 노래나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도시는 아니다.
그곳은 특히 불법 체류자가 많은 곳으로 한인부두노동자들이 많은 애환이 담긴 곳이기도 하다.
여름 한낮 뙤약볕에 요코하마 시내의 몇 군데의 거래선을 그것도 무거운 팜플렛들을 배달해
주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조금만 걸어도 숨쉬기가 답답한 특이한 증상에
시달렸지만 그 날은 걸어 다니는 것 조차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 날의 한낮 기온은
37~8도C를 오르내리지 않았나 싶다.
일을 마치고 전철에 올라서도 계속 그 책 속에 빠져 있었다. 일본의 추리 소설은 옛날 고교시절
흠뻑 빠졌던 무협소설에 못지 않는 재미와 반전을 거듭한다.
자취 집이 있던 동경도립대학 역에 내려서도 더위 탓도 있었지만 그 책의 재미에 빠져 냉방이
되었던 역의 대합실 의자에 몇 시간을 더 앉아 시간을 보냈다.
70~80년대의 일본은 이미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산업화에 성공한 선진국으로의 대열에 합류
할 즈음이었지만 국민들의 정서 속에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흔들이 남아 있었다.
원폭피해와 패전국으로서의 굴욕. 점령군인 미군에 대한 피해의식, 열등감과 증오…. 많은 것들이
그들의 뇌리 속에 아물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소설 ‘인간의 증명’은 한 흑인 청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동경의 최고급 호텔 로얄호텔의 42F 스카이라운지로 향하는 고속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가슴에 칼이 꽂힌 채 쓰러진 의문의 흑인 청년....
‘죠니헤이워드’라는 이름의 흑인 청년의 죽음을 추적해가는 경시청 수사1과의 ‘무네스에’ 형사 …
그도 어린 시절 점령군이었던 술 취한 미군들과 구경꾼 들 속에서 희롱 당하는 젊은 아가씨를
감싸주려다 미군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그들에게 둘러 쌓여 방뇨까지 당했던 자신의 아버지가
끝내 뇌출혈로 유명을 달리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피살된 흑인 청년이 투숙했던 동경비지니스호텔과 택시 안에서 찾아낸 그의 유일한 유류품인
아주 오래된 낡은 밀집모자와 한 권의 시집…..
그것이 죽은 죠니헤이워드에게 목숨만큼 귀한 물건이고 추억임을 알게 된 아픈 기억으로 세상과
인간을 증오하게 된 차가운 형사의 추적… 그리고 가혹한 운명 앞에 흔들리는 인간의 나약함과
에고이즘…. 보여지는 것과 감추어진 것들에 대한 위선과 그를 통해 찾아내려 한 인간 본연의
자세,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작가는 예리한 눈으로 파헤쳐 간다.
야스기쿄우코(八杉恭子)는 40대의 화려한 미모를 자랑하는 가족학 학자이며 가정문제 평론가로서
이른바 잘나가는 TV 스타이다.
각종 방송 프로에 단골 초대 손님으로 출연하고 있었으며 전도가 촉망되는 국회의원의 부인으로
남편과의 사이에 일류학교에 진학시킨 두 자녀를 가진 인텔리 여성이다.
그러나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이 보이는 그녀에게도 숨겨 놓은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 그녀 역시
전쟁이 남긴 상처의 공유자이다.
대학 진학 바로 후 미국에 대한 동경이었는지 어학에 대한 필요였는지 당시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어떤 미국인 흑인 병사를 만나게 되고 그의 따뜻함에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만다.
학교를 그만둔 후 그와 함께 살기 시작하고 머지 않아 아이가 생겨난다. 그리고 흑인 병사는 본국
발령이 떨어지고 그녀는 주변정리를 위해 일본에 남게 되며 아빠와 아이가 먼저 미국으로 들어
가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가족들에 의한 강제로 결국 미국 행 비행기를 타지 못하게 되고 집안의
중매로 어느 엘리트 청년과 결혼에 이르게 되며 전혀 다른 인생의 길을 걷게 된다..
헤어지기 전 세 가족이 함께 했던 유일한 가족여행….
그곳은 쿄우코의 고향 기리즈미(霧積) 부근의 산골 온천이었다. 산속에 가을이 찾아 올 즘이면
그 아름다움을 이루 표현할 수 없다. 아이에겐 그 자연의 아름다움 위에 부모의 자애로운 사랑이
겹쳐지며 일생의 추억으로 남게 될 여행길이었다.
어린 시절 아름다운 고향의 모습을 잊지 못하는 그녀는 사랑하는 가족이 생기면 꼭 함께 다녀
오리라 생각 했던 것이다.
쿄우코는 온천장 매점에서 가족과 함께 도시락을 사먹고 여행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이에게 밀짚모자
하나와 그곳 지명이 들어간 유명한 시인의 시집을 한 권 사주게 된다.
미국으로 돌아간 아이의 아버지는 헤어진 쿄우코에 대한 그리움과 생활고로 점점 쇠약해 져가고
알코올 중독으로 폐인이 되어버린 그의 유일한 희망은 그의 아들 죠니가 어둡고 비참한 뉴욕의
할렘 가를 떠나 일본의 생모를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병든 육신을 대신하여 자신의 아들이 그리운 그녀를 만나고 추억의 땅을 밟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아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어머니를 찾기 위한 경비를 마련해 주고자 지나가는 고급 차에
뛰어 들어 인생을 마감한다.
이십 년이 지난 후 일본의 어머니를 찾은 흑인 청년….
그러나 그는 꿈에도 그리던 그 어머니를 찾게 되지만 결국 그 어머니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쿄우코는 불현듯 찾아온 검둥이 자식으로 인하여 지금의 두 아이와 남편 그리고 자신의 사회적
성공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완벽한 알리바이로써 범행을 부인해 간다.
날카로운 무네스에 형사와 쿄우코의 대화…
당신은 가족이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가족이란 함께 나르는 비행기의 편대와 같은 것이죠.
나란히 함께 나르지만 어느 한쪽의 조종석에 이상이 생겨 추락한다 해도 위험을 알릴 수는 있지만
결코 대신 조종간을 잡아 줄 수 없는 그런 것…
쿄우코에게 죠니헤이워드는 추락해 버렸어야 할 먼 과거의 비행 물체였던 것이다.
소설의 대단원을 내리게 하는 것은 일본의 대표적 서정시인 사이죠야소(西條八十)의 시집에
수록된 한 편의 시~ ‘밀짚모자의 詩’ 에서 끝이 난다.
그것은 바로 단 한번의 가족여행길에서 그녀가 아들 죠니에게 사준 기념품이기도 했다.
형사는 죠니가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추억으로 20년간을 고이 간직해 온 낡고 손 때 묻은 시집을
꺼내어 그 녀에게 보여 준다. 그리고 그 중에서 한편의 시를 골라 천천히 읽어 내려 간다.
어머니, 나의 그 모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네~ 우스히(夏碓氷)에서 기리즈미(霧積)로 가는 길에 계곡에 떨어뜨린
그 밀짚모자 말이에요.
어머니. 그것은 좋은 모자였어요.
난 그 때 상당히 분했어요.
하지만 그 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 왔지요.
어머니, 그 때 건너편에서 젊은 약장수가 다가 왔었어요.
감색 각반에 팔 토시를 한...
그리고 주워 주려 허리를 많이 꺾으셨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어쨌든 깊은 계곡이었고 거기에 풀들이 키만큼이나 자라 있었으니까요.
어머니. 정말로 그 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때 옆에서 피어있던 수레바퀴 백합꽃은
벌써 시들고 말았겠지요.
그리고, 가을이면 회색 빛 안개가 그 언덕을 감싸고
그 모자 속에서 매일 밤 귀뚜라미가 울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어머니, 맞아요. 틀림없이 지금쯤은...
오늘밤 즈음이면, 그 계곡에 조용히 안개가 내려 쌓일 거예요.
옛날, 번쩍번쩍 빛났던 이태리풍의 그 밀짚모자와
그 안쪽에 내가 써 놓았던 Y.S라고 하는 영문자를 묻어 버릴 듯
조용하고 쓸쓸하게.......
쿄우코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눈가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나도 20년 동안 한번도 그 아일 잊어 본적이 없어요”. “늘 가슴에 넣어둔 가시처럼 날 찌르곤 했어요”.
“하지만 하지만~~~ 난 또 다른 아이들을 버릴 수 없었어요”. 그녀의 절규는 차츰 더 깊어 갔다.
도도한 인텔리의 당당한 모습의 내면에 감추어진 한 여인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섬뜩한 인간의
잔혹함… 그러나 소설은 끝내 인간일 수 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자백을 통하여 현대를 살아 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족이란 무엇인지, 또 국가 라는 것, 전쟁 이란 것, 정의와 사랑이란 것이 무엇인지
소설은 많은 메시지를 남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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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역의 대합실…..
마침내 마지막 책장을 덮고 일어나는 순간 멀리 오후의 태양이 하얗게 지워지며 무엇인가 하얀
꼬리를 물고 날아가는 비행편대 같은 것이 보였다.
지상으로 추락하는 나를 두고 비행 물체들은 한없이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이건 분명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마치 조종간의 산소가 떨어진 듯 숨이 가쁘고
호흡 할 수가 없었으며 모든 게 아득해 짐을 느꼈다.
정신을 차린 곳은 아카사카(赤坂) 병원의 응급실이었다.
혼미한 상황에서 나는 급히 동경에 주재 하고 있던 선배에게 전화로 위급상태를 알하고 그 후엔
거의 의식을 잃었다. 선배는 당시 한국 유학생들이 많이 다녔던 아카사카의 한 병원으로 나를
옮겨 놓았던 것이다.
몇 가지의 응급 조치와 검사 끝에 마주한 의사는 나에게 입원을 권유 했다. ‘급성흉막염’ 이란 진단…
그토록 숨쉬기가 어려웠던 것도 걷기 조차 힘든 흉부의 압박감도 그 때문이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병의 완치를 위해서 상당기간 휴식과 치료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난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좌절감과 아쉬움을 남기고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이 한 권의 책은 그렇게 나에게 각별한 사연으로 남아 있다.
당시에 읽었던 원작의 재미와 감동을 어찌 짧은 지면으로 옮길 수 있을까?
비록 대중의 기억 속에 잊혀져 버리고 말게 될 한 권의 추리소설 이었지만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꿈과 소회를 더듬으며 다시 한번 그 책을 읽어 보고픈 감회에 젖어 본다.
Chopin. Fantaisie-Impromptu/James L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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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한때 일본 추리소설에 심취 했던 적이 있읍니다. 드라마틱한 반전이 참 많더군요. 소개해주신 인간의 증명, 언제 함 보고 싶군요. 건강 때문에 중도 포기하고 귀향을 하신듯한데, 그 무렵 읽었던 책이라 더 기억에 남으신듯..잘 보았읍니다.

뵙길..^^
일본 추리소설 작가 중에서 마쯔모토세이쬬와 모리무라세이치의 작품은 상당히 작품성을 인정 받고 읽을 만한 책들이 많았던것 같아요. 언제 한번 뵙겠습니다 ^^;
'인간의 증명' 이 책을 매장에서 보는 순간 道雨님 일본서의 젊은 시절이 마치 주마등같이 떠오르셨겠습니다.저도 어느 날 집에서 짐정리를 하다 오래된 필름을 발견,인화를 했는데 26,7년 전의 저와 또 다른 사람들이 이제는 잊혀진 예전 모습 그대로 담겨져 있슴에 가슴이 뛰고 새
신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잔잔하게 써 내려가신 글과 James Last 악단의 음악을 듣자니 저역시 이십 수년 전의 어느 날로 세월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 듭니다.
지나간 것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대해 더 많은 얘기를 해야 하텐데... 벌써 나이를 먹었나 하고 생각케 되네요 ^^; ...쇼팽의 곡을 팝스오케스트라의 악단이 연주하니 색다른것 같습니다.
도우님의 글을 읽다보니..마치 한권의 소설을 읽은듯한 띵
한 느낌이 드네요. 한 권의 책이,한 곡의 노래가 한 편의 영화도..어쩜 음식 한가지까지
우릴 까마득한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엊그제 같은 옛날의 어느날을 떠올리게 하는 놀라운 힘을 가졌어요. 
글 쓰는 솜씨가 
예요
욜렛님도 글 잘쓰세요..^^
이런 때는 가마
이 있으라고..지난번 최백호님이 갤쳐 주셨습니다


일본서는 드라마와 영화로서도 제작 된적이 있는데 볼 기회가 없었네요. 저도 어디 가면 최백호 동생이냐고 물어 보는 사람이 있더라구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