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만연사 만연 배롱나무
화순 만연사는 선사 만연이 세운 절이다. 절을 품은 나한산을 만연산이라 부르는 연유이다.
세상의 가장 작은 수가 허공을 넘어 청정이고, 이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음이다. 또 가장 큰 수가 불가사의를 넘어 무량수이니, 이 또한 셀 수도, 알 수도 없음이다. 그렇게 세상의 가장 작음부터 가장 큼까지를 아우르는 말이 만(萬)이다. 광활함을 노래하는 ‘기러기 울어 애는 하늘 구만리’에서 하늘은 청정이고 무량수인 ‘만’이며, 기러기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온갖 생명이고, 삶의 인연인 ‘연’이다.
넓고 깊은 연못이란 만연(萬淵)은 또 알 수 없음의 인연인 만연(萬緣)이기도 하다. 세상살이가 볼 수도, 느낄 수도, 셀 수도, 알 수도 없는 인연이니, 만연사는 만 가지 인연의 절집이다.
1208년 선사 만연이 서석산 원효사에서 조계산 송광사로 가다가 지금의 만연사 나한전이 있는 곳에서 깜빡 잠이 들어 십육나한이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꿈을 꾸었다. 일어나니 온 누리를 눈이 덮었는데, 그가 누웠던 곳은 눈이 녹아 있었다. 만연사가 지어진 인연 이야기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어린 사미승 만연이 못된 중에게 능욕을 당하고 죽었다. 이 사미승이 그 중의 꿈에 나타나 나한산을 떠나 착한 불자가 되라고 호되게 꾸짖었다. 그리고 나주 목사와 부인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이름과 신분, 억울한 죽음을 알리고 목사의 아들로 환생함을 알렸다. 이윽고 아이가 태어나자, 목사 부부는 이름을 만연이라 짓고 잘 키웠다. 만연은 열여섯 살이 되자 출가하였고, 목사 부부는 아들의 인연에 따라 절을 세우고 만연사라 하였다.
조선시대의 치욕이었던 병자호란 때다. 만연사는 나물, 장, 종이, 신 등 군량미와 군수품은 물론이요, 지삼, 지환, 경훈 스님이 의병장 조수성과 함께했던 호국의 도량이니, 이 또한 거룩한 인연이다.
한말에는 국창 이동백, 이날치, 명창 정광수,·임방울이 창악을 연마하고 가르쳤다. 이곳 만연사가 소아암 어린이 돕기 산사 음악회를 열고 있으니, 그런 인연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또 여기 만연사 아래 동림사지는 자산어보의 정약전과 목민심서의 정약용 두 형제가 공부한 곳이다. 1777년 10월 두 형제는 화순 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와서 2년여 머무르며 공부와 함께 화순 적벽과 물염정, 서석산의 서석대 등을 둘러보며 호연지기를 길렀다.
당시 16세의 정약용은 화순의 진사 조익현과 교우하고 훗날 ‘성균관에서 7년간 거처하며 당대의 명사를 다 만나 교유했지만, 조익현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 정재원의 요청으로 화엄학의 대가인 연담 스님과의 만남을 시로 썼다. 훗날 정약용이 다산 초당에서 만난 혜장 스님은 연담의 제자이다. 그렇게 인연은 구만리 하늘의 기러기인 셈이다.
만연사 들머리 진각국사가 심은 노거수 전나무 아래에 있던 석불이 한때 화순중학교에 있었다. 6·25를 만나 땅속에 묻혔는데, 불에 그을려 묻혀 있는 석불이 만연사 주지의 꿈에 나타나 제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화순읍지’ 기록의 진각국사 목부도처럼 지금은 볼 수 없다. 이 또한 다시 만날지, 어떨지 알 수 없음이니, 구만리 하늘을 울어 헤매는 기러기 인연이다.
이곳 만연사의 배롱나무는 아름답고 우아한 자태로 보는 이의 넋을 빼앗으니, 보는 이의 마음이 절로 선경에 이른다. 인간사는 사는 날까지가 아닌 고손까지 이르는 인연의 굴레이다. 탐욕과 허황됨을 여기 만연 배롱나무를 보며 깨달았으면 한다. 나무건 사람이건 만연 배롱나무처럼 만 가지 인연이 아름다웠으면…, 더하여 우아했으면 한다.